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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의 향기 스크랩 030_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만기사
無盡藏 추천 0 조회 155 12.03.14 18:3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어제 집안 어르신이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접하고 안성의료원으로 가는 길이다. 고속도를 이용하여 내려가는데 수원쯤 오니 아예 서있다 싶이 꼼짝을 안한다. 기흥으로 나갈까 하다가 조금 움직이 길래 오산까지 갈까 하고 마음을 먹었는데 그래도 천천히나마 오산까지 내려왔다. 톨게이트를 빠져 나와 바로 육교밑에서 좌회전을 하여 안성가는 국도23번 도로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평택 엘지 공장을 지나 조금 가니 동천리에서 고속도로를 가로지르는 육교를 건너게 되는데 그곳의 밤색표지판이 눈길을 끌었다. 만기사 철조여래좌상 이라는 표지판이다. 막연하게 쓰여진 이 표지판만 보고 동네로 들어갔다.
 
작은 마을인데 움직이는 사람이 안보인다. 물어볼 곳이 없는 것이다. 마침 앞 쪽에서 순찰차가 온다. 차를 세우고 철조여래좌상의 위치를 물었더니 전근한지 얼마안되 모른다 한다. 아무래도 평지 쪽보다는 산 쪽에 있을 것 같아 큰길에서 우회전해 조금 내려가니 커다란 표지판이 밝게 보인다. 만기사 철조여래좌상(萬奇寺 鐵造如來坐像)이라 쓰여있다. 반가운 마음에 단숨에 들어갔다. 만기사입구에는 두갈래 길이 있다. 왼쪽길은 무봉산 청소년수련원 주차장이고 오른쪽으로 오르는 길은 만기사 가는 길이다. 만기사에 들어가 사찰을 둘러보고 사진도 찍기는 했지만 철제좌상은 찍질 못하였다.
 
[만기사 대웅전...]

1994년 창건, 5×3간, 외5내7포, 무고주7량가(추정), 팔작지붕, 겹처마 세 단으로 이루어진 만기사 대지의 가장 높은 단 중앙에 대웅전이 위치하고 있다. 내부에는 후벽에 의지하여 중앙에 불단을 마련하고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좌우에 문수·보현보살 모셨다. 5×3간으로 내7외5포의 다포식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불전이다. 1972년에 주지 金慧松 스님이 도리통 3간, 양통 2간의 맞배지붕으로 된 대웅전을 조영한 바 있다. 그러나 현재의 대웅전은 1994년에 기존의 대웅전이 있던 터전에 새로이 조영한 것이다. 비교적 큰 규모의 불전이며, 규모와 내부 평면 및 장엄에 있어서 조선시대의 건축양식을 따르면서도 최근의 불전 조영성향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평면은 도리통 5간, 양통 3간으로 도리통은 어간을 협간과 툇간에 비해 2배 정도에 가깝게 매우 넓게 설정하였다. 양통 역시 중앙의 간을 전후의 간에 비하여 2배에 가깝게 넓게 설정하고 있다. 내부에는 기둥을 전혀 사용하지 않아 매우 시원스러운 공간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내부에 기둥을 사용하지 않고 불단을 후면 벽에 기대어 설치하는 것은 많은 대중이 모여 예불을 들이기에 적합하도록 불단 앞 공간을 충분히 확보하려고 하는 최근의 불전 조영 성향을 반영하고 있다.

[보물 제567호. 만기사철조여래좌상(萬奇寺鐵造如來坐像)]

이사진은 문화재청 자료를 링크한 것이다. 엠파스 자료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써있다. "평택시 진위면 동천리 용주사의 말사 경기도 평택시(平澤市) 진위면(振威面) 만기사에 있는 고려시대 철불좌상. 높이 1.43m. 큼직한 나발(螺髮)에 육계가 높이 솟아 있으며, 육계 가운데에는 중앙계주가 표현되어 있다. 약간 긴 얼굴에 눈을 반쯤 뜨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고, 인중과 턱이 짧은 편이다. 불신은 어깨가 넓고 건장하며, 가슴이 발달하고 허리가 잘룩한 데다 배가 불룩하게 나와서 양감이 풍부하다.

결가부좌(結跏趺坐)한 하체는 무릎의 나비가 넓고 두꺼워 안정된 자세를 이루고 있다. 법의는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서 왼쪽 어깨부분의 옷깃을 접어 몇 줄의 굵은 대주름을 표현하였고, 왼쪽팔 전체에 평행선의 옷주름을 묘사하였다. 가슴 부근에는 세로줄이 몇 개, 무릎 부분에도 굵은 옷주름이 표현되었다. 손 모양은 오른손은 무릎에 대어 항마촉 지인(降魔觸地印)을 하였고, 왼손을 길상좌(吉祥坐)를 한 오른쪽 발 위에 대고 엄지와 장지를 맞대고 있다." 고 쓰여저 있다.

[만기사 심우당...]

[만기사 감로당, 뒤로는 공양간이...]

[경내에 노란 꽃창포가...]

[사찰 곳곳에 핀 노란창포...]

[대웅전옆에 높에자리한 삼성각(三聖閣)...]]

삼성각은 각 면 1간 팔각형, 이익공식, 겹처마, 팔모지붕 대웅전 동쪽의 한 단 높게 마련된 대지 위에 팔각형 평면의 삼성각이 있다. 칠성(七星)과 산신(山神), 그리고 독성(獨聖)을 모신 전각이다. 삼성각으로서는 드물게 팔각형 평면을 하고 있으며, 자연목의 형태를 살린 기둥과 변화 있게 꾸민 창호의 모습 등이 독특한 풍격을 자아내는 전각이다. 각 면 1간의 팔각형 평면으로 이익공식, 겹처마, 팔작지붕의 전각이다. 기단은 긴 판석을 한 단 깔아 매우 낮게 구성하였으며, 기단 윗면은 강회다짐으로 마감하였다. 초석은 항아리형으로 정성들여 조각한 원형초석이다. 기둥은 원목의 껍질만 벗겨낸 정도로 자연목의 굴곡과 옹이를 그대로 노출시켰다.
 
‘三聖閣’이라 쓴 현판이 달린 정면과 그 좌우의 간에 두 짝의 창호를 달았으며, 다시 그 바깥 쪽 각 1간, 즉 측면에는 들창을 달았고, 뒤쪽의 세 면에는 심벽의 벽을 들인 후 중방 위쪽에만 벽화를 그렸다. 창호는 매우 정성들여 조성하였다. 정면과 그 좌우의 면에는 상부에 교창을 들였으며, 그 아래 두 짝의 여닫이문을 달았다. 여닫이문은 아래에 궁창부 한 단을 두었고, 그 위는 상중하 세 단으로 나누어 상단을 교살, 하단은 띠살을 들였다. 중앙에는 방형의 울거미 속에 다시 팔각의 울거미를 돌린 속에 교살을 들이고, 모퉁이 여백에는 卍자 무늬를 베풀었다. 양 측면의 간은 중방 위에 들창을 설치했다.
 
[만기사 삼성각...]]

들창은 면을 중앙과 좌우의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중앙은 방형의 울거미 속에 다시 팔각의 울거미를 짜고 그 속에 교살의 살대를 들이고, 모퉁이 여백에는 卍자 무늬의 살대를 들였다. 이 좌우는 세로로 긴 세장한 형태로 띠살의 살대를 들였다. 여닫이문과 들창은 몇 개 부분으로 나누어 살대의 형태를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으나 같은 형태를 서로 다르게 배열하는 방법을 사용함으로서 반복에 의한 통일감을 부여했다. 내부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고, 천장은 중앙부에 팔각형으로 배열된 도리 안쪽만 우물천장을 들이고 그 주변은 추녀와 선자서까래를 그대로 노출시켰다.
 
후면과 그 좌우 벽에 의지해 壇을 조성하고 칠성탱을 중심으로 좌우에 산신탱과 독성탱을 봉안하였다. 모두 합성수지를 이용해 찍어낸 것으로 畵記가 있어 불기 2545년, 즉 2001년 12월 7일에 조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탱화 위에는 허주가 매달린 운궁형의 닫집을 설치했다. 삼성각은 불화의 조성연도와 같은 해에 현 주지인 圓鏡스님이 옛 삼성각을 헐어낸 위에 새로 조영하였다.
 
[대웅전 문살의 문양...]

[대웅전 문살의 문양...]

[대웅전 문살의 문양...]

[대웅전 문살의 문양...]

[대웅전 문살의 문양...]

[대웅전 문살의 문양...]

[만기사 명부전...]

명부전은 3×2간, 변형식 공포(무출목 다포식) + 상투걸이, 맞배지붕, 무고주5량가 명부전은 만기사의 가장 위쪽 대지, 대웅전의 서쪽에 남향으로 위치하고 있다. 대웅전에 비해 약간 뒤쪽으로 후퇴시켜 배치하여 전각들 사이의 위계를 표현하고 있다. 내부에는 지장보살상을 중심으로 무독귀왕과 도명존자를 비롯하여 시왕과 그 권속들의 조상(彫像)을 모셔놓고 있다. 평면은 도리통 3간, 양통 2간으로 도리통 어간을 협간에 비해 약간 넓게 설정하였다. 내부는 통간(通間)으로 구성하였다.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평면과 지붕 형식은 가장 일반적인 명부전의 모습을 따르고 있다. 다만 기둥 상부의 구조는 정면과 후면에 차이를 두었다. 정면에는 주간에도 공포를 배열했다는 점에서 다포식이라 할 수 있으나 출목이 없기 때문에 변형된 형식이라 할 수 있다.
 
후면은 기둥이 바로 보를 받도록 하였는데 기둥 위에 촉을 두어 보와 결구하는 소위‘상투걸이’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가구는 무고주 5량가이다. 기단은 장대석을 한 단 쌓아 만든 외벌대로 매우 낮게 조성하였으며, 그 윗면에는 긴 화강석 판석을 깔아 마감했다. 초석은 운두가 높은 원형의 초석을 사용했으며, 그 위에 원기둥을 세웠다. 기둥에서 특이한 점은 측면과 후면의 기둥은 외부가 원형인데 반해 내부에서 본 모습은 방형이라는 점이다. 창호는 정면 모든 간에 4분합문을 달았고, 양 측면에는 전면 쪽으로 출입을 위한 외여닫이문을 달았다. 창호의 형식은 모두 동일한데, 아래에 청판을 낀 한 단의 궁창을 들였으며, 그 위는 교살을 들였다.

[만기사 신도님들의 정성과 기도가 담긴...]

[기와에 기른 불심이 아름답고...]

[담장위 새로만든 석조물에서 흰물이 많이 내려와...]

[정겨운 돌담이 눈길을 끌고...]

[커다란 고목과 잘 어울리는듯...]

[이곳 돌담 위에도 하얀 물이 들어 보기싫어...]

[만기사 범종루각...]

범종루각은 3×2간, 이익공식, 겹처마, 팔작지붕, 무고주5량가, 연등천장 - 주차장으로 이용되고 있는 만기사의 가장 아래 단 대지의 북쪽 끝에 종루가 있다. 건물 안에는 범종과 목어, 운판을 걸어 놓았다. 누각형으로 평면은 도리통 3간, 양통 2간의 평면이며, 이익공식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무고주 5량가로 종도리는 굴도리임에도 장여를 사용하지 않았다. 종도리 아래 면에 묵서로 '龍 戊辰二月二十四日 巳時上樑 願以此功德 皆共成佛道 佛紀二五三二 虎'라는 상량문이 씌어져 있어 1988년에 조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직은 공사중이라 어수선한 경내...]

"경기도 평택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 사찰 만기사(萬奇寺)의 주지 원경(圓鏡) 스님(62·속명은 박병삼). 고려시대 철불(鐵佛)과 약수를 비롯해 ‘만가지 기이한 것’이 있다는 ‘만기사’에서 원경 스님이야말로 가장 기이하다면 기이한 대상이다.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에서 첫 손가락으로 꼽히는 박헌영(1900~1956)이 그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남한에서는 ‘빨갱이’, 북한에서는 ‘종파분자’로 불렸던 아버지 박헌영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한 일에 몰두해 있다. 바로 ‘박헌영 전집’(모두 9권)을 펴내는 일이다. 지난 92년 이래 지금까지 10여 년간 전집 발간을 위한 자료 수집·정리는 물론 마무리 색인 작업까지 모두 마쳐 디스켓에 담아 놓았다.
 
전집엔 '세계와 조선' 등 박헌영의 저서와 논문을 발굴해 수록한 것을 비롯, 공판기록.인터뷰, 그리고 러시아와 북한의 자료 등이 모두 포함된다. 이와 함께 박헌영이 소련 망명 후 28년부터 32년까지 4년간 국제 레닌학교를 다니면서 기록한 학습 노트도 찾아내 수록했다. '마르크스주의 철학 강좌'를 수강하며 영어로 기록한 이 노트의 원본은 러시아에 사는 박헌영의 딸 박 비비안나(1928~ )가 기증한 것이다. 자료를 수집하고 해제를 쓰는 데 모두 1백20명의 근현대사 연구자들이 동원됐다. 작업에 들어간 비용은 모두 원경 스님이 댔다. 선뜻 나서는 출판사가 없어 출간 이 미뤄지는 가운데,
 
[사찰에서 내려오는 길목...]

이 작업에 함께 참여한 임경석(45.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 박사가 자신이 '박헌영 전집'에서 맡은 연보(年譜) 만을 묶어 최근 '박헌영의 생애-박헌영 연보 1900~1956'(여강출판사)이란 이름으로 펴냈다. 원경 스님의 양해를 얻어 별도로 먼저 출간된 이 책은 '박헌영 전집'아홉 권 가운데에도 한 권으로 실릴 예정이다. '박헌영의 생애'는 시기별 사건을 단순히 나열만한 책이 아니라, 매 시기의 행적마다 그에 대한 근거 자료를 제시하며 해설한 연구서라고 할 수 있다. 임박사는 "구 소련의 코민테른 자료를 포함해 지금까지 박헌영에 대해 구할 수 있는 자료는 거의 모두 참고했다"
 
면서 "코민테른 자료를 통해 해방 직후 남한에서 박헌영이 조선공산당 대표 자격으로 미군정 사령관인 하지 중장과 여러차례 만나 당시의 시국을 논의한 사실 등은 새롭게 공개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소설가 심훈과 경기고 동창이기도 한 박헌영은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이후 상해로 망명해 사회주의 그룹에 가담했다. 심훈이 남긴 시 '박군의 얼굴'의 주인공 박군이 바로 박헌영이다. 그는 해방 직후 재건한 조선공산당의 당수를 지냈고, 46년 월북후 김일성의 정치적 라이벌로 맞서다가 6.25전쟁 후 '미국의 스파이''공화국 전복을 위한 정변 음모'혐의를 받고 56년 처형당했다. 이번에 공개되는 기록을 보면, 미군정청의 시책에 조선공산당이 협력해 줄것을 당부하는 하지 중장에게 박헌영은 여러차례 다음과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다.
 
[만기사입구에 커다랗게 서있는 무봉산 등산로 안내판...]

"한국의 해방이 미국을 포함한 연합국의 원조에 의해 달성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미군정청과 긴밀한 우호협력을 지향한다"면서 "군정청 사업에 활용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친일파나 민족 반역자들이 많다. 이같은 상황에서 무조건 지지만 할 수는 없다 "는 것이다. 원경 스님은 박헌영과 그의 둘째부인 정순년 사이에서 41년에 태어났다. 그가 불문에 귀의한 것은 10살 때인 50년. 고아가 돼 배를 곯고 있던 그를, 아버지의 측근이었던 한산(寒山) 스님이 데리고 다니게 되면서 결국 그도 머리를 깎았다. 한산 스님은 동경제대를 졸업하고 사회주의에 경도되었다가 스님이 된 사람으로, 원경 스님에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전해주며 돌봐 주다가 1968년 이후 소식이 끊겼다고 한다.
 
[무봉산 청소년수련원 입구...]

사찰의 접근로가 좀 아리송했던 이곳 그러나 무봉산 등산로의 입구이기도 하고 청소년 수련원의 입구이기도 한 이곳은 그리 높지 않은 산속에 자리잡은 만기사를 보며 등산을 하기엔 아주 좋은 곳이 기도하다. 최근에 중건한 사찰로는 느낌이 의왕시 청계사를 떠올리게 해주는 그런 맛이 있으며, 일주문이 없는 것이 이색스럽다. 아마도 몇 년이 지나 다시 찾으면 그때는 일주문과 천왕문이 들어서 있을 것 같다. 석축이 아름다운 절들이 많다. 아마도 이곳도 그중의 하나로 자리잡을 날이 올지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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