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시(市)로부터 발전하여 이탈리아반도 및 지중해 전체를 지배하였던 고대 서양 최대의 제국(帝國).
로마는 BC 8세기 무렵부터 전설적 왕정기(王政期)에 속하며, BC 510년부터 공화정기(共和政期)로, 옥타비아누스 이후는 제정기(帝政期)로 들어간다.
395년 제국은 동서로 분열되어 476년에 서로마제국은 멸망하고 동로마(비잔틴)제국은 1453년까지 존속하였다.
【초기의 로마】
로마는 인도 유럽계의 고대 이탈리아인에 속하는 라틴인과 사비누스인의 일부에 의하여 BC 7세기 무렵 티베리스강(현재의 테베레강) 하류의 라티움 땅에 건설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건국자인 로물루스(BC 753 즉위,8세기) 이래 7대의 왕에 의해 지배되었고, 마지막 3대의 왕은 에트루리아인이었다고 하는데, 적어도 초기의 로마가 왕정를 채택하고, 그 말기에 에트루리아인이 지배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왕은 군사, 정치, 제사(祭祀)의 여러 권능을 집중시켜 절대적이며 무제한적인 강력한 임페리움[命令權]을 가졌으나, 사실은 원로원, 민회(民會)가 이것을 제약하여 동방에서와 같은 왕권은 발달하지 못하였다.
BC 6세기 말 에트루리아인(人) 왕의 압박이 심해졌을 때, 왕을 국외로 축출하고 공화제를 수립하였다. 왕제폐지 직후의 시대에 로마의 정치조직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전하는 바에 의하면, 왕제폐지에 이어 정원 2명, 임기 1년의 콘술(집정관)이 선출되어 국가 최고의 지위에 오르고, 비상사태에는 임기 반 년, 정원 1명의 딕타토르[獨裁官]를 두고, 모두 귀족으로 구선된 약 300명의 원로원이 있었다 하나, 실제로 그와 같은 상태는 BC 4세기 전반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공화제의 변천
호민관 제도(BC494) 성산 사건을 계기로 설치, 임기 1년으로 평민 중에서 2명 선출(뒤에는10명)
호민관은 평민에게 불리한 법률이나 행정 조치에 대해 거부권 행사
12표법(BC494)
로마 최초의 성문법으로 내용은 귀족의 횡포로부터 평민권을 보호. 의의: 시민법 단계로 발전
리키니우스 법(BC494) 집정관 2명 중 1명은 반드시 평민 중에서 선출
개인의 국유지 점유 한도를 제한(대토지 소유 제한)
호르텐시우스 법(BC494) 평민회의 결의를 원로원의 동의없이 국법으로 효력이 있도록 규정
법률상 평민과 귀족의 평등 이룩 ... 평민의 참정권이 달성.
【로마와 지중해 세계】
BC272년까지 이탈리아를 통일한 로마는 시칠리아섬에서 카르타고와 충돌, 이로부터 로마의 지중해 지배에의 도전이 시작되었다.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인에 의하여 BC 9세기에 세워졌고, 특히 BC 6세기 이후는 서부 지중해 최대의 상업민족(商業民族)으로서 활약하고 있었으나, BC 264년부터 BC 201년에 걸친 제1, 2차 포에니전쟁에 의하여 로마는 카르타고로부터 서부 지중해의 패권(覇權)을 완전히 탈취하였다.
또 당시 지중해 세계의 동부에서는 여러 헬레니즘 왕국, 여러 도시가 항쟁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로마는 여기에도 개입하여 마케도니아 왕국, 시리아 왕국, 아이톨리아 동맹 등과 싸워 이 방면에서도 우위를 확립하였다. 이로써 로마는 프로빈키아(屬州)라는 형태로 해외에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중해 세계 전체의 국제정치도 로마를 축으로 하여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공화제 말기의 위기】
로마의 지배계층이 이와 같이 지중해 세계로 웅비할 때, 로마의 대외 발전이 이탈리아에 끼친 경제사적 반작용은 심각한 것이었다. 전쟁 포로의 형태로 밀려들어오는 수많은 노예를 사용하여 부유한 지배계급의 대토지 소유가 날로 발전하는 한편, 새로이 로마에 굴복한 해외 각지로부터 흘러들어오는 값싼 곡물은 이탈리아의 농업에 큰 타격을 주었다. 각지에서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은 병사로 출전한 이탈리아 소농민의 생활을 파멸로 몰아넣어 수많은 농민이 토지를 잃고 무산계급으로 떨어져 도시로 밀려들었다. 그럼에도 로마의 정치는 진정한 위기를 통찰하지 못하고 자기와 자기 당파의 이익과 명예만을 탐하였다(근권 과두 정치). 이리하여 표면적으로는 화려한 로마의 발전도 시민간의 빈부차(貧富差)를 심화시키고 중소농의 몰락에 의한 군사력의 위기를 불러 로마는 대내적으로 황폐하게 되었다.
그라쿠스 형제는 지배계층의 대토지 소유를 희생시켜 빈민에게 토지를 주어 중소농민을 재생시키고자 꾀하였으나 실패에 그치고 횡사하였다. 그들의 법안은 그 자체로는 별로 새로운 것이 없었으나 그들의 활동은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즉 그들은 수세기에 걸쳐 공동화(空洞化)하였던 민중의 기관인 호민관 제도와 민회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음으로써 지배계급에 대한 반역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지중해 세계의 통합】 그러나 광대한 영역에 걸친 로마의 방대하고 어려운 군사적 과제를 수행하는 데에는 마리우스의 병제개혁만으로는 부족하여, 마침내 외인부대가 보조군으로서 쓰이게 되었다(로마 판도 안에 사는 자라도 로마 시민권이 없는 자는 외인으로 불린다). 외인부대 역시 개인관계로 로마의 장군과 결탁하게 되었고, 장군으로서도 명장의권위를 소중히 하면서 평소부터 원주민 전사 계급의 지도자층인 왕후귀족에 대한 보호자적(保護者的) 지위를 확립하고자 힘썼다. 이 무렵부터 로마의 ‘제1인자들’은 원주민 전사 계급의 리더로서 귀족층과 결탁함으로써 그들의 군사력을 로마의 국방조직 속에 편입시키는 방향으로 나가게 되어, 이와 같은 여러 세력이 뒤엉켜 격렬한 당파싸움이 일어났으며, 원로원이나 민회를 혼란 속으로 몰아넣고, 다시 사병(私兵)의 무력을 사용하여 지중해 세계의 동서에서 처참한 혈투를 전개한 것이 공화제 말기의 내란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BC 80년대의 마리우스파와 술라파의 싸움을 제1차 내란이라 부르고, BC 40년대 전반 카이사르파와 폼페이우스파의 싸움을 제2차 내란이라고 부른다. 아뭏든 제정(帝政) 성립 전(前) 1세기의 로마사는 크고 작은 격렬한 정쟁(政爭)으로 일관하였으며, 이것은 날이 갈수록 확대되어갔다.
이러한 가운데 제1차 3두정치(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및 제2차 3두정치(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시대를 지나 옥타비아누스의 당파가 마지막 승리자가 되어 세력을 확립함으로써 제정(帝政)이 확립된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및 지중해 세계의 ‘제1인자들’의 으뜸 가는 자로서 ‘제1인자[元首]’의 정치를 펼치는데, 이것을 보통 제정이라고 부른다.
【제정의 개막】
BC 44년 카이사르 암살 후 전개된 내전의 궁극적 승리자인 옥타비아누스는 BC 29년에 원로원의 제1인자가 되었고, BC 27년 공화제 재건을 제창하여 특별한 모든 권한을 포기하고 공화제국가를 회복시켰다. 이에 대하여 원로원은 그에게 아우구스투스(존엄한 자)라는 존칭을 주었고, 이렇게 하여 옥타비아누스는 형식적으로는 공화제를 재건하였으나 여러 가지 권한, 권능은 아우구스투스 한 몸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 체제는 원수정치(元首政治)라 불리며, 그는 호민관 직권, 프로콘술 명령권, 콘술 명령권 등 공화제적 관직에 부수하는 권한을 종신토록 보유하고 전제국(全帝國)의 약 절반에 달하는 속주(屬州)의 통치권을 장악하였다.
여기에서 제국 최대의 부호인 동시에 사병(私兵)이나 다름없는 대규모 상비군을 거느린 원수 아우구스투스의 권한은 황제 이상의 것이 되었다.
후계자 선택에 부심하던 아우구스투스도 결국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가(家)의 한 사람인 티베리우스에게 뒤를 잇게 하였다. 음침하고 시의심(猜疑心)이 강한 티베리우스(재위 14∼37) 시대는 황제와 원로원의 관계는 원활하지 못하였으나, 속주 통치와 제국관료(帝國官僚)의 기구는 정비되었다. 9년 아우구스투스황제 시대에 토이토부르거발트전투에서 입었던 패전의 상처와 동요도 일소되고 변경의 군사정세도 호전되었다. 동쪽은 유프라테스, 북쪽은 다뉴브와 라인강이 자연적인 국경이 되었다.
제3대 칼리굴라(재위 37∼41)는 광적인 성격의 인물이었으며, 엄청난 낭비를 거듭하여 국고는 바닥이 나고 시민의 재산몰수가 계속되었으며, 또 자신의 신격화를 극단적으로 추진하였으므로 황제예배(皇帝禮拜)에의 길을 한 걸음 빠르게 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가 근위군 장교에게 암살된 뒤,
황제에 추대되어 즉위한 클라우디우스 1세(재위 41∼54)는 제국(帝國)의 도시화, 시민권 확대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측신제도(側臣制度)를 제도화하여 일종의 궁정관료제도를 완성하고, 제국의 행정, 재정조직의 정비에도 힘을 기울여 황제의 권력을 굳건히 하였다.
클라우디우스의 뒤를 이은 네로(재위 54∼68)는 차차 포악한 성격을 드러내어 모친과 비(妃)와 처남을 죽이고, 로마시에 불을 질러 그 죄를 그리스도교인에게 씌워 많은 그리스도교도를 살해하여 일종의 공포정치를 폈다. 제국의 동쪽 변경 팔레스티나에서 성립한 그리스도교는 제국 내의 각지로 침투하여 들어오고, 베드로, 바울로의 순교도 이 무렵으로 추정되고 있다.
네로의 폭정을 쓰러뜨리기 위하여 제국 각지에서 4명이 황제를 지칭하였으나, 유대 반란 진압의 총사령관으로 파견되었던 베스파시아누스가 마지막 승리자가 되어 평화와 안정의 시대를 되찾았다. 유대 진압은 그의 아들 티투스에게 계승되어 70년에는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재위 69∼79)는 변경수비를 강화하고, 시민권 확대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원로원과의 협조 아래 거대한 관료조직을 정비하여갔다.
제위(帝位)는 티투스(재위 79∼81), 도미티아누스(재위 81∼96)로 계승되었으나, 전제군주적인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당하자 이 왕가의 지배도 끝이 났다.
【5현제시대】
원로원이 66세의 네르바를 제위(帝位)에 추대하면서부터 원로원과 황제의 현명한 타협의 정치체제가 확립되어, 영국의 역사가 E.기번이 ‘인류사상 가장 행복한 시대’라고 절찬한 5현제의 시대가 열렸다.
사회복지 정책의 네르바(재위 96∼98),
최초의 속주(屬州) 출신(에스파냐) 황제로서 적극적인 대외정책과 자선사업을 추진한 트라야누스(재위 98∼117)는 동방 나바타이왕국을 합병한 데 이어 파르티아왕국의 수도 크테시폰을 공략하고, 다키아(현재의 루마니아)·아라비아(나바타이)·메소포타미아·아시리아 등의 속주를 추가하여 제국의 판도가 가장 넓은 시기를 이루었다. 북쪽은 라인·도나우 두 강을 자연적 국경으로 하고, 도나우강 하류에서는 다키아까지를 영역으로 하였으며, 동쪽은 유프라테스강과 아라비아사막, 남쪽은 사하라사막에까지 판도가 미쳤다.
반평생을 속주순행(屬州巡幸)에 바친 그리스 문화의 애호가 하드리아누스(재위 117∼138)때에는 수세(守勢)로 바뀌어 제국 각지를 순수(巡狩)하면서 국경방위 강화에 힘쓰는 한편, 속주의 통치조직·제국행정제도·관료제도·군제(軍制) 등을 개선·정비하였다.
경건한 안토니누스 피우스(재위 138∼161),
동분서주하며 외적과 맞선 철인(哲人)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재위 161∼180)는 각각 전(前) 황제의 양자가 되어, 원로원의 승인을 얻어 제위에 올랐으나 동부 국경에서는 파르티아군의 침입을 받고, 제국 각지에 전염병이 만연하여 인구는 현저하게 감소하였다. 황제는 동분서주하면서, 특히 북쪽 변경 수비에 몰두하였다. 더구나 다뉴브강 중류 유역에서 밀려온 게르만인의 침입을 끝내 저지하지 못하고 그들 일부에게 제국 내의 토지를 주어 소작농으로 만들고 그들에게 제국 방위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
5현제 시대의 특징은 제국의 영토가 확대되고 비교적 평화가 계속된 데에 있다. 또한 5현제시대, 즉 로마의 평화시대는 ‘도시화’ 정책이 침투하고 있던 시대이기도 하였다. 제국 각지에 로마식 도시가 세워져, 속주민에게는 널리 로마 시민권이 주어졌고, 로마문화가 속주의 구석구석까지 스며들고 있었다. 이리하여 도시의 번영은 2세기에 이르러 그 절정에 다다랐다. 중앙에 광장을 두고, 신전·바실리카·극장·원형극장·공공목욕탕·수도를 구비한 로마식 도시가 세워지고, 도시문화의 주체를 이룬 것은 도시의 부유층이었다. 그들은 도시참사회(都市參事會)를 구성하고, 도시의 관리[政務官]에 취임, 무보수로 도시를 위하여 헌신하였다. 한편 제국정부는 도시 부유층의 경제활동에는 전혀 간섭하지 않는 자유방임정책을 취하여 제국은 경제적으로도 크게 번영하였다. 제국 각지의 특산품 거래가 자유로이 이루어지고 안정된 통화의 뒷받침으로 게르마니아·인도·중국과의 교역도 성행하였다.
【도시의 번영과 싹트는 위기】
그러나 위기는 이미 5현제시대의 제국 내부에서 싹트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제국의 번영을 노예제에 의존하여 온 데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생산품의 대부분을 수출하여오던 공화제 말기부터 제정 초기의 이탈리아 노예제 대농장 경영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노예는 노동력인 동시에 자본투하의 대상이기도 하였으나 공급원의 감소, 투하자본으로서의 불안정, 상품판로의 정체(停滯) 등 노예제사회를 뿌리째 뒤흔드는 문제들이 앞을 가로막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노예제 자체가 지니는 비능률성이 분명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노예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모순이 따라다녔다. 확대 정책에서 수세로 전환하던 제국의 정책과 더불어 이미 그 징후를 보이고 있던 노예제 농장경영에서 소작제로의 이행도 더욱 가속화되고 있었다. 또 대토지소유제의 보급은 자급자족적인 경제체제로의 이행을 촉진시켜 경제의 중심이 도시에서 농촌 및 사유지로 옮아갔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것이 도시의 노화현상이며, 나아가서는 농촌 및 사유지에서의 계층의 분화였다. 이리하여 로마제국의 세포라 할 도시들이 그 기능을 잃어가는 한편 소작인에게 가하여지는 부담도 점차 무거워져갔다.
【세베루스왕조와 군인황제시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뒤를 이은 아들 코모두스(재위 180∼192)가 전제정치를 행하여,
그가 암살된 후 혼란을 수습한 것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재위 193∼211)였으나 그 후 약 50년 동안은 26명의 황제가 난립하는 ‘군인황제’시대로 바뀐다.
로마제국은 3세기에 대외적, 대내적으로 동란시대를 겪게 됨으로써 사회, 경제, 정치이념의 모든 면에서 고전, 고대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변질되어갔다. 이 변질의 시대에 제위에 오른 황제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였다. 한편 그리스도교 박멸을 목적으로 하는 최초의 조직적인 시도가 보이기 시작한 것도 3세기의 일이었다. 이미 네로는 로마시 대화재의 책임을 그리스도교도에게 씌우기도 하였고, 트라야누스황제 때에는 그리스도교도라고 고백하는 것만으로도 사형에 처하여졌다. 또 그리스도교도에 대한 박해는 민중의 선동에 의하여 자주 일어났으며, 본래는 외래 종교에 대하여 관용을 보여왔던 로마제국 정부도 분명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250년 데키우스황제의 포고, 즉 모든 주민은 로마의 신에게 희생을 바쳤다고 하는 증명서를 지녀야 한다는 포고령이 선포되자 그리스도교로부터 많은 이탈자를 낳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257년 및 258년에 발레리아누스에 의한 박해가 가해졌다. 그러나 그 아들 갈리에누스는 교회에 대하여 신교(信敎)의 자유를 인정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의 제국 재건】
내란을 수습한 제국에 평화를 가져온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284∼305)는 변경 수비를 또다시 굳게 하고 통치기구를 정비, 로마를 중앙집권적인 관료국가로 바꾸었다. 286년 부제(副帝)인 막시미아누스를 정제(正帝)로 승진시켜 그에게 서방 통치를 맡기고 자신은 동방의 통치를 맡았으나 293년에는 다시 부제를 각각 새로 임명하여, 사분통치제(四分統治制)를 확립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은 군대의 재건, 재정의 재정비에도 힘을 기울여, 301년에는 최고가격령을 공포하였으나 인플레이션의 확대를 막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현물징발을 하나의 제도적인 장치로 하는 세제(稅制)의 근본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제도에 따라 모든 부과금(賦課金)은 공평하게 토지 단위(iugum)와 인두(人頭) 단위(caput)로 할당되었다. 또 행정상의 개혁으로는 속주 수를 배로 늘리고 제국 전체를 관구(管區)라고 이름 붙인 12개의 속주 그룹으로 재편성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세운 전제군주정체를 한층 견고하게 한 것은 황제 퇴위 후 내란을 수습한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306∼337)였다. 황제는 312년 하늘에서 십자가의 표지(標識)를 보고 대립자 막센티우스를 격파, 로마로 입성한 다음 313년 밀라노에서 리키니우스와 회담, 그리스도교 공인의 칙령(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였다. 황제는 325년에 니케아에서 종교회의를 열고 교의논쟁(敎義論爭)의 해결을 꾀하였다. 이어서 330년 새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노플)를 개설하여 제국과 그리스도교의 결합을 더욱 더 굳건히 하였다. 황제는 라인, 다뉴브의 국경선에서 게르만인을 격퇴하는 한편, 게르만인을 제국 영내에 정주하게 하여 국가 방위를 맡기기도 하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죽은 뒤 그의 아들들과 일족(一族)의 내분으로 제국은 황폐화하였다. 콘스탄티누스가 이끌어 가던 역사의 흐름에 역행하여 F.C.율리아누스(재위 361∼363)는 전통적 제의(祭儀)와 이교(異敎)를 부흥시켜 그리스도교를 공격하고, 로마 고제(古制)의 회복을 꾀하였으나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전사하여 그의 치세는 단명으로 끝났다.
【게르만의 민족이동과 로마제국의 멸망】
율리아누스가 죽은 뒤, 동방에서나 라인, 다뉴브 강 쪽에서 이민족의 침입이 되풀이되었다. 서부를 통치하던 발렌티니아누스 1세(재위 364∼375)와 그의 동생 동제(東帝) 발렌스(재위 364∼378)의 활약도 소용없이 서부에서는 알라만인(人)이 침입하고, 갈리아의 바가브타에란(亂)도 격화하였으며, 브리타니아·파노니아·북아프리카 등도 어지러웠다. 한편 동부에서는 365년 고트족(族)이 반란을 일으켰고, 376년 흉노(匈奴)에게 쫓긴 서(西)고트족이 제국 안에 정주할 땅을 찾아 남하하여 고트족들과 함께 트라키아 전토를 짓밟고 마침내 발렌스 군대를 괴멸시켰다. 내외의 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하여 로마는 완전히 군사국가화하였으나 그 군대는 거의가 야만인으로 구성되었고, 한편 경제활동의 정체(停滯)는 극도에 달하였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로마제국 전토를 통치할 수 있었던 마지막 황제로서 그가 죽자(395), 제국은 최종적으로 동서로 분리되어 동반부는 아르카디우스, 서반부는 호노리우스가 영유하였다.
서로마 제국에서는 정치의 실권을 게르만인 무장(武將)인 스틸리코가 장악하였으나, 그가 처형된 뒤 각지에 황제가 난립하여 정정(政情)은 어지러웠다. 410년에는 알라리크왕이 거느리는 서고트족이 로마시를 점령하였다. 그 뒤 서고트족은 방향을 돌려 에스파냐로 이동하였으며, 역시 게르만인인 반달족은 아프리카로 진출하여 각각 왕국을 세웠다. 또 부르군트족과 프랑크족도 갈리아에 침입하고, 색슨족은 브리튼섬으로 건너갔다. 한편 로마의 장군 아에티우스가 서고트와 프랑크의 힘을 빌려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아틸라가 이끄는 흉노족을 격퇴하였으나(451), 455년 로마시는 반달족에게 약탈당하였다. 그 후에는 게르만인 장군이 로마의 정치적 실권을 쥐었으며, 결국 게르만인 용병대장 오도아케르가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황제를 폐하여 서로마제국은 멸망하였다(476).
한편 동로마제국은 서로마제국에 비하여 경제적, 문화적으로 활력이 있었고, 통치기구도 정비되어 있었으므로 서쪽의 로마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명맥을 유지하여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 즉 로마제국의 정통으로서 1453년 오스만투르크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존속하였다.
그러나 서유럽에서는 로마제국의 이념과 전통이 결코 소멸되지 않았다. 800년 샤를마뉴의 대관(戴冠)은 로마제국의 부흥을 의미하였고, 또 ‘로마황제’라는 호칭은 오토 2세 이후 줄곧 사용되어,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국호로 알 수 있듯이 황제들은 로마적, 그리스도교적 전통의 보호자로서 그 권위를 지켜갔다.
로마의 문화
19세기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 랑케는 로마 문화를 호수로 비교하면서 고대의 모든 역사가 로마라는
호수로 흘러 들어갔고, 근대의 모든 역사가 로마의 역사로부터 다시 흘러 나왔다고 하였다. 또한 예링은 {로마법의 정신} 제 1권 제 1면의 첫머리에서 "로마는 정치제도, 법률, 기독교로 세계를 세 번
정복하였다고 갈파한 바 있었다. 이처럼 로마는 서양 고대사의 집약적 대성을 이룸으로써 지중해 연안의세계 문화를 완성한 문화사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다. 종전에는 로마의 문화를 그리스 문화의 단순한모방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였으나, 지금은 로마 문화에 보다 더 넓은 문화사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로마 문화의 전체적 특성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첫째 절충적 성격인데, 로마인들은 선진 문화권이던에트루리아인의 문화에 그리스 문화를 받아 들이는 등 선행하는 모든 문화를 거의 다 흡수하여 폭과깊이를 부여하였다. 둘째, 실용적, 실제적인 성격을 들 수 있다. 로마인들은 추상적이고 명상적인면보다는 실용적인 토목 공법이나 의학을, 창작과 미학적인 면보다는 현실적인 과학 기술과 법률을발달시켰다. 예컨대, 로마의 외과의들은 정교한 핀셋과 수술용 기구를 사용하고, 갑상선 종양, 편도선,결석 등의 치료에 상당한 성과를 보였으며, 제왕절개 수술도 개발하였다. 세 번째는 로마 문화의 교량적역할을 들 수 있다. 로마에 의해 그리스 및 그 이전의 고전 문명의 '유럽화'가 달성되었다. 철학은 그리스 철학을 보존하였으며, 법개념은 오늘날까지 통용된다. 또한 라틴어는 많은 유럽 언어의 모태가 되었는데,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이탈리아어나 프랑스어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앵그로 색슨어에서 유래된 영어도라틴어와 깊은 관련을 갖는다. 예컨대 영어 language는 혀를 의미하는 라틴어 lingua에서 유래한 것이다.
로마의 문화유산 가운데서도, 로마의 정치제도와 로마법은 오늘날의 유럽의 정치체제에 많은 영향을미쳤다. 회계 연도, 상원제도, 시민권, 지방자치, 국세조사와도 같은 용어는 물론 재산(property),
계약(contract), 대리인(agent), 유언(testament), 재판관(judge), 배심(jury), 범죄(crime) 등 경제, 법률, 사법상의 많은 용어들이 로마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또한 사회계약설, 인민 주권 개념 및 견제와 균형을 내용으로 하는 삼권 분립의 원리 , 법치주의 등 후세에 확립된 정치사상의 기저는 로마의 유산이다. 특히 로마의 법률은 미, 영국을 제외한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그리스, 일본, 스코틀랜드, 남아메리카 제국 등, 그리고 우리나라 등 여러 근대 국가의 법률적 기저가 되었다.
로마법의 발달단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불문법의 단계인데, 이는 종교적 관습과 혼합된매우 엄격한 神法의 시대를 말한다. 그 다음이 12표법이다. 그리스인의 교과서가 호메로스라면, 로마인의 것은 12표법이라 할 정도로 이것은 중요하다. 이는 신법이 시민법으로 바뀌는 법의 세속화 현상과 법과 관습의 성문화의 시작을 의미한다. 재산의 사유권과 노예 제도, 계약, 동업 및 구매와 판매의 원칙 등의 민법과 약간의 공법을 포함하고 있다. 이에 따라 로마의 법률 기관이 확장되고 법무관(Praetor)직 창설된다. 시민법은 근본적으로 로마와 로마 시민들의 법으로서 성문법과 불문법의 형태로 존재한다. 이는 원로원과 민회의 결정, 황제의 칙령, 법무관의 훈령, 일반 법관의 판례, 고대 관습 등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 후 로마는 영토를 확대해가면서 이민족의 관습을 법체계 속에 섭렵하기 시작했다. 독자적인 시민법의 범위를 벗어나서 인간의 법률관계를 보편적으로 고려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발생하게 된것이 만민법이다. 만민법은 국적에 관계 없이 모든 지역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법으로서, 재산의 사유권, 노예 제도와 계약, 상거래 등을 내용으로 하고있다. 이 법은 시민법보다 우위에 있지는 않으나, 로마제국 내 이민족들에게 적용되어 시민법을 보충하였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활약한 법학자인 라베오와 카피토, 하드리아누스 시대의 율리아누스, 폼포니우스, 가이우스, 알렉산더 세베루스 치세하에 활약한 울피아누스 등의 영향하에 로마법은 더욱 발달하게 된다. 마침내 제정 초기의 몇 세기를 경과하는 동안에 각 지역의 법률 사조와 학문의 경향을 흡수하여 자연법이 발달한다.
자연법은 모든 개별성과 특수성을 초월한 자연계의 이치와도 같이 영원 불변한 보편적 법률이라는뜻으로 여기에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법률이 유래한다. 자연법은 사법적 관행의 산물이 아니라, 철학적 사고의 산물이며 스토아 철학에 그 근원을 둔다. 모든 사람은 본질적으로 동등하며, 국가가 침해할 수 없는 근본적인 권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이론을 그 바탕에 깔고 있다. 로마 자연법의 아버지는 황제로서, 그는 진실한 법은 모든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그리고 영구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자연과 일치하는 올바른 이성이라고 정의한다. 이 법은 국가보다 우위에 있어서, 이를 무시한 통치자는 자연히 독재자로 전락하는 것이다. 어쨋든 법적 원리로서의 자연법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의 발전은 로마법의 탁월한 업적에 속한다. 자연법은 실정법보다 우월한 만고불변의 자연권에 연결된 고정법이다. 현실적으로는 원로원 등 전통 기득권층의 특권을 초월하여 황제의 명령권, 입법권등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기능을 가졌다. 이같은 과정으로 발달한 로마법은 시민법, 만민법, 자연법 등의 3개의 커다란 줄기로 한다.
로마법은 6세기 전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시대에 이르러 법학자 트리보리아누스(?-545) 등에 의해학설집, 법학제요, 칙령집 등으로 이루어진 로마법 대전으로 집대성된다. 로마 문화의 특색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분야는 건축이다. 로마의 건축은 국가 생활의 표현으로서 확고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로마는 정복자로서 그리스와 소아시아 지역으로부터 수많은 조각, 구조물, 대리석 기둥 등을 약탈하여 그들의 호화스러운 저택을 장식하였다. 원수정 초기에 제국을 에워싸고 있던 국가적 영광의 분위기 속에서, 건축 분야는 비약적인 성장과 함께 라틴적인 특징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이리하여로마의 권력과 영광을 기념하기 위한 거대한 구조물들이 주를 이루었다.
또한 로마인들이 대규모의 토목, 건축, 예컨대 도로, 교량, 댐, 저수지, 항만, 상하수도 시설 등을 축조하게 된 동기는 광범한 제국의 통치상 필요한 실용성이다. 건축 양식은 그리스, 에트루리아 혹은 메소포타미아 등의 양식들을 모방하였으나, 그 구조가 견고하며 착상의 규모가 크며 장식적인 특색이 있다. 로마인들은 에트루리아로부터 배운 원형 아아취를, 기둥에는 그리스의 세양식을 사용하고, 로마인 독자적인 것으로는 도옴, 특히 궁륭(穹?)을 독특한 교차형으로 발전시켰다. 건축의 주재료는 석재, 콘크리트, 벽돌, 대리석 등이었다. 로마인이 처음 시작한 콘크리트법(이탈리아 지질이 화산질 지형으로 주위에 흔한 화산재와 석회석을 혼합)은 건축물을 매우 견고하게 하는 공법이었으며, 근세에 부활되었다. 로마인이 만든 교량이나 도로는 전대의 어떠한 민족도 능가하는 것이었는데, 예를 들면 스페인의 세고비아의 水道라든지 로마의 아피아路는 오늘날까지도 아직 사용되고 있다. 그외 신전, 포룸, 극장, 투기장, 경마장, 욕탕, 기념 건조물, 바실리카 와 같은 대규모 공공 건물이 있다. 로마의 대표적인 신전은 돔 양식의 판테온 신전(아그리파 건축, 하드리아누스 개축)인데, 직경 43.2미터의 거대한 원형 신전으로 북쪽 입구 부분에 코린트 양식의 기둥을 붙박은 돌출부를 갖추었다. 내부는 천장에 있는 직경 9미터의 天窓에서 원형의 공간에 쏟아지는 빛이 대리석 바닥의 구석구석까지 비추고 있으며, 주위에는 일곱 개의 커다란 벽감(壁龕)이 있어, 마르스, 비너스 등의 신상이 세워져 있다. 그 외 목욕탕과 경기장(앞 장 참고) 등이 유명하다.
마지막으로 로마인들의 의복생활을 살펴보도록 하자. 로마의 복식은 그리스와 에트루리아 양식을그대로 수용하여, 로마의 시대 상황에 맞게 변화되었다. 영토가 확장되면서, 복식의 재료와 형태도다양해졌다. 로마인들이 의복을 입는 이유는 크게 두가지 였는데,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이 속한 사회계급을 나타내고, 자신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로마인들은 자신이 속한 계급, 부, 나이 등을 자신들의 의복으로 나타내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토가는 시민의 유軀馨걋?/p> 것이었는데, 점차 의례용의 관복이 되면서 색과 장식선, 입는 방법등이 엄격해졌다. 대개 표백하지 않는 양모(후일 실크가 수입되면서 실크도 사용)로 된 키의 세배(약 8.3제곱미터 가량)나 되는 타원형의 긴 천으로 어깨에서 발 끝까지 감싸게 되어있었다. 그리하여 로뗌琯湧?회합에는 보통 베이지나 갈색의 토가의 물결을 이루었는데, 다만 입후보한 사람들만이 눈에 두드러지게 새하얀 토가를 입었으므로, 흰 색깔을 의미하는 'candidus'라는 라틴어에서 후보자 'candid'라는 말이 나타났다. 원로원 의원이나집정관들은 진홍색 혹은 자주색의 띠로 장식하여, 서열에 따라 휘장을 달리하여 신분을 구별하였다.
지붕이라는 말과 같은 어원을 가지는 토가는 공공 생활에서 덮어주고 감싸주고 점잔을 떠는 옷이었으나, 그리 편리하지는 못하였다. 여름에는 무겁고 겨울에는 추웠는데다가, 무엇보다도 왼손으로는 토가의 왼쪽 자락 끝을 잡고 있어야 하였으므로 오른 손만이 자유로왔던 것이다. 이는 즉 평화시의 옷이라는 의미로서 전쟁시의 병사들의 옷과는 아주 대조적인 것이었다. 로마인들은 그리스 인들처럼 육체를 자랑하지 않았고 드러내지 않았는데, 토가를 입었을 경우 머리와 손만 노출되게 마련이었다. 그리하여 로마 인들은 '머리와 토가와 오른 손'의 세가지로 대표되어 졌다. 그외 토가 아래 입는 튜니카 등이 대표적인 의상이었는데, 남녀 어느 계급에서나 보편적으로 착용되었다. 튜니카는 길이가 무릎에 미치는 셔어츠로서, 초기에는 넉넉한 실루엣에 소매없이 허리띠를 맨 형태에서, 후기에는 간단한 T자형의 원피스 형태가 되고, 신분에 따라 지위나 계급을 상징하기 위해 끌라비라는 수직선 장식을 하였다. 일을 할 때나 걸어다닐 때는 남자는 튜니카만을 입으면 되었는데, 잠옷으로도 사용되었다. 떼베나는 프릴이 달린 소형의 숄로 튜니카위에걸쳐 입는 상류 계급의 복식이었다. 형태는 만원형, 장방형, 원형 등이 있었다. 그 외 팔루다멘툼은 귀족 계급이 착용하는 일종의 망토형의 군복으로 제정시대 중기 부텨 착용되었으며, 울이나 실크가 주로쓰여졌다. 여자들은 스톨라라는 긴 겉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이를 튜니카 위에 입고 허리께를 벨트로 묶었다. 귀부인들은 파라솔과 부채를 아울러 갖고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