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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7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대림절 첫째 주일)
순례자의 기다림
사2:1~5; 롬13:11~14; 마24:36~44
다시 기다림의 절기인 대림절이 돌아왔습니다. 대림은 “오시기를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대림은 우리에게 오시기로 하신 분이 나타나시기를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림절에 기다림의 의미로 촛불을 켭니다. 대림절 양초는 진한 보라색에서 차츰 밝은 색으로, 그리고 마침내 흰색으로 바뀝니다. 그 의미는 우리의 기다림이 점점 우리 가까이 다가오시는 그리스도의 빛으로 바뀌어 간다는 것을 뜻입니다. 기다림이 그리스도의 빛으로 바뀌어 가는 것, 이것은 우리의 전체 삶을 요약하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이번 대림절에 우리는 내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왜 기다리고 있는지, 어떻게 기다리고 있는지, 우리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들을 좀더 깊이 들여다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무엇을 기다리는가가 그 사람의 삶의 질을 결정합니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고, 돈을 기다리고, 더 나은 삶을 기다리고, 행복을 기다리고, 심지어 죽음을 기다립니다. 이 기다림에 따라 우리의 삶의 질이 결정됩니다. 왜 기다리는가가 그 사람의 삶의 의미를 드러냅니다. 그 동기가 중요하지요. 또 어떻게 기다리는가가 그 사람의 삶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막연한 기대로 기다릴 수도 있고 설렘과 희망 가운데 기다릴 수도 있으며, 깨어 있어 기다릴 수도 있고, 손 놓고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교독한 시편 말씀, 시편122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시편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주님의 집으로 올라가자 할 때에 나는 기뻤다. 예루살렘아, 나의 발이 네 성문 안에 들어서 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메마르고 복잡한 삶에서 새로운 삶을 원하며 순례의 길을 떠나기로 마음먹습니다. 정신이 바싹 들고 설렙니다. 기쁩니다. 그러나 막상 떠난 순례의 길은 멀기만 하고 험하기 그지없습니다. 옷은 다 헤지고 허기에 지칩니다. 오랜 고된 시간이 지난 후에 마침내 순례의 끝인 예루살렘 성문 안에 들어섰습니다. “예루살렘아, 나의 발이 네 성문 안에 들어서 있다.” 순례자는 한 없이 기뻐합니다. 기다림의 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성지순례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어디일까요? 단지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물리적인 장소일까요? 그가 진정 순례의 길을 잘 마쳤다면, 그 순례의 길을 통해, 그가 도착한 곳은 고되고 험한 그 순례의 여정을 통해 새로 깨닫고 새롭게 만들어진 그 자신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례 여정은 기다림의 과정이며 변화의 과정인데, 그것은 자신의 삶의 변화입니다. 자신의 시선의 변화이고, 자신의 의식의 변화이고, 자신의 품이 달라진 것입니다. 티벳 사람들이 오체투지를 하면서 라싸의 사원들로 순례의 길을 떠나는 영상을 보신 적이 있지요? 그들이 도착한 곳은 어디이던가요? 단지 라싸의 사원일까요? 이것이 순례의 참된 의미일 것입니다.
성경은 기다림의 책이고 교회는 기다리는 공동체입니다. 다시 말하면, 순례의 책이고 순례의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가 처음부터 믿음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고향 우르를 떠나면서 평생을 기다림으로 살다보니, 그는 어느 순간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약속은 후손을 주시겠다는 약속과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는 그의 평생이 걸렸습니다. 아니, 그로부터 몇 백 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그가 받은 것은 고작 백세에 낳은 아들 하나와 헤브론이라는 작은 오아시스뿐이었습니다. 적어도 그의 약속은 다윗 시대에나 가야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그때나 가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이 생겼고, 에시온 게벨에서 하맛까지 팔레스틴 땅을 온전히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지요.
아브라함 자신은 자신의 안전한 고향을 떠나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가야 했으며, 매 순간 사나운 외적 위험과 끊임없이 올라오는 내면의 의심과 싸워야 했습니다. 이것이 순례자의 씨름입니다. 그 당대에 그가 경험한 것은 기다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헛된 약속이 아니라는 것, 그러나 자신이 생각하고 예상한 대로 그 약속이 실현되지는 않는다는 것, 그래서 자신이 알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야 한다는 것, 그럼으로써 자신의 삶도 새롭게 만들어져 가고 있다는 것. 이 모든 것이 기다림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결국 믿음의 사람이 되고, 희망의 사람이 됩니다. 자신은 아들을 바랐고 거주할 좋은 땅을 바랐을지 모르지만, 기다림을 통해 결국 이루어진 것은 그 자신의 깊은 믿음이었습니다. 자신의 삶이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든든한 반석 위에 놓여 있다는 깊은 믿음이었지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기다리고 또 기다립니다. 그래서 홍해를 넘고 광야를 지나, 또 수많은 장애를 넘어 가나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들은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가나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약속의 땅이란 마지막 도착지, 영원한 소유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기다림은 계속됩니다. 결국 그들은 메시야까지 기다리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린 메시야는 그리스도로 우리에게 오셨지요. 우리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또 무엇을 바라고 있습니까? 정말 문자적으로 재림 예수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우리에게 다시 나타나는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이 땅에서 소위 잘 먹고 잘 사는 부자가 되는 걸까요?
구약 예언서에 보면, “그날이 오면~” 이라는 구절이 많이 등장합니다. 이 말은 구약 예언자들의 공식구가 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많이 기다렸으면, 그들은 매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외칩니다. “그날이 오면, 주님께서 돋게 하신 싹이 아름다워지고 영화롭게 될 것이며...” “그날이 오면 너희는 이렇게 찬송할 것이다” “그날이 오면 큰 나팔 소리가 울릴 것이니...”
오늘 구약 이사야의 본문도, “마지막 때에, 주님의 성전이 서 있는 산이 모든 산 가운데서 으뜸가는 산이 될 것이며...”라고 시작합니다. “마지막 때에” 라는 말은 “그날이 오면”의 일종의 변이 형태입니다. 이러한 변이 형태는 여럿이 있습니다. “그날에” 혹은 “그때에” 등입니다.
오늘 이사야는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일들에 대해 묘사합니다. 모든 민족들이 주님의 성전으로 모이고, 모든 백성들은 ‘주님의 성전으로 올라가자’라고 말할 것이라고 합니다. 거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마지막 날에 주님은 민족의 분쟁과 갈등을 끝내시고, 그래서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라고,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않을 것이고,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기다림은 결국 평화의 왕으로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오늘 이 말씀들을 문자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지요. 이 말씀의 역사적 배경이 있고 이 말씀이 나온 상황이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이 말씀 속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마지막 때, 즉 하나님의 때, 다시 말해, 카이로스의 시간에 이루어질 삶의 질을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우리도 기다리고, 우리 안에서도 이루어질 삶이지요.
이런 기다림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손 놓고 막연하게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쁘게 서둘러 뭔가를 해내려고 애쓰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깨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기다림 속에서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이 자랄 수 있도록 깨어 있어, 지금 여기에 계시는 하나님과 만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도 새로운 기다림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면서 살게 됩니다. 복음서에 보면, 주님은 다시 오실 것이니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 많이 등장합니다. 또 바울의 서신들과 다른 공동서신에 보면, 재림의 그리스도를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다리라는 말씀들이 곳곳에 등장합니다. 결국 정신을 차리고 깨어서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은 초대 교회 공동체의 기본적인 삶의 자세였습니다. 이 초대 교회 공동체에게 기다림은 깨어있는 것과 동의어였습니다. 이들은 이 깨어있음을 통해 세상의 염려와 걱정에서 떠나 자신들의 삶을 좀더 온전하고 든든한 반석 위에 올려 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 안에 이루어진 것이 바로 믿음, 희망, 사랑이라는 향주삼덕입니다.
우리는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절에 “깨어있으라”는 주님의 권고를 다시 듣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너희는 너희 주님께서 어느 날에 오실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보면, 메시야를 기다렸던 구약의 믿음의 선조들처럼, 우리도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삶을 살고 있고, 그래서 깨어있음으로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여러분들이 공관복음서를 읽으면,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라는 말씀이 어디에 나오냐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주간 중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종말의 때에 관한 말씀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에 집중되어 나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24장과 25장이 바로 종말에 관한 말씀입니다. 마지막 때가 올 것인데, 그날과 그 시는 아무도 모르니, 깨어있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다음 26장부터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제부터 예수님의 부재가 실재하는 시간입니다.
기다림은 아직 이루어진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어둠의 시간이고 결핍의 시간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목표점에 도달한 시간이 아니라 과정 중에 있는 시간이며, 그래서 나그네의 시간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출발은 했으되 도착하지는 못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출발했기 때문에 기다림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다림은 그래서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는 시간입니다. 이미 길에 들어섰지만, 아직 “그곳”에는 이르지 못한 때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우리의 자리는 바로 여기입니다. 우리는, 이미 믿음의 여정에 들어섰지만 그 끝은 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계신 성전을 향해 출발했지만, 아직 그 성전에는 다 이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가르치시는 말씀을 받았지만, 그러나 그 가르치시는 길을 그대로 따라가지는 못합니다. 아직 우리 사이에는 분쟁과 갈등이 폭발하고 있습니다. 아직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기에는 믿음이 너무 없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기에는 사랑이 너무 적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다시 말씀드리지만, 순례 여정의 종착점은 순례 끝에 우리가 도착해야 할 그곳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곳에 도착하는 우리는 고된 순례의 여정을 통해 순례의 의미를 깨우친, 새롭게 자신을 발견한 우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다리는 목표와 그리로 가는 과정이 모두 중요합니다. 그런 모든 과정 중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깨어있음 입니다. 우리는 기다려야 하며 동시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마태복음의 말씀에 보면, 그날과 그 시는 아무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고... 그러니 깨어있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예를 들지요. 홍수 이전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며 지냈다. 그러나 홍수가 나서 그들 모두가 휩쓸려 갔지만 그들은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만은 방주에 들어갔습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며 지냈던 것을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느라고 방주도 준비하지 못했고 홍수도 대비하지 못했다고 책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노아도 먹고 마시고, 자식들 장가보내고 시집보내고 하지 않았겠어요? 문제는 그런 일상의 삶은 누구나 다 해야 하는 일이지만, 그런 중에 깨어있느냐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인자가 올 때, 두 사람이 밭을 갈고 있을 터인데,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데려가고, 버려두고” 하는 말은 마지막 때에, 어떤 사람은 주님께서 하늘로 올려 데려가시고, 어떤 사람은 내버려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은 구원을 받는 것이고 한 사람은 멸망 가운데 있는 것이지요. 종말의 때에 사람들이 구원받고 심판받는 것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또 두 여자가 맷돌을 돌리고 있는데,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둡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을 해보십시오. 똑같이 직장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한 사람은 하늘로 올라가고 한 사람은 남겨집니다. 똑같이 운동장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데, 한 사람은 하늘로 올라가고 한 사람은 남겨집니다. 아주 친한 둘이서 산책을 하고 있는데, 한 사람은 하늘로 올라가고 한 사람은 남겨집니다. 뭔가 SF 영화의 한 장면 같지 않습니까? 이것은 실제적인 사실을 말하기 보다는, 깊은 진리를 표현하는 상상력이 넘치는 장면입니다.
두 사람이 밭에서 일을 하고, 맷돌을 갈고 있습니다. 일 하는 모습을 보면 똑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둘은 갈라집니다. 무엇으로 갈립니까? 깨어있음입니다. 똑같은 일상의 삶을 살고 있지만, 깨어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엄청난 차이를 보입니다. 그날은 언제 올지 모릅니다. 어떻게 올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날이 왔을 때, 그들에게 일어난 일은 천양지차입니다.
그럼 깨어있으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순례자들이 기다림 속에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나아가듯, 오체투지로 지금 여기를 만나면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나아가듯, 지금 여기를 온전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는 일을 성실하고 묵묵히 해낸다는 뜻입니다. 아무 것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아도, 그 약속을 믿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어있음을 침묵 가운데서 기다리는 것이요, 어둠 속에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진정한 믿음, 진정한 희망, 진정한 사랑을 키워나가게 됩니다.
이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바라라는 것이 얼마나 불안하고 힘든 일인가요?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향해 나아가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게 들리는가요? 그러나 우리의 삶은 그러는 중에 온전하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이며 그분의 영광을 함께 누릴 상속자라는 믿음,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믿음, 우리가 비록 사방으로 우겨 싸임을 당할지라도 주님의 손 안에 있다는 희망, 우리가 믿는 약속은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 하나님과 나 자신과 이 세상에 대한 고마움, 조금 다른 말로 하면, 생명과 존재의 신성함에 대한 경외감, 생명과 존재에 대한 고마움, 생명과 존재의 그 원천을 생생하게 인식하는 것, 모든 것 안에 실재하는 하나님(Reality)에 대한 깨달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삶이 너무 허하기 때문에, 그것을 채우라고 우리 삶을 탐욕으로 몰고 가는 수많은 것들을 직시합시다. 우리 삶이 너무 가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보상하라고 끝없는 매달리는 자신의 모습을 직시합시다. 자신의 삶이 너무나 허약해보여서, 무언가 힘을 가지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그 약함을 직시합시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보이지 않게 붙잡고 계시는 주님의 자비의 손길을 기억합시다. 이것이 깨어있음입니다.
이런 깨어있음은 우리의 머리에서만 일어나는 작용이 아니라, 우리의 몸, 마음, 정신, 영혼 전체에서 일어나는 작용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런 주님의 자비를 기억합시다. 기도하면서 마음 안으로 주님의 자비를 받아들입시다. 침묵하면서 우리 영혼의 참 원천 안으로 들어갑시다. 하루에 한번이라도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의 현존과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활동에 동의하면서, 아멘 하는 마음으로 침묵 가운데 있어 봅시다. 그 침묵의 시간은 그냥 나를 하나님 앞에 맡겨드리는 시간입니다. 내가 어찌하는 시간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어찌하는 시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 하나님, 우리에게 다시 대림절을 주셨습니다. 이 기다림의 시기, 온전히 깨어 기다릴 수 있는 순례자의 마음, 순례자의 발걸음을 갖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