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의 교관겸수(敎觀兼修)는 교종 입장에서 선종을 포섭하는 것이요,
지눌의 정혜쌍수(定慧雙修)는 선종 입장에서 교종을 포섭한 것이라고 국사 시간에 배웠다.
아주 중요한 내용인데.. 정작 그것을 접한 우리는 뜻도 모르는 채 그저 암기했을 뿐이다.
비록 그때는 뜻도 모르고 암기했지만..
어른이 되어 문득 문득 암기한 것을 삶에 응용하고 있음을 보면..
암기일 망정 아주 고마운 지식이 아닐 수 없다.
교관 겸수는 교에 해당하는 대승 경전만 열심히 공부하지 말고 선정 수행을 함께 닦아야 한다는 것으로 설명하고,
정혜 쌍수는 선정을 닦으며 지혜인 법 곧 경전도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여 둘의 주장은 하나는 교종이 중심이 되어 선종을 다른 것은 선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포섭하는 것이라 가르치는데..
이렇듯 그 당시 불교를 이끌던 지도자들은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었던가?..
의천 국사는 당시 11세기 후반 한반도는 물론 중국에서 여러 종파로 나뉘어 대립갈등하는 현실을 우려하고 있었다.
그것은 석가세존의 의도 와도 부합되는 게 아니다.
어떻게 하면 종파간의 대립 갈등을 막을 수 있을까?..
고민은 깊었으나 답은 간단했다.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
수행자는 계를 지키고, 선정을 닦고, 부처님 가르침인 법[경]을 관찰하는 것.
그것을 당시 출가자들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바꾸니..
경전을 공부하면서 선정을 틈틈히 할 것을 강조한 게 교관 겸수다.
왜냐면 당시 출가자들은 왕실과 고관에게 잘보이려 경을 많이 읽고 암기해 설명해 주는 것을 즐기다 보니.. 개인 수행을 등한히 하는 결과를 낳았고.. 종파간의 갈등도 수행이 얕은 결과로 보았다.
그러니 교관(敎觀)할 때 관(觀)은 위빠사나가 된다.
의관 천태국사는 고려 초기에 활동한 스님이고, 보조 지눌국사는 고려 후기에 활동했다.
후기에 이르면 교학보다 선종이 주류가 된다.
산종이 주류가 되었다고는 하나 출가자들은 여전히 경전 공부를 주로 하는 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승려의 질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그것을 혁신하는 길은 선 수행이라고 보아..
경 공부를 하려면 우선 선정을 닦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 방법은 3학인 (계.)정.혜를 새삼 강조한 것이 아닌가.
조선이 망하고 일본이 한반도를 유린하는 가운데 우리의 불교는 오히려 중흥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 현상은 조선조 400 년 동안 불교가 얼마나 배척을 당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불교가 무너졌다는 것은 불.법.승에 대한 귀의가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고,
계.정.혜 3학 수행이 무너졌다는 것.
그런 불교가 자리를 찾아가는 것은 1947년 성철스님이 중심이 되어 봉암사 결사 이후라 하겠다.
봉암사 결사는 계를 바르게 세워 지키고, 선정 수행을 중심으로 삼고 틈틈히 경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석가세존이 가르친 수행법은..
계는 철저히 평소 지키며..
선정으로 마음을 평정하게 하고..
그 힘으로 들은 법을 관찰하는 것이다.
경 공부를 한다는 게 경을 관찰한다는 것으로 연상이 되는지..
그것도 마음을 하나로 집중하는 선정에 우선 이르고 그런 연 후 경을 관찰한다고 명시했다.
하고픈 말은 '경 공부'라 하지말고 '경을 관찰하라' 고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는 것.
경 공부라고 하려면..
경 뿐 아니라 책을 볼 때는 당연히 정신을 먼저 집중하는 명상이나 선정을 잠시라도 취하는 게
당연한 문화로 정착했으면 그 때는 경 공부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불교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악[탐욕]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계를 평소 지키려 애를 쓰고..
시간이 나면 먼저 선정을 하여 마음을 하나로 집중시켜..
책을 보거나 어떤 계획을 세우라는 것이다.
고려 시대 명승인 의천국사와 보주국사는 당시 출가자들의 잘못된 현상을 바로잡기 위해
의천국사는 위빠사나인 관을 강조하시고,
지눌국사는 사마타인 선정을 강조한 것이지..
각자 자기가 주장하는 교나 선을 으뜸으로 삼고 다른 것을 포섭하려는 뜻으로
교관겸수나 정혜쌍수를 강조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후학들은 선배님을 가벼이 여기는 잠재의식을 부끄러워해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