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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왼쪽부터) 앤더슨 쿠퍼. 제이크 태퍼. 미카엘라 페레이라. |
1977년 미국을 충격으로 몰아넣은 ABC 방송의 드라마 ‘뿌리’. 원작자 알렉스 헤일리는 자신의 뿌리 찾기 실화에 바탕을 둔 이 소설로 1976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흑인들이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팔려와 미국에 살게 된 과정을 그린 이 작품은 자신의 뿌리에 대한 인간의 보편적 관심을 극적 형태로 보여줬다.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면서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뿌리’로부터 37년이 지나 미국의 CNN 방송이 미국에 묻는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느냐고? CNN의 뿌리 찾기 특별기획 ‘Roots, Our Journeys Home(뿌리들, 고향으로 가는 우리의 여정)’은 그렇게 기획, 방송되었고 다시 한 번 미국인에게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가족사는 누구에게나 특별하면서도 스스로 생각케 하는 특별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따라서 CNN 앵커 12명의 뿌리 찾기에서 그런 특수성과 보편성을 보게 되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당연하다.
CNN에서 ‘AC360’을 진행하고 있는 앤더슨 쿠퍼는 명실상부한 미국 최고의 언론인 중 한 명이며 CNN의 간판앵커다. 그의 가족사는 각종 흥미있는 소재로 가득한 한 편의 드라마와 같다. 어머니는 철도왕으로 유명한 밴더빌트 가문의 후손인 글로리아 밴더빌트. 뉴욕 맨해튼의 파크애비뉴를 가로막고 있는 게 그랜드센트럴스테이션(Grand Central Station)이다. 1960년대 철거 움직임이 있었을 때 당시 영부인 재클린 케네디가 건물 보존 운동을 벌여 유명세를 떨친 그 건물. 이 땅은 1869년 글로리아의 할아버지 밴더빌트가 화물보관소 겸 간이역으로 활용하기 위해 매입했다. 그랜드센트럴스테이션은 이후 건축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역 앞에 가면 밴더빌트의 동상이 서 있고 역에서 분기되는 도로 중 한 곳에는 밴더빌트 애비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반면 쿠퍼의 아버지는 가도가도 들판뿐인 미시시피에서 태어나 뉴올리언스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UCLA, UC버클리에서 공부한, 단역배우 출신 작가이다. 재벌가 상속녀와 무명배우의 러브스토리. 이 러브스토리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길이 없다. 글로리아 밴더빌트에게는 와이어트 쿠퍼(앤더슨의 아버지)가 네 번째 남편이다. 사진으로 보는 쿠퍼의 아버지가 배우를 꿈꿀 정도로 미남이라는 점에서 미뤄 짐작해 볼 뿐이다.
뉴욕에서 태어나 자란 쿠퍼에게 미시시피강은 아프리카만큼이나 미지의 땅이다. 쿠퍼가(家)의 버려진 가족묘지를 찾아가는 길은 험하기만 하다. 매년 성묘를 위해 조상의 묘를 찾는 한국인에게 이렇게 버려진 가족묘지는 생소하기 짝이 없다. 비포장의 숲 속 길로 들어서면 불쑥 나오는 녹슨 철조망이 겨우 경계를 표시한다. 뱀을 조심하라는 안내인의 말은 과장이 아니다. 비석은 풍화되어 이름조차 알아볼 수 없다. 그중 겨우 한 곳에서 쿠퍼라는 이름을 읽을 수 있다.
가족사를 들여다보면 미국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4년 5월 13일 셔먼 장군이 이끄는 북군과 존스턴 장군이 이끄는 남군은 조지아의 레사카에서 전투를 벌인다. 이른바 레사카전투(Battle of Resaca). 5월 15일까지 3일간 계속된 이 전투는 남군의 패퇴로 끝났다. 바로 이 전투에서 쿠퍼의 두 조상은 서로 적군이 되어 총을 겨눴다. 노예제도를 지지하던 남군에는 아버지 쪽의, 노예제도를 반대한 북군에는 어머니 쪽의 선조(어머니의 외가)들이 속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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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10월 14일 CNN 간판앵커 돈 레먼이 그의 부모님과 함께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서아프리카 가나로 갔다. photo CNN |
ABC의 백악관 출입기자로 일하다가 지난해부터 ‘The lead with Jake Tapper’라는 프로그램으로 CNN에 새롭게 자리 잡은 제이크 태퍼의 뿌리 찾기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태퍼는 필라델피아 출신이다. 필라델피아는 실베스터 스탤론이 주연한 영화 ‘록키’의 무대로도 유명한 곳이지만 미국의 독립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갖고 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독립을 선언한 바로 그 도시다. 독립기념관도 이 도시에, 자유의 종도 바로 이 도시에 있다. 오죽하면 농구팀의 이름에도 독립한 해인 1776년을 기념하여 76을 새겨놓았을까.
태퍼의 부계는 동유럽에서 이주해 온 유대인이다. 어머니 쪽은 17세기 중엽 노르웨이에서 미국으로 이민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태퍼에게는 7대조(祖)가 된다. 어머니는 캐나다에서 태어나 세 살 때 미국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태퍼의 뿌리 찾기는 여기서 시작된다. 어머니 쪽으로 태퍼의 5대조, 그러니까 이민 3세가 성인이 될 무렵 미국은 영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독립전쟁에 돌입한다. 수많은 미국의 젊은이가 조지 워싱턴 장군이 이끄는 미 독립군에 자원입대한다. 이때 태퍼의 외가 쪽 조상인 솔로몬 허프와 폴 허프는 미국 독립에 반대하며 영국군에 입대한다. 오늘날 태퍼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조국, 미국을 향해 총을 겨눈 것이다. 미국이 이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허프 형제는 더 이상 미국에 살 수 없게 되었다. 캐나다의 퀸트라는 변경지역으로 도망쳤다. 이 도시는 토론토에서 차로 3시간 정도 걸리는 한적한 곳이다. 이런 사연으로 태퍼의 어머니는 캐나다에서 태어났다.
언제나 미국인임을, 미국이 탄생한 필라델피아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태퍼가 미국 독립을 반대한 사람의 후손이라니…. 이 아이러니 앞에 그는 황당한 표정으로 말한다. “내 입술에 묻은 독약 같다.(It’s like posion on my lips.)”
1960년대 미국은 풍요와 번영의 시대였다. 베트남전쟁의 수렁에 서서히 빠져들면서 인종갈등이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었지만 여전히 자신감이 넘치고 미래는 밝았다. 그 중심에 자동차산업의 중심지 미시간주가 있었다.
수바쉬 프리안카(Subhash Pryanka)는 아메리칸드림을 찾아서 인도를 떠나 미시간의 앤아버에 도착한다. 생전처음 온 이 도시에서 그녀는 차 고장으로 오도가도 못하게 된다. 그녀는 궁여지책으로 전화번호부에서 인도인 이름을 찾아 전화로 무조건 도와달라고 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전화를 받은 사람은 전화번호부에 있는 사람이 아닌 그의 룸메이트. 이렇게 만난 두 사람은 결혼에까지 이르렀고 둘 사이에 CNN의 의료담당 수석기자 산제이 굽타가 태어났다.
굽타의 어머니 프리안카는 파키스탄 태생이다. 그런 그녀가 인도로 이주하게 된 배경에는 20세기 최대의 종교전쟁이라 할 수 있는 힌두-무슬림 갈등이 자리 잡고 있다. 대략 50여만명이 죽은 것으로 추산되는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 분할이다.
산제이의 뿌리 찾기는 어머니의 고향 방문과 함께 시작된다. 그녀가 파키스탄을 방문하는 것은 5살 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쫓기듯이 조국을 떠난 이후 67년 만이다. 종교든 이념이든 인간이 만든 장벽은 때로 이렇게 질긴 것이지만 우리 인간의 의지는 그보다 더 질긴 것인가 보다.
2009년 7월 11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아프리카 대륙 가나의 케이프코스트캐슬(Cape Coast Castle)을 방문한다. 그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명백하다. 미국으로 떠나는 노예수출항이었기 때문이다. 붙잡혀 온 흑인들이 노예선을 타러 나가야 하는 문 위에 선명하게 새겨진 글, ‘돌아올 수 없는 문(Door of no return)’. 돌아갈 수는 없다. 나가야 하는 길은 오직 하나. 그 길로 나서면 기다리는 것은 노예선이다. 죽느냐 노예가 되느냐, 그것이 돈 레먼의 선조 앞에 놓인 운명이었다. 1792년에 만들어진 이 감옥 같은 지하 수용소는 최대 1000여명을, 평균 3개월 정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레먼의 선조는 죽기보다는 노예의 길을 택했고, 마침내 그의 후손은 미국 최고의 뉴스 방송국 CNN의 앵커가 되었다.
정확한 기록이 없어 레먼의 선조가 가나 출신인지 아닌지는 불분명하다. 오래된 기록에 의하면 레먼의 선조는 나이지리아나, 카메룬, 콩고 출신의 흑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런데 DNA 검사 결과 더욱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유전자의 76%는 아프리카와 관련이 있지만 22%는 유럽계라는 것이다. 레먼의 외할머니는 백인 아버지와 흑인 어머니 사이에 출생한 혼혈아였다.
돈 레먼은 1966년생이다. 흑백 차별이 심하던 시기에 태어났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루이지애나주 베이턴 루지는 길거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흑과 백이 서로 구분해 살고 있었다. 그가 어머니와 함께 아프리카로 뿌리 찾기 여행을 떠난다. 정확히 어딘지 모르지만 그의 선조가 노예선을 탔을 것으로 추정되는 케이프코스트캐슬을 방문하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매일 아침 잠에서 깨면 마치 꿈을 꾸는 것 같다. 나는 지금 얼마나 멋지고 축복받은 삶을 살고 있는가. 사람들은 이건 할 수 없어, 저건 안 돼, 그러지만 노예선을 타고 오던 사람들을 한번 생각해 보라.”
돈 레먼이 죽기보다는 노예가 되는 길을 택한 선조의 후예라면 울프 블리처는 천운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의 후손이다. 아돌프 히틀러의 대학살로 600만명의 유대인이 죽음으로 내몰릴 때 블리처의 부모는 그 죽음의 소용돌이를 헤치고 살아남았다. 샤워실로 안내된 유대인들은 정말로 샤워를 하러 가는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었다. 가스 학살. 그리고 그들은 집단으로 화장되어 수용소 인근에 뿌려졌다. 수용소를 찾은 블리처를 향해 안내원은 말한다. 그들은 정확히는 모르지만 이곳 어딘가에 잠들어 있다고. 생존자 모임에서 만난 블리처의 부모는 서로의 아픔을 껴안으며 부부가 되었다. 이후 뉴욕의 버펄로에 정착한 그들은 조그만 델리 가게를 열었다. 블리처는 이 델리 가게에서 계란을 묶어 파는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한다. 지금 그곳은 체육관으로 바뀌었다. 블리처의 아버지는 2002년 사망했고 어머니는 살아있다. 블리처가 진행하는 ‘시추에이션 룸(Situation Room)’은 오늘도 중동 정세 분석에 바쁘다.
CNN의 아침 메인 프로그램 ‘New Day’의 공동 진행자는 크리스 쿠오모와 미카엘라 페레이라다. 크리스 쿠오모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탈리아 이민의 후예로 뉴욕의 가장 영향력 있는 집안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는 뉴욕 주지사 재직 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도 거론되던 마리오 쿠오모이며, 그의 형은 현직 뉴욕주 지사 앤드루 쿠오모이다.
반면 페레이라의 경우는 좀 다르다. 그녀의 형제자매들은 페레이라와 피부색이 다르다. 그녀는 생후 3개월 만에 자메이카에서 캐나다의 양부모에게 입양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 이후 한 번도 자메이카를 찾지 않았다. CNN의 뿌리 찾기 프로그램에 참여할 때만 해도 친부모와 형제자매를 찾아나서는 것이 양부모를 배신하는 것 같았기 때문에 무척 망설였다. 그런 개인적 고민을 뒤로하고 자메이카를 찾은 페레이라는 현지 음식을 먹으며, 주민들과 함께 춤을 추고 노래 부르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단지 태어나기만 했을 뿐 자메이카가 어디에 붙었는지조차 모르고 성인이 된 이후 다시 찾은 자메이카에서 그녀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그렇게 찾아간다. 이 외에 ‘아웃프런트(Outfront)’를 맡고 있는 에린 버넷의 조상은 스코클랜드에서 감자 흉년으로 소작료는커녕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자 모든 것을 버리고 미국행 배에 오른 사람들이다.
DNA 분석 결과에 따르면 이들 12명의 앵커 중 순수 백인도 순수 흑인도 없다. 미국인은 대체로 과거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성묘 문화가 없는 것이 단적인 예다. 그러나 이번 특집을 통해 미국의 과거를 되돌아보게 된 것이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한때 노예였던 사람, 노예제도를 찬성한 사람, 노예제도를 반대한 사람, 미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친 사람, 독립에 반대하기 위해 총을 든 사람, 종교 박해를 피해 온 사람, 굶어죽지 않기 위해 찾아온 사람, 역사적인 인종대학살의 생존자 등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소설 같은 경우들을 모두 접하게 된다.
이렇게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나라가 미국이며, 과거의 뿌리는 달라도 지금은 모두 미국인인 것이다. 다양성의 공존을 위해 조화와 타협, 법에 의한 지배가 이 사회를 지키는 근간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미국이 나아갈 길은 결국 그것뿐임을 CNN은 이 프로그램에서 강조하려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