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
3·1운동을 계기로 항일무장투쟁이 적극적으로 전개됩니다. ‘광복을 위해 무력만을 수단으로’라는 의열단의 구호에서 엿볼 수 있듯이, 무력항쟁(무장투쟁)이 광복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는 주장에 무게가 실립니다. 이에 3·1운동 이후 만주·연해주 지역을 중심으로 무장투쟁 활동이 활발히 진행됩니다. 국내의 경찰서와 같은 식민통치기관 공격을 하고,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도 전개합니다.
홍범도가 이끌던 의병부대가(삼수·갑산) 3·1운동 이후 가장 먼저 재기하여 북간도의 왕청현 봉오동에 대한독립군이라는 이름으로 거듭 태어납니다. 대한독립군이 일제의 식민통치기관(헌병 초소 등)을 공격하자, 일본군이 봉오동으로 공격해 옵니다. 이에 홍범도 등은 일본군을 골짜기로 유인하여 일본군 1개 대대 병력을 크게 격파시킵니다. 봉오동 전투(1920.6)는 독립군 편성 이후 첫 승리로서,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높이는데 기여하였습니다. 또한 봉오동전투는 독립군의 병력 보강과 군비 확충에 총력을 기울이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편 일제는 독립군의 전력(전투능력)을 다시 평가하고 독립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 계획을 세우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일제는 간도 침략의 구실을 만들고, 더 나아가 간도에서 활약하고 있던 독립군을 완전히 제거할 목적으로 마적단을 매수하여 훈춘의 일본영사관을 공격하게 하는 훈춘사건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이를 한국인에게 뒤집어씌우고는, 이것을 구실로 간도 및 만주 지역에 2만여 명의 병력을 투입합니다. 일본군의 포위 압박으로 퇴로를 열지 못한 여러 독립군 부대들은(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대한국민회군 등)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입니다. 이러한 전투에서 일본군 1,200여 명을 사살하고, 2,000여 명을 부상시키는 전과(전쟁이나 경기 따위에서 올린 성과)를 거두는데 이를 청산리대첩(1920.10)이라고 합니다. 청산리대첩은 독립군의 여러 전투 가운데 가장 큰 승리였으며, 항일 독립 전쟁 중에서 최대의 승리였습니다. 거주 동포들의 협조와 독립군의 목숨을 아끼지 않은 투지, 지형을 이용한 효과적인 작전 등이 승리의 요인이었습니다. 청산리대첩은 무장투쟁을 하던 독립군은 물론이고 한민족에게 독립(광복)에 대한 희망과 용기를 갖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에서 두 차례나 패배한 일제는 독립군에 대한 무자비한 보복에 나섭니다. 일제는 독립군의 무장 항전을 그들의 식민통치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라고 판단하고, 무장독립투쟁의 근거지를 소탕(휩쓸어 모조리 없애 버림)하고자 일으킨 사건이 간도참변(경신참변)입니다. 일본군은 패배를 설욕(승부 따위에 이겨 전에 패배했던 부끄러움을 씻고 명예를 되찾음)하고, 독립투쟁의 뿌리를 뽑고자 한민족이 가장 많이 모여 살고 있었던 간도의 한인 마을들을 1920년 10월부터 1921년 4월까지 무차별적으로 공격합니다. 무차별적 공격의 방법은 살인·파괴·방화·약탈 등의 만행(야만스러운 행동)이었습니다. 방화는 일부러 불을 지르는 것을 말합니다. 살인·파괴·방화·약탈 등은 전쟁터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1920년 10월과 11월 두 달 사이에만 약 3,600여 명이 학살당하였고, 또한 가옥 3,500여 채, 학교 60여 개소, 교회 20여 개소 등이 소각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초토는 불에 타서 검게 된 땅을 말합니다. 초토화는 불에 탄 것처럼 황폐해지고 못 쓰게 된 상태를 비유하여 하는 말입니다. 일제(일본군)는 한민족의 생활터전이자 독립운동의 터전이었던 간도지역의 한인 마을을 초토화시켜, 패배를 복수하고 독립투쟁의 근거를 없애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일본군이 일으킨 사건이 간도참변입니다.
간도참변으로 간도 지역에서 활동이 어려워진 독립군 부대들은 서일의 대한독립군단을 중심으로 합류합니다. 김좌진과 홍범도도 이 부대에 합류합니다. 대한독립군단은 독자적인 활동을 하던 여러 독립군 부대가 1920년 12월에 서일과 김좌진 등을 중심으로 통합 조직한 항일독립군부대를 말합니다. 대한독립군단 가운데 일부는 소련과 만주 국경 지역으로 이동하고, 또 다른 일부는 소련 영토인 자유시로 이동합니다(1921).
자유시는 당시 소련의 영토였던 알렉세예프스크(지금의 스보보드니. 스보보드니는 러시아어로 자유롭다는 뜻. 그래서 자유시로 불림)를 말합니다. 자유시참변은 1921년 6월 소련의 자유시(알렉세예프스크. 스보보드니)에서 소련 적색군(적군. 붉은 군대. 볼셰비키 혁명군. 공산당 군대)이 대한독립군단 소속 독립군들을 포위하여 사살한 사건을 말합니다. 소련적색군이 독립군을 포위하고 사살한 이유는, 독립군이 소련적색군에 편입 당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소련적색군(공산당 군대. 혁명군)은 독립군을 그들의 군대 안에 편입시켜, 반혁명군(하얀 군대. 일본군과 한편)과 싸우길 바랐습니다. 편입에 찬성하는 독립군도 있었고 반대하는 독립군도 있었습니다. 무장해제 및 편입에 찬성하던 사람으로는 홍범도 등이었고, 무장해제 및 편입에 반대하던 사람으로는 김좌진 등이었습니다.
어떻든 독립군은 자유시 지역에서 소련적색군의 공격을 받아 전투력의 큰 손실을 입게 됩니다. 간도참변과 자유시참변으로 독립군은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서의 활동이 크게 위축(마르거나 시들어서 오그라지고 쪼그라듦)되고 말았습니다. 자유시참변 이후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은 소련적색군에 편입되었고, 김좌진은 따르는 독립군을 이끌고 만주로 내려와서, 3부로 독립군을 재조직합니다. 독립(광복)의 방법으로 무력항쟁을 택했던, 봉오동전투의 홍범도와 청산리대첩의 김좌진은, 또 다른 독립의 방법(해법)에 대한 생각의 차이 때문에 서로 다른 행로를 갑니다. 서로 다른 행로의 배경에는 생각의 차이, 즉 사상의 차이가 존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홍범도는 사회주의적인 사상의 입장에 김좌진은 민족주의적인 사상의 입장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홍범도는 소련 영토인 연해주에 남았고, 김좌진은 만주로 와서 흩어진 독립군들을 다시 모아 전열과 조직을 재정비합니다. 그러한 노력의 과정에 3부가 결성된 것입니다. 3부는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를 말합니다. 3부는 군사적 기능과 행정적 기능을 함께 가진 정부였습니다. 3부는 압록강 유역에 위치하여 임시정부의 직할대 역할을 한 참의부와 남만주의 길림성 부근에 있었던 정의부 그리고 북만주 지역의 신민부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한편 일제는 미쓰야 협정(1925)을 맺고 만주 지역에서의 독립군의 활동을 방해합니다. 미쓰야 협정은 1925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 미야마쓰와 만주의 군벌 장쭤린(장작림) 사이에 비밀리에 체결된 협약으로, 만주군벌이 한국의 독립 운동가를 체포하여 일본 영사관에 넘기면 그 대가로 일제가 포상금을 만주군벌에 지급한다는 것입니다. 미쓰야 협정은 일본군과 만주군벌이 만주에서 공동으로 힘을 합쳐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것으로, 만주에서 한민족의 항일독립운동은 큰 타격을 입게 됩니다. 참고로 만주군벌은 청의 멸망 이후 중화민국이 성립되던 사이의 혼란기에 만주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군사적 집단을 말합니다. 군벌(軍閥)은 강대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정치적 특권을 장악한 군인집단을 말합니다.
미쓰야 협정으로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에 큰 타격이 초래되자, 그 해결책으로 3부 통합이 추진됩니다. 결론적으로 완전한 3부 통합은 이루지 못했지만, 3부는 북만주의 혁신의회와 남만주의 국민부로 재편성됩니다. 나중에 혁신의회는 지청천의 한국독립군으로, 국민부는 양세봉의 조선혁명군으로 계승되었습니다. 한편 1931년 일본군이 만주를 침략하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장악하자, 한국독립군과 중국독립군이 연합하여 일본군을 상대로 공동으로 싸우게 되었습니다.
한국독립군의 대표적인 전과가 쌍성보전투과 대전자령전투가 있고, 조선혁명군의 대표적인 전과가 홍경성전투와 양릉가전투가 있습니다. 한국독립군은 중국 호로군과 연합해 한중연합작전으로 쌍성보전투과 대전자령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한국독립당의 당군(정당에 소속된 군대)이 한국독립군입니다. 조선혁명당의 당군이 조선혁명군입니다. 조선혁명군은 중국의용군과 연합하여 홍경성전투와 양릉가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1930년대 무장항일투쟁의 특징은, 한․중연합작전의 전개입니다. 독립군이 중국군과 협력하여 일본군을 상대로 싸웠습니다. 우익(민족주의) 계통의 독립군인 한국독립군은 중국호로군과 연합하여 일본군과 싸웠고, 좌익(사회주의) 계통인 조선혁명군은 중국의용군과 연합하여 일본군을 상대로 싸웠습니다. 호로군은 본래 일본에 고용되었던 중국 군인들로, 호로(護路. 지킬 호. 길 로)라는 말처럼 일본이 부설한 철로를 지키던 일본의 용병이었다고 합니다.
한국독립군의 일부는 임시정부의 요청으로 중국 본토로 이동하여, 임시정부의 직속부대인 한국광복군으로 창설되었습니다. 지청천의 한국독립군을 중심으로 여러 독립군을 통합하여 중국 충칭에서 임시정부의 직속부대로 창설된 군대가 한국광복군(1940)입니다. 한국광복군의 총사령관은 지청천(이청천으로 개명)이었고 참모장은 이범석이었습니다. 1942년에는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용군이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었고, 일본군에 학병이나 징병으로 끌려갔던 청년들이 대거 탈출하여 한국광복군에 가담함으로써, 한국광복군의 전투력은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한국광복군의 활약으로는 한국광복군은 중국군과 연합하여 중․일전쟁에 참전하였고, 일제가 태평양전쟁(1941)을 일으키자,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군과 함께 독립전쟁을 전개하였습니다. 또한 영국군과 연합(1943)하여 미얀마 전선에 파견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했고, 포로 심문·암호문 번역·선전 전단 작성·회유 방송 등 심리전도 전개하였습니다. 한국광복군은 미군의 협조로 중국에서 특수훈련을 받고 제2지대장 이범석과 탈출 학도병을 중심으로 국내진입작전을 통하여, 조국의 독립(해방)을 자주적으로 이루려 하였으나, 그 이전에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함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한민족 스스로에 의한, 온전한 자주적 독립의 실패는 광복 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남북이 민족의 의지와는 별 상관없이 남북분단으로 인한 고통과 슬픔을 겪고 있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래서 민족의 장래를 예견(어떤 일이 있기 전에 미리 짐작함)했던 백범 김구는, 연합군에 의한 일본의 항복과 한민족의 독립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편 1938년 김원봉을 중심으로 조직한 조선의용대는 중국군(중국의용군)과 협력하여 일본군을 상대로 싸웠습니다. 그 일부는 나중에 김원봉을 따라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였고 나머지는 조선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중국공산당 아래서 중국에서 항일투쟁을 했고, 다시 중국공산당군과 함께 장제스의 중국국민당군의 전투에 참전하여 현재의 사회주의 국가인 현재 중국의 건국에 기여했습니다.
조선의용군은 광복 직후 김일성의 요청과 모택동(마오쩌둥)의 승인으로 북한군에 흡수되었습니다. 6․25전쟁 때, 북한군(인민군)의 주력(중심이 되어 주요한 역할을 하는 세력)에는 전투 경험이 많았던 조선의용군이 있었습니다. 조선의용군의 대표적 지도자는 김두봉과 김무정입니다. 조선의용군은 1942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개편한 조선독립동맹의 당군(黨軍)이었습니다. 김두봉은 한글학자 주시경의 제자였고, 사회주의(공산주의) 계열의 민족지도자였습니다. 광복 이후로 북한에서 정치생활을 했고, 김일성대학의 초대 총장을 지냈다고 합니다. 김무정은 무정이라고도 하며, 조선의용군의 총사령을 지냈습니다. 광복 후, 북한에서 정치와 군인생활을 했고, 1950년 6․25전쟁 때 북한군(인민군) 제2군단장을 지냈던 인물입니다. 이렇게 볼 때, 대한민국 국군의 기반은 한국광복군이고 북한군의 기반은 조선의용군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투박하게 말하자면, 한국군과 북한군의 뿌리엔 모두 독립군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6․25전쟁 땐 사상에 따른 입장의 차이로 서로 죽도록 싸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