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27일 뉴욕 타임스는 미국전역에 실린 부고를 모아 천명의 부고 기사를 냈습니다. 불과 몇 달사이에 코로나 19 환자가 10만명을 넘어섰던 때였습니다. 그중 몇몇 부고를 소개합니다.
○바싹한 베이컨과 해시부라운을 좋아한 프레드 할아버지(Fred Walter gray, 75세)
○미스터리 소설을 좋아한 페기 할머니(Peggy Rakestraw,72세)
○세아이의 자랑스런 싱글 맘 루베니아(Louvenia Henderson, 44세)
○남편품에서 사망한 응급실 의사 프랭크(Frank Gabrin,60세)
○여섯 아들의 엄마 노마 할머니(Norma Hoza, 101세)
○두번의 암을 이긴 아자드(Azade Kilie, 69세)
○해마다 개학 첫날 손자들에게 노래를 불러준 클라라 할머니(Clara Louise Bennett,91세)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주로 공장에서 일했던 피터 할아버지(Peter Kafkis, 91세)
○아내를 사랑했고 “응, 자기 Yes, dear”라는 말을 많이 한 마커스 할아버지(Marcus Edward Cooper Jr., 83세)
○아침마다 아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던 마리아(Maria Garcia-Rodelo,52세)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마르기트 할머니(Margit Buchhalter Feldman, 90세)
○가족 행사에서 막 춤으로 악명 높았던 필립 할아버지(Philip A. Scadilli,91세)
○가족을 하나로 묶는 바위 같았던 메리 할머니(Mary E. Mack, 84세)
○헌신적인 간호사였던 조세핀(Josephine Tapiru,56세)
○남편을 보내고 이틀도 안돼 사망한 주디 할머니(Judy Therrian,80세)
○갓난 아이를 잃은 엄마 데벨레(Wogene Debele, 43세)
○코로나 19 환자 치료에 자원한 일반외과의 베리(Berry Webber, 67세)
○미시간주 최연소 희생자 스카일라(Skylar Herbert, 5세)
○남편을 보내고 이틀도 안돼 사망한 주디 할머니(Judy Therrian 80세)
○갓난 아이를 잃은 엄마 데벨레 (Wogene Debele 43세)
○바다위로 떠오르는 보름달을 좋아했던 노먼 할아버지(Norman Leslie Jenkins, 91세)
○누구도 홀로 죽기를 원치 않아 야간근무 중에도 항상 깨어 있던 마거릿 할머니(Margaret Busha, 89세)
○바이러스 퇴치를 돕기 위해 뉴욕으로 운전해 온 구급대원 폴(Paul Gary, 66세)
○마지막 근무일까지 바이러스 감영자들을 위해 일했던 시나(Sheena Renee Comfort Miloes, 60세)
○전염성 있고 장난스러운 웃음으로 모두가 그리워하는 덜린 할머니(Durlene Clontz Shuffler, 85세)
○생애 마지막 말로 “감사합니다”를 남긴 코닐리아 할머니(Cornelia Ann Hunt, 87세)
우리는 평소 타인의 죽음을 무감각하게 전문(傳聞)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타인과 이웃의 차이를 알아보기 위해 루카복음 10장 25절-37절 까지 성경 구절을 인용합니다: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내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 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내가 살 것이다.”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 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에리코로 내려가다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 죽음으로 만들어 놓고 가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 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 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 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 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너는 이세 사람 가운데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Jesus told him, “Go and do likewise.”
뉴욕 타임스 부고 기사는 박주영 지음 “법정의 얼굴들”에서 재 인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성경 구절은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성경”에서 인용했음을 밝혀 둡니다.
죽음에 대한 경외심이 삶을 더 치열하게 만드는 활력소가 되지 않을까 싶어 오늘 좀 무거운 주제를 택했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유한 합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면 여생은 하루하루가 축제일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알프레드 테니슨 경의 시 “모래 톱을 건너며(Crossing the Bar)”로 오늘 글을 마칩니다.
Crossing the Bar
Alfred, Lord Tennyson
Sunset and evening star,
and one clear call for me!
And may there be no moaning of the bar,
When I put out to sea,
But such a tide as moving seems asleep,
Too full for sound and foam,
When that which drew from out the boundless deep
Turns again home.
Twilight and evening bell,
And after that the dark!
And may there be no sadness of farewell,
When I embark;
For tho’ from out our bourne of Time and Place
The flood may bear me far,
I hope to see my Pilot face to face
When I have crost the bar.
모래톱을 건너며
태니슨
해는 지고 저녁 별 빛나는데
날 부르는 맑은 목소리
내 멀리 바다로 떠날 적에
모래펄아, 구슬피 울지 마라.
끝없는 바다로부터 왔던 이 몸이
다시금 고향 향해 돌아 갈 때에
움직여도 잔잔해서 거품이 없는
잠든 듯한 밀물이 되어다오.
황혼에 울리는 저녁 종소리
그 뒤에 찾아 드는 어두움이여!
내가 배에 올라탈 때
이별의 슬픔도 없게 해다오.
이세상의 경계선인 때와 장소를 넘어
물결이 나를 멀리 실어 간다 하여도
나는 바라노라, 모래펄을 건넌 뒤에
길잡이를 만나서 마주 보게 되기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