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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하게 하는 자(마 5:9)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갈등과 분열, 투쟁과 전쟁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길거리에 나와, 많은 사람들이 아무리 평화를 외치고, 평화 유지를 위하여, 완전 무장한 평화유지군을 파견하고, 그렇게 애쓰고, 힘쓰고, 노력할지라도, 세상에는 갈등과 투쟁, 그리고, 전쟁은 멈추지 않고, 계속될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설령 안다고 하여도, 안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역사학자는 “지구상에는 25년을 주기로 해서, 큰 전쟁들이 일어났다”라고 말했습니다. 지금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 뿐만 아니라, 민족간에, 종교간에 내전 등으로, 고통당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가장 흔한 인사말은 “안녕하세요”라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참으로 비극적인 말이라고 합니다. 전쟁을 하도 많이 겪다 보니, “간밤에 죽지 않고, 지금 살아 있습니까?”라는 그런 말이라고 합니다.
어릴 적, 동네에서, 어른들을 만나면, “진지 잡수셨습니까?”라는 인사말을 많이 했는데, 이 말은 “식사나 제대로 하셨습니까?”라는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 인사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만나면, “샬롬”이라고 인사를 합니다. 히브리어의 “샬롬”이라는 말은 전쟁이나 병, 기근이나 재난이 없는 소극적 평화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할 때에 찾아오는 기쁨과 축복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 안에서, 평안하십니까?”라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참된 평안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평안하십시오. 샬롬!
“화평”이라는 말은 “화목”, “평강”, “평안”, “평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클레이는 “화평이란 완전하고, 모자람이 없는 행복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완전하고, 모자람이 없는 행복이야말로, 누구나 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누구나, 한 시간만, 단 하루만이 아니라, 영원토록, 완전하고, 모자람이 전혀 없는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원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안에서, 완전하고, 모자람이 전혀 없는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시 29:11)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 14:33)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화평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화평의 하나님께서는 매순간마다, 우리에게 평강의 복을 풍성하게 내려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사 9:6)라고 말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예수님은 이 땅에 평강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강을, 우리에게 화평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14-16)라고 말했습니다.
평강의 왕으로, 우리에게 화평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의 보혈을 통하여, 제일 먼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평강의 왕으로 오셔서,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님께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릴 때, 그것이야말로, 참된 평안입니다. 그런 평안을 날마다 누리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열두 제자를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살아계셨을 때,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한 줄기 빛이요, 한 줄기 소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로마 군인들에게 붙잡혀 끌려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한 줄기 소망이 물거품처럼 무너져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제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한 자리에 모여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문을 굳게 잠그고, 삶에 대한 깊은 좌절과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숨을 죽이며 숨어 있던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두려움과 놀라움에 사로잡혀 있던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이 던진 첫마디가 무엇입니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
절망과 좌절 속에 사로잡혀,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주신 첫 번째 메시지는 “평강”이었습니다. 무섭고 두려워,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주신 선물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참된 평화였습니다.
바로 그날, 제자들은 생애 최고의 평안을 경험하며, 잃어버렸던 삶의 용기와 소망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잃었던 소망을 찾게 됩니다. 캄캄한 어둠이 걷히게 됩니다. 아마도 그들의 마음에는 이런 아름다운 노래가 흘러나왔을 것입니다.
찬송가 412장 1절입니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 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흘러나와 내 영혼을 고이 싸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평안과 행복을 원합니다. 어쩌면, 매순간마다, 평안과 행복을 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참된 평안을 경험하지 못한 채,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참된 평화는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참된 평화는 죽음의 권세, 무덤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평안이나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화를 경험했습니다. 그날 이후, 제자들은 비로소 평화의 사도가 되어,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주신 평화를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9절 말씀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정말 복 있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복 있는 사람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평화를 경험하고,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평화를 경험한 제자들은 이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 않는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들이 만나는 사람들이 제아무리 큰 부자라 할지라도, 조금도 그들이 부럽지 않았습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큰 권세를 가지고, 자신의 생명을 빼앗아 갈 수 있을지라도, 그들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값진 보배이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화평을 경험한 사람”이 아니라, “화평하게 하는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팔복의 말씀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화평을 경험한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고, 참된 평안을 맛본 사람이 분명히 복 있는 사람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늘의 복을 이미 받은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면,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되고, 하나님의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화평하게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화목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한 걸음 더 나아가, 화평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보혈을 통하여, 화평과 참된 행복을 경험하였는데,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화평을 경험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아니되고, 아직 화평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화평을 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52:7절을 보면,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라고 말했습니다.
화평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고, 화평을 만들어가는 사람이 가장 복 있는 사람입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 아니라, 평화를 만들어가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거리에 나가, “평화를 만들자”라고 목 터지라 외친다 할지라도, 실제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평화를 만들어가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프란체스코는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는 평화의 도구로 쓰임 받는 사람이 정말로 복된 사람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갈등과 분쟁을 일으키는 사람이 아니라,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다툼과 분쟁을 몰고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조용하다가도, 그 사람만 들어가면, 분쟁과 싸움이 일어납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만 괴롭히는 사람이 아니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힘들게 하고, 괴롭히는 정말 나쁜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8)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분쟁과 다툼과 갈등을 몰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화평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과 화평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자주 일어나고, 가장 큰 전쟁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과의 전쟁’이라는 것을 앞서간 믿음의 사람들의 경험이요, 고백이었습니다.
초대교회의 교부였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자신의 영혼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전쟁을 진정시키는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어거스틴도 “자기 마음의 동요를 가라앉히고, 복종시키는 사람, 자기의 육체적 욕망들을 길들이는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중적인 성격을 설명할 때, 선한 천사가 사람의 오른편에 서서, 선한 일을 하도록 하며, 또, 악한 천사가 사람의 왼편에 서서, 악한 일을 하도록 자극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합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이 둘 사이의 끊임없는 전쟁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 내적 전쟁에 대해,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9)라고, 그의 괴로움을 고백했습니다.
어느 날은 성자가 되었다가도, 어느 날은 악마가 되기도 합니다. 내 안에서, 이런 갈등이 계속되는 한, 화평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내 마음 안에 들어오실 때, 이 내적 전쟁을 끝낼 수 있습니다. 그래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내 마음속에 들어와 사실 때,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심각한 내적 전쟁은 끝이 나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영혼과 인격을 다스리는 평화의 왕이 되어 주실 때, 내적 전쟁은 끝나는 것입니다. 행복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그 마음 안에 계셔서, 자기 자신과의 전쟁을 끝낸 사람들은 이웃과 화평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교부였던 터툴리안은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보라.”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화평을 경험하고, 화평을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화평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고후 5:18)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잘 수행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첫째, 겸손해야 합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고독하고, 외롭습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갑니다. 교만하면, 시기와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교만하면, 사람들과 자꾸 싸우고 다툽니다. 그래서, 화평이 깨어지게 됩니다. 늘 싸우는 사람을 살펴보면 지식이나 재산, 그런 외적인 문제이기보다는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가정과 교회와 사회 속에서 교만한 사람은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일이 있을 때마다, 늘 싸우고, 다툽니다.
평생 소리 지르고, 화내고, 혈기 부리고, 싸우고, 다투다가,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얼마나 어리석고 불행한 일이겠습니까?
교만은 화평은 깨고, 불행을 부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속에 뿌리 박고 있는 교만을 뿌리 뽑아 버려야 합니다.
교만은 서로를 불행하게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야 합니다. 높아지고 인정받으려는 마음을 버리고, 낮아지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겸손한 사람을 싫어하고, 미워할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찾으시고, 그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야 합니다.
둘째,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싸웁니다. 때리든지 맞든지, 늘 싸우며 살아갑니다. 평안할 날이 하루도 없습니다. 욕심이 많으면, 늘 피곤합니다. 만족함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괴롭게 합니다.
욕심은 모든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욕심을 채울 수 있는 무엇도 세상에는 없습니다. 하나님도 욕심쟁이를 만족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욕심은 죄를 낳고,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욕심 때문에, 결국은 죽게 됩니다. 욕심은 사람으로 하여금, 평생 더, 더, 더…하다가, 결국은 죽게 만듭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죽으면, 얼마나 허망하겠습니까?
욕심을 버릴 때, 비로소 만족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복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셋째, 감사해야 합니다.
사람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불평이나 불만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여과 없이 발산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이 자기를 다스리지 못하면, 세상에 그 사람의 말을 들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불평과 불만은 우리 마음에 평화를 잃게 합니다. 매사에 부정적이고, 다른 사람 잘되는 모양을 보면, 질투심이 나고, 그래서, 심한 좌절감에 빠지고, 패배감이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마음의 평화도 없거니와, 자기 주변의 평화도 깨뜨리기 때문입니다.
원망과 불평이 나올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일지라도, 하나님의 사람들은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감사가 있는 곳에, 마음의 평화가 있고, 사랑이 있고,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만과 욕심을 버리고, 항상 감사하며,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서 화목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러분! “화평하게 하는 사람”들이 받을 복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되리라” “하나님의 딸이 되리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리라”
얼마나 감격스러운 복입니까? 들으면 들을수록, 너무나도 감격스러운 말입니다.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주변 사람들이, “너는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야, 예수 믿는 사람답다.”라고 한다면, 그런 말을 들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복된 삶입니까?
지금껏 그리 살지 못했다 할지라도, 이제부터라도, 교만과 욕심을 버리고, 항상 감사하며, 더욱더 하나님의 자녀답게,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화평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교만과 욕심을 버리고, 항상 감사하며,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화평의 삶을 살아감으로, 사람들과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을 받으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에게 크신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
교만과 욕심의 삶이 아니라, 겸손과 만족함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원망과 불평의 삶이 아니라, 감사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갈등과 분쟁을 만드는 삶이 아니라, 화평하게 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함으로,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잘 감당하기를 원합니다.
주여, 우리를 평화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