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풍병자와 그를 메고 온 사람들의 믿음
마가복음 2:1-12 15, 295, 287, 305
가버나움은 갈릴리 바다 해변으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예루살렘 다음으로 큰 도시로서 헤롯 왕의 별장과 왕의 신하가 거주하였으며,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와 그의 군인이 치안을 맡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에 거주하실 집을 마련하시고, 갈릴리 지방을 두루 다니시며 복음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집에 계신다는 것을 알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어설 자리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한 중풍병자가 누운 침상을 네 사람이 메고 왔지만, 무리들 때문에 예수님에게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렸습니다.(4)
중풍병은 멀정하게 잘 지내던 사람이 ‘억’하고 쓰러지는 ‘뇌졸증’으로 반심마비, 언어장애, 심각하면 식물인간이 될 수 있는 무서운 병입니다. 일찍 발견하면 의술로 어느 정도 고칠 수 있지만, 기회를 놓치면 현대 의술도 고칠 수 없는 무서운 병입니다. 중풍병에 걸리지 않도록 기도하십시오.
한쪽 팔이나 다리가 힘이 빠져 제대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은 물론 가족들에게까지도 고통스럽게 합니다. 성경은 타락과 방탕을 즐기며 오랫동안 나쁜 죄가 중풍병의 직접적인 원인이 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중풍병은 쉽게 죽지 않고 몇 년, 길게는 십 년 이상을 고생하다가 죽어야 끝이 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방에서 많은 병든 자들을 고쳐주신다는 소문을 중풍병자가 듣고 자신의 병도 고침을 받고 싶었지만 스스로 예수님에게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네 사람이 그를 도와주었습니다. 네 사람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가족이나 형제들, 아니면 친구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중풍병자가를 침상에 누운채 메고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중풍병자를 고쳐주셨다는 말씀은 구속사적으로 죄인을 구원해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중풍병은 무서운 병입니다. 그러나 중풍병 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죄입니다. 중풍병은 고침 받지 못해도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는 용서받지 못하면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습니다.
중풍병자가 예수님 앞에 나아와 고침받고 죄 사함받았던 것처럼, 죄인도 예수님 앞에 나아오면 죄 사함 받고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저주받지 않고 천국에 들어가서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누구든지 예수 앞에 나오면 죄 사함을 받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도와주지 않으면 멸망 받게 될 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을 도와주어서 멸망 받지 않토록 해 주어야 합니다.
“그들의 믿음으로 보시고”란 ‘그들은’ 중풍병자를 메고 온 네 사람과 중풍병자, 다섯 사람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신 ‘그들의 믿음’은 어떤 믿음 어떤 믿음입니까?
‘그들의 믿음’은 예수 앞에 나아가면 중풍병도 고침받을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방을 다니시며 병든자들을 고쳐주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중풍병자는 스스로 예수님에게로 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네 사람은 중풍병자를 침상에 누운 채로 메고 예수님이 계시는 집에까지 왔습니다.
찬송가 287장에 “예수 앞에 나오면 죄 사함 받으며 주의 품에 안기어 편히 쉬겠네. 우리 주만 믿으면 모두 구원얻으며 영생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 누구든지 예수 앞에 나오면 죄 사함 받고 주의 품에 안겨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그들의 믿음은 협력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중풍병자가 스스로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침상에 누인채 메고 예수님에게로 나아왔습니다.
믿음은 개인적이지만 협력하는 믿음은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백지장도 같이 들면 가볍다’는 말처럼 혼자 할 수 없는 것도 네 사람이 협력하여 중풍병자를 메고 예수님에게로 왔습니다. 네 사람의 협력이 없었다면 중풍병자는 예수 앞에 나아올 수 없습니다. 네 사람이 함께 협력하므로 중풍병자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며칠 전에 승용차가 충돌하여 뒤집여진 것을 보고 사람들이 모여 들어 그 자동차를 바로 세우고 차안에 사람을 구해주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넘어진지 불과 5분도 안되어 많은 사람들이 협력하여 차를 바로 세우고 운전자를 구해주었다고 합니다.
협력하는 믿음은 혼자서 할 수 없는 일도 해 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혼자 할 수 없는 사람을 협력해서 구원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들의 믿음’은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약2:17) 예수님께서 병든 자도 고쳐주신 다는 것을 믿어도 그들이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 나오지 않으면 그들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있어도 행함이 없기 때문에 믿음이 주는 복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음대로 행하지 않으면 그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는 죽은 믿음이 되고 맙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변명이 많습니다. 해 봐야 안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믿음으로 하려고 할 때 크고 작은 장애물이 있습니다. 장애물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이겨낼 수 있어야 합니다. 장애물을 탓하는 것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죽은 믿음입니다.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도록 길을 막은 사람들은 누굽니까? 예수님을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입니다. 중풍병자보다 먼저 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네 사람이 메고 온 중풍병자를 보았을 때 예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문앞에 모여든 무리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온 사람들입니다. 중풍병자를 보았을 때, 마땅히 자비를 베풀어 주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불쌍히 여기는 긍휼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 앞에 나아왔지만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오늘의 교회에도 예수 믿겠다고 찾아온 사람에게 길을 막는 사람이 누굽니까? 교회 밖에 사람이 아닙니다. 먼저 믿은 사람입니다. 아무개 때문에 교회에 가지 않겠다는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 그 아무개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스스로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그들의 믿음’은 장애가 있어도 포기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중풍병자와 그를 메고 온 네 사람은 포기하지 않고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렸습니다.(4) 그들은 문을 막은 무리를 보고 불평이나 원망도 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문을 막고 있는 장애를 보고 실망하고 돌아갑니다. 장애가 있어 포기하고 돌아가는 사람은 고침도 구원도 받기를 포기하는 사람이 됩니다. 천국을 버리고 지옥을 택하는 자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지붕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 지붕을 뜯고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렸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중풍병자가 누운 상(침대)을 달아 내릴 정도의 구멍은 쉽게 뜯어내는 작은 구멍이 아닙니다.
누가복음에는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렸다’고 했습니다.(눅5:19) 당시 유대인들의 집은 지붕은 흙으로 덮은 평면이었지만 기와를 덮었다고 했습니다.
어떤 다급한 일이 생겼을 때, 상상할 수 없는 능력과 비상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때가 있습니다. 그와 같이 네 사람은 지붕을 뜯고 침상을 달아 내릴 정도의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를 달아 내린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비상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풍병자를 살리고자 하는 강한 믿음과 최선의 방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중풍병자를 고치기 위해서 네 사람이 최선을 다했습니다. 사람들은 해보지도 않고 안된다고 합니다. 안되는 것부터 생각합니다. 그러나 안되는 것도 하면 상상 못했던 비상한 방법이 생깁니다.
지붕을 뜯고 구멍을 낸다는 것은 정상적이고 순리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구약 어디에도 그와 같은 일은 없습니다. 누구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도 아닙니다. 오로지 중풍병자를 고치기 위해서 그들이 생각해낸 유일무일한 방법입니다.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습니다.
지붕 아래는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런데 지붕을 뜯고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침상이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다는 것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이 하는 그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 다 아셨습니다. 지붕을 뜯었다고 책망할 수 있습니다. 지금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데 방해가 되었다고 나무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책망도, 나무라지도 않았습니다.
믿음 앞에는 그 어떤 장애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장애가 있다고 해서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은 복받을 수 없습니다. 장애물은 어디나, 누구에게 다 있습니다. 장애물이 있을 때 또 다른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럴 때 그 믿음은 기적을 일으키는 놀라운 믿음이 될 것입니다.
장애를 극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장애 앞에 믿음을 포기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장애를 보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지붕을 뜯고 구멍을 내는 것은 그들의 믿음입니다. 장애물 때문에 포기하는 것은 사탄 마귀에게 양보하는 것입니다. 저주를 받고 영원한 지옥불 속에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장애를 이기면 병도 고침 받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뿐 아니라, 죄 사함 받고 구원 얻어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습니다.
중풍병자가 예수님께 ‘불쌍히 여겨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메고 온 사람도 ‘주여 이 사람을 고쳐주소서’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내가 네게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람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5) 속죄의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께서 감동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시며 중풍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11) 중풍병자는 곧바로 그의 누웠던 침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갔습니다. 그 후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없지만, 자신을 고쳐주신 예수님께 감사하며 증거하다가 죽어 낙원에 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살려고 하지만 방해하는 크고 작은 장애물이 있습니다. 그 장애물을 보고 불평하고 누구를 탓하고 돌아서지 맙시다. 장애물을 이깁시다. 쉽게 이길 수 없을지라도 해 도전하면 길이 열립니다. 그러면 생각도 못했던 다른 방법이 생길 것입니다.
어떤 장애가 믿음을 방해해도 이겨내고 예수님 앞으로 나아갑시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던 그 말씀을 우리도 들읍시다.
그렇게도 괴롭히던 중풍병과 같은 괴로운 것들 다 고침받고 살다가 최후의 날, 주님으로부터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는 말씀을 듣고 기뻐 뛰며 천국에 들어갑시다.
고침 받은 중풍병자도 만나보고, 지붕을 뜯고 구멍으로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린 네 사람도 만나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