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요즘의 한국은 TV 사극이 역사 교육을 시킨다.당연히 고증은 허울이고,줄거리도 기득층을 옹호하는 내용
으로 그려진다.일명 '고려 거란의 전쟁' 사극도 그렇고 그런 맹탕이다.1천년 前 역사서에 기록된 거란의 고려
침략을 고려와 거란의 전쟁이야기로 만들어 고려 승리의 TV사극으로 방영하는 이유는 뭘까? 뒤에는 기득층
인 토착 왜구및 친일 뉴라이트들의 교묘하고 현란한 호응이 있다.한국에는 자주적(민족 통일및 남북교류 세
력)이고 대륙으로의 진출을 꿈꾸는 진보 세력들이 정권을 잡으면,한반도 파괴의 침략자이자 흉악한 세력으
로 역사의 倭를 등장시킨다.그 왜는 지금의 열도의 옛 세력으로 해설된다.냉전이 끝난지 오래이고 전쟁으로
먹고사는 무관들의 호시절이 지났는데도 기꼴의 무관들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홍보물이 활개 친다.
그러나 당시 형세의 불리함에도 해적처럼 무도하고 포악한 왜구들과 싸워 이겼다는 영화나 드라마가 절찬리
제작되고 방영된다.이어 큰 호응을 얻어 1천만 이상의 관객들이 관람을 했다는 프로모션도 하고,안방의 TV
에서도 수시로 재방영 된다.충성의 국가(기득층) 주의를 위한 조선수군(무관들)들 활약과 이순신의 충성이
극대화 된 '노량,명량,한산대첩' 같은 영화(극)들이 정사들의 기록과 달리 활개를 친다.인민들이여 국가(부자
들과 권력자를 대변)와 민족을 위해 충성을 다하라는 메세지를 보낸다.
2, 한국의 자주적 진보세력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북한을 열고 육지를 통해 대륙으로 진출하여 고립된 남한의
섬(島)같은 생활을 탈피 하고자 필사적이다.이러한 변화를 곱게 보지 않고 불편한 기색으로 바라보는 친일의
토착왜구들도 있다.이들이 바로 의존적 뉴라이트 친일파들이다.이들이 정권을 잡자 일본의 극우재단 도움을
받으면서 크게 성장하여 한국의 극우로 재무장을 했다.이른바 안병직,이영훈,이명박,유인촌 등과 같은 인물들
이다.이들은 반도의 남북교류와 통일을 반대하는 것은 물론,진취적인 남한이 육지를 통해 대륙으로의 진출도
반대한다.이들은 한국인으로 한국에 살면서 미국과 일본을 위해 일을 한다.
즉 반국가적이고 민주주의에 반동하는 세력들로 일본을 위해 충성하는 토착왜구들이다.어떤 식자는 이들과
추종자들을 일본간첩 이라고 말하기도 한다.'공작' 이란 영화와 책을 보면 직접 경험했던 작가가 말하길,미국
을 위해 일하는 한국인 간첩이 많다고 했다.미국이 피식민지 점령지역(보호령)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단결의 민족주의와 깨여있는 시민의식의 자주다.한국의 국방안보권을 미국이 가지고 있는 한 한국인 스스로
결정할 일은 많지 않다.
3, 이들을 정신적으로 써포트 하는 세력으로 '낙성대(강감찬이 태어났다는 낙성대에서 따옴) 학파' 같은 이들
이 있다.몸은 한국인이나 정신은 일본인 처럼 행동하는 자들로 과거 식민지시절 일본을 위해 맹활약 했던 친일
파 후예와 후손들이다.이런 뉴라이트 토착 왜구들은 자신들이 구국의 일념으로 대단한 일을 하는것 처럼 떠들
고 다니면서 태극기 부대와 엄마 부대와도 호흡을 같이 한다.反北과 동시에 종북을 팔고 전쟁을 선호하는 세력
인 전쟁사업가 들과도 친밀하다.이들과 오랜세월 짜고 치던 의존의 기득층들은 신냉전 시대를 맞이하여 또 활
개를 치면서 대륙세력(중국과 러시아)을 미국이 시킨다고 세계화(지구촌) 시대에 근거 없이 적대시 한다.
이들은 자주적 진보세력들에 비해 문화적 성취 능력이 낮고 예술적 이데오르기와 역사적 감각 역시 많이 열등
하다.따라서 무언가의 창작함에 있어 수준이 낮고 관습의 옛 것에만 의존하고 매달린다.특히 창의적,모험적인
도전을 입으로는 말하나 속으로는 싫어하는 이중적 잣대를 지니고 산다.특히 처음부터 없던 권위 상실을 두려
워 한다.따라서 그들이 우월감과 자존감을 공유할수 있으면서 대중들과 함께할 정서적 문화적 공유물들이 필
요했다.
4, 여기서 억지로 착안한 것이 바로 TV 사극이다.영화 제작은 현실감은 높으나 시간이 오래 걸리고 제작비도
많이 들어 곤란했다.그래서 TV사극으로 눈을 돌렸다.제목도 아리송하게 '고려 거란의 전쟁' 이란 엉성하고 아
리송한 역사용어를 채택했다.물론 고증이 있을리 없고 자료도 희박한 1천년전의 요사의 역사기록을 억지가
아니면 TV사극 으로의 재현은 불가능 하다.그래서 사극의 내용도 오직 기득층들의 찬양에만 몰두했을 뿐이다.
친일의 토착왜구이자 기득층들도 대륙의 침략세력(중국)을 상대하여 이긴적이 있다는 우월성을 주입시키려는
기획이었데,모든 면에서 졸속과 엉성함으로 저질의 가짜와 짜증의 영상만 흐르게 했다.
사실 고려와 거란전쟁이 있었던 시대의 정사의 진실은 '전쟁이란 전체를 볼때 고려가 지고 거란이 이긴 것이
진실이나,일시적 부분 전투(강감찬의 귀주 유격전,일제의 봉오동 유격전 처럼)에서 이겼던 사실을 표면화시켜
궁여지책의 애고적 확대 포장한 내용일 뿐이다.고려는 당시 정치적으로 거란의 요구로 송나라와 단교(거란의
요구)를 하고 거란의 발아래 있었다.당시 고려의 강감찬,강조,강민첨,서희등은 고려의 군벌중 한명 이었을 뿐
이다.
5, 의존적 토착 왜구들이자 뉴라이트 친일세력들은 역사의 倭을 핑게로 '명량과 노량' 이란 영화들이 전국을 누
비며 자주의식을 갖추게 하고 민주주의를 고양시키는 것에 불안을 느꼈다.못마땅해 했고 자주의식을 정립하려
는 진취적 진보세력들에게 수시로 불만을 표시했다.이유는 이대로 가다가는 의존적 자신들이 존재감 마져없어
지고 사그라 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AI 시대이자 무인시대가 성큼 다가옴은 이들은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신냉전의 도래를 학수고대 했다.그러자 존재감을 찾고자 자주 세력들을 향한 물타기와 초점 흐리기를
위해 반도의 기꼴들도 해양의 왜가 아닌 대륙의 중국 세력과의 전쟁에서 승전 사례를 역사에서 찾아 헤맸다.이
들에게 돈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그러나 현중국 역사의 漢族국가(漢,明,宋) 들에는 수시로 조공을 바치고 책봉도
받고 정삭(년호)을 받아 썼다는 정사서 기사들이 넘치고 있으니 채택하기 곤란했다.억울해도 당시의 기득권들
은 한족들의 역사정부와 제대로 싸워 본적도 없다.늘' 네,네,네' 로 일관했고 상전국으로 받들며 배워 만 왔다고
쓰고 있다.
6, 事大의 대명사였던 이성계도 왕의 명을 받고 明나라와 싸우라고 했더니 칼끝을 자신이 모셨던 왕과 자신의
고려 조정의 전복으로 마무리 했으니 역시 해당사항이 없었다.따라서 중원의 한족 권력부가 아닌 이민족의 황
제국과 싸운 기록에서 기꼴의 자존감과 국격의 권위를 찾으려 했던 것이다.그러나 '遼史,宋史,高麗史' 원전들을
수평적으로 펼쳐놓고 고려 거란의 전쟁 내용을 비교 해석해 보면,사극 내용의 전개및 해설들이 엉터리 조차 지
적 될수가 없다.사서의 기록들도 고려 거란의 전쟁과 패전의 내용들은 대륙에서는 어울려도 반도에서는 허황된
얘기란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더하여 전쟁의 실질에 대해 역사서는 말하길,'유목민 거란과 중원 고려의 군벌
들 사이의 땅뺏기 수준 이었음을 밝히고 있다.더하여 내국인들의 저항에는 권력들이 아주 냉혹하고 신속한 결
단을 내리나,외세의 침략과 간섭에는 아주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는 조정으로 왕과 권력부들이 도망을 가는 기
사들로 채워지는 처참함도 있다.이것을 나라의 역사 해설로 보기는 정말 힘들다.
7, 임진왜란(1592년) 이후 17세기 인조시대에 한족이 아닌 만주족인 청나라의 침공과 전쟁(병자호란)이 있었으
나 이 전쟁의 결말도 비참하기 그지 없었다.왕을 비롯한 기득세력들이 모두 도망을 가고 조정이 초토화되는 기
록들이 생생하여 인용하기도 어려웠다.더하여 삼전도에서 왕과 왕족들이 청 황제에게 무릎을 꿇는 굴욕과 함께
패전과 동시에 항복을 했었으니 기득층의 자존을 말하기 조차 곤란했다.일인지하 만인지상의 봉건 왕조국가에
서 상대가 있는 전쟁에서 패하면 자연히 종속의 식민지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승자 맘 대로다.세자와 왕자,백성
들까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갔었으니 승리의 자존과 체면 찾기는 어림도 없었다.唐과 고구려,백제의 전쟁도
있었으나 반도에서 신라로 그려진 경상도 세력인 신라가 타국의 침략 세력인 당나라와 공모,협작해 반도의 같은
민족국가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는 기존의 해설이 있으니 이역시 선택이 어려웠다.또한 고구려사는 현
재의 북한이 꽉잡고 있어 남한의 친일사학에서는 고구려를 언급하기 조차 어려웠다.
8, 그러자 어쩔수 없이 궁여지책으로 찾아낸 것이 1천년 전의 거란 고려의 전쟁 이야기다.임진전쟁 500년 전이자
지금으로 부터 1천년 전 중원이 5대 10국 이후 혼란을 정리할때 강자로 등장하는 중원의 거란과 고려와의 전쟁을
생각해 냈다.거란과 초기(10세기 말)의 전쟁이 아닌 말기(11세기 초)쯤 낙성대의 '강감찬' 이란 인물을 등장시켜
기득세력들의 위용,관용,구국의 정신을 홍보하려 했던 것 같다.그런데 망했다.강감찬은 하남성 '개봉(개경)' 의 낙
성대에서 태어났고 반도에서 태어나지 않았다고 정사서들이 모두 쓰고 있기 때문이다.그런대도 서울 봉천동에
가짜 낙성대가 있고 명칭을 차용한 낙성대 학파는 일본 극우재단의 지원을 받고있다.그들은 위장복을 입고 전복
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친일의 토착 왜구 뉴라이트 들인 것이다.이들은 한국에 사는 일본인들로 민주와 자주의
한국인을 무시한다.특히 이들이 잘하는 것은 '종북,친북,좌파' 팔이다.이것 이외는 이들이 팔 상품이 없다.
9, 고려의 강감찬이란 인물이 태어난 곳이 개경의 낙성대라고 하는데 (그가 태어날때 문곡성이 떨어졌다는 봉천
동의 어느곳)강감찬의 낙성대는 어이 없게도 현서울의 봉천동에 있다.물론 가짜다.그는 고려의 '開京' 에서 왕건
과 함께 나라를 창건한 고려의 개국공신 '강국진' 이란 군벌의 아들로 태어난 금수저였고 변할수 없는 오리지날
기득층에 속했다.그러나 그는 반도의 개성이 아닌 대륙의 '하남성 개봉' 에서 태어났다.반도의 개성에서 태어 났
다고 억지를 부려도 그가 태어났다는 '落星臺' 가 왜? 반도의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 있어야 하는지를 기득층들은
먼저 설명을 해야 한다.반도 고려의 역사인물이라면 강감찬의 낙성대는 반드시 황해도 개성에 있어야 제격이 아
니겠나?그러나 당시의 요사와 송사,고려사 기록을 보면 진실은 반도의 고려를 말하지 않는다.이해를 돕기 위해
정사서들의 기사들 들어 보충해설 해보자.
10, 고려를 침략한 거란(요)의 聖宗(耶律隆緖,983~1030)이 지휘한 40만 친정군이 고려의 서경이자 호경(지금의
섬서성 西安)을 침략한 때는 1010년(현종1년)이고,이듬해(1011년)에는 고려의 황도인 개경(개봉)이 거란의 성종
손에 떨어진다.즉 거란군에 고려의 개성이자 개경으로 불리는 황도가 거란군에 점령되어 초토화 된 것이다.정사
서 기록들이 이렇다.그러자 강감찬과 기득층들은 사직을 보호(실질은 기득권 권력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현종을 羅州(강소성 금릉지역)' 로 도망치게 했다.결국 강감찬도 백성과 국격의 보호보다 당시의 토호들과 기득
권층의 보호를 위해서 열일을 한 것이다.오늘날 한국의 윤석열 처럼 기득권을 보호함에는 훌륭한 장군이었는지
모르나,황국의 수많은 고려 백성들 보호와 국격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서는 한일이 없다.
11, 거란의 성종이 지휘한 친정군에 의해 고려의 서경과 개경이 함락(현종2년,1011)되자 고려의 황제가 나주로
도망을 가자 나라와 조정은 두려움에 떨었다.그럼에도 기득권들은 나라와 국민보호를 위한 용맹보다 기득권 보
호에 매진을 했는데,그중에 핵심 인물에 강감찬이 있었다.고려의 현종이 왕으로 즉위한 다음 해의 고려 상황이
이랬다.외침에 대한 방비가 전혀 없었다.형세가 이런데 상대가 있는 전쟁을 어떻게 수행할수 있나?왕이 친히 군
사를 이끌고 대항을 해도 승패를 가름할수 없었을 풍전등화의 형국에 나라의 중심을 잡아줘야 할 왕과 조정이
황도에서 멀리 도망을 간 상황이라면,전쟁은 이미 요나라(거란)의 승리로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어떻게 요나라 황제의 친정군을 막아낼수 있었을 것인가?또한 전쟁도 이익을 얻기 위한 사업인데 풍요한
지역도 아닌,척박한 반도의 고려와 개성을 치기 위해 40~80만 대군을 3차에 걸쳐 동원할 멍청한 황제와 장군은
없을 것이다.만약 중원 서북쪽의 거란군이 반도의 고려를 침략 했다고 가정한다면,아마도 승리의 전리품 규모보
다 원정의 비용이 더많이 들었을 것이다.옛날이나 지금이나 전쟁은 목숨을 담보로한 사업이기 때문에 손실과 전
비는 상상을 초월한다.
12, 이어 고려 현종 9년(1018년)에 요나라의 소배압이 또 10만 대군으로 고려를 침략해 오자 강감찬이 상원수가
되어 부원수인 강민첨과 함께 요군을 대적했는데 이때 강감찬이 대승을 거둔 것을 '귀주대첩' 이 있었던 때라고
기득층의 해설이 있다.여기서 말하는 '龜州' 역시 반도의 귀주와는 조금의 인연도 없다.중원의 서북방인 황하 지
류의 귀주에서 찾으면 있다.요사와 고려사를 동시에 보면 고려는 이미 고려 성종 13년(994년)에 요에 항복해 요
의 년호인 '統和' 를 사용하고,臣稱을 했으며,거란의 적국인 宋과 단교를 했었다.이것이 바로 서희의 담판(강화회
담) 결과가 아니겠는가! 현종 2년(1011년)에는 고려의 황도인 개경이 거란군에 함락되어 초토화 되었던 바 있다.
그런데 6~7년후 어떻게 강감찬이 강물을 막았다가 일시에 내려 보내 거란군(소배압군) 물리쳤다는 얘기를 하나.
이건 질낮은 소설일 뿐이다.당시 고려의 핵심지역인 西京과 황도인 개경은 거란군에 의해 함락되어 현종이 나주
로 도망을 가고 국토전체가 거란군에 유린되고 있는 상태였다.강감찬의 게릴라전 중 부분 승리에 해당하는 귀주
대첩은 양국간 전황의 전체에 미치는 영향도 없었다.
13, 한자로 契丹(계단)으로 쓰여지지는 것을 '거란' 으로 발음하는 것은 북중국의 遼나라 한자 독음이다.거란은 북
중국에서 '키타이' 로 쓰여지며,복수형은 '키탄' 이다.서북 몽고계 민족이면서 티벳과 흉노와도 어울어지는 퉁구스
(당항족=티벳족)족 들과도 혼혈되어 있다.또한 東胡의 일파이기도 하다.동방에서 거란의 거점지는 정사서 상으로
살펴보면 최소한 지금의 '산서성 북부와 섬서성 서북부,영하오르도스와 감숙과 서북지역' 에 해당한다.이들은 황하
유역중 중원 서북방인 초원의 유목민 나라로 정착민의 나라는 아니였다.그러다 10세기초 '耶律阿保機(야율아보기)'
라는 영웅이 나타나 무섭게 역량을 카웠다.이들이 강성한 시기는 2대 황제 태종(耶律德光,926~946)에서 6대 황제
인 聖宗(耶律隆緖,983~1030) 시대에 이르러서는 중앙아시아에서 서아시아 지역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전한다.중앙
아시아와 서아시아및 카스피해 지역까지 떨쳤던 이들의 영향력은 이지역에서 '스키타이' 란 부족명을 만들었다.
거란의 요나라는 9대 210년 동안 북중국에서 황제국의 지위와 영화를 누렸었다.이들이 서역으로 진출하자 당시
서역사람들은 '키타이,거란인' 을 황하가 있는 중원의 중국인으로 생각하게 되었다.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으나 과거
엔 홍콩에 러시아어와 영어 표현의 '케쎄이(Cathay=키타이) 항공사' 가 있었다.이것이 바로 거란(契丹)의 러시아어
중국 표현인 'Cathay(키타이)' 다.지금도 중국에 대한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표현은 같다.거란족의 요나라는 말은
있었으나 문자가 없어 한자를 사용할수 밖에 없었고,요사도 한자로 쓰여져 있다.
14, 역사 거란(요)의 위치가 북중국과 그 이북 초원지대가 되듯이 고려의 위상과 위치는 이해되는 것과 다르게 정사
서의 기록도 아주 다르다.한자로 쓰여지는 '高麗'는 중국어로 '까오리(Gaoli)' 로 발음되고,러시아 어로는 '까레이' 로
불린다.고려인은 당연히 '까레이스키' 다.까오리 나 까레이의 본의는 '가운데,핵심,중앙,중간' 의 뜻이다.고려란 표현
이 서유럽에 알려지기 시작 할때(일제초기)는 '코레,코리(Core)'로 불렸고,지명 어미사인 '~a' 가 붙어 '코리아(Corea)'
로 쓰였다.이후 피지배국이 지배국인 일본의 영어 표기를 앞설수 없다 하여 'Japan 앞의 Corea는 이후 Korea' 로 바
뀌었다.코리아의 'Core(코아)와 코아-시티(Core-city)' 가 중앙과 중심(핵심도시)의 뜻이 듯이 Core(중앙)역시 핵심인
'까레이와 까오리' 와 같다.따라서 역사에서 고려란 표현은 중국(중원)의 다른 표현이 된다.1930년대 후반에 일본과
소련이 전쟁에 돌입하자 스탈린과 소련 공산당 정부는 연해주에 살던 동양인들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켰다.남한의
고려대학이란 교명도 1948년부터 쓰여지고,반도에 조선이란 명칭을 사용한 것은 일제가 반도를 점령한후 조선총독
부(1910년 10월 1일)를 설치하면서 생겨난 칭호다.
15, 중앙아시아와 러시아로 간 이들은 스스로 말하길,당시 반도는 일본의 점령자들에 의해 조선이란 지역 명칭을
강제로 쓰고 있었음에도 선조들이 '원동의 고려' 에서 왔다고 말한다.스스로 고려인(까레이스키)이라고 말하는 이
표현의 진실은 곧 먼동쪽이자 '극동(연해주)에서 온 중국인' 이란 뜻이다.이때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및 인근에 있던
이시디어를 쓰는 독일계 유대인들도 동시에 연해주로 강제 이주시켰다.이유는 독일,일본과 동시에 전쟁을 하는
소련의 입장에서 이들이 적군(일본과 독일)을 도울 염려가 있다는 이유였다.지금도 극동의 연해주 '비로비잔과 하
바로스크' 등지에는 유대인 이시디어로 발행되는 신문이 아직도 나올 정도로 그때 이주했던 유대인들이 많다.한국
에서 쓰이는 '가온' 이란 말도 고려 까오리의 변형으로 중앙과 중심의 뜻이다.고구려 역시 중원(중앙)의 나라(고을)
란 뜻이다.
16, 고려가 '까레이와 까오리' 와 함께하는 중국이었다는 진실은 고려사와 요사,송사에 분명하게 나온다.우선적으로
고려사를 보면,성종 14년(995년)에 고려의 지방조직 개편을 한다.이때 고려 규모를 보면, '전국을 10道,128州,449縣,
7鎭' 이란 거대한 大國의 고려로 구획 정리를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또 15세기 세종때 발간되었다는 고려사 지리지
를 보아도 고려는 '京4,牧8,府15,郡129,縣335,鎭29개' 를 두었던 거대한 황제국임을 정확히 써놓고 있다.광종11년
(960년)에는 고려의 개경을 '皇都' 로 개칭했다는 기록도 생생하다.그럼 과연 반도의 황해도 개성이 황제의 '皇都' 였
나? 황성 옛터란 유행가는 있다.이때(995년경)는 거란의 蕭遜寧(소손녕) 80만 대군이 고려를 침략한지(993년) 2년
째가 되는 해이다.아직도 서희의 담판으로 강동 6주를 확보하고 거란군을 물리쳤다는 애고의 허접한 애기를 늘어놓
고 있으나,실제는 이듬해 고려 성종13년(994년)부터 고려는 거란(요) 황제의 년호를 사용하는 속국이자 신하국이
되었고,세폐와 조공을 바치는 고려가 되었다는 요사와 고려사의 기록을 숨긴다.예나 지금이나 전쟁은 사업이기 때
문에 실익없이 타협되는 경우는 없다.사업을 하러 고려를 침공한 거란군이 서희의 말솜씨에 소득없이 물러 났다는
허접한 거짓말은 이제 하지 말자.
17, 더하여 그동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수시로 조공을 바쳤던 이웃국가 송나라에 對거란군 원군을 요청했으나
거절되자 단교 했다는 얘기도 안한다.또 고려사는 목종 원년(998년)에 고려의 '西京을 鎬京(호경)' 으로 개칭했다고
쓰고 있는 것도 말하지 않는다.동양사 모두가 아는것 처럼 역사의 '호경' 은 지금의 섬서성 '서안부(장안,함양)' 를 말
하는 것이 아닌가?당시의 西安府(長安府)는 현재의 남한 면적보다 크다.여기에는 '장안,함양,화주' 란 별도의 역사
도시들이 있다.이 서안부의 호경을 고려의 목종(998~1009)은 즉위한지 6년째 되는 해에 직접 순시(1004년)를 했다
는 고려사의 기록도 무시한다.서안부의 호경(서경)과 하남부의 낙양(동경),개봉부의 개봉(개경),하동부와 안북부의
태원과 대동(북경)과 함께 고려의 4京이 되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바로 중원의 고려 핵심강역 이었던 것이다.고려란
명칭 자체가 바로 중국과 같은 뜻이니 만큼 정사서에 쓰여져 있는 큰 스케일의 고려가 현재의 대륙이 아니라고 한다
면,우리가 정사서라고 말하는 '고려사,요사,송사,오대사' 는 휴지조각이라고 말해도 된다.
18, 송사와 요사를 보면,고려를 침공한 요(거란)가 내분을 정비한 때는 聖宗인 耶律隆緖(983~1030) 시대였다.이때
송나라는 태종(976~997)시대 였고,고려는 成宗(981~997)시대였다.중원의 형세는 발해국의 잔당들이 섬서성 연안
부 지역에 '安定國' 을 세워 중원의 고려와 내통하고 있을 때였다.또한 성종13년(993) 이후의 고려는 사실상 요나라
의 속국으로 기록된다.이때의 송사를 보면 송의 태종 말년(997)이나 아직도 나라의 체계가 잡히지 않았었다.요는
성종 統和 17년(999) 7월 송나라의 서쪽과 서북쪽에 있던 안정국과 고려를 복종시킨후 안정을 찾자 중원의 또 한지
역을 탐내던 송나라를 토벌한다는 교서를 발표한다.이때의 송은 眞宗이 즉위한지 3년 째인 咸平 3년(1000)이 된다.
중원으로 진격한 요나라는 이후에도 전면전을 벌리지 않고 국경지역에서 국지전을 벌리는등 때를 기다리면서 휴식
을 취하고 있었다.때를 엿보던 요의 성종은 친히 대군을 이끌고 통화 22년(1004)에 대군을 이끌고 송나라로 진격 한
다.이날이 바로 같은해 윤9 월 갑자일로 20만 대군을 남하시켜 송나라를 떨게 만들었던 것이다.마치 고려의 현종이
벌벌 떨면서 도망간 것 처럼,송나라도 풍전등화의 형국이 되었다.고려의 현종과 조정처럼 송의 기득층들과 황제인
진종도 거란의 침략에 떨었다.물론 송의 조정도 강성의 거란군과의 전면전을 두려워 했다.거란군이 고려의 개경을
함락시켰을 때와 당시 송의 개봉과 고려의 개경 사정은 같았고 시대의 역사 이야기 전개도 비슷하게 흘러간다.이게
관연 우연일가?
19, 거란(요)군의 남하를 두려워 했던 개봉의 송조정은 진종을 비롯해 군신들을 모아 대책을 논의 했으나 대책과 대
안이 나올리 없었다.조정의 중론은 '천도를 하여 요(거란)와 싸움을 피하자는 의견이 대세' 를 점하는 형세가 되었다.
이때의 參知政事 王欽若(왕흠약)은 황제에게 잠시 '金陵(남경)' 으로 도망할 것을 청하고,진요수 같은이는 '成都' 로
파천할 것을 권하는 등 혼란의 연속상황이 이어졌다.반면에 재상인 寇準(구준)만 황제의 친정을 요청했다.구준은 왕
흠약과 진요수의 황제의 파천을 반대했다.이에 진종은 황하를 건너 북방으로 진군했으나 거란군과 싸우기에는 전력
이 너무나 허약했다.강성한 거란군을 상대로 전면전을 펼수없어 강화회담(澶淵의 盟)에 들어 갔다.關南(섬서성 남부)
의땅(강동 6주)을 거란이 돌려 달라고 하자,강경파 구준은 반대로 요가 점령한 북방의 유주와 계주의 16州를 돌려 달
라고 맞섰다.
더하여 거란은 송에 대해 臣 칭할 것을 요구했다.그러나 그럴수 없다는 것을 요와 송나라 조정이 더 잘알고 있었다.
전연의 맹으로 불리는 강화회담 체결 조건은 영토는 송나라의 요구와는 반대로 거란이자 요의 요구대로 영토를 현
재의 상태 그대로 두고 '宋은 遼나라에 매년 비단 20만필,銀 10만냥을 조공품' 으로 보낸다.그리고 송은 兄,요는 동
생이라는 관계를 맺는다는 송사의 기록이 있으나,반면에 요사의 기록을 보면, '宋이 요의 황태후를 叔母' 로 부른다
고 한 기록이 있다.이런 기록들을 비교 분석해 보면,이전쟁의 승자와 패자가 누구 인지는 자동으로 구분된다.송도
고려처럼 완패한 것이다.
20, 宋史와 요사,그리고 고려사를 참고하고 고려를 직접보고 썼다고 전해지는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 을 종합해
보면,고려인과 송나라 사람은 서로 구별할수 없을 정도로 같았다고 했다.즉 중국사의 송나라 사람과 고려사의 고려
인 구별을 못할 정도로 같은 나라 였다는 것을 시사한다.또한 고려의 서쪽은 요수가 흐르고 있고,고려의 동쪽에 여진
(금나라)이란 나라가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그렇다면 그 고려는 3면이 바다인 한반도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반도와
는 다르게 영토의 형세도 여러나라 들과 개이빨 처럼 맞물려 있었다고 쓰고 있다.遼史와 오대사의 고려열전을 보면
고려 강역의 크기에 대해 축소해 의도적으로 말하길 ' 동서가 2천리,남북이 1천 5백리' 로쓰고 있다.기록된 규모와 관
계없이 고려라는 나라의 모양세이자 강역의 형태가 '동서가 넓고 납북이 짧다' 는 것을 분명하게 한다.고려사의 스케
일이나 대륙사 원전들 기록이 말하는 진실은 남북이 길고 동서가 짧은 한반도는 역사의 고려 영토와는 어울리지 않
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21, 사실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까지 영향을 미친 초원의 유목민 국가였던 거란의 요나라가 반도란 협소하고 산악
이 많은 지대에 무엇을 뺏을 것이 있고 탈취 할것이 있다고,40만~80만 대군으로 그것도 3차에 걸친 대침략을 할 것인
가? 거란은 척박한 반도의 고려가 아닌 풍요로운 중원의 고려국 농경지대(황하유역)를 점령하고자 했던 것이다.역시
돈인 것이다.요사나 송사,그리고 고려사 모두는 쓰기를,遼의 야율씨 황제들과 대장군들인 소손녕과 소배압이 고려를
침략했던 것은 맞다.그러나 반도가 아닌 중원의 고려를 침략했었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거란의 장군들이었던 소
손녕과 소배압도 스스로 고려를 치기는 했으나 그들이 공격한 고려는 반도가 아닌 대륙에 있었다고 말한다.더하여 고
려말 홍건적의 침입이 있었을 때도 고려의 장군들은 홍건적들이 활개치는 지금의 안휘성과 강소성의 북부,하남성의
중앙부와 동부지역에서 싸운바 있다고 정서서가 쓰고 있음도 잊지 말자.역사는 기록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여러가지를 리마인드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현재를 비추어 역사에 대한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하지요?
거란이 어찌 망했는지 역사기록이 전무한것으로 봐서
역사갈라치기하다 꼬리부분이 없어지는현상이 아닐까 의심합니다
우리역사는 많은 갈라치기 현상을 볼수있습니다
명과 세종에 나라도 갈라치기로 명을 주원장에 몰고가고 세종에 나라를 조선이라 칭하고
진짜의도가 큰그릇을 작게 나누어 패대기치듯 옮겨버리고
그옮긴 공백에 새로운 역사를 넣는데 그자들이 바로 서양세력였다고 봅니다
지금으로서는 남아 있는 기록으로 말해야 하나 기록역시 갈라치기한 것들로
어떤게 진실이고 어떤게 장난질한것인지는
더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밝혀내야 할듯합니다
그러니까 송사도 고려에서 쓴것이라고 하는 말을 믿을수가 없지만 조광윤이 고려세째아들 광종과 동일 인물이고
티무르와 이성계가 동일 인물로 우즈베키스탄의 영웅아미르티무르왕조가 이성계의 왕조와 똑같습니다
이렇게 역사를 갈라치기로 다시만든 위조자들이 무엇때문에 그렇게 할수밖에 없었는지 알아야 할것으로 보입니다
올리신글 잘보았고요 저도 머리가 너무 복잡합니다 그만큼 공부하면 할수록 의문점이 많이 남기때문입니다
세뇌된 것을 벗어 내기가 힘들 겁니다.역사는 기록을 연구하는 학문이지요.공부의 정도가 어느정도 인지 모르나 원전을 중심으로 공부하시면 곧 의문점은 해소 될 것입니다.근본적으로 유목민들은 문자가 없어 역사의 기록들이 적거나 없습니다.20세기에 만들어진 역사서들이 대부분 입니다.참고가 되셨다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