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소고 4 – 시 몇 편 감상 2
다음은 조조의 ‘단가행(短歌行) 혹은 대주당가(對酒當歌)’입니다. 많은 <삼국지> 독자들이 좋아하는 시입니다. 적벽대전 전야 조조가 중국의 전설적인 술이라는 두강주에 취해 8척 길이 창을 끼고 노래했다고 해서 횡삭부시(橫槊賦詩)라고도 합니다. 삭이 8척이라나요. <삼국지>에 등장하는 ‘8척 장신’인 관우, 장비 등의 키는 오늘날 식으로 2미터 40 센티가 아니라 1미터 90정도라고 하지요. 한문 전문가인 하태형 교수는 이 시가 조조의 문선(文選)에 수록된 뛰어난 시라고 했습니다. 나관중은 이 시를 꺼내서 적벽대전의 전야를 한층 웅장하게 만들었지요. 나는 한문으로 읽기 전인 중학교 때 본 한글 번역을 읽고 너무 황홀했습니다. 총 32행 중 앞부분 8행을 싣습니다. 정음사 판입니다. (중국 원본에서 확인한 것인데 나관중은 32행 중 2행이 뺐더군요)
술 두고 노래하세/인생이 그 얼만고?
비유하면 아침이슬/예온 길이 꿈 같아라.
분하고 강개하여/ 시름을 못 잊겠네,
이 시름 어찌 푸노/다만지 술이로다.
번역이 멋지지 않습니까? 술을 잘 모르던 중학생이 읽어도 흥이 날 정도이지요. 마지막 구절 ‘다만지 술이로다’는 ‘오로지 두강주 뿐이로다, 유유두강(唯有杜康)’입니다. 두강은 명주를 빚은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두강이 죽었다는 유시(酉時, 저녁 5시에서 7시 사이)에는 술을 마시지 말고 연회에도 가지마라 (유불회객 유시불부연酉時不赴宴)이란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아마도 저녁 일찍부터 술을 마시지 말라고 주의한 것이겠지요. 요즘 중국에서 두강주를 부활시켰더군요. 수년 두강주를 맛을 본적이 있는데 그냥 백주에 향을 좀 넣고 ‘두강’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닌가 합니다. 나관중이 창작한 ‘적벽전야’의 인상이 너무나 강열해서 한국일보 근무 중인 1972년 여름 울산 앞바다 해저 석유탐사 취재에 나갔을 때 달 밝은 밤중에 채굴 장비를 바다에 내리는 작업을 보면서 조조가 적벽강에 띄운 전선에 불을 휘황찬란하게 밝힌 구절을 떠올리고는 내 딴에는 흥에 겨워 ‘이날 밤 탐사선은 불을 대낮같이 밝히고...’라고 썼지요.
이 시에 대한 해석은 분분합니다. 하교수는 ‘조조는 당시 새로운 사회질서를 이룩하기 위해 기존 지주계급을 대체할 인재들이 몹시 필요한 상황이었다. 실제로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를 보면 조조는 구현령(求賢令), 거사령(舉士令), 등 인재를 구한다는 포고령을 잇달아 발표하는 데 이 단가행도 내용으로 보아 구현가(求賢歌), 즉 인재를 구하는 노래라 보아도 무방하다’고 진단합니다. 이 시의 뒷부분을 보시죠.
교교여월 하시가철(明明/皎皎如月 何時可掇), 밝고 밝은 저 달이여(현인을 의미) 언제 저 달을 딸 수 있을 것인가(掇)?
우종중래 부가단절(憂從中來 不可斷絕) (현인을 구해야 한다는) 고민이 마음에서 자꾸 우러나와 그쳐지질 않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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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부염고 수부염심(山不厭高 水不厭深) (인재가 산 같이 쌓였어도 많음을 싫어하지 않듯이) 산이 높음을 싫어하지 않고, 물이 깊어도 싫지가 않네.
주공토포 천하귀심(周公吐哺 天下歸心) 주공(周公, 강태공)처럼 어진 선비가 온다면 먹던 밥을 뱉고서라도 나가가 맞으리라, 그러면 천하는 모두 돌아오리라!
이 시를 지금까지 특히 적벽대전과 연관하여 알고 계시던 분들은 찬물 한 바가지를 덮어 쓴 것 같이 정신이 번쩍 들지요? 두 번째로 정신이 번쩍 든 것은 새 번역자 신복룡 선생와의 대화였습니다. 이 역시 세종시로 가는 버스 안이었죠. 내가 이 시가 멋있다고 하니 신교수는 중국 고전 여기전기에서 따온 것이라 별로라는 겁니다. 이번에 책을 받아보니 정말 그렇게 써셨더군요. 각주에 ‘이 시의 문학적 가치에 대해서는 여러 평가들이 있다. “인생이 그 얼마라고, 돌아봄 아침 이슬 같은 것(人生幾何 譬如朝露)”와 같은 대목을 보면 시재(詩才)가 있다고도 하나, 전체적으로 여기저기 [시경 등 – 필자 주] 글을 모아 놓은 것이 다섯 소절이나 되어 그의 박식함을 알 수는 있지만 그리 훌륭한 작품은 아닌 듯하다. 이 시는 은유가 많고 당시 조조의 심경과 사회상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 본뜻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 시는 당시 구현령을 내린 터여서 여기에 나오는 대부분의 상징은 현사들에 대한 여망을 담고 있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천하의 인재를 구하는 것이 주제라는 데에는 신복룡, 하태형 두 교수의 의견이 비슷합니다. 그러면 ‘월명성희 오작남비(月明星稀 鳥鵲南飛)요, 달이 밝으니 별빛은 희미해지는데, 까막까치가 남으로 날아가고, 요수삼잡 무지가의(繞樹三匝 無枝可依)라, 나무를 서너 차례 빙빙 맴돌아도 앉고 의지할 가지에 없구나’는 어떻게 해석할까요? 적벽대전 전야 술판에서 노래한 것이라면 ‘나 조조가 달 같이 나타나 사방을 비취니 유비나 손권 무리들은 별같이 희미하고, 유비가 나를 피해 남으로 도망가지만 나무를 세 번 빙빙 돌아보아도 앉을 가지를 찾지 못하는 까막까치같이 의지할 데가 없는 신세가 아니냐.’면서 조롱한다는 해석하죠.
소동파도 그의 유명한 <적벽부>(1082)에서 ‘월명성희하니 오작남비’라, 이건 ‘조조 맹덕의 시가 아닌가,’라고 읊었습니다. 소동파(1036-1085)는 송나라 때 사람이니 나관중이 이 시와 적벽대전을 연관시킨 소설 보다 최소한 300년 앞섭니다. 소동파는 <적벽부> 외에 <염노교, 적벽회고(念奴嬌, 赤壁懷古>라는 시도 남겼습니다. 이 시는 주유를 찬양하는 헌시 같은 기분이 느껴지더군요. 적벽대전에서 우리가 기대하던 제갈량의 자리는 없었습니다. 주유와 소교의 백년가약을 맺고, 미남인 주랑이 제갈량과 담소하는 사이에 조조의 배는 재와 연기로 날아가 사라졌다는 겁니다. 제갈량의 신출귀몰한 전략이나 동남풍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습니다. 소동파는 사서(史書)와 같이 적벽대전을 완전히 주유의 공으로 돌린 겁니다. 소동파는 <적벽부>에서 조조의 진격로 등 적벽대전의 경과를 정확히 파악하고 여기서도 주유의 공으로 인정하지요. ‘서망하구 동망무창(西望夏口 東望武昌)하니, 서쪽으로 하구를 바라보고 동쪽으로 무창을 바라보니, 산천상무 울호창창(山川相繆 鬱乎蒼蒼)이라, 산천은 서로 엉켜 울창한데, 차비맹덕지곤어 주랑자호(此非孟德之困於 周郞者乎)아, 여기가 바로 조조가 주유에게 곤욕을 치룬 곳이 아닌가’ 라고 읊지요. 적벽대전을 이같이 조조와 주유의 싸움으로 받아들인다면 ‘월명성희 오작남비’는 도망가는 유비와 강동의 쥐새끼 같은 손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천하의 인재들아, 다른 곳에 가도 소용없다. 내 밑으로 오면 성의껏 대접해 주겠다.’는 말이 아닌가요? 다른 해석이 있으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면상 단가행/대주당가를 전문으로 여기 실을 수는 없군요. 32행 중 절반을 위에서 언급한 것으로 대신합니다. 이제 이 시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논의해 봅니다. 이 부분은 당연히 주관적인 이해를 기초로 한 것이라 어느 것이 맞고 틀렸다는 시비를 가릴 수는 없습니다. 신교수도 여러 평가가 있다면서 문학적으로 훌륭한 작품이라 할 수 없다는 정도입니다. <시경> 등 중국 고전에서 다섯 번 인용했다는데 32행 중 5행이라면 많다면 많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앞서 언급한 소동파의 <적벽부>라는 명문장도 ‘월명성희 오작남비’ 뿐만 아니라 ‘逝者如斯(서자여사, 가는 것은 이 물과 같으니)’를 <논어>에서 인용하지요.
중국에서는 언어 구조상 직접 인용을 피하기 어려울 겁니다. 우리 시는 워낙 이미지를 인용/원용하는 게 많아 차이가 있습니다. 미당 서정주의 ‘귀촉도’를 조지훈은 ‘낙화’에서 ‘귀촉도 울음 뒤에 먼 산이 다가서다.’라고, 두견이 우니 산이 가까이 보이는 새벽이구나라는 뜻으로 읊었지요. 박종화의 소설 <다정불심>도 원전은 고려시대 이조년(李兆年,1269-1343) 다정가(多情歌) 중 ‘다정(多情)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일 것이고 이것을 지훈이 ‘완화삼(玩花衫)’에서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라고 읊지요. ‘꽃이 진다하고 새들아 슬허마라(송순(宋純, 1493-?)’와 ‘꽃이 지기로소니/바람을 탓하랴.(조지훈의 ‘낙화’)’는 어떻습니까? 이를 두고 지훈이 인용/표절했다는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시적 이미지는 이렇게 전개되는 겁니다. 이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Es ist nichts neues under der Sonne.-맞게 쓴 건가요?)’는 말과 같지요.
<대주당가>도 한 편의 시로서 얼마나 감동을 주는가, 그래서 우리가 멋진 시라고 느낄 수 있는가라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역사에서 약간의 권위를 빌려 오면 조조와 그의 두 아들 조비와 조식은 후한 헌제 건안(建安, 196-220) 년간의 3조(曹) 꼽힐 정도로 글쟁이들입니다. 내가 아는 조조의 시는 <대주당가> 외에 관창해(觀滄海: 바다를 바라보며)가 있습니다. <삼국지>에는 안 나오는 것 같은데? 조조가 원소를 멸한 후 동북으로 변방이민족들을 치고 하북성 창려현(昌黎懸) 발해만 부근의 갈석산에 올라 바다로 보면서 읊은 시인데 시상이 웅장합니다. 바다를 아마도 처음 본 조조일 터이니까요. 한번 찾아 읽어 보시죠. 1954년 모택동이 이곳을 찾아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천여 년 전 위 무제 조조가 말을 타고 동쪽의 갈석산에 올라 시 한편을 남겼다. 스산한 가을바람은 지금도 다를 바 없으나 사람은 바뀌었구나(往事月千年, 魏武揮鞭, 東臨碣石有遺篇, 蕭瑟秋風今又是, 換了人間).’ ‘관창해’까지 언급한 것은 조조가 고전의 구절들을 몇 개 가져와서 얽듯이 시를 지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질을 갖춘 시인의 자질을 갖춘 인물이며 몇 구절을 넣은 것은 인재를 구하는 시의 주제상 고전에 좋은 글귀가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신복룡교수는 ‘아침 이슬 같은 것(人生幾何 譬如朝露)’이라는 비유가 좋다고 하셨는데, 사실 이런 건 중국이나 한국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상투어로 영어로는 cliche, 일본말로는 ‘쿠세’입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즐거워/슬픈거야’, ‘비유하면 아침이슬’, ‘술 두고 노래하세’, ‘술을 취케 먹고’, ‘어디에서 나와서 어디로 가는 건가?’, ‘풀잎에 이슬이라’, ‘물위에 거품이라’, ‘공수래공수거’, <삼국지> 서시에도 등장하는 낭화(浪花), 물거품 등등은 어린 시절 유행가 가락같이 익숙한 것 아닌가요? 이런 구절들이 반복되는 게 시적 감흥을 줄일 수도 있겠지요. 반대로 고전 음악에서 흔히 나오는 ‘주제와 변주’같이 주제가 나온 다음 계속 변주되면서 테마 음률이 조금씩 바뀌어 이어지고 새로운 모습으로 보이는 맛은 엄청나지요.
‘대주당가’는 조조의 문집에 포함되어 있을 뿐 어떤 상황에서 쓰인 것인지는 모릅니다. 내용상으로 보면 인재를 구하는 포고령들과 함께 인재에 대한 그의 절박한 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지요. 사회과학적 관점에서 보면 새 시대를 열어가는 데 새로운 마인드가 필요함을 조조는 절실히 열망했는지도 모릅니다. 이건 동시대를 살아간 필부나 범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삼국지>에서 관우를 자기사람으로 만들려하고, 아두를 품에 안고 조조군을 휘저으면서 달리는 조운을 활로 쏘아 죽이지 말고 살려서 잡으라고 한 것 등 인재에 대한 그의 욕심이지만 조조가 더 필요로 한 것은 새로운 국가경영을 위한 철학을 가진 인재일 겁니다. 하여튼 조조의 이러한 노력 덕분에 하북의 인재들이 조조 밑으로 모인 겁니다. 반면 소설 <삼국지>대로 이 시가 적벽대전을 앞두고 남으로 내려가면서 유비나 손권을 희롱한 것이라면 ‘월명성희 오작남비’는 기막힌 구절입니다. 나관중의 <삼국지> 이전 소동파도 이렇게 해석하고 적벽부에 이 구절을 인용한 것이 아닐까요? 특히 무인이자 정치인인 조조라는 인간의 시적 재능이 절정에 도달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동서를 통해 시인이자 성공한 정치가를 또 볼 수 있을까요? 과문입니다만 별로입니다. 프랑스 1848 혁명 후 제2공화국에서 외무장관을 몇 달 한 라마르틴느(Alphonse de Lamartine)의 연애시 ‘호수(Le Lac)’는 당대 애송시였지만 차원이 다르죠. 굳이 꼽자면 모택동을 들 수 있을 겁니다. 갈석산에 올라 조조를 찬양한 시인답게 그의 접연화((蝶戀花: 李淑一에 답하다, 1957.5.11)는 ‘대주당가’와 비견될 만 할 겁니다. 모택동이 국민당에 피해 도망한 장정 도중 전우 유직순(柳直旬)이 죽는 데 그의 아내 이숙일이 통일 후 모택동을 방문하자 국민당에 죽은 자기의 첫 아내 양개혜(楊開慧) 떠올리며 지은 시가 ‘접연화’입니다. 옛날에 한번 올린바 있는데, 첫 구절만 설명하죠. 아실교양군실류(我失驕楊君失柳)라, 나는 아름다운 양개혜(楊開慧)란 버들(楊)을 잃고 당신은 유직순(柳直旬)이란 버들(柳)를 잃었지 않았는가. -멋진 대구(對句)지요.(2021.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