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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6;1-10. 그리스도의법을 성취하는 이것. 2023, 8. 27.
바람은 필요합니다. 바람은 시원하기도 하고 열매를 맺게 하고 열매를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람은 태풍과 허리케인 같은 바람도 있습니다. 이 바람은 비와 함께 폭풍우를 몰고 옵니다. 이렇게 바람은 유익하기도 합니다만 엄청난 피해를 주기도합니다. 그런데 바람이 이런 문자적인 의미만 있습니까? 여러 가지의 의미와 뜻이 바람이라는 단어 속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바람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마가복음 4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일행이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 갈릴리 호수에서 배를 타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바람과 풍랑이 일어나 배를 덮쳤습니다. 예수님이 타신 배가 좌초될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배 밑 바닦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제자들은 배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써봤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할 수 없이 잠드신 예수님을 다급하게 깨웠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주님은 바다를 향해 ‘고요하고 잠잠하라’고 하시자 바람이 그치고 물결이 잠잠해졌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바람’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아네모스’(anemos)는 풍조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마가는 갈릴리 호수에서 제자들이 경험했던 풍랑 사건을 통해 단순히 기적을 행하시는 주님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상입니다. 당시의 사회가 직면하고 있던 위기가 무엇인지 또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를 제시했습니다. 여러분, 그런 바람이나 풍조에 맞설 수 있는 내적 힘이 없었기 때문에 제자 공동체라는 배는 파선의 위험을 겪었습니다. 마가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은 바람 같은 위기입니다. 그런데 바람을 잠잠하게 하신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꾸짖으셨습니다. 우리가 타고 있는 교회 공동체라는 배와 가정 공동체와 사업 공동체라는 배가 세속주의의 풍조에 밀려 좌초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돌아봐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이런 풍조들은 다 믿음 없음으로 인하여 생겨난 것이라고 합니다. 현재도 이런 삶이 된다면 예수님으로부터 믿음 없음의 꾸짖음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세상 풍조를 이겨내고 공동체 안팎으로부터 오는 도전을 물리치는 힘은 어디서 나올까요? 오직 믿음입니다. 하와이 섬의 화재 사건에 대한 뉴스입니다. 100여명의 사망자와 실종된 사람이 1000 여명이 넘습니다. 그 섬의 주택과 상가가 헤아릴 수 없도록 화재로 손실이 되었는데 그 중에 80퍼센트가 주택의 손실입니다. 얼마나 낙심이 될까요? 헤아리기도 어렵습니다. 검게 그을리고 소실된 부분들이 너무나 처참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투기꾼들이 대거 몰려들어서 헐값으로 그 땅을 구입하려고 합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수많은 영혼들을 삼킨 화재와 바다를 보면서 수영을 즐긴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은 미국을 비롯한 나토와 러시아를 추종하는 몇 나라의 연합된 나라들의 싸움이 되었습니다. 어제인가요? 미국의 캠프데이비드에서 韓, 日, 美, 연합 동맹이 결성되었습니다. 왜요? 北, 中, 러시아의 연합에 맞추어서 안보와 경제와 화합이라는 명제 때문입니다. 미국은 바빠요. 전 세계의 평화와 안전을 위하여 이런 수고를 한다고 하는데 누가 그런 권력을 주었습니까? 안전과 평화와 평안이요? 미국 내의 안전과 평화와 평안을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무엇을 한다고 합니까? 수신제가가 안되는데 어떻게 치국평천하가 됩니까? 이런 사건과 사고는 욕망의 충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도록 만든 경제 중심사회와 소비사회와 패권정치와 이기적인 욕망이 빚은 참극입니다. 소비사회는 모든 나라와 사람을 경제력에 따라 평가를 합니다. 소유한 것으로 세상의 가치를 삼습니다. 그래서 패권과 경제력이 없는 나라와 사람은 무시당하고 하찮은 존재로 여깁니다. 이런 풍토가 바꾸지 않는 한 이런 유사한 사고는 앞으로 세계 곳곳에서 계속적으로 일어납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인이 세상에 내 몰리고 있습니다. 세상의 풍토에서 가치를 찾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런 뉴스를 접하면서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하나님은 이런 세상에 대하여 안타까워하시고, 분노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이 무시를 당하고 수단으로 내몰리는 것은 곧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도 무시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 곧 우상을 섬기는 세상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여러분, 진정한 경건의 모습을 갖추기 쉬운 곳이 어디일까요? 찰스 라일리라는 사람은 대중 앞이라고 했습니다. 반대로 가장 어려운 곳은 가정 공동체이고 삶의 공동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성경을 인용하거나 기도를 하며 자신을 영적으로 보이도록 포장할 수 있습니다. 대중은 드러난 모습만 볼 수 있기 때문에 실제 삶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가정은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게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지 드러나게 되는 공간입니다. 부모와 배우자와 자녀들에게 나의 삶이 모두 공개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 안에서 비추어지는 내 자신의 모습이 진정한 영적인 삶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진정한 영적인 삶은 대중이 아닌 가정 안에서의 내면적인 행동과 태도에서 나타납니다. 대중 앞에서 보이는 허상보다 가정에서의 영적인 삶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선을 이룰 수 있을까요?
1. 살아가는 삶의 법칙에 불변의 법칙이 있습니다. 항상 그렇습니다. 절대로 변하지 않는 법칙이 있습니다. 황금 율입니다. 그런데 이 법칙을 세우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현실을 보면서 개탄하고 비판하고 미래가 없다고 판단할 일이 아니라, 이런 사건을 통해서 성경의 황금률 같은 가르침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 66권 전체의 말씀이다 중요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크게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것은 구원입니다. 우리가 왜 구원을 받아야 하며, 어떻게 구원을 받을 것이며, 구원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도 기본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런 다음에 주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어떤 모습으로 살 것인가를 배우게 되는데 신약의 경우 두 가지 황금률을 말씀합니다. 하나는 마7:12에 나오는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대접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심는 대로 거둔다는 법칙입니다. 이 두 가지 황금 율은 어느 세대이든지, 누구이든지 적용이 되는, 절대 변하지 않는 법칙, 황금 율 입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이 말씀의 적용은 참으로 쉬운 말씀입니다. 적용을 하는데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는 말씀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씀입니다. 남을 사랑하면 자기도 사랑 받고, 남을 비판하면 자기도 비판받는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심으면 기도한 만큼 응답 받게 되고, 믿음과 정성을 드리면 자기 본인도 거기에 상응하는 복을 받습니다. 이것은 남녀노소와 있고 없음이 아니고, 배우고 안 배우고, 젊은 사람과 노인,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법칙, 황금 율을 잊고 삽니다. 심지도 않고 거두려고 하고, 조금 심고서 많은 것을 거두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6;7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 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 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다른 말로 표현을 하면 하나님은 만만하게 인간에게 속임을 당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누구든지 예외 없이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악으로 심고, 거짓으로 심고, 육체로 심으면, 심는 데로 거둡니다. 쓴 뿌리와 엉겅퀴가 나옵니다. 여러분, 죄송합니다만 지금 만약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다면 한번 신앙 안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어려움 중에는 하나님이 훈련시키려고 일부러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어려움 중에는 본인이 알지 못하는 것을 경험하고 새로운 것에 적용하며 살게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어려움이 일어날 이유가 없는 그런 어려움과 고통이 있습니다. 이런 것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기도하면서 기다리면,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하나님의 때와 크로노스의 때가 되면 해결이 되고 풀려집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라면, 그 어려움은 자기 본인이 심은 결과가 상당 부분 해당이 됩니다. 물론 그 것도 시간이 지나면 주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그 결과는 뒤집어 지는데 오늘은 그 말씀을 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자성어 중에 자업자득(自業自得)이란 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저지른 일의 결과는 자기가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다시 한 번,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심고, 열매를 얻어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8절.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이 말씀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아주 단정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를 믿고 그분을 사랑해라. 그러면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다 선물로 주실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사랑할 것이냐?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귀중한 것이 있으니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자기 육체를 위해서 먹고 모으고 누려보면 그 모든 것은 육체에 열매를 맺게 됩니다. 건강해지고, 부자가 되고, 편하게 삽니다. 그러나 이것 이상, 더 놀라운 것은 없다는 말씀입니다. 마음의 평안을 얻고, 행복한 삶을 살고,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나라를 얻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고 나는 주님의 백성이 되는 그런 것은 기대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은 무슨 말씀일까요? 성령은 조직신학적으로 하나님의 다른 이름입니다. 특별히 지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성령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을 위하여 심는다는 말씀은 하나님이 원하시고 하나님께서 뜻하시고,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일을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뿌린 대로 거둔다는 이 법칙은 자연히 몇 가지 질문에 연결이 됩니다. 그 것이 무엇일까요?
1-1. 그러면 심는 대로 거두는 황금 율에서 무엇을 위하여 심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위하여 심어야 할까요? 현재세상 속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면서 무엇을 위하여 심었습니까? 왜 세상이 떠들썩합니까? 진심으로 무엇을 위하여 심어야 하는 것을 몰랐습니다. 아니 알았지만 그렇게 심지를 않았습니다. 심는 데로 거둔다는 불변의 법칙을 잊었습니다. 그들은 육체를 위하여 심었습니다. 그래서 육체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위하여 심어야 할까요? 바로 성령을 위하여 심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무엇을 심는가? 라는 질문보다는 누구를 위하여 심는가? 그런 말씀입니다. 여러분, 사실 누구를 위하여 심는가? 여기에 따라서 무엇을 심는가가 결정됩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다고 하면서 나쁜 것을 심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를 위하여 라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인류의 비극이 바로 이 문제에 대한 잘못된 생각 때문에 시작이 됐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아주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그 가운데서 가장 귀한 것이 생각할 수 있는 힘과 의지의 자유, 그러니까? 자유의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생각할 수 있는 힘, 자유의지는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한 의지의 자유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이것을 어떻게 사용합니까? 사람을 위한 자유로 사용을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하여 이것을 사용했습니다. 하나님과 같아지기 위해서 자유의지를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자유의지의 사용이 에덴동산을 상실하는 비극이 되었습니다. 쓴 뿌리와 엉겅키 입니다. 여러분, 답은 간단합니다. 성령을 위하여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영생입니다. 나를 위하여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낙원상실, 실낙원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가 위하여 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엘리제를 위하여, 황제를 위하여, 건배할 때도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위하여! 하고 소리를 칩니다. 러시아와 미국과 세계의 패권 국가들이 자기를 위하여 사용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하나님을 위하여, 성령을 위하여, 주님을 위하여, 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께서 자기 일에 충실 하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 마시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만 갖고는 부족합니다. 이웃에게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것이 귀찮은 일 같고, 손해나는 일 같지만, 그렇게 할 때 결국 여러분의 삶은 훨씬 더 풍요롭게 됩니다. 심어야 열매가 있습니다. 심어야 하는데, 모든 관계와 일에 대하여 심는 핵심은 주께 하듯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그 하는 일로 판단하지 않으시듯 우리도 다른 사람을 그 하는 일로 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을 대하고 자녀들과 아랫사람을 대할 때, 다 주께 하듯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계십니다.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땀과 기도로 심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공동체에서 거둘 것이 있습니다. 심는 모습이 있어야 됩니다. 귀찮고 힘들어도 하나님은 심기를 원하십니다. 작은 헌신 하나하나 모두가 하나님을 위하여 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데, 어떤 복이냐 하면, 심을 것을 더 풍성하게 주십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은 비와 눈을 주시고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고후9:10,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풍성하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많이 심는 자에게 심을 것을 더 풍성하게 주십니다. 우리는 심되, 육체를 위하여 심지만 이보다 더욱 성령과 하나님과 주를 위하여 심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을 심을까요? 신실하고, 정직한 것을 심고, 속임 없이 심고, 특별히 말씀대로 심어야합니다. 가치관이 안 맞아도 말씀하시는 것으로 심고, 세상의 이치가 아니어도 말씀으로 심어야 하는데 그렇게 행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2. 어떻게 심어야 합니까? 언제까지 심어야 합니까? 심은 것을 거둘 때까지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런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심는 작업은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이것인데, 이 것은 선입니다. 선은 양의 모습입니다. 주님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선을 행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9절,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좀 참고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심기는 제대로 심었는데도 거둘 것 같지 않은 날들이 계속됩니다. 자녀들을 양육할 때도 지금만 보면 낙심 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빌 게이츠도 하버드를 다니다가 집에 틀어 박혀 컴퓨터만 가지고 씨름을 했습니다. 부모님의 속이 얼마나 타겠어요? 그런데 그가 세계를 움직였습니다. 워싱톤 주립대학에 가면 그 대학 가까운 곳에 빌 게이츠의 동네가 있고 그 대학 안에 빌 게이츠의 연구관이 있고 기념관이 있습니다. 낙심하지 않고, 때가 되면 반드시 거두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요셉을 잘 압니다. 요셉을 통해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이 무엇입니까? 요셉이 어느 날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을 꿉니다. 그 꿈 이야기 때문에 형들이 앙심을 품고 요셉을 팔아 버립니다. 애굽으로 팔려가서 보디발의 집에서 엄청난 고생을 합니다. 10년 동안 고생을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하고, 거절했더니 감옥에 가게 됩니다. 10년 동안 열심히 심은 결과가 감옥입니다. 그 감옥에서도 열심히 심었습니다. 꿈을 해석해줘서 복직을 시켜준 사람도 있었는데 그에게는 소식도 없습니다. 마음 써주고 해몽해 준 결과는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감옥에서 2년을 더 있게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바로 왕의 꿈을 해몽하고 총리로 발탁이 됩니다. 그때까지 몇 년이 걸렸지요? 거둘 때까지 무려 십 삼년이 이상이 걸렸습니다. 그 사이에 무엇을 심었을까요?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을 심고, 기도를 심고, 정직을 심고, 성실을 심고, 경험을 심고, 알지 못하는 것을 심었습니다. 그런데 그 열매가 실력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실력으로 애굽을 통치했습니다. 뿌리고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면서도 또 뿌려야 합니다. 어느 순간 열매를 거두기 시작하면, 하나님이 거두게 하신 열매는 감당을 할 수 없을 만큼 30배, 60배 100배가 됩니다. 그때까지 낙심하지 말고, 참고 기다리면 하나님은 반드시 열매를 거두게 하십니다. 때가 되니까, 그 심은 노력 때문에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은 눈에 안 보이고, 손에 잡히지 않더라도 열심히 심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거둘 날이 있는 그때까지 심고 또 심는 그 일을 계속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그러면 무엇을 심어야 합니까? 오늘 본문은 몇 가지를 제시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관계에서 심어야 합니다. 여러분, 신앙과 믿음은 삶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신앙과 삶이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삶에서 주어지는 관계와 일에서 반면교사 삼고 그것을 나의 삶 가운데 적용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씀합니까?
2-1. 1절에 사람에게 있어서 무슨 범죄 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앙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입니다. 시각과 관계입니다. 범죄 함이 드러나고, 잘못 된 것이 보이면 그 것을 바로잡고, 그 되어 진 일을 보면서 자신을 돌아보라고 합니다. 보는 시각과 관계입니다, 이 것이 중요합니다. 바로잡고라는 단어는 가르치고 올바르게 라는 뜻 속에 용서와 사랑이 포함 되어 있습니다. 사랑으로 바로 잡고, 용서로 바로 잡는 것입니다. 가르치고 꾸짖고 대가를 요구한다고 변화되지 않고, 바로 잡히지 않습니다. 이 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선입니다. 오네시모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네시모는 원래가 골로새 사람으로 빌레몬 집안의 종으로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 오네시모는 그 주인에게 범죄하여 로마로 도망갔다가 그곳에서 또 어떤 좋지 않은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고, 그 감방에서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오네시모는 바울을 만난 후 완전히 새롭게 변화를 받아 지난날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알고 있는 오네시모가 아니라 새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이 편지에서 알려줍니다. 오네시모는 그가 회개한 후에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전의 삶이 아무리 천하고 악하다 할지라도 그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면 그러한 사실은 그들의 영적 관계에 있어서 하등의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같은 특권에 참여하며, 같은 존경을 받을 권리가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롬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갈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 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차별이 없고 하나입니다. 오네시모는 바울의 수족 같은 일꾼이 되어 골로새 교인들에게 오히려 자랑할 수 있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처처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고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기에 답이 있고,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선이 있습니다. 바르게 해야 하지만 용서하고 용납하고 그리고 자신을 살피는 것입니다.
2-2. 3-5절 자랑할 것이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 된 줄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선줄로 생각하고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랑은 자기에게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살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자랑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을 해야 합니다. 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예수 그리스도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 내는 진리는 십자가의 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율법을 지켜서 도덕적 생활이 깨끗하고 아름답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십자가의 진리를 분명하게 깨닫고, 십자가를 튼튼히 붙잡아야만 죄 사함을 받고 산다는 진리를 깨닫습니다. 그러면 매사에 감사와 감격 속에 십자가의 복음을 힘 있게 증거하며 십자가만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빌립보3장에서 바울은 십자가만을 자랑한다고 하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자신에 대해서는 죽었다는 말이고 세상에 대해서도 죽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무엇이든지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겼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여러분, 자랑은 자신 대하여 한정이 됩니다. 여러분, 세상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자랑하다 보니까? top 뉴스가 되었습니다.
2-3. 가르침을 받는 사람과 가르치는 사람과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를 해야 하는가? 6절. 이 말씀의 앞뒤 문맥을 보면, 앞에 5절까지는 성도로서 져야 될 짐에 대해서 말씀을 합니다. 서로 짐을 나누어지라고 하면서, 각각 자기 짐을 성실하게 지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6절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성도와 목사의 관계입니다. 스승과 제자입니다. 가장과 구성원입니다. 앞 선자와 나중 된 사람입니다. 사장과 종업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목회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시고,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첫째는 하나님의 명령이고 둘째는 그렇게 하면 저와 여러분께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교회와 공동체가 풍성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와 빛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한국교회 성도님들은 목사님들께 지나치게 잘하는 부분이 있고, 목사님들도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지금의 한국 교회를 어렵게 했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오늘 말씀을 말씀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렵고 아프고 좋은 것이 있으면 같이 나누고 아울러 마음도 좀 나누어야 합니다. 저 역시 좋은 것 있으면 여러분과 나누겠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교인은 두 종류가 있는데, 목사를 위해 기도하는 교인과 목사로 하여금 기도케 하는 교인이랍니다. 여러분 모두가 목사를 위해 기도하시는 교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이것, 선이 됩니다. 이 것 역시 심은 대로 거두게 됩니다.
누구를 위하여 심을까요? 하나님을 위하여 심고 자신을 위하여 심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심어야 할까요? 낙심치 말고, 참고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때가 이를 때까지 심어야 합니다. 그리고 얼마나, 어떻게 심어야 하겠습니까? 가능한 한 많이 심고, 말씀대로 정성을 다하여 심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거두게 됩니다. 거둘 때는 심은 것만 거두는 것이 아닙니다. 삼십 배, 60배 100배입니다, 하나가 천을 이루고, 둘이 만을 이루는 복입니다. 여러분, 로고스와 레마를 아십니까? 다시 말하면 로고스의 말씀과 레마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로고스 말씀은 내속에 들어오는 말씀이고 배우는 말씀이고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레마의 말씀은 내속에 들어와 나와 싸워 나의 육신의 생각들과 옛 사람이 죽고 영의 생각으로 나오는 말씀이고, 내가 깨달은 말씀을 전하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모두를 살리는 말씀은 레마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먼저 사모하지 않고, 찾지 않고, 두드리지 않고, 구하지 않고, 깊이 공부하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도 없습니다. 나를 죽이지도 못하고, 깨달을 수 도 없습니다. 귀로만 듣고 신앙생활과 사역을 하면 보지도 못하고, 만지지도 못하고 뜬구름으로 신앙생활과 사역을 감당하게 됩니다. 말씀이 그렇지 않은가?를 깊은 생각하지 않으면, 말씀의 내용에 있어서 궁금한 것이 없으면 듣기만 하게 됩니다. 질문도 하지 않습니다. 욥은 듣기만 했습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궁금한 것이 없었습니다. 물어 볼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욥기가 끝나는 욥42;5-6,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눈으로 뵙는 그래서 다시 나오는 말씀이 레마의 말씀으로 고백을 하고 질문을 했습니다. 욥42;2-4.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입니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이제는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여러분, 이 전에는 몰랐으나 이제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압니다. 그 계획을 확실하게 이루실 것을 믿는데 지금까지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렸습니다. 그 무지한 말은 깨닫지도 못한 말이었고, 스스로 알 수도 없는 말이었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말씀을 드리오니 하나님은 들으시고, 이제 묻겠으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이러면서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이전의 로고스의 말씀만을, 알고 있던 말씀만을, 객관적인 말씀만을 자기 속에 간직했던 사실을 회개를 했습니다. 왜요? 그래야 살고 그렇지 아니하면 적용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려움과 고민과 낙심만이 남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욥은 모든 것을 수용하고 그리고 말씀이 가르친 대로 살게 되는데 결론이 어떻게 납니까? 42;10-15,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이전에 알던 이들이 다 와서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케쉬타 하나씩과 금 고리 하나씩을 주었더라.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 하였으니, 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그들의 오라비들처럼 기업을 주었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덕이 있는 사람은 양심의 소리를 듣고, 지혜로운 사람은 부모의 말을 들으며,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합니다. 육체를 위해 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 심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 됨 같이 평생의 모든 일이 형통하고 강건하게 되는 복을 위하여 말씀대로 열심히 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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