화근(박정란)
손바닥만 한 종산 하나가 화근이었다 뉘 이름이면 어때서 사촌 팔촌 하극상이 난무했다
큰 손자 이름으로 종산 묶어놓고 내 맘이 다 너희들 맘일 테지 믿거라 마음 놓고 길 떠나신 백부님
그게 뭐라고 육십 년 봉제사에 허리 굽은 종부 공들여 쌓은 탑도 무참히 무너져버렸다
물질 앞에서 벌겋게 타는 태양 하나씩 가슴에 떠안고 뒤도 안 돌아보고 흩어져 버렸다
능선 따라 묻힌 조상님들의 한숨 소리가 소낙비 되어 세차게 쏟아붓고 있었다
빗물이 긋고 간 자리 피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이 세상과 이 우주는 만물의 공동터전이지, 어느 누구의 소유물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것과 네것을 따지고, 공동체 사회와 국가의 영역을 따지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아주 기본적인 영역다툼이었던 것이지, 그 모든 것을 사고 팔며, 더 많은 돈과 더 많은 영토(사유재산)를 확보하기 위한 자본주의적인 싸움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옛날, 자본주의 사회 이전에는 개인의 권리는 아주 작고 사소한 것에 불과했고, 공동체 사회가 그 모든 전권을 다 가지고 처리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가 탄생한 이후, 가정과 사회와 국가마저도 해체되고 개인이 모든 전권을 다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사유재산과 소유권은 신성불가침의 성역으로 극대화되었고, 이 사유재산과 소유권을 획득하기 위하여 ‘만인 대 만인의 싸움’이 그토록 처절하고 잔인하게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물물교환의 펀리함 때문에 사용되었던 화폐가 전지전능한 황금의 관을 쓰고 그 모든 산업제도와 금융제도는 물론, 현대의 국가제도와 모든 국제기구를 장악하게 되었다. 모든 서열제도는 돈의 크기에 따라 구축되었고, 자본주의 사회의 최상위 포식자들은 자기 자신의 동족은 물론, 부모형제의 피와 살과 뼈까지도 아삭아삭 씹어먹는 폭식성을 자랑하게 되었다. 돈은 인류의 조상이자 우리들의 아버지가 되었고, 돈은 예수이자 부처가 되었다. 돈은 천하장사이자 백전백승의 총사령관이 되었고, 돈은 천하의 대사기꾼이자 모든 소송전을 주재하는 재판장이 되었다. 돈은 너무나도 맛있는 음식과도 같아서 우리는 모두가 다같이 미치광이가 되어 탐욕의 이빨을 자랑하게 된다. 지나치면 모자람만도 못하다는 말도 있지만, 이 탐욕은 ‘만인 대 만인의 싸움’의 [화근]이 되어 “사촌 팔촌 하극상”을 난무하게 만든다. 손바닥만 한 종산, 큰 손자 이름으로 묶어놓고, 이 종산을 토대로 조상의 얼을 기리며 문중의 번영과 행복을 기원했던 큰아버지, 그러나 그 큰아버지의 뜻을 받들며 “육십 년 봉제사에 허리 굽은 종부”의 공든 탑도 이 탐욕의 발톱에 순식간에 무너지게 되었던 것이다. 문중을 위해, 조국을 위해 돈을 내라고 하면 다 도망가고, 돈이 생긴다거나 이익이 생긴다면 사촌과 팔촌은 물론, 모든 인간들이 다 모여들게 된다. 너무나도 즐겁고 기쁜 스포츠와도 같은 소송전이 끝나면, “물질 앞에서/ 벌겋게 타는 태양 하나씩 가슴에 떠안고/ 뒤도 안 돌아보고 흩어져“ 버렸다. “능선 따라 묻힌 조상님들의 한숨 소리가/ 소낙비 되어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지만, 그것이 자기 자신의 조상님들의 피눈물이라는 것은 아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돈이 되었고, 돈은 그 화려한 변신술에 의해 천의 얼굴을 지난 악마가 되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악마가 되었고, 아버지와 엄마도 악마가 되었다. 친구와 동료들도 악마가 되었고, 스승과 제자도 악마가 되었다. 악마는 이처럼 번식을 하며, 소위 모든 인간들의 피를 다 빨아먹으며, 이 황금무대를 그 어떤 스포츠보다도 더 즐겁고 기쁜 소송전으로 연출해 놓았다. 인간의 이성은 광기가 되었고, 우리 인간들은 이 광기에 의해 동족상잔의 피비린내를 좋아하는 악마가 되었다. 황금무대는 돈의 무대이며, 돈의 무대는 이 세상의 삶의 의미와 삶의 권리를 다 잃어버리고도 오직 돈만을 생각하는 요양원과 요양병원을 지상의 천국으로 연출해 놓았던 것이다. 인류의 역사상 가장 큰 사업은 무병장수의 실버산업이며, 오늘날 황금무대의 최종적인 승자는 모든 복지비용을 다 빨아들이는 실버산업의 악마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박정란 시인의 [화근]은 돈의 뿌리이자 재앙의 뿌리이고, 이 화근에 의하여 황금무대의 스포츠와도 같은 소송전이 자라나게 되었던 것이다. 양심도, 정의도, 도덕도, 인간성도 다 무너진 [화근], 너무나도 끔찍해서 스포츠와도 같은 [화근] 앞에서, 그러나 박정란 시인의 양심의 가책이 장대비로 쏟아져 내린다. 시인의 힘은 너무나도 약하지만, 시의 힘은 모든 인류의 희망이자 그 모든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문중은 소위 모든 종친들의 본향本鄕이며, 문중의 선산은 조상의 제사를 지내며, 문중의 혈통과 문중의 번영을 위한 성소聖所라고 할 수가 있다. 자기 자신의 뿌리와 현재의 삶과 미래의 희망이 담겨 있는 이 성소가, 그러나 국토발전과 도시화에 의한 재산(돈)으로 변모되었을 때, 바로 그때에는 너무나도 무자비하고 끔찍한 스포츠와도 같은 소송전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남극과 북극의 빙하가 다 무너져 내리는 것도 남 모르는 일이고, 히말라야의 설산과 알프스의 설산이 다 녹아 내리는 것도 남 모르는 일이고, 너무나도 끔찍한 이상기후로 지구촌이 폭발하게 되어 있는 것도 남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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