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현의 신앙고백
어제는 불자모임광장 카페 단멸론자 뗏목님의 글에 "이 카페가 단멸론을 주장하려면 카페 문을 닫으시라"고 썼더니 두 말 없이 준회원으로 강등시켜버립니다.
그러나 이미 모든 단멸론자들의 카페에서 강퇴 혹은 활동정지를 당하였지만 조금도 섭섭하지 않은데, 문제는 홍사성의불교사랑 카페입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초기불교를 전한 홍선생님이 단멸론자들의 습격으로 카페가 졸지에 식물이 되었는데도 바쁜 탓인지 그냥 두고 보고만 있습니다.
이미 공부 잘 하던 분들이나 초심자들이 모두 떠나버리고 단멸론자들의 글로 도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미얀마에서 공부 수행하고 오신 스님이나 재가자들 중에 단멸론자가 숱하다는 것입니다.
오직 "지금 현세, 당대에 도과를 성취해서 해탈 열반을 이룰 수 있다"는 말에 현혹되어 "교리교학 수행명상이 불교의 모든 것”이라고 현혹된 탓입니다.
대승이 아니라, 아직도 불교를 망하게 한 부파불교, 논장불교를 하고 있는 진정한 소승들이지요.
그러나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렇게 열심하는 분들 중에, 저는 아직 아라한이 단 한 분이라도 나셨다는 소식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저들은 니까야 속 부처님께서 "세상을 이익 되고 평화=안락하고 행복하게 살도록 해야 한다"는, 불교의 궁극적인 대승적인 목적을 팽개치고, 세상을 위한 생활실천불교에 대한 가르침은 "유아적인 시시한 것"이라고 외칩니다.
그러면서 "그런 유치한 것은 해탈 열반과 무관하다"고, 애써 한 줄도 읽지 않고 가치부여조차 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출가 목적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목적은 개인의 고통이나 생로병사를 초월하는 소승적인 해탈 열반이 아니라, 전쟁으로 수십만 명이 한꺼번에 살륙 당하거나, 농경제에서 작은 생명 벌레가 새들에게 쪼아 먹히는 것조차도 마음 아파서, 생명 있는 모든 것의 평화와 행복을 위한 법을 깨닫기 위해 출가한, 대승적인 출가였습니다.
'이 세상은 왜 이렇게 전쟁과 살인과 도둑질 강도질 사기 질투 강간 다툼으로 뭇 사람이 죽어가고 불행한 삶을 사는가?' '어떻게 하면 모든 사람이 함께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것인가?'를 깨닫기 위해 출가하신 것입니다.
6년, 죽음에 이르도록 갖은 공부와 수행 고행 가운데, 부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불행과 고통은 개인의 욕심과 악한 생각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으셨고,
욕심과 악의가 생기는 이유는, "나라는 존재나 나의 것이 영원하거나 단멸한다는 집착으로 생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욕심과 악의 집착을 버리고 떠나기 위해 무엇을 가르쳐야 할 것인가"를 연구하신 결과,
"눈앞에 전개된 모든 것, 일체법이 무상(허무가 아니라 영원하지 않다는 뜻)하고, 나라는 존재는 무아"라는 것을 깨달으신 것입니다.
이후 제자들을 모아 이 '무상과 무아를 체득시켜, 세상 재가자들에게 욕심과 악의를 완전히 떠난 모범을 보일 스승'으로 세우셨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화려하고 권세 있던 사람들도 부처님의 승단으로 출가하면, 즉시 '분소의 입고 식은 밥을 빌어먹으면서, 사람들의 모욕에도 일언반구 대꾸 없이 그윽한 미소로서, 무상과 무아를 체득하여 욕심과 악의를 떠난 성자의 모습으로 모범'을 보이셨던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는 재가자들은 "아! 나도 욕심과 악의를 떠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가르침을 무언중에 받고 변화된 삶을 살고, 위대한 스승들께 진정으로 존경하고 공양 올리며 귀의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님들께서 '무상 무아를 체득하고 욕심과 악의를 버린 성자의 모범'을 보여주신다면, 초기불교 교학이나 수행법, 대승불교의 교학이나 수행법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바보 출라 판타카 존자께서 그 복잡한 이론이나 어려운 위빠사나 간화선을 해서 아라한이 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교리교학은 무상무아적 삶과 수행을 위해 고안된 방편이지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각각 다른 수많은 출가수행자들 혹은 외도들에게 근기에 맞는 말씀으로 무상 무아를 증거 하기 위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8만 4천 법문을 하셨지만, 그 많은 교학을 모두 공부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불요의한 경을 해석한답시고 무수히 침소봉대된 논장을 해석하는데 수십 년 날밤 샐 필요는 더더구나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당시에 그런 논장들이 있어 아라한이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니까야에 나타난 4제8정도는 무상과 무아를 철학적 논리적으로 증거 하기 위한 교리교학입니다.
37조도품 4념처 수행 선정 명상은 무상 무아를 철저하게 체득하도록 제시된 수행법입니다.
그런 논장이나 선정명상에만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기쁨도 행복도 없습니다.
교리교학만 깨달으면 해탈이고 선정 명상만 잘하면 열반인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던 불교경전이 단멸론인들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오직 자기의 깨달음이나 자기 수행이 최상이라고, 가는 곳마다 시비하고 아상 높은 소리만 하는 것입니다.
교리교학이 최상이고 수행 선정 명상이 수승한 것이라고만 여긴다면 더 이상 불교의 발전은 없습니다.
그러다가 인도에서도 한국에서도 불교는 망했던 것이고, 그런 불교는 절름발이 불교일밖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은혜로운 부처님 가르침
저는 매일 경전 속 부처님의 사랑과 자비심 가득한 말씀을 읽으면서, 때로는 목이 메이고 눈물을 글썽입니다.
51년 거지 옷 입으시고 하루 한 끼 조금 얻어 자시며, 양산 우산도 없이, 수레는 고사하고 슬리퍼조차 없이, 열사의 길을 걸어 다시시며,
"욕심과 악의 집착을 버리면 평안을 얻고 기쁘고 행복하다"
"욕심과 악의는 무상 무아를 체득함으로서 얻어진다"
"나의 가르침을 깨닫고 나에게 귀의한 사람은, 이웃과 세상을 위해서 이익 되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라"
고 가르치신 진정한 복음에 언제나 감격하고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행복합니다.
급하고 신경질적인 성격이 신중하고 부드럽게 변하여, 스스로나 남에게도 제법 편안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언제나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고 음성이 낮아지고 모든 것이 아름답고 따뜻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이 위대한 부처님의 행적과 그 가르침을 전하고 싶은 열망이 생겼습니다.
절에 가고 싶고 부처님 전에 예배 올리고 싶고, 계행청정하고 자신의 소질에 따라 추구하는 바를 열심히 수행하시는 스님들을, 존경하여 모시고 공양 올리고 싶어졌습니다.
손에 항상 염주를 차고,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나는 부처님의 아들"이라고 팔을 뽑아 염주를 보여 자랑하고 싶어졌습니다.
부처님을 모르는 분들이 불쌍하게 여겨집니다.
부처님당시의 부처님 가르침에 감동받아 귀의한 재가신자들처럼, 나의 이웃들이 혹 나에게 영향 받아 부처님께 한 발이라도 다가 갈 수 있도록, 나의 언행이 정의롭고 진실하며 단정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오랜 습을 하루아침에 버릴 수는 없지만, 매일 경전을 읽고 묵상하며 가능한 한 오계를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나중 젊은 불자들을 가르칠 일이 있을까 대비하여 나쁜 머리지만 공부하려 합니다.
시간만 나면 도반이나 공부가 부족한 분들을 만나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고, 초기불교와 불교의 원형인 설교불교에 대한 이해가 없는 스님들을 만나 간절히 조언해 드리고, 카페에 훗날 젊은 스님들이 설교 설법에 필요한 자료를 부족함 없이 찾을 수 있도록 자료를 찾아 정리해 올리고 있습니다.
내 눈앞에 보이지 않지만 밥을 굶는 많은 생명을 위해 어려운 중에도 자동이체 하고, 정의롭고 진실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시위하고 투표하는 등으로 열심히 봉사하고 참여하려 합니다.
이렇게 저는 대승불자가 되었습니다.
저를 이렇게 변화시켜 세상을 긍정적이고 기쁘게 살 수 있게 한 불교는 추호도 허무주의 염세주의가 아닙니다.
예전 한국불교에서 길을 찾지 못하여, 일시적으로 기독교에 얼렁거릴 때의 억압적이고 죄의식으로 답답하던 고통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지구상에서의 삶은 천국으로 가기 위한 시험대라며 일가친척과 친구들마저 외면하고 마귀 취급하는 기독교의 교리가 오히려 염세주의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부처님은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보다 훨씬 더 극심한 고통과 사랑과 자비, 희생과 모범을 그의 51년간의 행적과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불교 수행 중에서 가장 좋은 수행은 "교리교학이나 선정 명상보다, 부처님의 행적과 재가자에게 주신 가르침을 읽고 공부하며 바르게 사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수행을 80% 하고 교리교학 10% 선정 명상 10%가 가장 좋은 수행법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공부하면 수십 년 동안 안 열리던 입이 열려, 누구를 만나도 불교를 설교할 수 있어집니다.
물론 스님이나 연구자들은 논장도 수행도 깊이 연구하고 발표해야 합니다.
그래서 불교는 '개인의 해탈 열반을 위한 수행의 종교'라는 말은 때로는 옳지 않습니다.
진정한 해탈 열반은 나와 남이 함께 평안하고 행복한 것입니다_()_
원불사한국불교개혁源佛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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