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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0일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제1독서 : 다니 3,14-20.91-92.95
복 음 : 요한 8,31-42
그때에 31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32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33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너희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까?”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35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37 나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
39 그들이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이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다.
40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41 그러니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인터넷에서 텀블러를 구입했습니다.
사실 몇 개의 텀블러를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쇼핑몰에서 텀블러 가격이 터무니없이 싼 것입니다.
840원. 그것도 배송비 포함이었습니다. 주문하고 며칠 뒤에 텀블러를 받았습니다.
워낙 가격이 쌌지만, 텀블러의 질이 너무 형편없었습니다. 허접하고 지저분했습니다.
물로 깨끗이 닦다가 글쎄 손을 베고 말았습니다.
텀블러의 입구가 제대로 마감되어 있지 않아서 날카로운 것입니다.
싸게 샀지만, 현재 전혀 사용하지 않습니다.
혹시 입술을 베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이렇게 제게 쓸데없는 짐이 또 하나 늘었습니다.
물질적인 것으로 풍요롭게 사는 것이 아니라,
아주 적은 것으로도 매우 풍요롭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결코 지금보다 많은 것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를 떠올렸을 때 결핍을 느끼지 못합니다.
많은 것이 없어서 불행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때를 그리워하지 않습니까?
욕망하는 것이 적을수록 더 풍요롭고, 더 자유로우며, 더 강력해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이기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인 것에 의존하면 ‘나’ 스스로 하는 것이 줄어들게 됩니다.
온전히 나의 노력을 통해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인가를 통해 ‘나’를 만들려다 보니 남과 비교하면서 부러운 이유만이 늘어납니다.
미국의 유명한 편집자 맥스웰 퍼킨스는
“더 강한 사람일수록 원하는 게 적다.”라는 말을 자기 외투에 새겨놓고 늘 다짐했다고 합니다.
원하는 게 적을수록 ‘나’에 집중할 수 있게 되어, 더 강한 ‘나’를 만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그 모든 모습을 보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분명해집니다.
세상 것에 집착하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사는 삶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서 늘 사랑하라고 하셨고, 당신께서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셨던 사랑의 삶을 통해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세상 것에 욕망을 두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안에서는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없습니다.
오로지 주님을 통해서만이 진정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사랑을 실천 하는데 더 집중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이는 이미 믿는 이들에게 당신의 제자가 되는 길을 알려주시며, 당신의 제자로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가 되면 진리를 깨달을 것이고 진리가 그들을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단지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을 넘어서,
그 말씀 안에 ‘머무르는’ 것으로의 초대요, 동시에 진리와 자유로의 초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한 이들을 지탄하여 말씀하십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요한 8,37)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 당신 말씀이 있을 자리’를 마련할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삶 안에 당신 말씀이 머무르는 보금자리’를 마련해 드려야 할 일입니다.
‘머무른다’는 것은 요한복음 15장에서 말한 대로,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있듯이
말씀이신 그분께 ‘붙어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그분 영의 수액을 받아먹듯이 그분의 생명에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단지 상대 안에 머무르는 단순한 머무름이 아니라 ‘역동적인 상호교환’,
곧 서로에게 건너가고 서로를 받아들이는
‘성령의 역동적인 활동’(extasis와 kenosis)을 내포합니다.
그리고 이는 본질적으로 서로 향하여 있음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향하여 있으면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 머무르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이 머무르는 자리요, 궁전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 말씀이 우리의 삶 안에서 지켜지고 실현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당신의 참된 제자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같은 복음서 1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13)
그렇습니다.
말씀과 우리가 이렇게 상호 내주하면 진리를 깨달을 것입니다.
진리이신 말씀이 우리의 삶을 밝혀주실 것입니다.
곧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말씀이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의 노예이고”(요한 8,34),
진리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다 진리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 저희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 8,36)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요한 8,36)
주님!
제 안에 당신 말씀이 있을 자리를 마련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말씀이 머무르는 보금자리가 되게 하소서!
당신 말씀이 제 삶 안에서 지켜지고 실현되게 하소서!
당신은 진리이오니 저를 자유롭게 하소서! 아멘.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31절)
말씀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진리와 자유에 대한 희망 때문이다.
신앙인은 믿음과 희망으로 사는 이들이며, 진리와 자유를 얻기 위해서 기다림과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32절)
우리는 진리를 향해 가는 것이며, 진리는 참된 자유를 주시는 분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자유는 진리에 온전히 따를 수 있을 때 얻을 수 있다.
이 진리는 우리를 죽음, 곧 죄의 노예 상태에서 자유롭게 해주시는 하느님이시다.
우리가 평화 속에서 진리를 누리지 못하는 한, 어떠한 자유도 누리지 못한다.
자유롭게 된다는 것은 죽음, 부패 그리고 변하는 것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의미이다.
진리는 그 자체가 죽지 않고 썩지 않고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참으로 죽지 않고 썩지 않으며 변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 한 적이 없습니다.”(33절).
이 말은 진실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은 노예 생활을 했고,
지금도 유대인들은 로마에 세금을 내면서 살고 있지 않은가?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34절)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도 게으름으로 소홀한 실천으로 그의 자손이라는 지위를 잃어버릴 수 있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다”(39절).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말한다.
전 생애를 통하여 하느님과 아브라함이 가졌던 관계를 말한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그러한 신앙으로 살아가라고 하신다.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40절).
“그러니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41절)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41절).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42절)
하느님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이들의 아버지가 아니시다.
예수님께서 사랑받으셔야 하는 이유는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나셨고,
그 하느님을 자기들의 아버지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아들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또한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진정한 자유인으로 태어나는 시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진리 안에 자유롭게 되기를
반영억 라파엘 신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름다워지는 일입니다.
사랑하면 그를 닮게 되고 상대방의 모습으로 변하게 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면 사랑하는 이와 하나가 됩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사랑하는 이에게 맞춰주기보다는
나에게 맞추려 하고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한다면 아직 깊은 사랑을 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 삶의 모습에 이끌려 그분의 모습으로 바뀌게 됩니다.
나를 사랑하는 그분의 사랑을 안다면 그냥 함부로 살 수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갈라2,20) 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얼마나 마음에 새기고 사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하였다고 하더라도 마음에 주님의 말씀을 새겨 두지 않았다면
그는 겉모양만 제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요한17,21.).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10,30).
이제 우리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실천하여 주님과 하나 되어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요한8,38).고 하셨습니다.
결국 주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참된 제자가 됩니다.
예수님은 자나 깨나 당신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을 생각하고
당신의 삶으로 하여금 오직 그 말씀이 실현되게 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고 하면 하루에도 수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실행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1,2-3)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여 깨닫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할 때
우리는 세상의 흐름, 세속의 그늘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써
우리에게 죄악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말씀을 깊이 새겨 말씀 안에서, 말씀과 함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말로만 되는 일이 아닙니다.
살아야 합니다. 실천을 요구합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랑의 메시지인 성경,
성경대로 생각하고, 성경대로 살아가는 삶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사실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는지 곧 잊어버립니다.” (야고1,25).
자기 얼굴을 비추어 보고 무엇이 흉하게 묻었으면 지워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에 마음을 비추어 무엇이 잘못되었으면 고쳐야 합니다.
우리 영혼을 비추는 거울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그 말씀에 비추어 영혼이 자유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함으로써 예수님과 하나 되는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넌 내 마음 몰라.
좋으면서 싫은 척하는 내 마음 몰라.
떨리면서 떨리지 않는 척하는 내 마음 몰라.
겉으로는 차가운 척하면서 속으로는 온통 열병을 앓고 있는 내 마음 몰라.”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는 나를 아는 분은 누굴까?
참새 마음은 참새가 알고, 비둘기 마음은 비둘기가 안답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면 속을 알게 됩니다.
‘주님께서 저를 알고, 저도 주님을 압니다.’하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나이를 먹으면서 하지 않아야 할 말들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잔소리’라고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지내기 마련입니다.
잔소리를 하는 이유는 인정받고 싶어서라고 합니다.
잔소리를 하는 이유는 누가 알아주지 않아 심심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잔소리가 늘어 가면 늘어갈수록 사람들은 더욱 멀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전에 선배들이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자주 여세요.’
아버지도, 어머니도 철이 들면서부터는 잔소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성인이 되었으니, 저를 믿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부모님의 침묵이 더욱 무겁게 저 자신을 돌아보게 하였습니다.
둘째는 ‘반복되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좋은 이야기도 자꾸 들으면 따분하고 귀찮기 마련입니다.
하물며 지난날의 허물을 들추어내면서 험담하고, 불평하는 이야기를
반복하면 가까이 하고 싶지 않게 됩니다.
부부간에 다툼이 있을 때라도 지금 현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좋지,
예전에 있었던 일까지, 특히 친정과 시댁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꺼내면
다툼은 싸움에까지 이르고,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기도 합니다.
셋째는 ‘나 때는’이라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저도 예전에 선배들이 ‘나 때는’이라고 하면서 훈계를 하면 귀찮았습니다.
돌아보니 저도 가끔 ‘나 때는’이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흘러간 물로는 방아를 돌일 수 없다고 합니다.
‘나 때는’이라는 말은 서랍 속에 깊이 넣어두고
지금 살아가는 이야기를 경청하면 좋겠습니다.
본당 모임에서, 사목회에서 이 3가지 말만 조심하면 사목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성경 말씀은 모두 우리 삶의 등대가 되고, 지치고 목마른 영혼에 단물이 되지만
제게 특히 가슴을 뛰게 했던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는 ‘눈물로 씨 뿌리는 사람이 기쁨으로 곡식을 얻으리라.’입니다.
저는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사필귀정(事必歸正), 인과응보(因果應報), 상선벌악(賞善罰惡)은
문화와 문명의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저는 서품성구로 ‘눈물로 씨 뿌리는 사람이 기쁨으로 곡식을 얻으리라.’로 정했습니다.
성실하게, 정당하게 열심히 일한 사람이
그 노력의 대가를 받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불의한 사람이 득세하고, 불로소득 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권력을 사유화해서 억울한 사람이 생기고, 약한 사람을 괴롭히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사회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사회를 정화하기 위해서 예언자를 보내셨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냈습니다.
다른 하나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Veritas Liberabit Vos!)'
신학교에서 강의 시간에 이 성경말씀을 들었는데
마치 어둠 속에서 찬란한 빛을 본 것 같았습니다.
하늘을 나는 새가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도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도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삶을 풍요롭게 하고, 원하는 것을 채울 수는 있지만
참된 자유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자유는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을 내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유는 상태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믿음 때문에 모든 것을 내어 줄 수 있다면 그것이 자유입니다.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내어 줄 수 있다면 그것이 자유입니다.
희망 때문에 모든 것을 내어 줄 수 있다면 그것이 자유입니다.
좋은 옷을 입고, 맛난 음식을 먹었지만,
라자로에게 인색했던 부자는 결코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재물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없었던 부자청년은
결코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는 비록 불가마 속에 있었지만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모든 것을 내어놓았기에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어드린 여인은
기꺼이 가진 것을 주님께 봉헌했으니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유는 소유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 때문에, 사랑 때문에, 희망 때문에, 열정 때문에 기꺼이 내어 줄 수 있다면
감옥에 있어도, 병중에 있어도, 가난할지라도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에 대한 희망과 사랑으로
죽음의 두려움에 충분히 맞설 수 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예수님의 죽음과 우리의 죽음을 진지하게 묵상하고 성찰하도록
초대하는 사순 시기에 큰 도움을 줄 명저가 출간되었습니다.
‘남겨진 단 하나의 사랑’ ‘발타사르, 예수를 읽다’ ‘세계의 심장’ 등
불멸의 저서로 유명한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1905~1988)가 지은
‘발타사르, 죽음의 신비를 묵상하다’(가톨릭 출판사)입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위대한 대 신학자로서 그의 신학 사상은
제2차바티칸공의회에 크게 기여하였는데,
이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표현으로 1988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그를 추기경으로 서임했지만, 안타깝게도 수여식 이틀 전에 선종하고 말았습니다.
‘발타사르, 죽음의 신비를 묵상하다’를
우리말로 번역하신 분은 존경하는 윤주현 베네딕토 신부님이십니다.
가르멜 수도자이신 윤신부님 역시 대단한 신학자이십니다.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지만, 다들 엄두도 못 내는 신학 서적들을
꾸준히 번역하고 출간하는데, 진심인 신부님의 노력 앞에 큰 감사와 박수를 보냅니다.
옮긴 이의 말에서 윤신부님은 아주 간략하고도 명쾌하게 죽음의 신비 속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죽음은 인간이 존재하면서부터 떠안을 수밖에 없는 존재 방식입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으로 각인된 존재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짧은 인생에
‘영원’을 각인하려는 염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형태로든 각자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영원’의 조각을 새기려 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이러한 모든 노력을 수포로 돌아 가게 합니다.
마치 냉엄한 사형 집행인처럼 말입니다.
영원을 갈망하지만, 그 시작부터 사형 선고를 받은 비극적인 존재,
인간의 이러한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죽음에 대한 의문을 풀 해결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있습니다.
성부에게서 인류 구원을 위한 사명을 위임받아 이 세상에 강생하시고,
친히 우리가 겪을 죽음의 무게를 짊어지심으로써
죽음을 인생의 마지막이 아닌 영원을 향한 희망의 아이콘으로 바꿔 주신 분,
그리스도야말로 결국 한 줌의 재로 영원히 사라질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향한 가능성을 결정적으로 선사해 주신 분이자, 인류의 진정한 ‘구세주’이십니다.”
윤신부님께서는 오늘 우리 각자를 향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두려움 앞에
신앙인들은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해도,
죽음은 여전히 이승에서 우리의 존재를 최종적으로 마감하며 해체하는,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사건입니다. 그렇기에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죽음에서 부정적인 측면보다
더 강한 긍정적인 의미를 봐야 하고 또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신비적으로 변화되어 주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파스카 사건에 동참함으로써
죽음 속에서 부활의 빛을 발견할 수 있는 신앙의 눈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에 대한 희망과 사랑으로 죽음의 두려움에 충분히 맞설 수 있습니다.
죽음을 긍정적인 실제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님과 깊이 일치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신앙인에게 죽음은 자신을 ‘결정적으로’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과 결합시키는 기쁨과 희망의 사건이 될 것입니다.”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부담스럽고 고통스러운 죽음에 대해
깔끔하고도 명료하게 선을 그어주신 신부님께 큰 감사를 드립니다.
“만일 우리가 죽음에 직면해서 두려워 떤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지닌 가치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에 앞서 죽음의 의미를 바꾸기 위해
친히 죽음을 끌어안으신 주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분께서는 한 개인으로서 우리와 함께 돌아가신 것이 아니다.
이미 당신 자신 안에 우리의 죽음을 간직한 채 수난하고 돌아가셨다.
무엇보다도 그분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통해 우리 존재가 간직한 고뇌와 무능함
그리고 당신을 향한 열망이 부족한 우리의 내면을
제대 삼아 당신 자신을 성부께 온전히 봉헌하셨다.”(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도 어제 복음과 같이 예수와 유다인들 사이의 논쟁을 들려준다.
요한복음 史家는 이 논쟁을 통하여 예수의 神的 自己啓示를 도모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유다인들의 고정관념을 근거로 한 고집과 아집을 보여준다.
이로 인해 예수와 유다인 지도자들 사이의 절벽은 점점 더 깊어만 가고,
둘 사이의 이해 가능한 지평이나 공감대는 점점 멀어만 간다.
논쟁의 결과는 결국 서로의 고립으로 치닫는다.
어제 복음은그 와중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했다.(30절)
그런데 그들이 ‘정말 예수님을 믿는 것일까’,
아니면 그들이 ‘도대체 무엇을 믿고 있는가’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이는 우리보다 예수께서 먼저 가지신 느낌이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31절)라는 서두로 시작한다.
언뜻 보기에 예수께서 믿음을 가졌다는 유다인들에게
가르침을 내리려는 듯이 보이나 실상은 논쟁의 연속이다.
논쟁의 연속으로 전개되는 오늘 복음은, 그러나 두 가지 중요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하나는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새기고 산다면 참으로 예수의 제자가 되고,
그럴 때 진리를 알게 되며, 이 진리가 우리에게 자유를 선사한다.(31~32절)
다른 하나는 죄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죄의 노예가 된다(34절)는 것이다.
오늘의 두 가지 가르침은 다 ‘자유’와 관련이 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인데,
참으로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새기고 사는 것’이다.
‘말씀을 새기고 산다’는 것은 참다운 제자로서의 믿음을 말하는 것인데,
이는 예수를 향한 단순하고 순간적인 이끌림이나 매료됨이 아니라
충실함과 인내함으로 말씀을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의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는 제자는 그 보상으로 진리를 알게 될 것이고,
진리가 그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다.(32절)
여기서 진리란 두말할 것 없이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다.
결국 진리이신 예수께서 자유를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죄를 짓는 자는 죄의 노예가 된다.(34절)
노예는 자유를 마음대로 행사할 수 없는 신분일 뿐만 아니라
아예 자유를 지니지 못한 신분이다.
이는 죄 자체가 참다운 자유를 선사하는 진리이신 예수를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를 지은 자는 자유가 없는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제 죄를 지은 자의 죄를 용서하시고 참다운 자유를 선사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뿐이시다. (36절)
예수님은 진리이시고, 진리가 곧 사람을 참으로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참다운 자유는 다시금 진리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새기고 실천하며 사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새기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다.
그가 비록 자유를 주장하더라도 그 자유는 종종 아무 거리낌 없이
마음대로 행동하는 放縱이 될 수밖에 없다.
그에게 참다운 자유를 선사하는 진리가 빠져있기 때문이다.
예수와 진리, 이는 예수님 옆에 어떤 무엇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스스로가 바로 진리 자체이신 것이다.
진리란 예수님이 어떤 철학자로서 배워 익혀 제자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어떤 불변의 지성적 가르침도 아니다.
진리는 바로 예수님 그 자체이시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말씀 안에 사는 것은, 진리이신 예수님 안에 사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자주 진리(예수님)가 주는 자유(은총)의 삶과,
진리를 거부하는 죄(세상)가 주는 가책(종살이)의 삶을 두고 선택의 고민에 자주 빠지게 된다.
그러나 진리를 택한 자는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성주간이 가까워지고 있는 이때,
예수님께서는 우리 신앙의 매우 중요한 본질 하나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분의 제자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그분 말씀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스승의 말씀을 듣고 간직하며 그 말씀 안에 머무는 것은
제자로서 당연히 하여야 할 일입니다.
말씀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스승과 제자 사이를 드러내 주는 일차적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굳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는 것일까요?
그분의 제자가 되면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깨달으려면 진리, 자체이신 분 가까이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면 또 다른 질문이 생깁니다.
도대체 진리는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요?
그 답도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인간의 존엄은 ‘자유’를 통해서 발현됩니다.
구속이나 검열 또는 규제의 방식으로 누군가를 대하면,
그는 사람이 아니라 동물로 전락하여 버립니다.
교육이 아닌 조련으로 길들여지기 때문입니다.
한편 오늘 독서는 불가마에 던져진 세 청년의 이야기로
진리가 어떻게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지 알려줍니다.
하느님만을 섬기고 우상을 거부하며 ‘진리’를 선택한 그들은
불가마 안에서도 ‘자유롭게’ 걸어 다닙니다.
그러자 박해의 주범인 네부카드네자르조차
“신의 아들” 같은 존재가 불가마 속에서 그들과 함께 거닐고 있음을 증언합니다.
진정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자유’이고,
이 자유는 ‘진리’에서만 싹트며, 진리는 그분의 ‘말씀’이기에,
교회는 무엇보다도 그분의 말씀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놀랍게도 하느님의 말씀을 따를 때
진리이신 그분께서는 모든 상황을 역전시키십니다.
심지어 지옥의 불가마같이 뜨겁고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 있다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걸으시기 때문입니다.
서 바오로 수녀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오늘 1독서에 나오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
이 세 청년은 타오르는 불가마 앞에서도
그리고 불가마 속에서도 자유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하느님을 믿었고,
네부카드네자르가 고백한 ‘신의 아들 같은 이’가
이 세 청년과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머무르길 원하는 사람 곁에는
그분께서 이미 함께 걷고 계심을...!
주님,
주님을 믿기에 주님이 주시는 진리 안에서
오늘도 자유롭게 사랑하게 하소서.
[출처]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대구수녀원 - 복음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