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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2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제1독서 : 예레 20,10-13
복 음 : 요한 10,31-42
그때에 31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33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하고 대답하자,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35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36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37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38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39 그러자 유다인들이 다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40 예수님께서는 다시 요르단 강 건너편, 요한이 전에 세례를 주던 곳으로 물러가시어 그곳에 머무르셨다.
41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분께 몰려와 서로 말하였다.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가 저분에 관하여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42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자매님한테서 들은 말입니다.
“신부님, 저는 사는 게 재미없어요. 매일 매일 똑같은 삶의 반복이에요.
지루하고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중년의 나이를 넘기면서 이런 말씀 하시는 분이 많아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지루함과 무기력함이 과연 나이 탓일까요?
오히려 삶의 태도에서 올 때가 많습니다.
어떤 회합에서 “그거 내가 다 해봤는데 소용없어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정말로 소용없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것이 없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그 어떤 것도 새롭지 않은 것이고,
현재의 삶을 과거의 방식대로만 살려고 하기에 지루할 뿐입니다.
어떻게 삶을 대하는가가 중요했습니다.
사람들은 제게 “그렇게 책 많이 읽으면 지루하지 않으세요?”라고 물으십니다.
저 역시 학창 시절에는 책 읽는 것을 지루하게 여겼고 또 재미없어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재미있습니다.
공부가 이렇게 재미있는지 중년의 나이가 되어서 비로소 깨달은 것입니다.
주님을 받아들이는 마음도 그렇지 않을까요?
신앙 생활하는 것이 지루하다고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과거의 한 체험을 계속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닌, 너무 재미있고 신날 것이라며
미래를 바라보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이 먹는 것은 변함없는 진리이지만, 삶의 태도를 바꿔서 멋지게 사는 것은
언제든지 내가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무엄하게도
주님께 돌을 던지려는 유다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분명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지만,
그들은 그 일들은 보려고 하지 않고 자기 방식만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삶의 태도를 바꾸지 않고 계속해서 사람들을 죄인으로만 만들고 있고,
심지어 하느님마저도 죄인으로 만드는 어리석음 안에 머뭅니다.
크고 전능하신 주님의 다양한 활동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작고 부족한 나의 머릿속에 가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삶의 태도를 바꿀 수 있을 때, 일상 안에서 멋지고 신나는 삶을 살아가면서
주님과 함께하는 미래를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당시의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합니다.
거부하는 몸짓이었고, 죽이려는 적의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셨던 사랑으로 주님을 잡아야 합니다.
이런 믿음을 통해서만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재미없는 삶이 아닌 너무나 신나고 재미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어 성전 봉헌축일 때,
솔로몬 주랑에서 벌어진 유대인들과의 논쟁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유대인들의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시오.”(요한 10,24)라는 질문에 대해,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요한 10,30)라는 예수님의 증언에 대한 반응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곧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신성모독으로 여기고
돌로 치려고 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8)
이는 ‘아버지의 일’과 ‘예수님의 일’이 같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 일은 사랑을 완성해 가는 일입니다.
곧 생명을 북돋우고 창조를 완성해 가는 일이요, 구원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이 일은 또한 아버지와 아들을 알고 믿고 따르는 ‘우리의 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일을 믿게 되면, 곧 사랑을 완성해 가는 이 일을 믿게 되면,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안에 계심을 깨달아 알게 될 것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0,38).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라는 말은 그냥 단순히 알게 되는 것을 넘어서,
아는 바를 받아들여 체험하여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마치 아버지와 아들이 상호 내재를 통해 알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그분 안에 내재할 때 깨달아 알게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사랑이신 말씀을 받아 사랑을 완성해 가고,
생명이신 말씀을 받아 생명을 완성해 가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받으면 하느님이 됩니다.
이를 흔히 ‘신화’(θεοσισ)라고 합니다.
이는 앞서 예수님께서 하신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요한 10,36)라는
말씀을 비추어줍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는 하느님이 될 것이요,
마귀의 말을 받아들이는 이는 마귀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나의 말과 행동이 누구를 따르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대체 누구의 말을 받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혹 하느님의 말씀을 배척하고 모독하고 있지는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진정,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으니,
들은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 따름으로써 하느님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그분 말씀을 따름 안에서 그분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요한 10,35)
주님!
당신의 말씀을 받은 이가 되게 하소서.
받아들인 바를 따라 살며, 당신 안에 들게 하소서.
제 안에서 말씀이 자라나고, 당신 사랑이 실현되게 하소서.
말씀을 받았으니, 말씀이 되게 하소서. 아멘.
요르단강 건너편으로 가시어
조욱현 토마스 신부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32절).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33절)
그들은 그분이 하느님이심은 알지 못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에 인간이었다가 나중에 하느님이 된 분이 아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하느님이셨고, 나중에 인간이 되셨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것은 우리 인간을 당신과 같이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말씀에 참여함으로써 하느님과 같이 되고,
아들과의 친교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들이 된다.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하고 말할 수 있느냐?”(35-36절).
사람들이 하느님과 같이 될 수 있도록 하느님의 말씀이 세상에 오셨다면,
하느님과 함께 계시는 바로 그 하느님의 말씀이
하느님이 아닌 다른 무엇일 수 있는가?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인간이 신(神)이 된다면,
그들이 참여하는 그분이 하느님이 아닐 수 있는가?
우리는 빛에 다가가 빛을 받고 하느님의 자녀들이 된다.
그러나 빛에서 물러나면 어둠 속에 있는 자가 된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신들이 되게 한다면 하느님의 말씀은 당연히 하느님이시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37-38절)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모든 일은 바로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이었으며
그분의 뜻을 온전히 이루신 것이었다.
그분이 하신 일들은 모두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이었다.
그분이 아버지의 일들을 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증거이다.
아들의 일은 아버지의 일임을 알아야 한다.
유다인들은 다시 예수님을 잡으려 하였지만,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
“요르단 강 건너편, 요한이 전에 세례를 주던 곳으로 물러가시어 그곳에 머무르셨다.”(40절).
예수님께서 유다를 떠나 다른 민족들에게로 가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다인들에게서 다른 민족들로 건너가셨고,
“많은 사람이 그분께 몰려와” 그리스도에 관하여 한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다.”(41-42절 참조)
우리도 항상 아버지의 일을 살면서 그분의 사랑받는 자녀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연장입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우리는 살아가면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를 무시하고 지나칠 때도 있지만 가끔은 버릇을 고쳐 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아니 버릇을 고쳐 주기보다도 혼을 내주고 싶은 마음이 더 큽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엉뚱한 소리를 통해서도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남을 탓하지 않고 그를 품어줄 수 있는 마음을
키우지 못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게 됩니다.
남의 허물과 부족함을 보기보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성찰합니다.
그야말로 회개의 삶을 삽니다.
유다인들은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행세를 하며 신성을 모독하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이 그렇게 행동한 것도 이해가 됩니다.
사람은 사람이고, 하느님은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감히 인간 주제에 하느님의 행세를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실 인간이 아무리 훌륭해도 하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 예수가 하느님의 행세를 하였으니,
돌을 맞을 일을 한 것입니다. 자업자득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지만, 하느님께서 인간이 될 수는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인간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를 육화의 신비, 강생의 신비라고 합니다.
강생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인간이 되시기까지 한 사랑의 절정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같이 완전할 수는 없지만
완전하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완전함으로 이끌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처지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한없는 사랑으로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하심으로써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께서 하느님 안에 계심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에페1,4).
그러므로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이웃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해야 합니다.
분명, 사람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다면 영적으로 하느님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답게 살수 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와 구원의 희망을 안겨 주었듯이
우리도 사랑으로 이웃에게 다가가서 기쁨과 평화, 위로와 희망, 구원을 주어야 합니다.
그리한다면 바로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이요, 신입니다’(요한10,35).
주님께서는 당신의 구원사업을 하시되
우리를 도구로 삼으시고 우리를 기대하고 희망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연장입니다.
주님의 일을 함으로써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고,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심을 증언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이는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전하는 이는 더 행복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행복하십시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언론은 제2의 신이다.(Mass Media is the second God.)'이란 말이 있습니다.
언론이 현대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이 말은 언론이 정보를 전달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적 가치관을 형성하고 영향을 미치는 데 큰 역할을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말은 언론이 사회적으로 매우 영향력이 크고
중요한 존재임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습니다.
언론은 사람들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것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의견을 형성하고
사회적 논의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언론은 권력과 통제의 수단으로도 작용할 수 있으며,
이는 언론이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을 더욱 부각시킵니다.
하지만, 이러한 영향력에는 부정적인 면도 존재합니다.
언론이 편향적이거나 왜곡된 정보를 전달함으로써
사회적 분열을 야기하거나 잘못된 사회적 가치관을 형성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언론이 권력에 의해 조작되거나 통제되는 경우도 있어서,
그 영향력이 악용될 우려가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언론은 제2의 신이다"는 표현은
언론이 현대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으로,
그 영향력과 책임성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편식과 과식은 건강에 해롭습니다.
언론에 의해서 잘못된 판단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언론에 따라서 맹목적으로 판단하지 않기 위해서는
편향된 언론은 아닌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색안경을 쓰고 보면 세상이 그렇게 보입니다.
파란색 안경을 쓰면 파랗게 보이고, 빨간색 안경을 쓰면 빨갛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권력에 의해서 사유화되는 언론이 가지는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기도 합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권력과 야합한 언론에 의해서 단죄되었고, 죽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하셨습니다.
언론의 힘에 의해서 아무런 죄의식 없이 사람들은 유대인들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매카시 광풍’이 있었습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증거도 없이 매카시는
‘우리 사회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있다.’라고 선동하였습니다.
언론은 그것을 공개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죄도 없이 공산주의자로 몰려서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가 거룩하시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언론의 힘에 의해서 사람들의 거룩함이 상실되고 말았습니다.
대한민국의 언론도 권력과 야합했던 역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 폭도들이 소요를 일으켰다.’라고 보도했습니다.
합리적인 판단과 균형 잡힌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언론의 편식과 과식을 피해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을 옳은 길로 인도하였지만
권력은 예레미야 예언자를 거짓 예언자라고 선동하였습니다.
선한 일을 한 사람이 단죄를 받고, 악인들이 부와 권력을 누리는 세상이라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예언자들의 시대에도 권력에 야합한 언론은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많은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을 단죄하고 있습니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거룩하신 분’이라고 외쳤던 군중들은
언론의 선동에 따라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의 시대에도 깨어 있는 시민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가 저분에 관하여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우리가 진정을 따라야 할 신은 ‘언론’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을 따라야 할 신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믿어야 할 분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요즘 계속 봉독되는 복음은 예수님과 유다인들 사이에서 벌어진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논란입니다.
이제 지상에 머무실 날은 그리 오래 남지 않았는데,
끝까지 당신을 주님으로 고백하기는커녕 무시하고 죽이려고
돌까지 손에 드는 동족을 향한 예수님의 비애감은 혹독했을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9월 중순에서 10월 중순 사이에 초막절 축제를 성대하게 벌이는데...
이 축제 후에 또 하나의 축제가 남아있습니다.
11월 중순부터 12월 중순까지 이어지는 봉헌 축제입니다.
점령군들로 인해 심각하게 훼손된 예루살렘 성전을
유다 마카베오가 독립 항쟁을 벌여 탈환한 뒤 실시된 성전 정화작업의 결실로
새롭게 건립한 제단을 하느님께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존경하는 송봉모 토마스 모어 신부님 표현에 따르면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던 때는 겨울이었는데,
예수님의 생애에서 겨울이 다가오고 있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유다 지도자들의 불신과 거부의 찬바람이 이제는 파국을 향해 치달아
내년 봄, 파스카에는 예수님이 돌아가실 것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의 아레오파고스,
즉 토론의 장소라고 할 수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자,
유다인들은 즉시 예수님을 둘러 쌌습니다.
그들의 의도는 오직 하나! 예수님의 입에서 나
는 메시아다라는 말을 끌어내어 로마에 고발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적 정체를 말씀하실 때마다
귀를 막고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신적 정체에 대해
처음부터 무시하고 불신한 것입니다.(송봉모, 요한복음 산책. 제3권, 바오로딸 참조)
유다인들과의 논쟁 중에 예수님께서는 거듭거듭 밝히셨습니다.
당신은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어 이 세상에 오신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이다.
아버지와 당신은 하나이다. 나를 보는 것은 곧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다인들은 끝끝내 예수님을 거부하고 무시하고 손에 돌까지 들었습니다.
눈앞에까지 다가온 구원과 영생을 발로 차버렸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저 그런 예언자 중의 한 사람입니까?
나와는 전혀 무관한 역사 속의 한 인물입니까?
나의 창조주요 구원자,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십니까?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성주간을 앞두고 오늘 독서와 복음은
‘폭력’에 대한 내용들을 전합니다.
독서는 예레미야 예언자를 향하여 주변의 모든 이가
적대감을 드러내는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군중(직역하면 ‘많은 사람’)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가까운 친구들마저 모두, 제가 쓰러지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복음도 팽팽한 긴장과 불안으로 시작됩니다.
“그때에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이유는 바로 전에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도발과 위협의 긴장감 속에서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라고 하면서
그 ‘모독’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모독이라는 낱말은 그리스 말로 ‘블라스페미아’로,
상대의 명예를 훼손하고 치욕스럽게 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명예를 훼손하시거나
치욕스럽게 하신 일이 있는지가 판단의 기준이 될 터인데,
그분께서는 오히려 당신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과 가르침이
아버지를 증언하고, 드러낸 일이었음을 주장하십니다.
이스라엘의 기득권자들을 긴장시키고 불안하게 한 사건들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음을 역으로 환기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새로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은
언제나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여 살기를 내뿜습니다.
논리가 통하지 않으니 물리적 학대와 폭력으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향하여 돌을 던지려 아무도 모르게 손을 움켜쥔 채 살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손에 움켜쥐고 있던 돌을 조용히 내려놓을 시간입니다.
성주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김 마리 에프렘 수녀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요한 10,32-
돌을 던지는 행위
그 안에는 악이 가득 차 있다.
상대를 해치려는, 상처를 입히려는, 생명을 위협하는 행위이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졌다고
함부로 던지는, 상처를 입히고 아프게 하는 모든 것들이 ‘돌’이다.
유다인들은 좋은 일을 많이 보여준 예수님에게
무엇 때문에 돌을 던지려고 했을까?
아마도 자신들의 속마음을 들킨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인간 본성의 나약함이 폭력이라는 비겁함으로 드러난 것이리라
어쩜 나 역시..
내 양심의 부끄러움을 감추고자
상대의 마음에 돌을 던지는 일은 없었는지 ...
오늘도 우리는
이유 없이 예수님에게
돌을 던지고 있는 건 아닌지...?
반성해 볼 일이다.
[출처]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대구수녀원 - 복음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