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1일 (토) 오전 11시경 정발산 평심루 앞에서 도당굿이 열렸다. 일산에 이주해서 십 수년을 살았지만 정발산 도당굿을 처음 보았다. 아침 열시경에 집을 나서서 정발산으로 오르는 길은 각종 꽃들로 알록달록 예뻤다.
요즘 창밖을 보면 목련이 흐드러지고 벚꽃이 만개한 꽃숲속에서 살고 있다. 1년중에서 가장 화려한 순간이다. 느티나무 새순이 움터 나오고 있다. 느티나무꽃(?) 날이 더운 탓에 조팝나무꽃이 벌써 피었다. 배꽃(?) 화살나무 꽃다지 냉이 민들레 제비꽃 진달래 개벚나무
평심루 아래 운동터 앞에 활짝 핀 벚나무
드뎌 정발산 도당굿이 열리는 장소에 도착하니 준비가 덜 된 탓인지 예정 보다 늦게 시작되었다. 정발산 도당굿의 유래는 마을 노인이 꿈에 붉은 옷을 입은 동자가 서쪽 강을 건너 정발산 쪽으로 다가 왔는데, 흰수염이 많이 난 할아버지(정발산 산신령)가 호령하여 쫓아버려다. 이때는 마을에 괴병이 만연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나 정발산 부근의사람들은 모두 무사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후로 정발산 산신령을 위하여 도당굿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부정거리에 나선 무당.
정발산 도당굿 보존위원회 이강은 위원장에게 공수하고 있는 무당 동네 주민 관객석. 원래는 장항1리, 장항 2리, 마두 1리(낙민), 마두2리(강촌), 마두 3리, 마두 4리 등 6개 마을이 함께 마을굿을 주재하였다. 주민과의 대화를 시도하는 무당. 굿은 본시 주최하는 사람과 끝임없이 대화를 나누고 공수하고 복을 비는 절을하고, 산신령과 무당과 주최인이 상호 교섭하는 마당이다. 관중의 호응이 별로 없자 무당도 흥이 나지않고 분위기도 어째 썰렁하다. 근대화 이후 굿은 종교 행사가 아니라 전통 문화로 격이 바뀌었다. 부정말명거리가 끝나고 성황거리가 시작되자 다른 무당이 옷을 갈아 입고 젯사상 앞에 나섰다.
돌아가신 어머니께서는 굿을 많이 하셨다. 거의 연례 행사로 집안에서 열렸는데, 초등학교를 다니던 나는 굿은 미신이라는 학교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어머니의 굿을 이해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남보기에 부끄러웠다. 그래서 울면서 굿판을 뒤집고 땡강을 부리던 기억이 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돈을 쥐어주시면서 나를 달래어 밖으로 내어보내셨다. 그런 어머니를 이해하게 된 것은 철이 들고도 한참을 지난 후 였다. 도당터 고목의 신을 놀게 하여주고 참석한 모든 동네 사람들에게 술과 떡을 나눠주면서 놀이마당을 벌인다. 세월이 흘러 집안에서 굿을 하기가 어렵게 되자, 가을이면 어머니는 밤샘을 하시면서 떡을 찌고 홀로 치성을 드리신 다음 동네 사람들에게 떡을 돌리게 하셨다. 주로 막내인 내가 담당하였다. 굿거리 장단은 내 귓가에 무척 친숙한 소리이다.
도당대받이. 도당 할아버지, 도당 할머니를 모셔오는 거리. 두 분은 산의 주인이며 나중에 도당나무를 찾아서 할머미, 할아버지를 같이 묶어서 모셔 놓ㅇ는다. 악사들이 밖으로 나와 날라리를 분다.
오후 6시는 되어야 예정된 굿이 모두 끝날텐데... 술과 떡, 고기만 잘 얻어먹고는 12시 반쯤 정발산을 내려왔따. 개나리가 활짝 웃으면서 배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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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nature&love 원문보기 글쓴이: 나무사랑
첫댓글 와! 엄청 긴 시간이었네요. 내 어릴 때는 굿을 참 많이 하기도 하고 보기도 했는데, 굿 자체가 당시 민중들의 한 풀이 마당이었고, 해학과 축제의 장이기도 했는데, 요즘 서양 문명에 밀려 사그라드는 것이 참 아쉽지요. 그 자체가 문화 한마당인데, 일제와 5.16을 거치면서 짓밟혔으니 그 명맥을 이어가는 굿이 많지 않아서 아쉽네요.
더군다나 문화적으로도 너무 서구화, 타자화되어서 굿과 만신을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도 굉장히 위축되고 터부시되어 있더군요. 그날 만신이 하는 말씀 "당신들만 하느님 있나요? 우리도 하느님 있어요." 어쩌면 우리의 근대사가 서양적 가치관 종교관에 일방적으로 강요되어 내재화 되왔기 때문일 겁니다. 사실이지 하느님은 인간의 마음 속에 있다고 하질 않습니까? 육신이야말로 하느님의 성전이고요....언제쯤, 만신과 판수와 승려와 신부와 목사가 동등한 인격으로 한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될까요? 권정생님께서 생전에 그런 예배당 하나 만들고 싶다던 말씀이 생각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