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전자레인지.hwp
<전자레인지 앞에서> / 서태수
전자레인지 회전판이 빙글빙글 돌아간다. 꽁꽁 언 곰국 덩어리를 안고 흥얼흥얼 잘도 돈다. 흐릿한 조명발에 소음 같은 전자음악. 곰국이 살살 녹아 은근한 맛을 내면 이 맛 저 맛 어울려 한 세상 한 끼 식사 금상첨화 아니더냐. 물레방아도 아닌 것이 실시리시르렁 실시리시르렁, 시름의 한세상을 흥겨이 돌아간다.
안고 돈다는 것은 스탭과 호흡의 완벽한 일치. 그렇지. 세상은 저렇게 이심전심으로 돌고 돌아야 홍야홍야 녹아내리는 것이려니. 음식이든 사람이든 단단하게 굳은 것들은 맞손 잡고 어울려 돌고 도는 가운데 발효醱酵되고 숙성熟成되어 삭기도 하고 익기도 하는 것 아니랴.
나는 지금 응급 싱글족. 오늘도 나의 저녁은 돌고 돌리는 해동 식단解凍食單이다. 아내는 냉동 먹거리를 켜켜이 쌓아놓고 며느리 회복구완을 떠났다. 떠나면서 알뜰살뜰 자상히 일러주었다. 냉동국은 미리 꺼내어 녹인 다음 도자기 그릇에 옮겨 담아 3분 정도 데우라고. 일회용 비닐그릇 해동은 몸에 해롭단다. 그런데 여태 한 번도 그리 못했다. 전기매트에 드러누운 채 배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글을 쓰거나 졸다 보면 밥때는 항상 한발 놓친 시각이라 정석대로 할 여유가 없다.
냉동 곰국과의 첫 대면은 쌍방 치열한 칼부림이었다. 일회용 비닐그릇에 담긴 얼음덩이 정도야 싶어 처음엔 가볍게 건드렸다. 옆구리를 이리저리 툭툭 쳐서 엎었다. 어르고 달래며 엉덩이를 톡, 치면 쏙! 하고 홀랑 벗어 알몸을 보여줄 줄 알았는데 아, 이 여자 한 고집 있데. 요지부동! 첫 대면이라 수줍어 그랬던가. 헤픈 여자가 아님을 직감하고는 주먹으로 내리쳐도 분리 불가의 일심동체다. 통치의 최후 수단은 완력이렸다. 결국은 칼, 가위를 찾아 비닐그릇을 찢기 시작했다. 온갖 용을 다 써서 질긴 비닐을 갈기갈기 찢었다. 이놈도 질세라 허연 얼음 핏가루를 흘리면서 영악한 저항이다. 내가 칼로 자른 비닐 끝을 뾰족이 세워 내 손바닥을 향해 앙탈을 부린다. 주먹만 한 엉덩이에 손톱같이 걸친 속옷까지 가로세로 다 찢고 나서야 알몸덩어리를 도자기 그릇에 담을 수 있었다.
이 겨울, 땀방울을 훔치며 돋보기를 끼고는 전자레인지 시간 버튼을 찾는다. 이 단순한 기기에 무슨 놈의 버튼이 열 개가 넘는다. 그냥 ‘시간, 작동, 스톱’ 버튼 세 개면 될 것을 이리도 복잡하다 . ‘기술자들이 별별 메뉴를 덧보태어 신제품으로 팔아먹는다.’던 공학도 아들녀석 말이 생각난다. 3분을 데웠다. 지조 곧은 이 여자, 부릅뜬 눈알만 뭉개졌을 뿐 얼굴 형상은 여전히 완고한 고집덩어리로 버티고 있다. 다시 1분, 그리고 다시 2분…. 그러다 며칠 후, 문학강의 중에 이 얘기를 들은 여성회원께서 비닐그릇을 엎어 수돗물을 흘리면 냉큼 빠진데나. 그러고 나서 그릇에 옮겨 6분을 데우라고 일러준다. 사람이든 얼음이든 옷 벗기기는 역시 칼바람보다는 햇볕이 효과적이라. 이솝우화를 잊고 있었다니. 자고로 머리가 나쁘면 수족이 고생이라더니, 쌓인 경험은 훈장이렷다.
가끔 전쟁은 치르지만 전자레인지는 정말 고마운 기기器機다. 나는 따뜻한 음식을 좋아한다. 생선구이나 조리 음식이 식어버리면 내 수저는 말없이 다른 반찬으로 향한다. 자취 생활 15년에도 밥과 국은 데워 먹었다.
전자레인지 회전판은 어느덧 흐물흐물해진 곰국 덩어리를 안고 돌아간다. 국그릇 속에 근엄한 안방마님 같은 앉음새의 얼음덩이가 서서히 무너지더니 유리에 김이 서린다. 이어 조선솥 그 무거운 뚜껑을 밀어 올리고 코끝에 스며오는 구수함! 저절로 눈이 감기며 아련한 세월을 거슬러 온갖 추억의 냄새들이 왁자지껄 몰려온다. 돌려서 익히는 게 어디 한두 가지더냐. 국화빵도 돌리고 솜사탕도 돌리고 뻥튀기 기계도 돌린다. 돌리는 게 어디 음식뿐이랴. 바람개비도 돌리고, 상모도 돌리고, 고스톱 화투짝도 돌린다. 잘못은 남 탓으로 돌리고 영광은 내 덕으로 돌리고…. ‘돌리고 돌리다 보면 좋은날 꽃피는 날도 돌아올거야’라는 대중가요도 있거늘.
도는 건 또 힘이 되고 균형도 된다. 회오리도 돌고돌아 상승하는 힘이 되고, 사계절이 돌고 지구가 돌고 태양계도 돌고돌아 팽팽한 우주로 살아난다. 돌고 돌리는 능력! 인류 역사에서 생존 능력을 보장해준 것이 농업혁명이라면 생존의 효율성을 드높인 것은 돌고 돌리는 능력이 가져다 주었다. 돌고 돌리는 원圓의 원리를 깨달음으로써 인류 문명은 도약을 시작했다. 멀리는 마차의 수레바퀴에서 가까이는 전자칩의 제조와 무한한 정보검색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돌고 돌리는 능력에서 비롯하렷다. 무엇이든 돌고 돌리는 것은 능력이요 힘이다.
나에게도 돌고 돌리기에 탐닉할 절호의 기회가 있었다. 내 중년 무렵, 그때는 돌고 돌리는 속칭 ‘발바닥 비비기’가 유행으로 번졌다. 내가 근무하던 학교에서도 중년의 남자 선생님들이 특별실에 모여 끼리끼리 무도舞蹈 연수를 주고받기도 했다. 많은 권유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대열에 합류하지 않았다. 지나고 보니 이것은 불찰이었다. 지하에서 돌고 돌리고, 생활에서 돌고 돌리는 인생살이를 조금이라도 일찍 터득했더라면 나도 모가 닳고 깎이어 둥글둥글 수박 같지는 못해도 개똥참외 정도로는 원만해지지 않았을까.
그래도 내가 지하무대를 돈 적이 딱 한 번은 있다. 워낙 오래전 추억이라 장소도, 같이 간 벗들도 기억나지 않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갔던 나이트클럽. 휘황찬란한 불빛과 음악과 술기운으로 달뜬 분위기에 휩쓸려 무대에서 몸을 흔들었다. 누구나 몸을 흔들 수 있는 고고 스타일의 음악이 흘러 나왔다. 한참 흔드는데 음악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더니 다들 손에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고 돌리기 시작한다. 엉겁결에 혼자서 음악에 맞추어 몸을 비비꼬고 있으려니 또래의 여자분이 눈인사를 하며 손을 내밀기에 냉큼 물결에 휩쓸렸다. 엉거주춤 어깨를 붙들고 섰다가 어찌어찌 한 바퀴를 돌고 돌렸다. 빙그르르 돌고는 제 자리에 와 보니 그녀는 입에서 떨어져 흙 묻은 사탕 살피듯, 아래위를 힐끔 훑어보더니 몸을 돌려 불빛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촌각寸刻의 일장춘몽一場春夢!
그런데 이 발다닥 비비기도 지금은 은밀한 지하 무대에서 굴러나와 당당하고도 의젓한 스포츠댄스로 거듭났다. 여가 활용의 멋진 광명세계로 부활승천! 그때 온갖 눈치 보며 발바닥 비비던 사람들, 늘그막에 신바람 나겠다. 역시 인생살이는 돌고 도는 모양이다.
아무튼 돌고 돌리는 전자레인지 덕분에 끼니마다 따뜻한 식단이다. 일회용 식단이 풍성한 세상, 전자레인지는 특히 나 같은 응급 싱글족에게는 구세주다. 엄마 대신 아내 대신 전천후 식단 돌봄이다. 싸늘한 밥반찬을 빙글빙글 돌려 따듯하게 데워주는 구세주. 구세주는 세상을 한켠으로만 보지 않는다. ‘둥글 원圓 가득할 만滿’의 구족具足한 마음으로 지구본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온 세상 구석구석을 동시다발적으로 다 본다. 부처님의 천수천안千手千眼도 하나님의 전지전능全知全能도 이래서 생겼으리. ‘돌려보다, 돌아보다, 돌보다’라는 어휘가 모두 돌고 돌리는 한 뿌리라, ‘돌보는 마음’이 어디 예사 정성인가.
요즘은 인간을 돌보는 성인聖人들이 몹시도 바쁜 세상이라, 돌고 돌리는 기기器機를 인간 스스로 만든다. 인공위성 쏘아 올려 지구궤도에 돌려놓고, 세탁기도 돌리고 핸들도 돌리고, 소줏잔도 돌리고 엉덩이도 돌리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나니. 돌고 도는 온갖 기기가 세상만사를 돌보는 가운데, 전자레인지 돌리고 돌려 진수성찬 펼쳐놓고 사람들은 행복에 겨우리니…. 전자레인지 만세!
--(컴퓨터 화면의 시각적 평의상 행갈이를 했습니다.)------------------------------------------------
첫댓글 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세상사를 한편 글안에 어쩜 그렇게 통쾌하게 담으셨는지 필력에 감탄합니다. 제 글 올리려다 기가 죽어 주춤해서 못올리고 미뤄야겟습니다.
아고-------- ㅎㅎㅎ. 글마다 특징은 있으려니까요.
암튼 감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