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 즉 미(美)를 인식한다는 것에 대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미를 지각한다는 것은 육체적인 감각기관에 의한 작용이기 때문에 고차원적 이성능력에 못 미치는 저차원적인 정신활동이라는 견해다. 다른 하나는 미를 느끼는 것은 감각기관인 시각뿐 아니라 기억력, 상상력과 같은 고차원의 내적 감성능력도 필요하므로 저급한 정신활동만은 아니라는 견해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미의식은 후자의 견해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리스 철학자들의 세계관은 미와 선이 하나라고 하는 ‘미선합일(美善合一)’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의 추구는 현대로 올수록 말초적이고 감각에 치중하여 전자의 견해에 더 가까운 경향이 있다. 필자의 견해는 자연과 동질화되어 풍류를 즐길 줄 알았던 우리 옛 선인들의 미적 감성능력이 수많은 자극과 가상현실이 풍부한 현대인의 심미적 능력에 비해 그렇게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심미적 감수성이란 감각적 자극이 풍부하다고 잘 발달되는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
아름다움의 가치는 그것의 총체적인 의미를 파악하는 사람의 심신능력을 통해 비로소 제대로 평가될 수 있다. 우리 민족이 좋아하는 소나무의 아름다움은 과연 어떤 것에 기인하는 것일까. 아마도 사계절 잃지 않는 푸른 녹음, 철갑을 두른 듯 느껴지는 나무껍질, 힘찬 상승의 에너지가 느껴지는 곡선도 직선도 아닌 나무 줄기, 그 아래 있으면 아늑함을 베풀어주는 상부가지 등에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이런 외적인 조건들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늘 푸른 녹음에서 느껴지는 굽힐 줄 모르는 선비의 기개, 거친 바위틈에서도 뿌리를 뻗어 내리는 필사의 생명력, 몰아치는 세찬 바람에도 끄떡없는 강인함, 이런 것이 바로 소나무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또 다른 이유일 것이다. 이처럼 아름다움의 감정은 겉의 모습뿐 아니라 그것이 일깨워주는 내재적 의미가 함께 결합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미는 곧 선이라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생각에는 아름다움의 또 다른 측면이 있어 보인다. 숲과 나무의 아름다움은 미적 감흥을 넘어 삶의 한 든든한 신앙과 같은 경지로까지 이끈다. 나약한 소년시절, 세상의 거대함 앞에 자꾸 작게만 느껴지던 때 거대한 나무로 들어찬 숲속을 거닐면서 아버지와 같은 든든함을 느껴보았다. 짙은 숲속 길을 헤매며 산에 오르면서 이 세상과도 같이 거칠어 보이던 자연으로부터 두려움을 극복해보는 희열도 맛보았다. 서울 도심에 살던 유년시절 올라다니던 뒷산과 숲은 내가 한 청년으로 든든히 서게끔 도와준 또 한 분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아름다운 숲은 미적 감흥을 넘어 인생에 대한 조감을 가능케 하고 그 뜻을 일깨워 주었다.
숲길을 지나 산위에 올라서면 성냥갑처럼 축소되어 펼쳐진 우리 동네를 내려다보면서 거대한 듯 위협적이기만 하던 이 도시가 별것 아님을 느꼈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 건물들과 길의 짜임새를 머릿속에 그려나가다 보면 길을 잃지 않을 자신감도 저절로 생겼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 느꼈던 자연의 아름다움과 감흥이 경관을 꾸미는 작업을 평생 직업으로 삼도록 인도해 주었는지도 모른다. 숲이 지닌 아름다움의 가치는 단순히 눈을 즐겁게 해주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세상을 헤쳐 나아갈 길을 제시해주는 아버지와 같이 삶의 의지를 일깨워 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미가 곧 선이 되는 경지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아름다운 숲은 어떤 모습일 때 우리에게 이러한 역할을 가장 잘 할 수가 있을까? 봄과 가을, 꽃과 단풍이 이루어내는 색감이 좋은 천연림의 숲은 그야말로 아름답다. 단풍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의 산과 지형이 아기자기해 거기에 자라는 나무들이 다양한 서식조건에 따라 드러내는 색조 변화에 기인한다. 반면에 서양은 거대한 지형조건 탓에 단풍을 보는 맛이 우리처럼 아기자기하지 못하다.
자연이 그렇게 좋다는 외국에 이민가서 오래 살아본 한국인들도 잊지 못하는 고국의 경관은 바로 이러한 지형의 섬세함과 다채로움에서 드러나는 자연스러움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또 다른 유익을 가져다 줄 숲의 조건이 있다. 그것은 미래를 꿈꾸고 의지를 키워줄 웅장한 숲이다. 우리 주변 산야에서 볼 수 있는 나무와 숲은 아직 어버이의 기품을 느낄 만큼 키가 장대하거나 그 품속이 깊지 못하다.
필자는 이웃나라 일본이 왕궁 소유의 숲을 수백년 동안 키워오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산림부국인 독일과 북유럽에 펼쳐진 광대한 평지 숲을 보았을 때 참 부러움을 느꼈다. 우리 산의 조건은 험준한 지형과 암반층이 많아 큰 숲을 이루는 데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치열한 전쟁과 개발의 시대를 지나면서도 평지에 펼쳐진 광릉 숲을 지켰듯, 경제성이 떨어지는 생산조건과 험난한 지형 탓을 핑계로 돌리지 않고 가평의 우람한 잣나무 숲을 키워왔듯 조금만 더 크고 깊게 숲을 키워 보자. 그래서 우리 2세들은 숲이 가진 아름다움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우리 세대는 숲이 가진 아름다움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살아왔기에, 후손들만큼은 숲이 가진 웅장미가 얼마나 든든한지, 숲이 가진 정연미가 얼마나 반듯한지, 숲이 주는 공간감이 얼마나 아늑하고 깊은지 스스로 감지하는 경험을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숲을 멀찌감치에서 보아왔던 외부적인 경관체험에만 익숙해 있다.
숲속 길을 걷거나 수림 밑에 누워 숨을 고르고 땀을 식히면서 올려다보는 숲속 내부자로서의 경관체험이 절대 부족하다. 숲의 심미적 가치를 제대로 깨달으려면 멀리 떨어져 산을 바라보는 것 같은 경험에 만족하지 말고 숲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 보자. 그러면 숲이 보인다. 좀더 들어서면 약동하는 생명이 보이고 또 인생도 보일 것이다.
〈김태진 한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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