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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NaAPoMPOevM
2025.8.3(주일설교) 눅 7:11~17 자기 백성을 돌보신(파카드) 예수님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구나 돌봄이 필요한 순간을 맞이합니다.
슬픔이 너무 커서 말도 못할 때,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
누군가가 다가와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를 위해 울어주고, 함께해 주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 속 나인성 과부는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녀는 남편을 잃고, 이제는 하나뿐인 아들마저 잃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남편과 아들은 단순한 가족이 아니라, 생계의 기반이자 사회적 보호망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이제 경제적·사회적으로 철저히 고아와 같은 인생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의 스트레스는 인간이 겪는 가장 큰 심리적 충격 중 하나입니다. 미국 정신과 의사 토마스 홈스(Thomas Holmes)와 리차드 레이(Richard Rahe)가 개발한 "사회적 재적응 평가 척도(SRRS, Social Readjustment Rating Scale)", 일명 홈스와 레이의 스트레스 척도에 따르면:
■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의 스트레스 지수:
배우자의 사망: 100점 (최고 스트레스 사건)
가족 구성원의 사망: 63점
친한 친구의 사망: 37점
이 척도는 43가지의 주요 인생 사건을 스트레스 점수로 환산하여, 점수가 높을수록 신체적, 정신적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위험이 크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삶의 균형이 무너지고, 정체성과 관계성에 큰 충격을 주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의 나인성 과부는 남편도, 아들도 모두 잃은 상태로, 그 당시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생계 수단까지 모두 무너진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16절은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는 선언으로 마무리됩니다.
16절에서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예수님께 대하여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이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여기서 돌보다는 헬라어는 에페스켑사토이고, 히브리어로는 ‘파카드’, 즉 ‘잊지 않고 찾아오다’, ‘돌보다’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돌보다’는 히브리어 ‘파카드’의 사용례를 보면
1) 창세기 2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이 구절에서 '파카드'는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방문하시고 기억하심을 뜻합니다.
사라는 나이 많아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이 그를 ‘찾아오시고’ 돌보시므로 이삭을 잉태하고 낳게 됩니다. 이 구절에서 파카드의 의미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개입과 생명의 회복입니다.
2) 룻기 1:6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함을 듣고”
흉년 중이던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은혜로 방문하셔서 양식을 주신 사건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의 회복과 자비의 돌보심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결핍을 아시고 채우시는 분이십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분이신지,
특별히 나인성 과부의 입장에서 경험한 돌보심이 무엇인지 함께 나눠보겠습니다.
1. 슬픈 마음에 찾아오시는 예수님 – 우리 아픔을 아시는 주님(11~13절)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13절)
과부는 남편을 잃고, 이제는 외아들마저 장례를 치르고 있는 절망적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먼저 그녀를 “보시고”(13절), 마음을 아시고 다가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인성의 성문에 들어서며 장례 행렬을 보셨습니다.
그러나 단지 무리를 보신 것이 아니라, 한 사람, 그 여인, 즉 아들 장례를 치르는 나인성 과부 한 사람을 보셨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여인의 존재는 종종 무시되었고,
특히 과부는 보호받지 못하는 계층이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 자신의 형편을 말하지 않았고,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침묵 속에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을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녀를 ‘보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돌보심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찾기 전에, 우리가 기도조차 하지 못할 때에도
주님은 먼저 보시고, 먼저 다가오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하나님의 돌보심은 우리가 찾기 전에 이미 시작됩니다.
혹시 나는 너무 힘들어 지금 아무 말도 못한 채, 고통을 혼자 품고 있지는 않다 할지라도 주님은 그런 나를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13절에 계속해서
예수님은 단지 장례 행렬을 ‘구경’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깊은 상실감과 아픔을 공감하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셨다”(헬, splagchnizomai, 스플랑크니조마이)고 하십니다. 이 표현은 ‘창자가 뒤틀릴 만큼의 극심한 공감과 사랑과 동정과 연민’을 뜻하며, 신약에서 오직 예수님에게만 사용된 단어입니다.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씀은 감정적 동정이 아닌, 그 사람의 고통에 함께 들어가 공감하시고 행동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나인성 과부의 슬품을 보고 단지 객관적으로 불쌍히 여긴 것이 아니라,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고통에 함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상처를 깊이 아시며, 그 자리에 함께하십니다. 그녀는 하나님이 자신의 고통을 잊지 않으시고 직접 찾아오셨다는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녀에게 다가가 “울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닙니다. 슬픔을 그치라는 강요가 아니라, 이제는 새로운 소망이 올 것임을 선포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돌보심은 감정적인 연민을 넘어서, 우리의 감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시는 사랑입니다.
우리도 슬픔에 빠져 울고 있는 사람들에게 “울지 마세요”라고 위로의 말을 건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말은 아무리 진심을 담아고 그 말이 실제적인 영향과 힘으로 나타나지 않고 말로 그칠 때가 많습니다. 진심과 사실을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울리 말라고 위로해도 울지 않도록 해줄 힘이 없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우리의 피상적인 위로와 다릅니다. 우리의 위로는 말로만 그칠 때가 많지만, 예수님의 말은 실제적인 힘이 있습니다. 이사야 55장 11절에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은 헛되이 내게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말씀에는 그대로 되는 힘과 권위가 있어서 그대로 되는 힘과 권위가 있어서 한 마디도 헛되어 돌아오는 법이 없습니다.
적용 질문) 내 마음에 슬픔과 고통이 있을 때, 나는 예수님께 그 감정을 열어드리고 있는가?
그분은 내 감정 속에 깊이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2. 죽음도 이기시는 예수님 – 다시 살게 하시는 주님(14~15절)
14~15절에 보면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그의 어머니에게 주시니”
당시 과부는 경제적 보호자 없이 생계를 이어갈 수 없는 사회적 약자였습니다.
아들을 잃는다는 것은 단지 가족의 슬픔을 넘어 삶 전체의 붕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을 향해 명령하십니다. “일어나라!”
이 한 마디에 죽음이 물러갑니다.
죽었던 자가 살아나고, 과부는 아들을 다시 품에 안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죽음도 순종하는 권위와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 무력하지만, 주님은 무력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죽음을 꾸짖을 수 있고, 죽음을 생명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런 주님이 울지 말라하시면 울지 않을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됩니다. 그리고 ‘일어나라’고 말씀하시면 죽음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14절에 관에 손을 대십니다. 관에 손을 대지 않고도 얼마든지 과부의 아들을 살릴 수 있습니다. 백부장의 종을 말씀으로만 고쳐주신 것처럼 죽은 과부의 아들도 “일어나라”라는 말씀으로만 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전에 죽은 시신이 들어 있는 관에 손을 대십니다. 민수기 19장 11절 이하의 말씀에 의하면 죽은 사람이나 그의 뼈 혹은 무덤이나 관을 만지면 사람이 부정해 집니다. 그런 율법 앞에서 주님은 사람들 앞에서 의도적으로 관을 만져 죽은 자가 초래한 부정을 자신이 끌어안으십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생명이 그저 주어지지 않고 죽음과 죽음이 불러온 모든 부정과 고통을 주님이 다 끌어안으신 결과로 주어짐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주님은 이제 관을 만져서 부정을 끌어 안으시는 정도가 아니라 십자가로 가져서 우리 대신 죽임을 당하셔서 사망과 죽음 자체를 끌어안으십니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죄가 가져온 모든 부정과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정결함과 생명을 주십니다.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신 기적은 그러한 주님의 은혜의 예표가 됩니다.
15절에 “그를 그의 어머니에게 주셨다”는 예수님의 행동은 단순한 인계의 동작이 아니라, 무너진 공동체와 정체성을 회복시켜주신 돌보심입니다.
과부는 자기 손으로 묻으려 했던 아들을 되돌려받음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옮겨지는 극적인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의 돌보심은 단순한 위로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분의 말씀에는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 청년이 살아나고, 어머니에게 돌아간 사건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돌보심(파카드)’이 실제가 된 순간입니다.
예화) 시골 교회 전도사님이 병든 아이의 병원비로 기도하던 중, 누군가 봉투를 놓고 갔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잊지 않으셨습니다”라는 짧은 메모와 함께. 그 순간, 그는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파카드 하셨구나. 기억하시고, 돌보고 계셨구나.”
적용 질문)
나는 정말 하나님의 능력이 내 인생의 현실에도 개입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는가? 주님은 죽은 자도 살리시고, 무너진 삶도 회복하십니다.
3.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은혜 –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시는 주님(16,17절)
예수님께서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사건은 단순한 한 사람의 문제가 해결된 일이 아닙니다. 이 사건은 마을 전체,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주는 놀라운 은혜의 물결이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눅 7:16)
1) 예수님의 돌보심의 은혜는 개인에게서 공동체로 확산됩니다.
예수님께서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신 것은, 그 어머니 한 사람만을 위한 돌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는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심령을 움직이는 기적이 되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신앙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는 나만 누리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내 삶을 통해 그 은혜가 퍼지고,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일으키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2) 사람들은 예수님의 돌보심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16절은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은 무서움이 아니라, ‘경외함’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올려드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돌아가도록 사역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어떤 일을 하든지,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는 믿음의 고백이 생깁니다.
많은 사람이 나인성과부의 아들을 살린 사건을 보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이것은 단순한 놀람이 아니라, 신앙의 회복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이 침묵하셨다고 느낀 사람들, 고통과 슬픔 속에서 하나님이 멀리 계신다고 느낀 이들에게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돌보고 계신다!”는 확신이 생긴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예배하며 고백해야 할 말도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나님은 나를 외면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내 삶 가운데 찾아오셔서 나를 일으키셨다!” 할렐루야~~
이 부분을 우리의 삶 속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 내가 받은 은혜는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입니다.
→ 여러분의 삶 속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을 말하십시오.
→ 회복된 이야기를 간증하십시오.
→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가 되어 주십시오.
* 하나님의 돌보심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 우리가 보지 못할 뿐, 느끼지 못할 뿐,
→ 주님은 지금도 우리 가정과 자녀와 교회를 자세히, 조용히, 깊이 돌보고 계십니다.
* 오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 슬픔 중에도 찬양하십시오.
→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 감사하십시오.
→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은 나를 돌보셨다!”고 믿음으로 고백하십시오.
예수님의 은혜는 개인을 넘어 공동체로 퍼집니다.
그 은혜는 사람들의 입술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합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셨다”는 신앙의 회복을 이루어냅니다.
오늘 우리도 같은 고백을 하며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속 나인성 과부는 세상 누구의 눈에도 중요하게 보이지 않았던 존재였습니다. 기쁨의 성, 즐거움의 성이란 이름의 나인이란 성에 살면서도 남편도, 외아들도 잃고, 미래의 희망마저 잃은 그녀는 장례행렬의 맨 앞에서 절망을 짊어진 채 조용히 눈물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예수님께서 다가오셨습니다. 그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말씀하시며, 손을 내미셨습니다. 그럴 때 죽은 아들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이 찾아오셔서 슬픔의 행렬, 죽음의 행렬을 기쁨의 행렬, 생명의 행렬로 바꾸어주셨습니다. 시편 30:11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이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눅 7:16)
예수님은 나인성 과부를 돌보셨을 뿐 아니라, 그녀의 슬픔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증거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은 마음의 상처로, 어떤 분은 가족의 아픔으로, 어떤 분은 삶의 무게로 인해 보이지 않는 장례행렬의 길을 걷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자기 백성을 돌보십니다."
그분은 우리 인생의 아픔과 눈물을 모르고 지나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향해 발걸음을 멈추시고,
우리의 상황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말씀하시고, 손을 내미시며 죽음에서 생명으로 일으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적용) 그러면 우리는 그 예수님의 돌보심을 어떻게 누릴 수 있을까요?
첫째, 예수님의 시선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무너졌다고 생각될 때, 예수님은 가장 먼저 나를 보고 계십니다.
사람은 몰라도 주님은 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시선은 곧 사랑의 시작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셔야 합니다.
"울지 말라." (눅 7:13)는 주님의 음성은 단순한 위로가 아닙니다.
그것은 회복의 시작이고, 믿음으로 붙잡아야 할 말씀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손길을 기대해야 합니다.
죽은 청년을 살리신 예수님의 손은 오늘도 죽어가는 마음, 식어버린 관계, 꺾인 소망을 만지십니다.
예수님의 손길은 죽음도 거부할 수 없는 생명의 손입니다.
오늘도 우리 인생의 장례행렬을 보시고 그 앞에 멈춰 서시는 예수님,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으로 오신 그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의 눈물은 주님의 돌봄과 기적의 출발점이 됩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경험한 우리의 삶도 세상에 선포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