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우연히 한 홈페이지에서 퍼온글입니다.홈지기에게 퍼온다는 말없이
글을 갖고왔네요...허정희라는 분이 쓰셨습니다.
산사는 일몰 속에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다.
사를 둘러싼 산마루에는 한줄기 햇살이 언뜻 비쳤다.
나는 낮잠이 깊이 든 남편 곁을 빠져나와 여관의 앞마당에 놓여있는
살평상에 앉았다.
여관에서 잔일을 하는 할머니가 수돗가에서 나물을 씻고 있었다.
"이리 가져 오세요. 같이 다듬어요."
"그래요. 천천히 해도 상관 없으니. 낼 아침 찬거리로 쓸거요."
할머니는 물묻은 손을 허름한 바지자락에 쓱쓱 비벼닦은 다음 플라스틱
통에 수북이 담긴 산나물을 들고 살평상으로 다가왔다.
주름살이 깊게 패인 노인의 얼굴에 저녁햇볕이 쏟아졌다.
"주인양반께선 일찍 들어오셨지요?"
"네. 오전에 대리석을 산에 올리느라 녹초가 되어 돌아왔어요. 낮잠을
들었는데 깨어나질 않아요."
"저녁상을 받지 않았지요? 새댁이 배고파 어떡하지."
"그이 깨어나면 나가서 먹지요."
저녁예불을 알리는 범종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할머니는 손을 재빨리 움직이며 부드러운 나물줄기에서 억센 잎을 솎아냈다.
"혼자서 부엌일을 다 하시려면 힘드시겠어요."
그녀의 거무퇴퇴한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스쳐갔다.
"지금처럼 저녁나절이 제일 한가하지요. 몇몇 손님들의 저녁상만 봐주고
아침찬거리만 좀 준비해 두면 되니까요."
"이른 새벽부터 이 여관이 붐비는 걸 보고 저도 정말 놀랐어요. 여긴 무척
한가한 곳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게 요새 풍조겠지요."
"할머니는 어떻게 이곳에 오시게 되었어요?"
나는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 했다.
나는 노인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지난 사흘동안 여관에 머무르며
남편이 절 보수공사를 하러 산에올라간 후 나는 계속 할머니와 지내온
터였다. 허드렛일을 하고 있었지만 할머니는 점잖은 분 같았다.
말수가 적었지만 함께 있으면 푸근한 느낌을 주었다. 할머니는 서울
토박이말씨를 썼기 때문에 이곳 함안사람이 아닌 것이 확실했다.
"난 집도 절도 없소. 자식도 없지요."
"결혼하지 않으셨어요?"
노인은 다듬어진 나물을 한켠으로 밀어두고 속바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불을 댕겼다.
담배를 한가치 다 태울동안 그녀는 말이 없었다.
"새댁 나이가 몇이요?"
"스믈 일곱이예요."
"나는 새댁보다 훨씬 어렸을적 부터 술집에 다녔어요. 어쩔수 없는 형편이었지요.
어머닌 내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어요. 아버지는 몸져 누워 계시고 남동생
둘은 아직 어려 돈 벌 사람은 나 밖에 없었지요. 나는 그렇게 이십년을
살았어요. 그러다 어느날 그를 만났어요. 처음 봤을 땐 영판 술판에만
쫓아다니는 건달인줄 알았수."
"어떤 사람이었어요?"
나는 호기심에 끌려 재촉하듯이 얼른 물었다.
"그 나이에 돈벌 생각은 않고 고시공부를 하고 있었소. 자기 말로는 괜찮은
직장자리가 여러번 있었는데도 내키지 않았다는 거요."
"몇살이었는데요?"
"나랑 동갑이었으니 서른여덟이었지요. 딴은 어릴적 부터 부모도 없이
혼자 안해본 일없이 고생하며 살았으니 늦을만도 했소."
"그래서요?"
할머니는 나물 다듬던 손을 멈추고 내얼굴을 바라보며 넉넉한 미소를 지었다.
허리춤에서 다시 담배갑을 꺼내 담배에 불을 당겼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동생들도 다들 장가간 터라 나혼자 살고 있었으니
당연히 내방에서 같이 살았지요.동거한 거요.
그때부터 그는 독서실에도 가지 않고 집에서만 공부를 했소.
내가 밤에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무섭게 공부를 하는 거요.
그 사람이 시험에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기 때문에 난 아무말도 않았지요.
난 그저 그사람과 함께 지내는 것이 좋았수. 그때까지 남자한테서 따뜻한
정을 느껴보지 못했지요."
할머니는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한밤중에 우리는 해장국집으로 가서 밥을 사먹고 통금시간에 쫓겨 거리를
달려 집으로 돌아왔지요.
가끔 술집에 쉬는 날 난 그와 함께 버스를 타고 시외로 나가기도 했소.
그게 마치 어제일 같이 느껴진다우.그때만큼 행복했던 적은 없었소."
"술집동생들은 날건달을 떼어버리라고 빈정거렸지요. 하지만 난 그가
건달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었수.
그는 착하고 여리고 아주 점잖한 남자였어요. 정말 양같이 순했더랬어요."
"그분과 계속 사셨어요?"
할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화사하게 빛나는 노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내게 우울한 표정을 보여주기 싫은지 할머니는 고개를 숙였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왜요? 유부남이었어요?"
"그는 노총각이었소. 그인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이우."
"그럼 왜요?"
뒷담벼락에 기대고 잠든듯이 누워있던 검둥이가 어슬렁거리며 살평상
가까이 다가왔다.
검둥이는 꼬리를 흔들었다. 몸집은 크지만 유순하기 그지없는 개였다.
"일년 후에 그는 행정고시에 합격해 버렸지요."
할머니는 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군요. 고시에 되고 나니까 사람이 달라졌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할머니 곁을 떠났죠?"
노인은 다시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했잖우. 그는 절대 그런 남자가 아니지요. 시험이
됐다고 기뻐하며 나한테 식을 올리자고 재촉했어요.
이제 술집에는 나가지 말라며 집밖으로 나가게 하지도 않았어요.
난 한동안 꿈에 부풀었소. 내가 사모님이 되다니! 하지만 날이 가고 달이
가자 난 생각을 고쳐먹었수.
그는 여전히 내방에서 지내며 연수원에 다녔지요. 난 궁리해 보았지요.
그가 나와 결혼하면 집한칸 없이 고생만 할 것 같았어요. 그당시에는
지금보다 빽이 더 중요한 시절 아니우? 술집여자와 결혼해서
뭐가 잘 되겠어요? 내 나이 사십이었으니 세상일을 환히 읽고 있었지요.
또 그의 친구들에게서 높은 자리에 있는 양반이 사위감으로 그를 점찍고
있다는 소리도 들었어요. 난 그에게 좋은 혼처를 택하도록 권했지요.
그는 펄쩍 뛰며 그런 소리 말라더군요. 그는 완강했어요."
"그래서요?"
"난 미리 짐을 싸고 술집 일도 마무리한 다음에 전에 아는 언니가 다방을
하고 있는 포천으로 갔지요."
"어떻게 그럴 수가? 나라면 도저히 그럴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는 내가 다니는 술집을 난장판으로 만들며 마담언니에게 날 찾아내라고
다그쳤다고 들었어요.
그는 그후로도 계속 나를 찾아다녔어요. 그래서 난 동생들에게도 연락할
수가 없었어요.
그가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는 소식이 들려왔지요."
"그 소식을 듣고도 아무렇지도 않으셨어요?"
"......"
"정말 대단한 분이세요."
"술로 세월을 달랬지요. 너무 술을 퍼마시다 보니 정신을 잃었던가 봐요.
그 언니가 그이를 찾아가 버렸지요. 사람 살려내라고 심한 소리를 했나봐요.
내가 자초지종을 말하지 않으니까 그 언니 생각에는그이가 나를 버렸다고
지레짐작했지요. 그는 나를 보러 왔어요. 그의 얼굴이 너무나 초퀘했어요.
그는 나를 보고 눈물을 흘렸어요. 우린 둘다 큰소리로 울고 말았지요."
할머니는 시꺼먼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그는 다시 나를 찾아오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난 생각해 보았어요.
나를 계속 만나는 게 그에게 이로울 게 없는 거지요. 결혼한 남자들이
두군데 신경을 써다 패가망신한 걸 수없이 봐왔지요.
그가 가정에 마음을 붙이고 잘 살기를 바랬어요. 그래서 난 다시 도망쳤지요.
그는 계속 나를 찾아다니고 난 장소를 바꿔가며 달아났지요. 그는 집요했어요.
난 할 수 없이 내가 가는 절의 스님께 말해 이 수덕사 로 와서 허드렛일을 했지요.
절일은 무처 힘들고 고달팠지만 여기서 난 마음이 진 정되었어요.
범종소리와 예불소리 그리고끊임없이 울어대는 산새와 산벌레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고통이 진정되었소.
그가 도저히 찾아낼 수 없는 곳이었으니까. 나이가 들어 절일을 감당하지
못하자 보살님이
나를 이 여관으로 보냈지요. 그는 세무청장까지 올라갔어요.
난 신문에서 그의 이름을 찾아내지요.
요새는 당뇨병으로 아파 누웠다는데. 나보다 빨리 가지 않았으면 좋겠수.
아마 내무덤에 술이라도 한잔 쳐 주겠지요."
산새들이 시냇물 흐르는 소리를 내며 무수히 우짖고 있었다.
해는 산마루를 넘어가고 하늘이 청색물을 먹은 도포자락처럼 싱그러웠다.
검둥이는 살평상에서 다시 담벼락으로 어슬렁거리며 다가갔다.
할머니는 다 다듬은 나물을 씻어놓기 위해 우물가로 천천히 걸어갔다.
나는 긴 잠에서 깨어난 남편과 저녁식사를 하러 밖으로 나가면서도
할머니의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다.
밤늦도록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왠지 찡한 감정이 생겼습니다. 이 글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한번쯤 사랑에 대해 되돌아 보게 하는건 사실일것입니다.
진짜 사랑이라는 것은 뭘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