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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7월7일(금)흐리고 소나기
목욕하고 길을 나서니 소나기가 들이닥친다. 햇볕에 달은 아스팔트에 빗줄기가 쇄도하니 김이 무럭무럭 피어난다. 굴러가는 차바퀴에서 튀는 물보라와 도로에서 올라오는 김이 합쳐지니 물놀이 마당에 온 것 같다. 길옆으로 펼쳐지는 풍경에 녹색이 짙어졌다. 돌아와 방에 앉으니 후덥지근하여 가만히 있어도 몸이 끈적끈적하다. 물기에 젖지 않은 뻐꾸기 소리만 또렷하고 모든 것이 불유쾌한 느낌이다. 중생은 몸의 감촉을 먹고 살아간다. 身觸이 불쾌하니 만사가 불쾌하게 인지된다. 이럴 때는 덜 움직이고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다. 밤이 되니 빗줄기가 굵어지고 낙숫물소리 경쾌하다. 낮 동안 데워진 공기가 비를 맞아 시원해졌다. 하늘에 매달린 주전자에서 물이 쏟아지듯 비가 내리더니 이내 그친다. 요즘 비는 변덕이 심하다. 금방 쏟아지다가는 그치고, 그쳤다 싶으면 다시 왈칵 쏟아지기를 반복한다.
2017년7월8일(토)비, 흐림
아침 창을 열고 정진하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져 처마에 낙숫물 주렴이 드리운다. 마당에서 놀던 새가 마루로 날아올라 비를 피한다. 담장 밖의 키 큰 나무는 비를 맞아 호흡이 깊어지는지 어깨를 들썩이며 후우 후우 숨을 내뿜는다. 멀리 안대眼臺에 있는 점점 산들이 안개구름 속에 아롱거리며 羽化우화하려는 듯, 백룡이 기어가는 듯하고. 白虎백호 嶝등의 一字峰일자봉은 어깨가 든든하여 驟雨취우에도 의연하다.
빗방울 부서지는 소리가 선방에 가득 울린다. 聽雨청우sati에 몰입한 스님들에게 무너짐의 지혜(bhanga nana)가 일어난다. 보는 즉시 부서지니 이제 일어남은 거의 보이지 않고 사라짐의 국면만 뚜렷해진다. 모든 것이 경험되자마자 사라진다. 발을 디디면 발이 사라지고, 소리를 들으면 소리가 사라진다. 모든 것은 보이자마자 붕괴한다. 아, 무너지는구나. 잡아둘 것이 도대체 없어져 아쉬운가, 두려운가, 무서운가? 이것은 법이 보여진 것이니 담대 하라, 수행자여. 초전법륜을 듣고 제일 처음 깨달았던 꼰단냐 존자가 외쳤지 않느냐? ‘일어난 법은 그 무엇이든 모두 사라지게 되어있는 것’ ‘Yam kinci samudayadhammam, sabbam tam nirodhadhamman’. 이것을 명확히 아는 삼빠자나(sampajana, 확실한 앎)가 일어나면 대상이 무너지고, 대상의 무너짐을 보는 인식이 명료하게 자각된다. “아 무너지는 구나” 하는 사띠가 보이고, 다시 “이것도 무너졌구나.” 하는 그 사띠도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서 붕괴라는 것으로 드러나는 법에 대한 이해가 확립한다. 무너짐, 붕괴, 소멸을 빠알리어로 ‘방가(bhanga)’라 한다. 무너짐을 보는 지혜가 얻어지면 이제 돌아오지 않는 강을 건넌 것이다. 뒤를 돌아다보니 방금 밟고 온 다리는 이미 가라앉아 이제 다시는 뒤로 돌아갈 수 없다. 오직 앞으로 가야할 길만 남았다. 가자, 해탈과 열반의 길로, 사랑하는 님들이 가셨던 길 따라.
2017년7월9일(일)흐림 소나기
오늘은 또 어떤 날인가? 강변 백사장에 모래알만큼 널린 날들 가운데서 우연히 주은 한 개의 반짝이는 날인가? 숲속에 매달린 무수한 잎들 가운데 사슴이 따먹는 어떤 약초 이파리 같은 하루인가? 밥 먹다 목구멍이 메여 뱉어버린 밥알 가운데 땅에 떨어진 밥풀 같은 하루인가?
紅霞穿碧海, 홍하천벽해
白日繞須彌. 백일요수미
붉은 놀은 바다 밑을 꿰뚫고
밝은 해는 수미산을 돈다.
갑자기 광대무변한 우주적 시공간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천 개의 눈으로 보고 천 개의 팔과 다리로 세상을 경험한다. 그런 관점에서 다시 여기 무한 여백위에 찍힌 한 점으로 존재하는 나를 바라본다. 그러면 어떤가? 시공을 無限大에서 無限小로, 無限小에서 無限大로 줄였다 늘렸다하면서 시공을 가지고 논다. 생명활동은 緣起연기로 설명한다. 9류 중생이 6도를 윤회하며 펼치는 생명활동을 연기로 설명하니 밧줄 하나로 히말라야산맥을 묶어서 끌어당기는 無所畏力무소외력이요, 종교의 백가쟁명을 일시에 침묵시키고 천하를 평정하는 사자후이다. 연기게송, 환멸연기, 유전연기는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연기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업감연기, 아뢰야식 연기, 진여연기, 여래장 연기, 법계연기, 10현연기, 중중무진 연기를 말한다. 업감연기설은 업인과보의 3세윤회를 뒷받침하는 해준다. 나머지 아뢰야, 여래장, 진여연기설은 유출설 내지 전변설의 냄새가 나서 금구직설의 연기가 약간 변질된 感이 든다. 법계연기, 10현연기, 중중무진연기설을 화엄사상에서 유래한 것으로 현대 천문학과 철학과도 상통하는 수준의 설이라 불교문화의 산물이라 볼 수 있다. 이는 부처님이 설하신 연기의 외연적 확장으로서 초기불교가 가르치는 연기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戱論희론으로 떨어질 수 있다.
‘무아(無我)이므로 연기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연기 그 자체가 사실이자 진리인데, ‘무아이므로’ 라는 조건을 달 필요가 없다. 오히려 ‘연기하기에 무아이다’라는 명제가 더 자연스럽다. 부처님은 ‘연기(緣起)이므로 공(空)이다.’라고 하신다. 연기로부터 공을 말하는 이 사유의 방향은 일체의 환상을 깨부수고 모든 독단을 제거하려는 ‘존재부정을 위한 투쟁’이자, 환상을 좇아 온갖 고통과 불행을 자초하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자비심의 발로이다. 서양철학의 맥맥한 주류는 존재를 위한 투쟁(Struggle for Being)이며, 존재론적 확실성의 추구(Search for Ontological Certainty)이다. 이는 存在에 대한 강박과 집착이며 無存在에 대한 불안과 공포이다. 이것은 질병이다. 그런데 그들이 처방하는 해결책이란 神, 아니면 유물론, 아니면 우연론이다. 결국 그들은 신을 버리지 못한다. 존재와 무존재, 유와 무는 연기하는 현상에 불과한데 이것을 모르니 유무에 떨어진다. 유무의 함정에 빠지면 보는 관점이 좁아져 유무가 상통하기도 하고 유무가 적멸하기도 하는 경계를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다. 같은 땅 위에 살아도 딴 종류의 인간일 뿐이다.
*참고: 부처의 4무소외는
①일체지무소외(一切智無所畏):‘나는 일체 법(一切法)을 깨달았다’는 두려움 없는 자신,
②누진무소외(漏盡無所畏):‘나는 일체의 번뇌를 모두 끊었다’는 두려움 없는 자신,
③설장도무소외(說障道無所畏):‘나는 깨달음에 장애가 되는 것을 모두 말했다’는 두려움 없는 자신,
④설출도무소외(說出道無所畏):‘나는 괴로움의 세계에서 벗어나 해탈(解脫)에 이르는 길을 모두 말했다’는 자신.
아침 비가 그친 틈을 타 마당에 난 풀을 뽑는 울력을 하다. 밤에 다시 비가 내린다. 비속의 숲은 어머니가 젖은 머리를 풀어헤친 것 같아, 온 숲 속이 검은 머리 타래에 휘감겨 깊이 잠들리라.
2017년7월10일(월)비
아침 비 내린다. 빗소리 마음의 건반을 두드린다. 빗방울이 빛 방울이다. 소리를 듣는 마음이 빛난다. 하늘이 낮게 드리워 천지가 가라앉았다. 몸도 가라앉아 무겁다. 무거우면 누워서 중력을 분산시켜야지. 물이 되어 질펀하게 퍼질까, 땅이 되어 깊은 잠에 빠질까? 인도인들은 마음이 없는 무정물들에게도 영혼이 있지만 숙면에 빠져 있어 죽은 것처럼 보인다는 재미있는 상상을 했다. 만물이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두 잠들어 있다는 거다. 잠들어있지 않고 항상 깨어있다면 세상의 슬픔과 고통을 어찌 다 감당할까? 때론 가슴이 느끼지 않고 잠들었으면 한다.
비가 오는 건 세상에 슬퍼할 일이 많아 하늘이 대신 울어주는 것이다.
우리는 왜 함께 살기로 해놓고 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살아야 편한가?
우리는 왜 함께 살았으면 하는 사람과는 같이 살지 못하고 떨어져 있고 싶은 사람과는 들러붙어 살아가는가?
우리는 왜 행복하려면서 불행의 씨앗을 퍼뜨리는가?
우리는 왜 자신의 불행과 고통을 타인과 세상과 운명이나 우연으로 돌리면서 피해자임을 자처하는가?
自業自得자업자득이라면서 자기의 고통과 불행을 누구의 탓으로 돌리려 하는가?
자신이 세상 가운데 살아있다는 자체가 이미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고 있으며, 동시에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고 있다는 걸 아는가? 그래서 살아간다는 것이 마냥 즐거워할 일만은 아니며 송구한 일이 될 수도 있다.
오늘 한 개의 물방울이 먼 하늘에서 떨어져 나뭇잎을 구르다 땅으로 내려와 물로 뛰어든다. 숲을 빠져나온 물길이 개울을 따라 마을을 지나며 시냇물로 합쳤다가 다시 먼 길을 돌고 돌아 어디론가 흘러갈 것이다. 모두들 물은 흘러 바다로 간다고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바다에 이를지 아닐지를. 바다에 이른 물방울은 벌써 물방울이 아닌데. 물방울은 떨어질 때 벌써 ‘물방울임’을 떠나버렸다. ‘나’라는 망상에서 벗어났기에 모든 곳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할 수 있고, 어떤 것이라도 되었다가 빠져나올 수 있다. 그래서 물을 따라 흐르는 긴 여행은 물방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흐름 그 자체가 흐름의 방향을 잡아간다. 나는 ‘나’인 것을 포기했기에 ‘지금여기’로 있다. 내가 나인 것을 놓아버린 것은 부처님을 믿기 때문이다. 내가 ‘나’로부터 풀려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자유로운가?
2017년7월11일(화)흐림
며칠 동안 연이어 비가 내린다. ‘오뉴월 장마에 돌도 큰다.’는 말이 있다. 비를 계속 맞으면 돌조차 자란다니, 얼마나 시적詩的인 발상인가? 그러나 좋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나쁜 것도 따라다니는 법. 눅눅해진 방에 널어놓은 젖은 빨래가 마르지 않아 냄새가 나고, 비에 갇혀 며칠간 경행을 할 수 없으니 몸은 불어터진 국수처럼 축 쳐진다. 빗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스님들은 모두 말이 없어졌다. 빗소리 듣는 것만 해도 귀가 피로할 지경이니 사람의 입에서 나는 소리는 더 듣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다.
그런데 예기치 않는 장마 때문에 며칠간 산속에 갇혔던 옛 스님들이 그 자연적인 유폐기간동안 화두를 참구하여 깨달음을 얻은 사례가 불교사에 전해온다. 그런 유폐라면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무문관에 들어간 셈이니 참으로 법의 은혜를 입은 것이라 하겠다. 봉선사가 있는 양주 땅에서 출가한 無畏禪師무외선사(1792,정조 16년~1800,고종17)가 그런 스님들 가운데 한 분이다.
스님의 법명은 선영(善影), 자는 무외(無畏), 법호는 영허(映虛), 당호는 역산당(亦山堂)이다. 12세에 경기도 양주 학림암(鶴林庵) 용운승행(龍雲勝行)선사 문하에 들어가 스님이 된 후 강원 이력을 마치고 참선수행에 매진하였다. 21세 되던 해 한여름 천둥번개를 동반한 장대같은 비가 내렸는데, 3일째 되는 날 벼락 치는 소리에 크게 깨달았다.
무위한(無位閑: 심신이 청정해져 한가해지다)
松窓土壁溪邊地, 송창토벽계변지
白首緇衣懶一翁; 백수치의나일옹
意到忽然心自樂, 의도홀연심자락
朗吟閑步任西東. 랑음한보임서동
창밖에 푸른 솔 보이는 시냇가 초암에,
흰머리 검은 승복 게으른 노승 하나
마침내 한 경지 다다르고 보니 마음 절로 즐거워,
낭랑하게 읊조리며 한가로이 거닌다.
自樂자락의 경지를 누리게 되었다. 선정을 얻고 動靜에 일여하게 정진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월파공(月破空 : 달조차 부서져 한 물건도 없구나)
卓立庭前栢, 탁립정전백
長靑直聳空; 장청직용공
影從千古月, 영종천고월
聲任四時風. 성임사시풍
우뚝 선 뜰 앞의 잣나무,
창공으로 솟은 늘 푸른 모습.
천고의 달빛 따라 그림자 드리우고,
사계절 바람 좇아 소리를 낸다.
‘卓立庭前栢, 우뚝 선 뜰 앞의 잣나무’로 보아 스님은 庭前栢樹子-뜰 앞의 잣나무라는 화두를 참구했던 것 같다. 스님은 잣나무를 불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본 듯. 그래서 長靑直聳空-창공으로 솟은 늘 푸른 모습이라고 佛性의 공덕을 칭송한다. 그것은 공간을 꽤 뚫고 지금여기 눈앞에 생생하게 現前현전해 있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그런 잣나무-불성마저도 달빛에 비친 그림자라 했다. 그러면 그것의 원인이 되는 빛은 어디서 오는가? 달에서 온다. 그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닌 영원히 빛나는 千古月이다. 그러며 천고월이란 만상의 제일원인으로서 불성이 아닌가? 그렇다고 한다면 스님은 불성이 잣나무도 되고 천고월도 되는 신통자재한 물건으로 본 것인가? 그렇다. 스님은 그렇게 본다. 소위 ‘한 물건,一物’은 영원한 시간을 비치는 달이면서 시간과 장소에 따라 임기응변한다. 그래서 ‘사계절 바람 좇아 소리를 낸다.’고 했다. ‘달조차 부서져 한 물건도 없다’는 뜻에서 月破空을 게송의 제목으로 삼았다. 이 짧은 게송 가운데 선종문종에 회자되던 몇 가지 설화가 녹아있다. 그런 종류의 설화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면서 생각의 씨앗을 전수한다. 전해들은 것을 기억했다가, 그 기억한 것이 재료가 되어 구도심과 정진력으로 부글부글 끓으면 어느 날 ‘한 소식했다.’는 체험을 노래하는 게송, 悟道頌오도송이 튀어나온다. 무외선사의 깨달았다는 소식은 전형적인 선의 논리에 따른 것이다. 혹자는 아마도 月破空이란 제목에서 아직도 교리의 때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평하리라. 500년 동안 불교를 파괴하던 조선시대라는 한계상황에서 겨우 이어오던 선종의 깨달음이란 것도 시대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선사들의 깨달음을 고타마 붓다의 깨달음이나 아리야승가의 깨달음과 같은 수준에 놓고 볼 수는 없으리라. 조선시대의 선사들의 불교를 보는 지견과 안목에는 한계가 있다하더라도 가히 영웅적으로 불교를 지켜왔다고 찬탄하고 싶다. 조선시대 500년 동안 권력엘리트들 불교를 철저히 박멸하면서 유교이데올로기를 집단최면 걸 듯 집요하게 백성을 세뇌시켜왔다. 아마도 다른 종교 같으면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졌으리라. 그러나 가뭄에도 불구하고 콩 넝쿨 하나가 줄기를 아슬아슬 이어와 오늘에 이른다. 그렇게라도 살아남은 것은 대견하지만 척박한 환경에서 전해오는 콩의 품질은 왕사성의 보리수와는 다를 것이다.
오전 내내 흐리다가 오후 늦게부터 구름이 벗겨지니 푸른 바탕이 드러난다. 다시 찾은 靑天白日이다. 명고스님이 조상을 위한 천도재를 모시면서 대중스님들을 재에 초청했다. 월운스님께서 천도법문을 간단히 해주셨다.
2017년7월12일(수)맑음
비온 후 숲을 걸으면 지형이 바뀐 것을 볼 수 있다. 평소 다니던 길이 물에 패여 이리저리 지렁이 같은 물길이 나고, 말라붙었던 웅덩이에 물이 괴어 졸졸졸 흐른다. 물길이 휘어져 나무등걸 모퉁이를 돌아 물안개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본다. 새 한 마리 깃을 펴고 물을 적셔 날개를 씻는다. 새 입속에 머금은 한 모금의 물은 어느 구름이 내려준 빗줄기에서 유래한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긴 가뭄동안 말랐던 이 물줄기가 어디서 생겨났을까, 흐름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하늘 아래 첫 샘물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땅 밑에서 솟았겠지, 그러면 그 수분은 어디에서 왔나? 나무뿌리에서. 나무는 어디에서 수분을 얻었나? 묻고 물으면 돌고 돌아 무한 소급의 오류에 빠진다. 제일 원인은 알 수 없는 말이다. 그러면 묻는 방식을 바꾸어야한다. 존재가 아니라 관계로. 어디서 왔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있게 되었느냐고 물어야 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겨난다. 緣起가 모든 것을 설명하고 밝게 비쳐준다. 숲이 밝아진다. 눈도 밝아진다. 물을 머금은 새가 가볍게 날아오른다. 산책 나갔던 스님도 돌아온다. 소나기가 한 차례 지나가면 숲속의 지형이 바뀌듯 차 한 잔 마시면 내 몸의 지형도 변하겠지. 어떤 한 생각을 한 모금 마시면 마음에 어떤 흐름이 형성될까? 그리하여 업의 지형은 얼마나 어떻게 바뀔까?
業의 地形 topography of karma이라. 흠, 말이 멋있네.
진주선원은 저녁에 일광스님의 지도로 사물지족명상과 자기 동네자랑 명상을 성황리에 마쳤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선재, 선재, 선재.
2017년7월13일(목)맑음
비온 후라 공기 중에 수분이 함유되어 있다. 몸이 어항에 담긴 금붕어처럼 흐늘흐늘하다. 몸이 불어나 무거워진 느낌. 경안하지 못함. 이럴 때 정진을 해야 四大가 각성되어 몸도 마음도 민활하게 된다. 점심 공양하고 산을 한 바퀴 돌다. 물먹은 숲속은 생기가 넘친다. 산책을 다녀와 씻고 차 한 잔을 마신다. 정신이 구름 같이 피어나 눈은 멀리 본다. 오늘을 산다.
2017넌7월14일(금)맑음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거라 믿고 있은 것들이 다음 순간 거기에 없을 수도 있다.
항상 자기 곁에 있을 거라 믿었든 사람들이 다음 순간 빈 자리만 남긴 채 떠날 수도 있다.
사람들은 내 마음 같지 않아 언제 어떤 이유에서든 변할 수 있다.
설사 굳게 믿었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떠날 수 있고 배신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드린다. 그들 또한 자기 나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은 저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사람은 이익에 흔들리는 갈대이다. 중생은 나약하고 소심하면서 제 잘난 맛에 살아간다. 오늘 당신 밖에 없다면서 웃으면서 다가와서는 내일 별 것 아니네 하면서 떠나기도 한다. 내게로 올 때는 반겨 맞으면 되고, 내게서 멀어져 갈 때는 어디가든지 잘되라고 축원하면 된다. 사람들은 물 같이 바람 같이 오고가지만 사람에 대한 사랑은 나에게 그대로 남아 있다. 내가 사람을 믿고 사랑한 것에 무슨 잘못이 있을까? 사람에 기대를 걸지 않고 사람을 믿지 않으면서 무슨 불교를 가르칠 수 있겠는가? 바람도 숲을 지나고 물도 숲을 지나지만 숲은 항상 제 자리를 지키듯 나는 불교를 가르치는 자리에 남아 있으리라.
오늘 내가 살아있는 것이 확실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내일이 다시 오지 않을 수 있다.
지금 건강해 보이는 몸이 내일도 건강하리라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는가?
지금 이 순간이 견고한 실체처럼 보여도 다음 순간 어떤 이유에서건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아는가?
지금 밟고 있는 땅이 아무리 견고해 보여도 다음 순간 어떤 이유에서건 발밑이 꺼지고 대지가 통째로 가라앉을 수 있다는 걸 받아드리는가?
지금 이 순간 콧구멍으로 숨이 들락날락하니까 살아있는 것 같지만 다음 순간 어떤 이유에서건 마지막 숨을 내쉬고 죽을 수 있다는 걸 받아드리는가?
지금 살아서 이리저리 팔팔하게 쏘다니지만 다음 순간 어떤 이유에서건 바닥에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 할 수도 있다는 걸 받아드리는가?
사람들이 말하는 노후보장, 안정된 생활이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왜, 사바세계에 태어난 자체가 이미 불완전하고 불안정하여 다음 순간 어디서 어떤 일이 어떻게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제행무상의 진리에 완전히 항복하는 것이 생활안정이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감사히 받겠다는 티베트사람들의 기도가 제일 적절하다.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일이 나중에 생각해보면 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는 게 얼마나 많은가?
지금 내게 제일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들조차 죽음 앞에서 그 의미와 가치를 그대로 지니게 될까?
지금 내가 붙들고 놓치고 싶지 않은 것들이 세월이 간다 해도 그 의미와 가치가 변하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 있는가?
지금 그것을 잃어버린다고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픈 것들이 세월이 가면 빛이 바래어 별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밤비에 젖은 땅을 바라본다. 축축한 어둠이 숲을 적신다. 마음이 땅 밑으로 깊이 가라앉는다.
2017년7월15일(토)종일 비 내리다, 간혹 구름 깔리고
새벽부터 소나기가 따라 붓는다. 아침 먹고 나니 비긋고 산골마다 안개구름 피어오른다. 까마귀 소리만 허공을 두드리며 ‘살아있네’라고 우짖는다. 무엇이 죽었고 무엇이 살았나? 어제가 죽고 오늘이 산다? 쓸데없는 말이다. 자고로 생사를 자재한다며 큰 소리 치던 사람들의 말로는 어떠했는가? 거개가 용두사미요, 언행불일치다. 죽을 때 죽고 살 때 살면 되는 것을. 깨달은 도인은 생사에 자재하다는 말이 횡행하면서 인심을 들뜨게 하여 필요이상의 주목을 끌었던 일이 예전에는 많았다. 平凡하고 眞實하고 素朴하게 살고 싶다. 사람들의 눈에 뜨일 필요도 없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필요도 없다. 나, 물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간다고 했던 오마르 카이얌이 생각난다. 나, 물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가리라. 올 때 아무 것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처럼 갈 때에 몸과 마음과 모여진 쓰레기들을 태워버려 아무 것도 남기지 않으리라. 내 왔다간 흔적이 지구를 더럽히면 되겠는가? 한평생 살게 해준 것만 해도 은혜가 큰데.
오후 늦게까지 내린 비가 밤까지 추적추적 내려서 온갖 것을 젖게 한다. 젖은 것은 허물어져 가라앉는다. 가라앉는 것은 땅으로 기어들어 스민다. 스며든 것은 깊이 들어가 숨는다. 땅 속 깊이 숨어서 잠든다. 그렇게 대지는 잠들고 다시 꿈꾼다. 대지의 꿈은 무엇인가? 실뿌리를 타고 스며들어 나무줄기를 타고 높이 오른다. 나무는 하늘에 가 닿고자 손을 뻗는다.
2017년7월16일(일)비온 후 맑음
전국적으로 비가 많이 온다는 소식이다. 큰 절 연못에 백련이 여러 송이 피었다. 연이은 비로 물이 불어 도랑이 철철 넘친다. 뒷산에서 산비둘기가 구구 구구 울어 여름이 간다. 초복이 지나고, 중복은 엿새 남았다. 바야흐로 여름 더위는 정점을 찍고 있다.
집단무의식은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집단적으로 세뇌가 되면 일어나지 않은 일도 일어난 것처럼 믿게 된다. 역사적으로 그런 례가 한둘이 아니다. 특히 종교에서 이런 사례는 다반사이다. 죽은 예수가 재림했다든지, 성모마리아 상에서 피가 흐른다든지, 미륵이 하강했다느니, 우담바라 꽃이 피었다느니 하는 일들이 부지기수이다. 여기 선종에서는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 냈다. 達摩달마라는 불세출의 인도고승이 불교의 한 갈래를 가져와 중국인에게 전해주었는데 그게 禪宗선종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달마에 관한 인도 측 자료는 전무한데 오직 중국 측 자료에만 등장하니 실존인물로 삼기엔 부족하다. 그래서 불교문헌학자와 일부 선종사학자들은 달마는 실존이 아닌 가공의 인물이 아닐까 여긴다. 그러나 선사들은 달마가 실존했다고 철석같이 믿는다. 그래서 역대 선사들은 왠만하면 달마대사를 그리고 찬을 붙였다. 여기 서산대사의 달마찬이 있다.
達摩讚1(달마찬1) - 休靜 : 西山대사
剪雲爲白衲, 전운위백납 흰 구름 오려서 누더기 깁고
割水作靑眸; 할수작청모 푸른 물 떠다가 눈동자 삼았네.
滿腹懷珠玉, 만복회주옥 뱃속에 주옥이 가득 찼으니
神光射斗牛. 신광사두우 온몸이 밤하늘에 별처럼 빛나네.
達摩讚2(달마찬2) - 休靜 : 西山대사
蘆泛淸波上. 노범청파상 갈대 한 가지 푸른 물에 띄우고
輕風拂多來; 경풍불다래 가벼운 바람에 나는 듯이 오시네.
胡僧雙碧眼, 호승쌍벽안 호승의 한 쌍 푸른 눈앞에
千佛一塵埃. 천불일진애 천불도 한 알의 먼지일 뿐.
달마찬1은 達摩를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보기보다는 차라리 法을 뜻하는 다르마 Dharma로 본다. 그래서 우주가 곧 달마이고 달마가 곧 산하대지 일월성신이다. 화엄경의 법계연기요, 法身법신과 淨土정토가 둘이 아닌 도리를 노래한다. 지금 여기에 나타난 법(現法)에서 달마를 보는 서산대사는 어떤 경지인가? 日落西山月出東. 해가 서산으로 떨어지니 달이 동쪽에서 떠오르네. 달마찬2는 모든 것을 꿰뚫어서 해체해보는 혜안慧眼을 지적한다. 달마는 곧 혜안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肉眼육안을 가진 사람이라면 적절한 수행을 거쳐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경지라는 걸 보인다. 혜안으로 본다면 千佛도 一塵埃라. 천불도 한 알의 먼지일 뿐. 왜? 千佛이라는 것도 法境(意根의 대상이 되는)이요, 法相(개념에 대한 집착)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선사들은 사실 달마를 실존인물로 받아드리기보다는 現法을 보이기 위해 사용한 道具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달마도에는 그린 사람의 혜안이 드러나 있고, 아울러 그림도 있고, 글도 있고, 문자향도 깃들어 있으니, 이런 걸 <선문화>라고 한다. 선사들이 여가에 달마 한 점을 그려 제자들이나 신심단월에게 주었던 것이다. 요즘 달마도는 격조가 떨어져 볼 것이 없다. 불교가 수준이 떨어지니 달마도도 따라서 타락한다.
첫댓글 平凡하고 眞實하고 素朴하게 살고 싶다...평범한 진리 앞에 無所畏한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스님~ 어제는 스님께서 보내주신 편지를 해성보살이 옥구슬같은 목소리로 절절히 읽어주셨구요. 많은 도반들이 모여 방학과 가을학기에 대한 마음나누기도 하였습니다. 스님 제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진주선원의 버팀목이 되어주신 스님께 감사드립니다. ((()))
스님!
사라지는것에 허무함,애석함으로 발심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7월8일 일기에 연기에 깨달음과 삼빠자나 가 일어나면 인식이 명료하게 자각된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공부가 거의 완성의 단계에 든것이라 할수있습니까?
사라짐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아주 중요하다고 느껴집니다.
스님께서 정리를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문인이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니, 해제하고 진주 가서 이야기해요.
네 스님!
항상 건강하시고 해제날이 많이 기다려집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