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養山-無等山 장불재-立石帶-瑞石帶-證心寺 縱走(2-2): 서석대-증심사, 뒤풀이
(51) 서석대 전망대 입구
(52) 전망대에서 본 서석대 -천연기념물
제465호-
해발 1,100m에 있는 瑞石帶는 無等山 柱狀節理帶의 일부로 立石帶보다 풍화작용을
적게 받아
한 면이 1m 미만의 높이 30m의 돌기둥들이 東西로 50여m에 걸쳐 병풍처럼
펼쳐진 주상절리대이며, 노을이 질 때면 水晶처럼 반짝인다고 ‘서석의 수정병풍’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53) 전망대에서 본 서석대
‘瑞石’은 ‘선돌’의 漢字式 表現(音借用)으로 古代 선돌신앙숭배의 중요한 표상이었다고 한다.
(54) 서석대전망대에서 본 장불재와
백마능선
(55) 서석대에서 中峯으로 가는
길에 있는 돌기둥
(56) 서석대에서 중봉으로 가는
길의 불규칙한 돌계단
이런 돌계단 길 또는 돌길이 증심사까지 계속 이어져 더욱 부담이 컸다.
(57) 무등산옛길을 따라 내려간다.
(58) 목교 -해발
958m-
(59) 中峯復元地에서 본 중봉으로 가는 길
[↑중머리재
1.5km/중봉 0.4km, ↓입석대 1.2km/서석대 0.7km, 해발 911m]
(60) 중봉으로 가는 길
(61) 군부대 移轉址 復元
이곳은 1965년부터 軍部隊가 주둔하여 출입이 통제되었으나
1998년 군부대가 공원 밖으로
이전하여 1999년 地形 및 植生을 복원하였다.
(62) 無等山 中峯 -해발 915m-
(63) 중봉에서 본 백마능선-장불재
(64) 奇巖
(65) 멋지게 생긴 소나무
(66) 장불재갈림길, 뒤돌아 본 모습. [↖중봉 1.0km, ↑장불재 1.5km]
(67) 중머리재
(68) <중머리재> 표석 -해발 617m-
[←장불재 1.5km, ↓증심사 2.0km/토끼봉 1.7km, ↓새인봉 1.7km]
(69) 松風亭
(70) 당산나무
[보호수번호; 광주광역시
1982-3/수종; 느티나무/樹齡; 450년/樹高; 28m/나무둘레; 4.8m/
소재지; 동구 운림동
45/관리자; 증심사]
[↑증심교 1.0km, ↓중머리재 1.7km, →천제단(天祭壇)
1.0km, 해발 315m]
(71) 無等山 證心寺 一柱門
*證心寺 -광주문화재자료 제1호-
大韓佛敎 曹溪宗 제21敎區 本寺인 松廣寺의 末寺로 통일신라시대 澈鑒禪師
道允(798∼868)이 開創하고, 고려 宣宗 11년(1094) 慧照國師가 重修 했다.
조선 世宗 25년(1443) 金倣이 重修, 壬辰倭亂 때 燒失되어 光海君 1년(1609)
釋經∙修裝∙
道光의 三大禪師가 四創하고 그 후 信徒들의 정성으로 몇 차례 補修하였으나 6∙25전쟁 때
많은 부분이 소실되어 1970년 大雄殿을 비롯한 殿閣들이
복구되었다.
(*鑒: 거울 감 *倣: 본뜰
방)
境內에는 五百殿(광주유형문화재 제13호)∙三層石塔(광주유형문화재 제1호)∙五層石塔∙
七層石塔∙五百羅漢
및 鐵造毘盧遮那佛坐像(보물 제131호)∙
石造菩薩立像(광주유형문화재 제14호) 등이 있다.
(72) 무등산 證心寺 浮屠群과 碑石群
(73) 증심사 四天王門
(74) 證心寺 翠栢樓 築臺와 나무의 共存
(75) 無等山 證心寺 중심부
(76) 무등산 證心寺 大雄殿 (*문이
잠겨 있어 내부는 보지 못하였다)
(77) 證心寺 五百殿 -광주유형문화재
제13호- <문화재청 사진>
世宗 25년(1443)에 全羅監司 金倣이 五百羅漢과
十大弟子像을 奉安하고 마을의 편안함을
기원하기 위하여 지은 전각이다.
오백전은 대웅전의 뒤편에 세워진 법당으로, 현재 무등산에 남아 있는 사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며, 조선시대에 오백전이 지어진 절은 전남지방에서는 증심사가 유일한
것이어서 더욱 귀중한 전각이다.
(*시간이 없어 증심사를 자세하게 둘러보지 못하여
문화재청 사진을 올렸다)
(78) 光州 證心寺 鐵造毘盧遮那佛坐像 -보물
제131호-
<문화재청 사진>
彫刻手法으로 볼 때 뛰어난 작품은 아니지만 통일된 均衡美를 보이는 점이
우수하게 평가되며 鐵原 到彼岸寺 鐵造毘盧遮那佛坐像(국보 제63호),
長興
寶林寺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117호) 등과 함께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본래 전남 光山郡 瑞坊面 東溪里에 있던 것을 1934년 현 위치로 옮긴 것이며,
옮길 때에도 臺座와 光背는 없었다고 한다.
(79) 證心寺 三層石塔 -광주유형문화재
제1호-
<문화재청 사진>
증심사 대웅전 뒤 五百殿 앞에 있으며, 二重基壇의 삼층석탑으로 9세기경
통일신라 때 澈鑑國師가 證心寺를 창건할 때 조성한 것으로 통일신라의
石塔 樣式을 그대로 계승하였으며, 파손된 것을 1971년 12월
解體∙復元하였다.
(80) 證心寺 寂默堂
(81) 證心寺 地藏殿(왼쪽)-行碩堂(스님들의 修行空間인 것 같다.)
(82) 증심사 梵鐘閣
(83) 증심사(↖)-약사사(↗) 갈림길, 뒤돌아 본 모습
藥師寺(庵∙광주문화재자료 제2호)는 證心寺의 부속 寺庵으로 신라 道允이 文聖王 9년(847)
唐나라에서 귀국한 뒤 창건하여 人王寺라고 했으며, 고려 睿宗
때 慧照國師가 重創하면서
藥師庵으로 바꾸었다.
조선 哲宗 7년(1856) 性庵이 藥師殿을 重修하고, 1905년 善周가 觀察使 朱錫冕 등 관청의
도움과 시주로 중건했으며 1970년대부터
주지 石潭이 법당과 요사채 등을 중건∙중수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언제부터인가 ‘약사사’로 부르는 것 같다. 이 절에는 주위의 秀麗한
風光과 어우러져 參禪∙休養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冕: 면류관 면)
(84) <의재 문화유적지> 안내판
南宗畵의 大家로 詩∙書∙畵를 兼全한 毅齋 許百鍊(1891 ~1977)의 유적지이다.
許百鍊은 전남 珍島에서 朝鮮 末의 문관이며 書畵家 小痴 許鍊(1807~1892) 의 傍系孫으로
태어나 1912년 日本으로 留學, 1916년 일본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부친이 위독하여
1918년 겨울에 귀국하였다.
1922년 朝鮮美術展覽會에 처음 출품하였으며, 광복 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國展)
2회부터 13회까지 심사위원을 지냈으며 1958년 大韓民國藝術院 종신회원으로 선임되었다.
(85) 許百鍊 春雪軒 -광주기념물
제5호-
<문화재청 사진>
南宗畵의 大家 毅齋 許百鍊이 1946년부터 1977년까지 30년간 기거하던 집으로 이곳에서
작품활동을 하면서 國內外 名士들과 교류하며 지내던 곳이다.
춘설헌이 있는 자리는 일제강점기 때 東亞日報 편집국장이던 崔元淳이 身病을 요양하던
집으로 1950년
허백련이 무등산 새인봉 기슭에 있는 이 집을 사서 헐고, 새로 벽돌조 현대식
건물로 지었으며 현관을
들어서면 제주 출신의 서예가 현종화가 썼다는 〈春雪軒> 편액이
걸려 있고, 바닥에 장마루를 깐 대청과 그 왼쪽으로 2칸의 방은 아래칸은 온돌방, 위칸은
일본식 다다미방이다.
(86) 증심사계곡에 핀 개나리꽃
(87) 무등산지질공원 탐방안내센터
(88) 順興 安氏 永思齋
경북 榮州의 順興 安氏가 전남 光州에 入鄕한 시기는 安仁厚의 次子 珙이 4촌 형제인
貞愍公 瑭이
中宗 14년(1519) 己卯士禍로 화를 입게 되자, 충청도 觀察使職을 끝으로
光州로 낙향하면서 入鄕祖가 되었다고 한다. (*珙: 크고 둥근 옥 공 *瑭: 옥
이름 당)
(89) 순흥 안씨 영사재
(90) 순흥 안씨 영사재
(91) 증심사계곡
(92) 光州 傳統文化館
뒤풀이
(93) 자연산 엄나무 백숙전문 <무등골>
(94) 무등골에서 뒤풀이
(95) 무등골에서 경복산우회장의 건배제의 “We Love!” - “Nature!”
서울-광주
가고 오는 길
(96) 무등산으로 가는 길
(97) 논산-천안 고속국도 탄천휴게소
(98) 서울로 돌아오는 길
(99) 귀경길, 호남고속국도 井邑 녹두장군휴게소
- 끝 -
첫댓글 아 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고산의 답사기가 올라왔네요 난 힘들어 증심사 밑 길로 내려왓는데 덕분에 증심사며 여러문화재 잘 보았네요 수고해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