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의 섬에 가까운 곳에서 살면서도 가보지 못한 섬들이 많았는데 모처럼 암태도를 간다니 소풍을 기다리는 어린이처럼 들뜬 기분으로 며칠을 기다렸다. 당일은 날씨도 좋았다.교통편은 후동이 운전하는 봉고차에 회원 가족들이 함께 했다. 압해 송공리 선착장에서 차도선으로 암태도로 가기로 하였다. 압해대교를 자동차를 타고 지나는데 개통 된지 꽤나 시일이 지났지만 처음 지나는 길인데도 섬을 이은 다리라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한참을 가니 밭 가운데 길다란 돌이 우뚝 서있다. 높이가 4m가 넘는 동서리 선돌이다. 주민들은 ‘장수지팡이’, 장군바위‘등으로 부른다고 한다. 크기가 커서 힘센 장수가 지팡이로 썼다는 설화와 송장수가 자신의 부하 사병을 매장한 뒤 그 위치를 표시하기 위하여 입석을 세웠다는 설화 등이 전해진다.
송공리 선착장에서 암태도로 가는 배보다 먼저 팔금으로 가는 배가 있어, 그 배로 팔금 선착장으로 가서 팔금 암태를 잇는 연도교를 지나 암태로 갔다.· 암태에서 송곡리 매향비를 찾아가는 길목, 송곡마을 입구에 송곡우실이 있다. 이 우실은 1905년 마을 앞을 지나가던 스님이 마을이 번창하고 우환을 막으려면 담을 쌓아야 한다고 가르쳐주어 팽나무 숲이 있던 현 위치에 돌을 쌓아 우실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여기에서 차를 놓아두고 매향비埋香碑를 찾아 갔다.
매향비는 송곡마을의 넓은 ‘안실골들’이라는 간척지와 야산의 사이에 있는데, 야산의 동쪽 끝자락에 있다. 매향비란 내세(來世)의 발원(發願)을 위하여 향(香)을 강이나 바다에 잠가 두고 그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를 말한다. 송곡리 매향비는 조선시대 초기인 1405년에 세워진 것으로 정제되지 않은 자연석의 평평한 면에 7행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제1행에 ‘매향처반사도埋香處伴巳島’라 하여 매향의 위치와 방위가 표시되어있다. 아울러 사방기준지, 매향시기, 주도집단, 매향과 비를 세운 경위, 참여자, 시주자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특히 매향의 주도층과 향도香徒가 명시된 점과 매향처埋香處를 명확하게 기록한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고 한다.(현지에서는 판독하지 못하고 신안문화원의 자료를 인용하였다.)
이어서 암태도소작인항쟁기념탑으로 갔다. 항쟁기념탑은 단고들을 지나 면소재지로 들어서는 삼거리에 조성되어 있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1920년대에 대표적 소작쟁의로 1923년 8월~1924년 8월까지 전개되었다. 서태석의 주도로 소작인들은 '암태소작회'를 결성, 7~8할의 고율소작료를 4할로 내려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지주가 묵살하자 소작료 불납동맹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소작회는 지주측 부친의 송덕비를 무너뜨리고 충돌하여 간부 13명이 검거 되었다.이에 박복영과 농민 400여명이 목포경찰서와 재판소에서 집단농성을 벌여 사회문제화 되자 일제 관헌이 개입하여 '소작료 4할로 인하, 구속자 쌍방 고소취하, 비석은 소작회 부담으로 복구한다'는 약정서가 교환되었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서해안 섬들과 전국적인 소작쟁의의 계기가 되었으며, 지주와 그를 비호하는 일제 관헌에 대항한 항일운동이었다. 기념탑의 좌우에는 당시 암태소작회를 돕던 분들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다. 내국인(우측)과 외국인(좌측)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내국인의 명단에는 동아일보 직원들이 있었고, 외국인에는 일본인의 이름이 있어 눈길을 끌었다.
오후에는 안좌도 천사의 다리로 갔다. 가는 길에 팔금면 읍리 3층 석탑이 있었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탑인데, 석탑에서 30m 정도 떨어진 곳에 이병연효자비각이 위치하고 있다. 효자비각은 퇴락하여 뒤편 지붕의 일부가 무너져 있었다.
안좌 천사의 다리는 두리에서 박지도(547m), 박지도에서 반월도(925m)로 연결되는 나무다리이다. 때마침 썰물이어서 갯펄 우에 서있는 다리는 신기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만약 물이 들어서 바다위에 떠 있는 나무다리의 비경은 그야말로 속세를 벗어나 새로운 세계에 와 있는 것 같았을 것 같다. 또한 밤에 조명이 켜지면 정말 멋있는 경관이 연출 되었으리라 생각 되었다.
천사의 다리를 뒤로 하고 암태면에서 자은으로 들어오는 은암대교恩岩大橋를 건너가니 도로 우측에 4기의 비가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그 비석을 설명하는 석물이 있는데 그 설명이 너무 잘못 되어 있어 실소를 금치 못하겠다. 즉 함풍咸豊 4년(1854)에 세원진 목사김후기현영세불망비牧使金候箕絢永世不忘碑를 설명한는데 牧事金後基(목사김후기)의 불망비라고 되어 있다. 또 일본의 해군용지의 경계석을 용소龍沼의 물을 일본해군의 용수로 썼다는 용수장표지비用水場標識碑라고 적고 있다. 돌아 와서 신안군청 문화관광과에 전화를 했으니 무언가 조치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여러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서 많은 돈을 드리면서 좀 더 정확한 설명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암태에서 돌아오는 길은 자동차가 밀려서 사람들이 먼저 건너오고 자동차가 다음 배편으로 오는 과정에서 이산가족이 발생하는 헤프닝이 있었지만 무사히 돌아왔다. 좀처럼 가기 힘든 값진 여행이었고,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낀 하루였다. 이 일을 주관한 홍정선생, 말없이 우리를 안전하게 데리고 다니느라 고생한 후동선생에게 이 자리를 빌어서 고마움을 표합니다.
※ 매향비埋香碑
내세에 미륵불의 세계에 태어날 것을 기원하며 향을 땅에 묻고 세우는 비.
불교에 대한 억제책이 강화되던 조선 초기에 극락정토로 갈 것을 기원하면서 비를 세우던 비밀 종교의례의 하나이다. 매향은 주로 민중들이 했고, 특히 발원자들이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는 현실적 위기감을 바탕으로 한 순수한 민간신앙 형태였다. 지금까지 발견된 매향비로는 1309년 8월에 세운 고성삼일포(高城三日浦) 매향비, 1335년 3월에 세운 정주(定州) 매향비, 1387년에 세운 사천(泗川) 매향비, 1405년에 세운 암태도(岩泰島) 매향비, 1427년에 세운 해미(海美) 매향비 등이 중요하다. 땅에 묻는 향은 주로 침향(沈香)이며 희귀약재로 쓰인다. 향은 불교신앙의 필수적인 용품으로 중시되었는데 침향의 경우는 더욱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향을 땅에 묻는 행위는 미륵하생신앙(彌勒下生信仰)과 연결된다. 땅에 묻은 향을 매개로 발원자와 하생할 미륵이 연결되기를 기원했다. 미륵신앙은 현실 위주의 구세·기복적인 것으로 여말선초에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시대적인 불안감을 해소하고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것이다. 매향의 주도집단은 보(寶)·결계(結契)·향도(香徒)였다. (Daum 백과사전)
전남지방의 매향비는
➀ 영암군 서호면 암길리 매향비(1344년)
➁ 영광군 법성면 입암리 매향비(1371년과 1410년의 매향 기록이 한 비의 양면에 있음)
➂ 신안군 암태도 송곡리 매향비(1405년)
➃ 장흥군 매향비(1434년)
➄ 해남군 마산면 맹진리 매향비(1406년) (해남군의 문화유적, 국립목포대학교, 1986.)
첫댓글 불편한 점은 없으셨는지요. 시간 때문에 충분한 답사가 되지 못한 것 같아서 내심 아쉬웠는데 선생님의 글을 보니 안심이 됩니다. 다음에는 좀더 치밀한 계획으로 알찬 수련회가 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