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지 않는 갈매기
김 상 립
오래 전에 L.A에 갔을 때, 부근 바닷가에 횟집들이 모여 성업을 이루고 있는 곳이 있다 해서 양식에 지친 입 맛도 돋우고 구경도 할 겸 해서 일행을 따라 나섰다. 그 곳에는 규모가 제법 큰 횟집들이 바다에 바짝 붙어 있거나 일부는 바다 위에 지어진 것도 있었지만, 인공적인 통로로 죽 이어져 한 개 조그마한 타운을 이루고 있었다. 많은 미국인들도 회를 맛있게 먹고 있었고 나와 같은 여행객도 상당수 눈에 띄었다. 기왕이면 물위에서 먹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있어, 우리는 바다 쪽으로 가장 멀리 나아간 집을 택했다. 주문한 회가 나오고 막 입에 넣으려는 찰라 뭔가 후다닥 하는 소리와 함께 큰 그림자가 다가왔다. 얼마나 놀랐던지 얼른 몸을 숙이자, 안내자가 웃으면서 ‘갈매기니 놀라지 마십시오. 여기는 이런 곳입니다. 이제 여러 놈이 올 것이고 손님들은 갈매기와 더불어 회를 먹는 셈이지요’ 하면서 젓가락으로 회를 집더니 난간으로 던져준다. 순간 번개같이 받아 먹는 동작이 너무나 빨라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몇 마리의 갈매기가 또 날아왔고 일행은 회를 먹는 둥 마는 둥, 손을 길게 뻗으면 잡힐만한 거리에 앉은 그 놈들에게 회를 던져주기 바빴다. 놈들은 서로 먹겠다고 부리를 부딪치고, 날개를 흔들고 고함을 꽥꽥 지르기도 했지만 큰 소란을 피우지는 않았다. 마치 잘 훈련된 쇼 무대의 동물처럼, 관중이 재미와 흥미를 느껴 돈을 지불할 수준까지만 먹이 싸움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찬찬히 그들을 살펴 보았다. 아마 횟집 동네가 생기자마자 이 곳에 자리를 잡고 손님들이 던져주는 먹이에 익숙해진 갈매기들의 후손 같았다. 놈들은 보통의 그것들보다 체구가 훨씬 커 보였다. 잘 먹어서인지 배 둘레도 만만찮고 날카로워야 할 노란 부리도 색이 많이 바래지고 둥글 넙적하게 변형되어 던져주는 횟감을 손 쉽게 받아 먹을 수 있게 진화된 것처럼 보였다. 바다를 닮아 맑고 푸를 줄 알았던 눈동자도 손님들 눈치를 살피느라 계속 굴려댄 탓이지 제법 충혈된 상태다.
게으름과 식탐이 온 몸에 가득 찬 그 놈들은 더 이상 갈매기가 아니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놈들은 이미 나는 것을 스스로 포기한, 가축같이 길러지는 동물이었다. 우리 접시에 담긴 회가 거의 바닥을 보이자 용하게도 알아채고, 옆 쪽 난간으로 재빨리 몰려갔다. 나는 씁쓸한 마음을 안고 그 자리를 떠났다. 시내로 돌아 오는 길. 그날 따라 왜 그렇게 살찐 여자들만 보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드럼통만한 몸을 뒤뚱거리며 힘들게 걸어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자꾸 난간에서 본 갈매기들이 떠 올라 심난하기까지 했다. 사람이건 짐승이건 무릇 생명을 가진 것이라면 모두가 비슷한 구석은 지녔으리라. 예하면 사람이 너무 비만해지면 여러 가지 질병에 쉽게 노출되듯이 갈매기도 살이 많이 찌면 나는 일이 어려워질 게고, 이런 태생(胎生)의 기능을 잃게 되면 자연히 그 수명도 단축되지 않겠는가?
오랜만에 찾아 간 부산의 대변항(港)은 바다가 마치 호수와 같이 조용했다. 멸치 축제로 이름난 이곳은 방파제로 세 겹이나 둘러쳐져 있기 때문에 왠 만한 바람에도 내항(內港)은 아무 영향을 입지 않는 듯 했다. 부두 바로 앞, 바다 위에 둥글고 하얀 스티로폼 부표가 여기 저기에 떠 있는 게 보였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부표 위에는 새가 한 마리씩만 앉아 있었다. 내 눈이 익숙해지자 그것이 갈매기라는 것을 쉽게 알아 보았지만, 새는 조각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하 그렇구나, 놈들은 멸치 잡이 배가 항구로 들어 올 때를 기다리고 있구나. 잠시 후면 선창가에서 영차 영차 하는 구령소리와 함께 어부들이 그물을 털어내면 생선은 사방으로 퉁겨져 나갈 것이고, 놈들은 격렬한 몸싸움을 해가며 정신 없이 먹어댈 것이다. 누구라도 가까이 접근하기만 하면 기어이 바다에 빠뜨리고 말 태세로 버티고 서 있는 모양을 보니, 도저히 공생이나 양보라는 개념은 찾을 수가 없을 것 같다.
문득 둥근 테두리 안에서 필사적으로 상대를 밀어 내어 승리를 쟁취하는 일본의 스모 경기가 떠 올랐다. 정해진 원안에서 상대를 밖으로 몰아내야 하니 우선은 몸이 무거워야 할 터. 스모 선수들은 기술의 연마보다도 최대한 많이 먹고 잠을 푹 자서 체중을 불리는 게 급선무라니 어째 그 직업 자체가 많이 짠한 마음이 들게 한다. 비록 그들에게 부와 명예, 갈채가 따른다 해도 주어진 천명(天命)을 억지로 줄여가며 살아야 하는 생활 방식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부표 위의 갈매기도 욕심껏 먹어 치운 탓으로 살이 찔 대로 찐 것 같다. 더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 보아야 할 바다 새들이 부두를 어슬렁거리는 텃새가 된 꼴이다. 설령 그들이 날고 싶다 해도 지금의 몸으로는 멀리 날 수도 없을 것이다. 바람과 파도를 안전하게 막아주는 방파제 안의 잔잔한 바다에서 버려진 생선만 주워 먹어도 배가 부르니 애써 움직일 필요가 없었던 까닭이리라. 멀고 먼 L.A 바닷가 횟집에서 본 갈매기와 이 놈들은 너무나 흡사하다. 아, 인간들이 추구하는 편의제일주의와 물질지상주의가 지어낸 비극이 날 짐승에까지 이르렀구나.
먼 바다의 갈매기들은 하늘 높이 날아 올라 유유히 공중을 선회하다가 물고기 떼가 보이면 쏜살같이 내려 꽂혀 사냥을 한다. 어부들은 그런 바다 새를 보고 그물을 쳤고, 그 잽싼 몸 놀림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며 함께 만선의 꿈을 꾸었다. 그것이 갈매기의 타고난 이미지다. 그러나 이제 한 낱 텃새가 되어버린 그것들은 더 이상 비상(飛上)을 하지 않을 것이다. 멀리 나는 것을 잊어버린 새에게 구 만리 창공을 누비는 꿈이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꿈이 없는 생명체는 살아 있어도 산 것이 아닐 터. 갈매기에게도 비상의 꿈이 있어야 비로소 이상(理想)의 나라로 갈 수가 있을 것이다.
끝없는 욕망을 좇아 사는, 남의 것까지 빼앗아 먹어도 성에 차지 않는 사람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 권력의 그물에서 떨어져 나오는 부스러기 하나라도 줍기 위해 체면 불구하고 서로 싸운다. 어쩌다 좋은 자리에 앉았다 하면 ‘옳다구나’ 여기고, 그 자리에서 밀려 내려오지 않을 심산으로 열심히 체중을 불리고 있다. 만약에 그런 사람들이 이기적인 욕심에 계속 짓눌려 의당 지녀야 할 인간 본성마저 잃어 버리게 된다면, 오늘 본 갈매기들과 무엇이 크게 다르랴. 돌아보면 나 자신도 별로 나을 것도 없는 처지라 갑자기 생각이 많아 진다. 나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내 뱃살을 감추고 싶은 마음에 양복 자락을 가만히 앞으로 당겼다가 바로 놓아 보았다.
첫댓글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다들 먹는 데 너무 아등바등 하는 것 같다. 날짐승만 그런 게 아니라 사람도 매한가지다. 비만으로 뛰뚱거리는 아이들을 보면 안쓰럽다. 음식점에 가 보면 먹다 남은 것들을 다시 손질해서 상을 차려도 새로운 한상의 음식이 될 수 있다. 지나친 낭비이자 호사라 해도 좋을 성싶다. 먹지 못해서 배곺아 울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도 지난날의 아픔을 가슴에 새기지 못한다. 일본에 가보면 깨닫게 된다. 그들의 음식상은 지나치게 간소하고 인색하다. 식사가 끝나고 나면 빈 그릇만 남는다. 배울 점이 많다. 모든 게 지나친 욕심 때문에 빚어지는 비극이라고나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