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소설집 리뷰
심연이 있기에 꿈도 있을지어니
──김연수, 『파도가 너의 일이라면』
오혜진
김연수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는 작가이다. 역사란 것이 과연 글자로 기록될 수 있는지,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 진실인지, 인간 사이의 관계란 것이 진실로 연결될 수 있는지, 우리는 우리를 알고나 있는지 등등 꽤나 묵직한 철학적 질문으로 독자를 뒤흔든다. 이 작가, 이 무거운 주제들을 요리조리 잘 다듬어서 그럴싸하게 포장해 내놓는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도 마니아층이 많은 작가가 김연수다. 김연수는 소설만 쓰는 작가는 아니다. 최근에 선보인 『지지 않는다는 말』(마음의 숲, 2012)에서 그 이전의 『여행할 권리』(창비, 2008), 『대책없이 해피엔딩』(씨네 21, 2010) 등 수필과 산문 등 잡문도 가리지 않고, 가끔 번역도 한다. 독자와의 만남도 열심히 가지고, 여행도 즐기고, 심지어 마라톤까지 하는 꽤나 바쁜, 요즘 대세인 ‘버라이어티’한 작가님이다. 이 바쁘신 김연수 작가의 최신작 『파도가 너의 일이라면』은 그 이전 소설들의 주제 의식의 끈을 놓치 않으면서 다소 가벼운 접근이 눈에 띤다.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창비, 2005),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문학동네, 2007), 『밤은 노래한다』(문학과 지성사, 2008) 등이 무겁고 진지하게 소설적 주제를 풀어냈다면, 최근의 『원더보이』(문학동네, 2012)에 이어 나온 이 장편소설은 여전히 김연수답지만, 보다 유연해지고 힘을 뺐다는 느낌이 강하다.
이 소설 역시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라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진실’과 얼마나 거리가 먼지, 기록된 역사와는 상관없이 우리 몸 속 안에 체화된 흔적들의 원형이야말로 우리가 알아야 할 기억이자 유전자일지 모른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입양아 카밀라의 엄마 찾기는 이 유전자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는 추적의 이야기이다. 김연수의 다른 소설에도 추리적 기법은 주요서사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다. 감춰진 진실과 흩어진 단서들, 그것을 조각조각 맞추기 위해 애쓰는 주인공들의 노력, 찾으면 찾을수록 진실과는 거리가 먼 허점투성이의 빈칸들이 이 소설 속에도 고스란히 재현된다. 하지만 김연수의 소설은 추리소설이 아니다.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수사와 번뜩이는 추론이 있다면 언제라도 숨겨진 진실은 밝혀지고 선이 승리하고 악이 패배한다는 추리소설의 단순함은 사실 지극히 낭만적이고 환상적이다. 진실이란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똑같은 사건의 목격자라도 보는 이의 시선에 따라 그 사건은 얼마든지 정의의 실현 아니면 철저한 악마의 소행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저 짧은 소설 『라쇼몽』에서 일찍부터 인간의 이러한 부조리함을 간명하게 드러내지 않았던가. 역사를 어떤 해석과 어떤 잣대로 들이미느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면, 과연 객관적 진실이나 역사란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헤쳐 나가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새롭게 역사를 만들어가는 존재가 바로 모순 가득한 인간이란 존재일 것이다. 김연수의 소설 속 인물들은 진실이라 여기는 실체에 다가가면 갈수록 계속해서 ‘미끄러진다’. 엄마를 찾아가는 카밀라의 한국행도 이런 미끄러짐의 연속이다.
자신을 키워주던 미국인 엄마의 죽음을 대하며 카밀라는 왜 자신의 이름이 카밀라인지 문득 궁금해진다. 자신의 과거에 대한 정리를 글로 써내려간 카밀라는 『너무나 사소한 기억들 : 여섯 상자 분량의 입양된 삶』이란 자전소설을 발표한다. 이 소설 안에 담긴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 세계가 우리 생각보다는 좀 더 괜찮은 곳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사진”은 아주 중요한 단서이다.
그래서 사진을 들고 이 사람들은 누구일까, 바라보는데 벼락이 치듯이 짧은 한순간,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뭉뚱그려져 눈앞에 번쩍 떠올랐다. 그 순간, 나는 내 인생의 진실을 목격했지만, 워낙 짧은 순간이라 그게 어떤 것인지 말하기는 쉽지 않았다. 내가 작가라면 평생에 걸쳐서 뭔가를 쓰더라도 그 순간 내가 목격한 진실을 모두 쓰는 날이 찾아올 것 같지는 않았다.(33쪽)
때론 아주 우연히 인생의 비의와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로 응축해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예상할 수 없다. 그저 어느 날 “벼락이 치듯이” 그렇게 와 닿는 것들, 그것이 밑도 끝도 없이 일갈하는 무엇이 어쩌면 복잡하게 살아가는 우리 생의 가장 단순하면서도 소중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뭉뚱그려”진 것인지 모른다. 학교 내 동백나무 밑에서 여전히 어린 ‘그녀’가 그보다 더 어리디 어린 ‘나’, 카밀라를 안고 있는 사진이라면 더욱 그렇지 않겠는가.
이 사진을 들고 글을 쓰는 데 큰 도움을 준 유이치와 함께 그녀는 엄마 정지은의 고향 진남에 발을 디딘다. 18세에 카밀라를 낳은 정지은. 그녀의 행적은 묘연하다. 카밀라는 지은의 여고를 찾아가 신해숙 교장을 만나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지은에 대한 궁금증만 더한다. 카밀라는 그러다 지은의 친구 김미옥을 만나 지은이 카밀라를 낳은 이듬 해 자살을 했고, 그에 더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듣는다. “나의 엄마는 정지은이고, 나의 아빠는 정재성인데, 두 사람은 남매였대.”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접한 뒤, 유이치에게 이를 고백하며 18년 전의 엄마 지은처럼 바닷속으로 뛰어든다. 겨우 살아난 카밀라는 유이치와 헤어지고 방글라데시로 향한다. 진남에서 자신을 구해준 지훈의 메일을 받고, 카밀라는 지은의 진실이 정말로 무엇인지를 찾기 위해 다시 한국행을 결심한다. 지은과 여고 수학 선생님과의 관계…. 방송으로 우연히 접하게 된 이 소식은 이어 지은의 친구들 간의 전화 통화나 메일, SNS, 트위터, 소문, 낙서 등 소위 우리가 매체라 일컬어지는 것들을 통해 전파되는 실체의 일부분들이 얼마나 진실과는 거리가 멀 수 있는지를 새삼 보여준다. 이것들이 모여 하나의 그림이 된다면 그것이 과연 제대로 된 진실 혹은 한 인간의 생애를 연속적으로 보여주는 완성된 조각그림이 되는 것인지. 카밀라는 여러 증언들과 방송, 지은의 시, 문서를 보면서 조금씩 지은을 엄마로서, 여자로서 이해해 간다.
말로 설명될 수 없는 지은의 등장은 다소 놀랍다. 카밀라의 1인칭 시점에서 시작하여, 3인칭으로 소설은 변한다. 이 시점의 변화는 미묘하다. 즉 나와 타인의 시선이 어떻게 다른지 시점의 변화를 통해 보여준다. 그리고 문제적 시점, 2인칭이 등장한다. 독자들은 카밀라의 곁을 시시각각으로 붙어 다니며 이러한 내용을 들려주는 이가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혹 바람인지, 파도인지, 알 수 없는 이 시점의 주인공은 그러나 카밀라에 대한 깊은 공감과 안타까움, 아쉬움을 듬뿍 담고 있다. 그리고 마치 연애소설처럼 광고 카피에 사용된 그 말이 등장한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었다면, 너를 기다리는 일은 나의 일이었다.
카밀라를 ‘너’로 지칭한 존재는 바로 현실에는 없는 죽은 자, 지은이다. 환상소설도 아닌 이 소설에서 유령과 같은 존재 지은의 등장은 당황스럽지만, 그럼에도 우리 몸 속에 남아있는, 나에게 유전자를 전해준 존재인 엄마이기 때문에 가능할 수도 있다고, 그래야 마땅하겠다고 우리는 고개를 끄덕인다. ‘카밀라’의 몸이 바로 지은 유전자의 흔적이자 체화인 것이다. 이보다 더 확실한 진실이자 증거는 없다고 작가는 역설한다. 비록 생후 6개월에 이 땅을 떠났지만, 몸 깊숙이 이 땅의 흔적인 남아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느닷없이 밀려드는 거친 밤바다의 높은 파고처럼 알게 된 존재, 아버지 이희재를 만나러 카밀라는 그곳, 아카이브로 향한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안과 밖이 구별되지 않은 연결고리처럼 이 소설 속 모든 인물과 사건들은 교묘하게 얽혀있다. 작가는 작품 곳곳에 툭 던지듯 이러한 암시들을 던져놓고 시치미를 뚝 뗀 후, 슬그머니 이러한 것들의 흔적들을 끄집어내면서 “저 곳의 발자국과 이곳의 창문과의 관계를 알아보라”는 선문답같은 눈짓만을 던지고 또 한발 물러선다. 아마도 김연수 소설의 마니아라면 이래서 김연수의 소설을 읽는다고 할 것이고, 김연수의 소설을 어려워서 못 읽겠다 한다면 이래서 던져버릴 것이다.
이런 능청스러움은 “부디 내가 이 소설에서 쓰지 않은 이야기를 당신이 읽을 수 있기를”이라는 작가의 말로 대변된다. 소설의 끝을 덮기 전에 다시 우리 독자들은 책을 뒤적이며 앞으로 거슬러가지 않을 수 없다. 지은의 아버지가 타워크레인에서 자살을 하던 시간으로, 화재가 났던 파업의 현장으로, 지은의 아버지와 네 명의 노동자가 파업을 했던 공장의 일로, 그 공장 회장의 일로, 그 회장의 과거사로, 과거 엘리스의 죽음이 있던 ‘양관’ 아카이브로. 이제 다시 현재의 아카이브다. 진남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곳, 이곳을 지키고 있는 이희재를 만나기 위해 이 소설은 그토록 먼길을 거슬러 왔는지 모른다. 지은과 희재의 만남과 외로움, 사랑, 이별, 그리고 자살, 희재의 기다림은 작가가 하지 않았던 이야기이고, 우리는 그것을 다시 재구성하며 이 역사를 “상상하고 복원해낸다”. 누군가를 진실되게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이야기되지 않은, 이야기할 수 없는, ‘뿌넝쉬’라면 상상하게 내버려 두는 게 어쩌면 그 이야기를 왜곡하지 않고 진실에 다가가는 일일지 모른다고 작가는 이렇게 직접 소설의 형태로써보여준다.
지은의 친구인 유진이 영화를 통해 말한 바가 바로 이 소설의 핵심일 수 있다.
“(…생략…)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심연이 존재합니다. 그 심연을 뛰어넘지 않고서는 타인의 본심에 가닿을 수 없어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날개가 필요한 것이죠. 중요한 것은 우리가 결코 이 날개를 가질 수 없다는 점입니다. 날개는 꿈과 같은 것입니다. 타인의 마음을 안다는 것 역시 그와 같아요. 꿈과 같은 일이라 네 마음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야 하나도 어렵지 않지만, 결국에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방법은 없습니다. 그럼 날개는 왜 존재하는 것인가? 그 이유를 잘 알아야만 합니다. 날개는 우리가 하늘을 날 수 있는 길은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날개가 없었다면, 하늘을 난다는 생각조차 못했을 테니까 하늘을 날 수 없다는 생각도 없었을 테지요.(274~275쪽)
인간과 인간은 결코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날개를 통해 그것이 헛되다 하더라도 날아갈 수 있겠다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포기하지 않기에 우리는 또 여기서 일어서고 앞으로 나아가고 서로의 얼굴을 보고 사랑을 하는 것이다. 지은과 희재가 그 심연을 넘어 서로를 이해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꿈’과 같은 일지만 역사가 ‘꿈’이 있기에 차곡차곡 쌓여갔듯이 그 둘의 만남과 사랑과 ‘꿈’이 존재했을 터이다. 결국 날개를 달아 날고자 했으나 추락하는 이카루스처럼 지은 역시 추락하였지만 그 꿈은 카밀라에게 이어져 이제 카밀라와 희재가 서로를 마주 본 것이다. 심연이 있지만 날개가 있기에 꿈을 꾸고 사랑을 하며 인간들은 운명의 비바람에 처절하게 쓰러져도 살아가는 것일 것이다.
조금은 충격적이고 조금은 허망한 이 소설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비밀을 알아서 모든 진실을 깨달았다 해도 그것은 마침표가 아니라 또다른 관계의 시작이라는 작가의 경고 혹은 희망같은 끝맺음은 ‘김연수’스럽다. 마른 잎이 바람에 흩날리고 쇠락해가는 가을날의 볕을 보며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새삼 깨닫지만 한편으로 그것을 극복하려는 시지푸스의 몸짓처럼 겨울을 준비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김연수의 『파도가 너의 일이라면』을 가만히 덮는다.
오혜진 / 박사학위 논문을 책으로 엮은 『1930년대 한국 추리소설 연구』와 논문 작업 틈틈이 읽었던 소설에 대한 서평 모음집 독서에세이 『소설과 수다떨기』가 있다. 현재 남서울대 교양과정부 교수로 재직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