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사랑하면)
15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 14:15~21)
400년 동안 이집트의 노예생활로부터 탈출한(출애굽)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나이 반도의
남단에 위치한 시내 산 기슭에 도착했을 때 그들의 지도자였던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밝혀주는 율법을 공포하였습니다.
그 내용이 구약성경의 례위기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레위기 18장과 20장은
온통 근친상간을 금하는 율법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근친상간을 행하는 자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쌍방 모두를 죽이라고 엄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레위기 20장 15,16절에는
짐승과 성행위를 갖는 자 역시 그가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장본인은 물론이고 해당 짐승까지 모두 죽여 버리라는 명령이 나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400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인들이 도덕이나 윤리의식을
지니지 못한 채 짐승처럼
극도로 문란한 성생활을 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선지자 사무엘은 사무엘상 12장 3절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반문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내게 대하여 증언하라
내가 누구의 소를 빼앗았느냐 누구의 나귀를 빼앗았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누구의 손에서 받았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 하니
사무엘이 구태여 이런 말을 해야 할 까닭이 무엇겠습니까?
당시 이스라엘 지도자들 사이에 권력 남용과 뇌물 수수가 심각할 정도였기에 참된 자도자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일깨워 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궁극적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러나 일차적 대상은 언제나 그 말씀이 기록될 당시의 사람들
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때, 그 말씀이
기록될 당시의 상황이나
당시 사람들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것을 앎으로써 성경이 의도하는 깊은 의미를 포착할 수 있고,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삶 속에
그 의미를 바르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4개의 복음서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이 4복음서
중에서 요한복음이 가장 늦게
기록되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복음 이른바 공관복음이 대략 주후 60년을 전후하여 기록된 반면
요한복음은 주후 90년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시차가 약 30년이 되는 셈입니다.
주후 30년경 주님의 부활 승천을 기점으로 교회의 역사가 시작된
것을 감안한다면
주후 90년이 되기까지 교회 역사 60년 중 30년의 시차란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이처럼 큰 시차를 두고 기록된 요한복음에는 공관복음서와 다른 특징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기도에 대한 내용입니다.
초기 복음서들은 단순히 기도할 것을 강조한 데 반해 요한복음에는 기도하되 신실하고
참되신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것, 사람이 먼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의 말씀을 그 마음
속에 품은 후에 기도할 것,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기도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과 비슷한 시기에 사도 요한에 의해서 기록된 요한 1서 5장 14절은 기도에 대하여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기도 내용이 허망한 망상과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기도의 내용이 성숙해지지 않고서는 성숙한 진리의 삶은 절대로 수반되지 않습니다.
기도의 내용이 거룩해지고 신실해진 만큼만 우리의 삶이 거룩하고 신실해집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의 삶은 기도의 내용을 앞서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신실하고 참되신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것을, 진리이신
주님 안에서
기도할 것을,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것을 촉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한복음이 다른 공관복음서와 다른 또 하나는 요한복음에서는 믿음은 곧 행함임을 강조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1절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이는 예수님께서 성자 하나님 되심의 증거를 당신의 행함 속에서 찾으라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행함을 강조하신 주님께서 본문을 통하여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15절)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21절)
주님은 위 말씀 속에서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 바꿔 말해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삶이라는 것,
곧 믿음은 감정의 변화나 구호의 선언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말씀에 따른 행함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계십니다.
그래서 24절을 통해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라고 아예
단언하고 계십니다.
그뿐 아니라 요한1서는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1.2:3)
이처럼 요한 사도가 다른 복음서와 달리 믿음은 곧 행함으로 나타나는 것임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습니까?
초대교회가 시작된 이후 60여년이 경과하자 이미 그리스도인들의
믿음과 삶은 심각할 정도로
괴리되어 있었음을 뜻합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인들의 믿음과 삶이 일치하는 칭찬받는 그리스도인을 찾아보기
쉽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마지막 복음서를 기록하는 사도 요한으로서는 참 믿음이란 말씀대로
사는 것임을 거듭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 복음과 요한 1,2,3서를 기록한 지 1,900여 년이 지난 오늘 우리의 상황,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그 때와 아무런 차이가 없지 않습니까?
참되고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기도하기보다는 욕망이 요구하는 대로 내가 원하는
것만을 위해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의 말씀과는 전혀 동떨어진 삶을 사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계명을 지켜야 하고, 주님을 정말로
믿는다면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함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러나 이처럼 당연한 말씀이 새삼스러운 것은 우리가 말씀대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15절)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요 14:21)
뉴질랜드 남섬에 크라이스트 처치란 도시가 있습니다.
그 도시를 세운 사람들이 얼마나 주님을 사랑했으면 도시 이름을 아예 `그리스도의
교회’
라 붙였겠습니까?
이 도시에 그림처럼 아름다운 성당이 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일본의 젊은이들이 그 성당에서 결혼하는 유행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 성당이 아름다워 일부러 그 성당을 찾아가 신부님의
주례로 결혼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숫자가 점점 늘어나자 일본 여행 업계는 크라이스트 처치에서의 결혼과 신혼여행을 상품으로
팔기 시작했고 심지어 인근에 그들만을 위한 호텔이 세워지기까지 했습니다.
처음에는 순수한 의도에서 예배당을 빌려 주던 성당측은 되어가는 일이 본질에서 벗어나자
일본인 결혼식을 위해서는 성당을 빌려 주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자 여행업계에서는 아예 크라이스트 처지에 있는 성당 하나를 구입하고 신원을 알 수 없는
신부를 고용하여 결혼식을 주선했고 그러자 오히려 예전보다 이 상품이 더 잘 팔렸다고 합니다.
아무리 예배당을 아름답게 꾸미고 지붕 위에 십자가를 내걸었다 하더라도 일본 여행 업계가
운영하는 성당은 교회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설사 쓰러져가는 판잣집이라도 그곳은
아름다운 교회임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이 땅의 교회는 어떠합니까?
고급 예식장, 혹은 고급 사교장으로 변질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요?
복음의 본질은 무시한 채 복음의 껍질만을 기념품으로 팔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크라이스트 처치나 관광지로 전락한 서구 교회와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이런 교회는 아무리 수가 늘어나도 인간을 해치는 마약과 같을 뿐 생명의 통로가 되지
못함은 지울 수 없는 역사의 교훈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교회가 단 한 곳만 있어도 한 민족, 한
나라의 역사가 새로워 질 수
있음은 주님의 말씀대로 산 소수의 제자들에 의해 인류의 역사가 새로워진 것으로 이미
증명되었습니다.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이 땅에 아무리 많은 교회가 있을지라도 민족은 고사하고 자기의 삶
하나 변화 시킬 수 없습니다.
새로운 역사는 오직 말씀대로 사는 삶 속에서만 펼쳐집니다.
주님!
우리가 주님을 정말로 사랑하고 있음을
주님을 진정으로 믿고 있음을
우리 스스로 증명하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이 민족의 새 역사를 전개할 생명의 불씨가 되게 하여 주시길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