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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노래하는 마음
대보름이 지났다. 절기상으로 어느새 겨울과 봄이 임무 교대를 할 간절기가 점점 다가온다. 어김없이 봄은 올 것이다. 겨울은 ‘겨우 산다’고 해서 겨울이다. 봄은 무슨 뜻일까? 봄은 ‘새로 본다’고 해서 봄이다. 흐린 날 밤에 용케 떠오른 둥근 달을 바라고, 또 주위에 드믄드믄 깜박거리는 점들을 보면서 ‘별을 노래하는 마음’을 헤아린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시인 윤동주(1917-1945)가 세상을 떠난 지 꼭 80주년이 되었다는 기사를 보았기 때문이다. 윤동주 출생 100년을 앞두고 개봉한 영화 ‘동주’는 윤동주의 죽임을 생생히 그려냈다. 후쿠오카 형무소 독방에 갇힌 윤동주는 고문과 강제노역에 시달린다. 성분을 알 수 없는 주사를 강제로 주입 당한 것도 그 무렵 감옥에서였다. 일본이 저지른 국가범죄 앞에서 시인이 치룬 목숨값은 얼마나 가볍던가 싶다.
사후 3년 후인 1948년,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가 서울에서 출간되었다. 시인 정지용이 서문을 썼다. 윤동주의 시에는 낭만적이며, 동시에 비장감이 배어있다. 윤동주가 지금껏 사랑받는 이유는 공감할만한 시어와 정서 때문이다. 윤동주를 읽은 사람은 누구라도 잠시 시인이 될 뻔했을 것이다. 특히 윤동주는 유난히 별을 사랑하였다. 시에 등장하는 별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통한다. ‘별 헤는 밤’에 나오는 대목이다.
“...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윤동주의 고향은 북간도로,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외삼촌 김약연 목사가 세운 명동교회와 명동소학교를 다니며 민족의식을 품었다. 1932년, 용정의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는데 사촌 송몽규, 친구 문익환과 함께였다. 시인은 1938년부터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1941년까지 연희전문학교 핀슨관에서 생활하며 시작(詩作)을 이어갔다. 현재 연세대 핀슨관(등록문화재 제770호)은 육필 원고와 유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오늘(2.16)은 윤동주의 80주기 추모일이다. 윤동주를 기억하는 행사가 국내와 일본에서 열린다니 반갑다.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80년만에 첫 추도식을 하고, 연세대는 루스 채플에서 추모예배를 드린다. 밴드 ‘눈오는 지도’의 추모 공연은 20년째 이어오고 있다. 다음 주일(2.23)에 일본 릿쿄(⽴教)대학에서는 추모행사가, 윤동주와 정지용의 시비가 있는 교토 도시샤(同志社)대학은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한다. 일본에는 여전히 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이 있다.
윤동주는 1943년 7월 조선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된다. 쿄토에서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에 연루되었는데, 사촌 송몽규도 같은 혐의로 붙잡혔다. 윤동주의 대표작 ‘서시’(序詩)는 당시 우리 민족이 겪는 고난의 현실 속에서 자신이 겪는 아픔, 흔들리는 마음, 결심을 고백한다. 요약하면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지키려는 의지가 느껴진다. 그 마음은 윤동주의 생애 내내 순수하고, 한결같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윤동주는 자신의 처지를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추스린다. 당시 조선의 마음은 바늘 하나 꽂을 자리가 없을 만큼 핍절했지만, 시인의 품은 온 우주도 끌어안을 만큼 너르고 막막하다. 사람은 마음가짐에 따라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데, 윤동주의 마음은 별과 함께 좌절, 분노, 갈등을 넘어 이해, 공감, 내일로 나아간다.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놀라운 공간인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격언이 있는 까닭이다. 과연 윤동주는 ‘십자가’를 마음 먹은 것일까?
“...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윤동주는 우리 민족의 마음이 되었다. “마음은 영혼의 고향”이라고 한 헨리 나우웬의 말처럼 그의 십자가는 이웃에게 다가가는 심정이고, 하나님 앞에서 손을 벌려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의 자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