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장소 : 약사암
일 시 : 2023.02.23(목) 10시,
참 가 : 강공수 김상문 김영부 김재일 나종만 박남용 양수랑 윤상윤 이용환 장휘부 정원길 등 11명
불 참 : 윤정남(어지럼 증)
회 비 : 100,000원(나종만은 산행 후, 점심 식사 않고, 문중회의에 참석함)
식 대 : 80,000원(장어탕 7, 애호박찌개 1, 김치찌개 1, 청국장 1)
잔 액 : 20,000원
이월 잔액 : 441,000원
총 잔액 : 461,000원
아침 일찍 윤정남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침에 어지러워서 일어날 수가 없어서 오늘 산행에 참여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지난 밤에 눈이 내렸는데 시내는 금방 녹아버리고, 무등산에는 녹지 않고 남아 있는 상태였다.
부곡정에서 9명이 만나서 산행을 시작하였다. 나무다리를 건너가는데 바닥이 얼어서 매우 미끄러웠다. 더구나 평평하지 않는 무지개형 다리여서 발걸음을 더욱 조심해서 디디지 않으면 금방 미끄러질 것 같았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종종걸음으로 건너야 하였다.
그런데 올라가면서 윤상윤 친구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인조(仁祖)가 용골대(龍骨大)에게 굴욕적인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를 행하였다는 것을 어느 영화에서 보았다고 하여서, 그것은 용골대가 아니라 청태종(淸太宗, 홍 타이지)라고 고쳐 주었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주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다시 한 번 종합적으로 언급할 예정이다.
약사암의 수양매실은 하얀 꽃망울들이 더 벌어져 피어 있었고, 어젯밤에 내린 눈이 그대로 하얀 밀가루를 뿌려 놓은 것처럼 암자 주위의 산야를 덮고 있었다.
오늘은 며칠 전, 내가 어느 정형외과에서 진료를 받으면서 느꼈던 의료인(醫療人, 의사 간호사 등 모든 의료종사인)들에게 쓴 소리를 하고자 한다. 나는 어깨가 아파서 그 정형외과를 찾았다. 나는 지난번에 <초음파 영상진단기>를 사용하여 주사를 진료를 받았는데, 이번에는 <초음파 영상진단기>를 쓰고 싶지 않다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손으로 만져서도 아픈 부위의 진단이 확실하므로 거기에 주사를 놓으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인데, 건강보험 비적용인 <초음파 영상진단기>를 이용하여 주사를 놓아서 환자에게 비싼 비용을 부담시키려 하는 것을 보고, 왜 의료인들은 인술(仁術)이라는 명목으로 저렇게 환자의 약점을 이용하여 돈을 벌려고 하는지, 그렇게 환자의 약점을 이용하여 번 돈으로 부를 누리면서 의료인들과 그 가족들은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은 어느 의료인이 한 말이다.
“아픈 사람한테서 번 돈, 함부로 쓸 수 없었다.”
경남 진주에서 반세기 넘게 ‘남성당한약방’을 운영해온 김장하(79) 선생이 대중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은 아니다. 39살이던 1983년 진주에 세운 명신고등학교를 1991년 국가에 헌납했을 때, 당시 가치로 100억 원이 넘는 자산의 기부를 다룬 미담 기사가 많이 나왔다. 하지만 세간의 관심은 금방 꺼졌다. 그의 기부가 거기서 끝났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는 인터뷰는 모두 다 거절해왔기 때문이다.
2022년 5월 말 60년간 운영해온 한약방의 문을 닫으면서, 30년 전 자신이 세운 <남성문화재단>도 마지막으로 <경상국립대>에 기증한 선생의 삶의 궤적이다.
처음 한약방을 연 그의 옆집에 살았던 이웃은 “이 동네 사람들 다 ‘김 약국’ 없으면 못 살았지. 돈 없을 때마다 금고처럼 갖다 썼으니까”라고 기억한다. 선생이 준 장학금으로 공부를 할 수 있었던 문형배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2019년 열린 선생의 깜짝 생일잔치에서, “(받았던 돈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이 사회에 갚아라.”고 했던 선생을 회고하다 끝내 목이 메었다.
선생은 “한약방에서 머슴살이하다가” 18살에 국가에서 시행한 한약사 자격시험에 합격해 이듬해인 1963년 경남 사천에 처음 한약방을 열었다. 다른 약국보다 싸면서도 좋은 약재를 써 효험이 좋았던 남성당한약방 약은 전국에 소문이 나 첫차가 다닐 때부터 앞에 긴 줄이 섰다. 선생은 많을 때는 직원 스무 명과 매일 새벽까지 약을 지어 큰돈을 벌었다.
선생의 도움으로 수많은 학생들이 고등학교와 대학을 마칠 수 있었고,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성과 아이들을 위한 쉼터가 세워졌으며, 길거리에 나앉아야 할 처지의 극단이 든든한 공연장을 갖게 됐고,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제작에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선생은 “내가 돈을 벌었다면 결국 아프고 괴로운 사람들을 상대로 해서 번 건데, 그 소중한 돈을 함부로 쓸 수 없었다.”고 사회 환원에 나선 이유를 설명한다. “똥은 쌓아두면 구린내가 나지만 흩뿌려 버리면 거름이 돼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는다.”는 그의 이야기는 돈에 관한 그의 철학으로 고스란히 포개진다.
그는 돈이 필요한 사람들 이야기를 들은 뒤 서랍 속 흰 봉투를 꺼내 몇 십만 원부터 몇 천만 원까지 넣어줄 때 별말이 없었다고 한다. 그가 10년간 매달 1천만 원씩 적자를 보전해줬던 <진주신문>이 좀 더 사회의 불의와 싸우지 못하는 것에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편집 방향에 단 한 번도 의견을 내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선생의 집에서 숙식하며 장학금으로 대학을 가 학생운동에 투신했던 조해정 부산대 교수는 “큰 지원을 받고도 공부는 안 하고 데모만 하는 데 대한 죄송함을 피력하자 (선생님은) ‘그것도 사회를 위해 기여하는 길이다.’라고 하시면서 존중해주셨다. 살면서 그런 지지를 받아본 적은 없다”며 눈물을 흘렸다.
우리는 다시 음악정자에 모여서 정지용의 향수(鄕愁) 노래 가사를 입을 모아 암송한 뒤에 부곡정으로 가서 점심을 먹었다. 1시간 동안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