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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9일 화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제1독서 : 2사무 7,4-5ㄴ.12-14ㄱ.16
제2독서 : 로마 4,13.16-18.22
복 음 : 마태 1,16.18-21.24ㄱ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20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4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바오로 사도께서는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리 4,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어떻게 하면 늘 기뻐할 수 있을까를 묵상하게 됩니다.
돈 많이 벌고, 승진 척척 되고, 아프지 않고, 시험에 늘 좋은 성적을 맞고,
자기 원하는 대로만 된다면 늘 기뻐할 수 있을까요?
어린이가 썼다는 다음과 같은 일기의 내용을 봤습니다.
“수건은 집안의 더러운 것들을 깨끗하게 만들고 걸레가 된다.
걸레가 더러워진 만큼 우리 집은 깨끗하게 된다. 나는 걸레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어떠십니까? 걸레 같은 삶도 멋질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부모는 자기 자녀가 걸레 같은 삶을 살겠다고 하면
아마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면서 말릴 것입니다. 그 삶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삶 안에서 더 큰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자기를 희생해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
자기를 희생해서 다른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이 길을 쫓아갈 때, 예수님과 함께하게 되고 진짜 기쁨을 갖게 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과 우리가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신 성 요셉 덕분입니다.
요셉 성인은 단 한 번도 주인공이 되지 않았습니다.
약혼자 마리아가 아기를 잉태하자 그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습니다.
단호하게 마리아를 법정에 세우지도 율법 학자들에게 고발하여 돌로 치게 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요셉에게 꿈에 천사가 나타나 주님의 계획을 전합니다.
말없이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합니다.
이렇게 그는 조용하게 주님의 뜻이 세상에 펼쳐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구원을 가능한 일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 반드시 주인공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초등학생이 말했던 걸레면 또 어떻습니까?
의미가 충만하다면, 분명히 기쁘고 행복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요셉 성인께서 바로 그런 행복을 가지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깨끗이 닦여진 귀한 명품만 되려고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사실 명품은 피곤합니다. 어떤 분이 제게 명품 만년필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한 번 쓸 때마다 부담됩니다. 즐겨 쓰는 만년필은 아무렇게나 쓸 수 있는 보급형 만년필입니다.
만년필 쓰는 기쁨 역시 명품 만년필이 아닌, 막 쓰는 보급형 만년필에서 생겼습니다.
많이 사용되는 ‘나’, 비록 걸레처럼 지저분하지만,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사랑을 베풀며 기쁘게 사는 ‘나’가 되어야 합니다.
요셉 성인의 모범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대로 하였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신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복음사가들은 예수님의 모친이신 마리아께 대한 관심에 비하면,
성 요셉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마 그것은 구속사에 있어서 그의 중요성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아마 그에게는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유년시절까지만 함께할 수 있도록 안배한 까닭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가 구속사에 있어서 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계획하신 대로를 일찍이 다 이루셨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두 가지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통해,
태어날 아기가 구세주 메시아임을 알려줍니다.
<첫째>는 그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이요,
<둘째>는 그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다윗의 자손인 요셉가문에서 태어남이요,
그 요셉의 약혼자인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남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러한 하느님의 계획과 예언이
요셉의 믿음의 결단과 행동을 통해서 성취됨을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이처럼 인류의 구원을 잉태시키는데
온전한 조력자가 되신 성 요셉의 인품을 세 가지로 묵상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복음사가는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었다.”(마태 1,19)고 전하고 있습니다.
곧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데 열심을 다 하는 사람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앞세우며 살았기에,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안락과 평안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일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둘째>로는 요셉은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 1,19)고 전하고 있습니다.
곧 그는 타인에 대한 깊은 이해심과 자비심을 겸비한 사람이었음을 말해줍니다.
요셉은 약혼자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온갖 의혹과 치욕스런 배신감으로
분노와 갈등을 겪었을 것입니다. 비록 임신의 원인이 밝혀졌다 하더라도,
결코 약혼자에 대한 서운함과 불신을 떨쳐버릴 수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공적인 고소를 통해 마리아를 수치스럽게 만들지 않으려고,
사소한 문제를 빌미로 이혼증서를 써주어, 조용히 그와 파혼하기로 작정합니다.
물론 그렇게 된다하더라도 그 아기는 요셉의 아기가 되는 것이며,
결국 요셉에게는 모욕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만
그러한 모욕을 감수하면서라도 마리아의 안녕을 도모하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요셉의 사려 깊은 처사와 자비심을 보게 됩니다.
<셋째>로는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마태 1,24)고 전하고 있습니다.
곧 그는 순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항상 침묵으로 하느님의 음성에 마음의 귀를 열고 있었으며,
“하느님의 뜻”에 행동하는 믿음으로 순명하였습니다.
그렇게 그는 순명으로 인류를 향한 하느님 구원계획의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사실, 요셉은 오늘 <복음>에서뿐만 아니라, 복음서 전체에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제2독서>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많은 민족의 아버지”(로마 4,18)가 되었듯이,
그 역시 “행동하는 믿음과 순명”으로 구원받는 모든 이들의 양부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얻은 외아들을 포기했지만,
요셉은 아들을 얻기도 전에 이미 아들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 포기에 따르자면, 아브라함에게는 그래도 아내가 있었지만,
요셉에게는 아내마저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침묵하되 참으로 믿는 사람이었으며, 믿되 참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었고,
행동하되 참으로 순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그는 우리 수도승들의 모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이 수도생활 안에서, 요셉 성인과 함께
또 다른 예수님이신 형제들의 양부로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
주님,
믿음으로 침묵할 줄을 알게 하소서.
행동으로 사랑할 줄을 알게 하소서.
타인의 처지를 자비로 헤아리고,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희망하게 하소서.
선하신 당신의 뜻과 당신의 의로움을 따르며,
영으로 인도되는 다 헤아려지지 않은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요셉은 천사가 일러준 대로 하였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18절).
이 잉태는 거룩한 신비이다. 이 잉태로 인해 우리는 요셉의 놀라운 모습을 본다.
요셉은 조금도 마리아의 마음을 괴롭게 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그 일을 해결하려 한다.
약혼은 했지만, 마리아와 혼인을 하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고,
그 일을 드러내어 마리아를 재판에 넘긴다면 마리아가 죽을 수도 있어서 조용히 파혼하려 했다.
이때 천사가 꿈에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20절) 하였다.
이것은 요셉이 마리아의 순결을 의심하지 않도록 그 신비를 알려준 것이다.
요셉은 의심이라는 악을 떨쳐버리고 신비라고 하는 선을 받아들여야 함을 깨달았다.
요셉은 이제 마리아가 아무 죄가 없다는 것과 동정 잉태를 인정할 수 있었다.
요셉이라는 뜻은 흠 잡을 데 없는 이라는 뜻이다.1)
천사는 또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21절) 하였다.
그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했는데 그 뜻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 구원자라는 뜻이다.
이는 하느님께 어울리는 이름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이요 구원자는 나밖에 없다.”(참조: 이사 43,3; 호세 13,4)라고 하셨다.
즉 그 이름은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분의 육에 붙여진 이름이다.
요셉은 천사에게서 계시를 받고 기쁘게 하느님의 뜻에 따른다.
그는 마리아를 맞아들이고 기쁘게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가게 되었다.
요셉 성인이 의롭다고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을 채우려 노력했다고 하는 것이다.
요셉이 하느님의 뜻을 따름으로써,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는데 협력하셨던 삶을 본받아,
우리의 삶의 순간순간에 주님의 뜻을 이루려고 노력하며 그분을 본받도록 하여야 한다.
요셉은 어떤 큰 공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온전한 믿음을 통해서 주님께 인정을 받았다.
우리의 믿음은 바로 하느님의 뜻에 대한 올바른 응답이 되어야 한다.
요셉이 자기 뜻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듯이,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였듯이
주님의 뜻을 따르며 주님의 뜻을 따르려 노력하여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살면서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삶의 순간순간이, 조그마한 행위 하나하나가
하느님 구원사업에 협력하는 순간으로 될 것이다.
요셉 성인과 같이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이루는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도록 깨어있는 삶을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믿음의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산부인과 의사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사람이랍니다.
그렇다면 변호사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랍니다.
오늘 기억하는 요셉은 “법대로 사는 사람”, “의로운 사람”입니다.
성경에서 의로움이란
하느님의 속성으로 사랑과 용서로 인간을 구하시는 하느님의 의(로마3,5 2코린5,21),
인간의 죄를 위해 무죄한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마5,17),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의 의(로마9,30. 필리3,9)를 일컫고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이 인간의 징벌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것이었듯이
요셉의 의로움은 바로 한 여인을 살리는 사람에 대한 애정과 생명의 존중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가끔 화가 났다. 또는 ‘홧병이 났다’는 말을 합니다.
정말 화는 불입니다. 아주 뜨거운 불입니다.
그러나 그 불로는 방을 따뜻하게 덥힐 수도 없고 밥을 지을 수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나무를 태울 수도, 쇠를 달굴 수도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속만 태울 뿐입니다. 그러니 병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화를 다스리는 법을 터득하면 좋겠습니다.
화가 나도 무조건 참는다는 것은 용수철을 눌러놓는 것과 같습니다.
무조건 누르지 말고 하늘을 보면서 잘 풀어야 합니다.
오늘 기억하는 요셉은 정말 화를 다스릴 줄 아는 분이셨습니다.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는 결혼하기 전에 임신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바라보는 요셉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신명기22장을 보면 간음에 대한 규정을 말하고 있는데
“젊은 여자의 처녀성이 증명되지 않으면, 그 여자를 제 아버지의 집 대문으로 끌어내어,
그 성읍의 남자들이 그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여야 한다”(신명22,20-21).고 되어 있습니다.
법대로 사는 요셉이 이러한 규정을 알진 대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1,19).고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결혼을 준비하며 꿈에 부풀었을 텐데 너무도 황당한 사실에 접하게 된 것이니
실망과 좌절감 속에서 마리아에게 망신을 주고 서운함을 되갚아 주어도 시원찮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드러낼 생각을 갖지 않았다니 그러한 마음이 어디서 왔겠습니까?
돌에 맞아 죽을 허물까지도 덮어줄 수 있었던 것은
사랑 때문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마리아를 사랑했기에 사랑하는 이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입니다.
사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이요, 능력입니다.
그리고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은 일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화를 다스리는 방법은 결국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니 지금까지 내가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사랑받았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1,20). 했을 때,
곧바로 자기의 생각을 접고 천사가 일러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군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뜻을 따른 겁니다.
깊은 신앙은 어려울 때 드러난다고 했는데 바로 이 순간이 그의 믿음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화를 다스리는 또 하나의 방법은 철저한 믿음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믿음 위에 서 있는 사람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요셉 성인은
아주 사소한 일에도 마음 상하고 서운함을 오래도록 기억하는 우리들의 모범이십니다.
의로운 사람이란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활하며 기쁘고 진실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요셉이 그런 분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결코 그것에 대해 알려고 하거나 해명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저 받아들이고 살았을 뿐입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의로움을 간직한 성인의 마음을 닮고 싶습니다.
“믿는 이에게는 질문이 없고, 믿지 않는 이에게는 대답이 없다”고 합니다.
오늘은 사랑으로 그리고 믿음으로 화를 다스리시길 바랍니다.
“성 요셉의 침묵과 겸손, 절대적인 신앙이 있었기에
하느님께서는 요셉을 통해 당신의 뜻을 온전히 행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완전히 내맡겨 드린다면
그분은 우리 안에서 당신의 일을 충분히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가경자 알베리오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군대 가면 ‘군기’ 잡는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것을 잘 통과하면 군 생활 적응을 잘하고, 군 생활이 편해집니다.
그것을 통과하지 못하면 ‘고문관’이란 소리를 듣습니다.
지금은 군 생활이 짧아지고 편해졌습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는 지금보다는 열악한 상황이었습니다.
내무반에는 모포와 옷을 넣어놓는 ‘관물대’가 있었습니다.
관물대에 사람이 들어가려면 들어갈 수 있지만 쉽지는 않았습니다.
신병이 오면 관물대에 들어가서 ‘어머니 은혜’를 부르라고 했습니다.
신병은 비좁은 관물대에 들어가서 어머니의 은혜를 부르면서
감정이 복받치는지 눈물을 흘리곤 했습니다.
이 행사가 우리 내무반의 ‘신고식’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식기를 세척하고, 내무반 청소를 하고, 군화에 광을 내면서
군 생활에 조금씩 봄이 오기 마련입니다.
전투체육의 꽃인 ‘족구’를 하고, 그리운 친구와 연인의 편지를 받고,
초소에서 근무를 서면서 계급도 이등병에서 일병 그리고 내무반에서 실세인 상병이 됩니다.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한다는 병장이 되면 국방부의 시계는 돌아가고 드디어 제대 특명을 받습니다.
3년의 군 생활은 군대에 다녀온 사람들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입니다.
새 집으로 이사 가면 집도 집 주인의 군기를 잡는다고 합니다.
새 집과 주인이 서로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제관에 온 지 3일 만에 보일러를 교체했습니다.
후배 신부님이 가스 냄새가 난다고 하였고,
홈디퍼에서 가스 누출 검사기를 사서 측정하니 가스가 누출되고 있었습니다.
보일러 수리하는 형제님이 와서 수명이 다 되었다고 교체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보일러를 새것으로 교체하고 5일 만에 싱크대에서 물이 흘렀습니다.
형제님이 와서 보더니 음식물을 분쇄하는 기계가 고장 났다고 합니다.
음식물 분쇄하는 기계를 교체하면서 싱크대 누수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생각하니 새 집과 저는 적응기간이 있었습니다.
와이파이 용량이 너무 느려서 인터넷 접속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용량을 높이고 기계를 새로 바꾸니 해결되었습니다.
화장실의 세면대가 막혀서 물이 잘 내려가지 않았는데
월마트에서 플라스틱 막대기를 사서 뚫으니 잘 내려갔습니다.
열쇠로 열어야 하는 문을 번호 키로 바꾸었습니다.
신제품인지 스마트폰으로 밖에서도 원격으로 문을 열고, 닫을 수 있어서 편했습니다.
사제관으로 온 지 1달이 되었습니다. 이제 사제관도 저도 서로 적응 시간이 끝난 것 같습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나자렛의 성가정도 적응 기간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먼저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아이를 가질 것이라고 예고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이 몸은 아직 남자를 모르는데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응답했습니다.
천사는 이는 성령으로 인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했습니다.
이번에 천사는 요셉에게 약혼녀 마리아는 아이를 가졌다고 말하였습니다.
요셉은 마리아가 곤경에 처할 수 있기에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천사는 다시 요셉에게 나타나서 그것은 성령으로 인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나자렛의 성가정은 시작되었습니다.
마리아도, 요셉도 모두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그렇게 나자렛의 성가정은 시작되었지만, 적응 기간이 또 필요했습니다.
헤로데는 2살 이하의 어린이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을 갔습니다.
바람결에 헤로데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드디어 요셉과 마리아는
어린 예수님과 함께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와서 성가정을 이루었습니다.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의 공동체와도 적응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생각이 다르고, 의견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늘 그랬던 것처럼 하느님의 사랑이 길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주님의 약속을 믿었고,
요셉은 꿈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 그대로 하였습니다.
약속은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고 은총으로 주어집니다.”
말없이 행동하고, 말없이 사랑합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사순 특강을 갔다가 정말이지 몇십 년 만에 신학교 동창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특강 시간에는 성당에 안 보이더니, 사제관에서 따로 들었더군요.
저를 보고 하는 말, 어떻게 사람이 변해도 이렇게 변할 수 있냐고.
하루 온 종일 말 한마디 없던 사람이었는데,
아무리 말을 붙여도 뒤로 빼면서 실실 웃기만 하던 사람이었는데,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 어떻게 이렇게 날나리가 되었냐며 놀라워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정말이지 그랬습니다. 제가 봐도 놀랄 정도입니다.
사실 저는 젊은 시절 요셉 성인 못지않게 과묵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저 듣기만 하고, 마음속으로 깊이 생각하고, 해야 할 일만 딱 하고...
몇십 년 동안 엄청나게 많은 말을 하며 살았으니,
이제 다시 과묵했던 시절로 돌아가야 할 순간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살다 보면 진국 같은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말없이 사랑하는 사람.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 조용히 도와주는 사람.
힘들 때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는 사람. 침묵 속에 기도하는 사람.
생각만 해도 마음이 든든하고 힘이 나는 그런 사람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요셉 성인이 그런 분이셨습니다.
복음사가들은 그에 대해 철저하게도 함구하고 있습니다.
사실 구세주의 양부이자, 마리아의 동반자로서,
오랜 세월 구세사의 주역들을 동반하셨던 그의 역할은 참으로 막중한 것이었습니다.
요셉 성인의 특별하고 굴곡진 삶을 글로 쓰자면, 아마도 소설 몇 권으로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그는 과묵하고 진중한 사람, 침묵하고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요셉 성인은 하느님으로부터 아주 특별한 사명을 부여받았으며,
그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일생을 봉헌했습니다.
그 사명은 예수님을 보호하고 양육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마리아의 순결을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비오 11세 교황님께서는 요셉 성인의 사명이 세례자 요한의 사명이나
베드로 사도의 사명에 버금가는 막중한 것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성 요셉의 사명은 조용히 생각하는 사명이요, 침묵하는 사명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구속 사업의 비밀이 세상 사람들에게 미리 노출되지 않도록 끝까지 침묵을 지켰습니다.”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는 성 요셉의 사명은 곧 오늘날 우리 교회의 사명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성모님과 함께 계실 때의 성 요셉의 사명은
보호와 방위의 사명, 수호와 원조의 사명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도 적으로부터 방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사명은 곧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 역시 이 혼탁한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지키고,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주위에 성장시킬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요셉 성인에 대한 신심이 각별하셨던 요한 23세 교황님께서는
그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성 요셉! 저는 이 성인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저는 가장 먼저 그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제 하루 일과를 시작할 수도, 끝낼 수도 없을 정도로 그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성모님 전문가 쇼사르 박사는 요셉 성인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성 요셉은 우리와 조금도 다름없는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두 발을 땅에 딛고 있었으며, 결코 지상 낙원의 꿈을 쫓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나이를 먹지 않는 영원한 청년입니다.
그는 세상 모든 가장들의 모범입니다.
그는 참으로 여성스런 동정녀 마리아와 떳떳하고 올바르게 교제할 수 있었던,
참으로 이상적이고 멋진 남자였습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이 세상, 성 요셉처럼 침묵의 사명에 충실해야겠습니다.
성 요셉처럼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만사를 바라봐야겠습니다.
성 요셉처럼 말없이 행동하고, 말없이 사랑해야겠습니다.
요셉 성인에게 만들어 준 명함
박상대 마르코 신부
한창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는 교회가 오늘 하루만큼은 사순시기를 중단하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요 예수의 양아버지인 요셉 성인을 크게 경축한다.
요셉 성인에 대한 성서상의 기록은 복음서의 前史에 속하는 마태오 복음 1-2장,
루카복음 1-2장에서 예수의 탄생과 더불어 보도된 내용이 전부다.
요셉은 다윗 가문의 후손(마태 1,16)이었으나,
다윗의 고을인 유다 지방 베들레헴에서 살지 않고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에서 살았던 것(루카 2,4)으로 추정된다.
이곳 나자렛에서 목수 직업을 가졌던 요셉은 ‘의로운 사람’,
즉 법대로 사는 사람(마태 1,19)으로 이미 世間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하였으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기를 가진 그녀와 파혼하지 말라는
천사의 명을 받들어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요셉과 마리아는 호구조사령 때문에 다윗의 고을 베들레헴에 왔고, 여기서 예수를 낳게 된다.
요셉은 아기 예수를 경배하러 온 목동들과 동방박사의 방문을 받았고,
헤로데 대왕의 무죄한 영아 학살을 피하기 위하여 가족을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였다.
헤로데 대왕이 죽은 후에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은 나자렛으로 와서 살았다.
요셉은 아기 예수에게 할례를 베풀었고, 예루살렘 성전에 봉헌하였다.
예수가 12세였을 때, 요셉은 마리아와 함께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잃어버렸다가,
학자들과 대화를 하고 있던 아들을 찾기도 하였다.
여기까지 前史가 보도하는 내용이다.
그후 요셉이 예수의 아버지이고 목수였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공생활 중 고향 방문 때 그곳 사람들의 입으로 증언된다.(마태 13,55; 마르 6,3; 루카 4,22)
기원후 2세기경에 예수의 형제로 추정되는 야고보가 편집한,
그러나 僞經에 해당하는 《야고보 복음서》에는 요셉과 마리아, 안나와 요아킴,
그리고 예수의 소위 ‘잃어버린 시절’(12살~30살)에 관한 흥미로운 기사가 많다.
야고보복음서에 따르면 요셉이 마리아와 약혼할 때 이미 80세의 고령이었고
이미 결혼한 경험이 있어 슬하에 야고보, 유다, 시몬, 미리암 등의
자식들을 둔 것으로(마태 13,55) 전해진다.
야고보복음서의 이러한 내용은 초기 교회가 직면한
일련의 신학적 문제들에 대한 성서적 근거를 들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당시 중대한 신학적 문제들로는 성모 마리아의 동정성과 천주의 모친성,
성령으로 말미암은 예수의 잉태, 예수의 神性 등을 손꼽을 수 있다.
야고보복음은 어디까지나 위경에 속하기 때문에 그 내용의 역사성과 진실성은 아무도 보장할 수 없다.
그러나 正經을 이해하는데, 다소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요셉!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원래 그는 가장자리에 서 있고, 그림자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침묵 가운데서도 남을 도울 줄 아는 사람이었고,
하느님께서 천사를 통하여 내리는 지시를 군말 없이 따랐으며,
보여주는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이것이 요셉의 법칙이다. 그리고 아무도 그에게 입을 주지 않았다.
이게 무슨 말인가?
위에서 보았듯이 요셉에 관한 성서적 근거는
마태오와 루카복음이 전하고 있는 예수의 탄생 예고부터 12살까지로 한정된다.
그러나 그 어느 부분에도 요셉 스스로의 말은 찾아볼 수 없다.
요셉은 그저 침묵으로 등장하며, 그저 마음먹는 것뿐이다.
성서 저자가 말할 기회를 주지 않은 그 의미가 무엇일까?
마태오와 루카의 의도는 그렇다 치더라도,
성서상 말하지 못하는 요셉의 답답함을 누가 헤아릴 수 있겠는가?
‘말이 없는 자의 마음은 크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운다.
그렇다. 말하지 않아도 주어진 모든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요셉의 넉넉한 마음 때문이다.
넉넉한 마음은 때로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말이 없는 요셉에게 사람들은 名銜을 만들어 주었다.
그 명함을 나는 보았다. 명함에 나타난 직함은 이렇다.
‘임종자의 수호자’, ‘노동자의 수호자’, ‘가정의 수호자’,
게다가 비오 9세는 ‘교회의 수호자’라는 직함까지 내렸다.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1841년 8월 22일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그분의 배필 성 요셉을
한국교회의 공동 수호자로 정했다.
말로써 주장을 펴지도 못하는 요셉이 왜 수호자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는가?
우리가 지난 2000년의 교회역사를 통하여 볼 수 있는 것은
교회의 교도직이 신앙의 유산을 수호하기 위하여 줄곧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수많은 사상적 침입으로부터 신앙을 보존하고 전수하였다는 것이다.
교권은 신앙을 수호하면서 많은 부작용을 빚어냈다.
논쟁을 벌이고 이단자를 파문하고, 심지어는 종교재판을 통하여 사람까지 죽였다.
요셉이 바로 이런 교회의 수호자란 말인가?
아니다. 요셉은 그렇지 않다. 요셉은 그저 ‘수호자’이다.
오늘 복음에서 해답을 찾아보자.
마리아는 요셉이 모르는 사이에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자 요셉은 몰래 파혼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러나 꿈에 나타난 천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자, 그 마음을 고쳐먹는다.
결국 요셉은 처음에 자신의 잣대로 파혼을 결심하지만,
금방 그 잣대를 내려놓고 하느님의 잣대로 사건을 바라본다.
그 바라봄의 결론은 받아들임이다.
마리아와 그녀의 태중에 있는 아기를 수호하자는 것이 아니겠는가.
바로 이 점이 요셉을 교회, 노동자, 임종자, 가정의 수호자로 칭송할 수 있는 명함을 만든 것이다.
우리도 요셉처럼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아끼고 돌보고 수호할 수 있는 은총을 요셉성인을 통하여 하느님께 간구해야 하겠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교회의 수호자이며 우리 모두의 아버지인 요셉 성인은
예기하지 못한 사건과 고통을 마주하는 인간이
지녀야 할 자세를 모범적으로 알려줍니다.
먼저, 의로움입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유다인들에게 ‘약혼’은, 함께 살지는 않더라도
이미 부부와 같은 신원을 가진 상태가 됨을 뜻하였습니다.
이 경우, 여성이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지면
율법에 따라 처벌(투석형)되었습니다. (신명 22,21 참조).
요셉은 마리아를 배려해서 조용히 ‘파혼’하는 것으로
피의 복수를 면하게 하여 주려 합니다.
그러나 꿈에서 하느님의 뜻을 알게 되자,
곧바로 자신의 계획을 거두고 하느님의 뜻을 따릅니다.
요셉에게 ‘의로움’(정의)은 법의 준수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름으로써 구현되는 덕목이었던 것입니다.
둘째로, 신앙입니다.
이러한 의로움은 언제나 ‘믿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제2독서는 아브라함의 모범을 통하여 요셉과 아브라함의 공통점을 부각시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실천한 이들이었고,
하느님께서는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십니다.
의로움(정의)의 구현은 믿음(신앙)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실천입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합니다.
한마디 저항이나 이의 제기 없이
하느님의 뜻을 그대로, 묵묵히 실천합니다.
요셉의 생애는 결코 힘없는 공허도 의미 없는 희생도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을 흠숭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성실히 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빛날 수 있음을 보여준 진정한 존엄의 삶이었습니다.
마리 문모 수녀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4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마태 1:20-24)
복음서에는 아주 간단하게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라고
되어 있지만,
요셉 안에 얼마나 많은 고뇌와 번민이 있었을지 생각하니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마리아의 몸에 잉태된 아기가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라는 것을 믿지만,
그 마리아를 자신의 아내로 받아들이는 것은
요셉에게 큰 결단과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갈등 속에서
요셉은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제가 당신이 바라시는 길로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고뇌와 갈등 속에서도
끝내는 천사가 명령한 대로 행하는 요셉을 보며
삶 안에서 더 사랑해야 함을 알지만,
더 용서해야 함을 알지만,
더 너그러워져야 함을 알지만,
선뜻 내딛지 못하고 내 안에 갇힐 때
하느님 앞에 앉아봅니다.
'제가 당신이 바라시는 길로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출처]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대구수녀원 - 복음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