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년간의 중일전쟁중 중국은 8명의 이급상장(별3개)이 전사했다고 하는데 당시 중국군에서 이급상장은 집단군사령관에 해당됩니다.(참고로, 원수에 해당하는 특급상장은 장개석 한명뿐이고, 그 밑의 4스타인 일급상장은 전구사령관, 3스타인 이급상장이 집단군사령관, 2스타인 중장이 군사령관, 1스타인 소장이 사단장 보직입니다. 군이 우리의 군단, 집단군은 우리의 야전군에 해당됩니다.) 그 중 한명이 40년 5월 ~ 6월간 벌어진 호북성 의창회전에서 전사한 제33집단군 사령관 장자충입니다.
이 양반이 장자충(1891~1940). 비록 숙적 국민당군의 몸이지만 대륙에서도 항일투사로 인정받아 북경시내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도 있고 그의 집앞에는 주은래가 직접 쓴 추모비도 있다고 합니다.("장자충路" 이런 식으로..) 우리나 북한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죠. 확실히 대륙인들이 대인배인듯...-.-(그렇다고 서울 한복판에 "김무정 거리" 이딴걸 붙이자는 얘기는 아님. 저 역시 반공세대라..) ※ 사진출처 : 위키백과 일본어판
군벌전쟁시절에는 풍옥상의 "13태보"중 하나라는 석우삼의 제6군에서 여단장을 지냈고 북벌전쟁, 이후 중원대전 등에서 싸웁니다. 만주사변이후 일본군이 화북까지 노리자 찰합이성과 만리장성, 수원성에서 이들과 여러차례 싸워 격퇴시키는 등 항일명장으로 명성을 떨칩니다. 중일전쟁 직전에는 찰합이성 주석과 천진시장을 지냅니다. 37년 7월 7일 노구교사변 당시 그는 제38사단을 지휘하여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입니다. 이후 이종인휘하 제5전구에 배속되어 제59군(풍옥상의 서북계열)을 지휘합니다. 그리고 38년 3월 태아장전투과 서주회전에 참가하는 등 화북의 주요전투마다 참전하여 큰 활약을 합니다.
한편, 중일전쟁이 장기화되고 만주땅에서는 관동군이 쥬코프의 소련군에게 아작나면서 전선은 사실상 교착상태가 됩니다. 일본군은 화북과 화중에 100만명에 달하는 병력을 전개하지만 대소전에 대한 부담과 국력의 한계로 극심한 병참 부담과 병력 부족에 시달리죠. 따라서 39년 이후부터는 작전을 바꾸어 무작정 닥돌하여 전선을 무한 확장하기보다는 적을 공격해 아작낸후 전리품만 털고는 빠지는 작전을 구사합니다. 이런 작전이 44년 대륙타통작전때까지 무한 반복되는 것이 중일전쟁의 양상이었죠. 이런 소모전은 전쟁 수행 능력이 딸리는 중국에게는 그야말로 피를 말리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른바 "의창작전", 중국에서는 "조의회전(조양-의창)"이라고 부르는 일본군의 호북성 침공작전은 39년말부터 개시된 장개석의 동계공세가 병력만 털어먹힌채 참담하게 깨진후 일종의 제한된 반격작전으로 시작됩니다.
※ 중국군의 동계공세에 대한 글을 보고 싶다면 ? http://blog.naver.com/atena02/100110444742
일본군은 지나파견군 산하 제11군(군사령관 소노베 와이치로) 4개 사단(제3, 제13, 제39사단, 제40사단)을 비롯해 수개 독립여단과 2개 전차연대, 중포병 1개 여단, 2개 비행단, 포함 수척 등 총 8만의 병력을 동원해 호북성을 관할하는 이종인의 제5전구를 목표로 합니다. 여기에 대항하는 중국군은 제5전구 산하 6개 집단군(제2, 제11, 제22, 제29, 제31, 제33집단군, 13개군 약 50개 사단 35만명)이었습니다.
삼국지시절에는 "형주"라고 불리었던 지금의 호북성. 중일전쟁기간 중경을 방어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서 중일 양국은 4번이나 치고 박는 소모전을 펼쳤으나 결국 44년 대륙타통작전으로 빼앗기고 말았죠...
호북성은 중국의 임시수도인 중경의 관문이자 무한삼진을 장악한 일본군에 대항한 최일선이었습니다. 또한 양자강 중류에 있는 항구도시 의창은 중국 최대의 병참기지이자 수로교통의 중심지기도 했습니다. 이를 방어하는 것이 "광서왕" 이종인의 제5전구였죠. 이종인은 전략, 전술적으로 매우 유능한 인물이었으나 그의 제5전구는 서주방면에서 일본군에게 계속 깨져 이 동네까지 밀려나온데다 연말 연초에 화중, 화남일대의 동계공세에 주력으로 동원되어 상당한 타격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당시 전형적인 장개석식 방어전략은 일단 최일선의 부대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낸후(물론 이들은 아작나겠지만) 일본군이 병참의 한계로 공세종말점에 다다라 후퇴를 시작할때 제2선에 배치된 부대가 추격하여 빼앗긴 땅을 되찾는다는 식이었습니다. 물론 기동성에서 열세인데다 제공권마저 없는 이들이 두발로 죽으라 쫓아간다고 차타고 돌아가는 일본군을 포위하거나 치명타를 가하기는 어려웠지만요.
5월 1일부터 일본군은 공세를 시작하여, 양자강 중류의 지류인 한수를 따라 제3사단이 필양으로, 제39사단은 다수의 토치카에 의존하여 저항하는 중국군 최일선을 돌파한후 조양을 손쉽게 공략하고는 한참 신나게 약탈을 한후 퇴근하듯 기지로 돌아갑니다. 중국군은 강력하게 저항하기보다 지연전술을 펼치며 일본군 진격로 측방으로 일단 물러나면서 반격을 준비합니다.
5월 10일 장자충의 제33집단군은 병력을 양분하여 의성에서 한수 동안으로 도하한후 철수하는 일본군을 추격하면서 이들의 병참선을 위협합니다. 또한 탕은백의 제31집단군(중앙직계군)도 북쪽의 일본군 제3사단을 사면에서 포위합니다. 그런데 중국군의 무선통신을 사전에 캐치한(중국군은 통신보안에 개념이 없었기에.. 일본군도 크게 다를바 없었지만) 일본군은 제33집단군 사령부가 장가집 부근의 고지에 있음을 파악하고 제39사단 231보병연대가 이들이 위치한 고지를 포위 기습합니다. 2시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에서 장자충은 직접 선두에 서서 진두 지휘를 했으나 일본군의 총탄 5발을 맞고 전사합니다.
제5전구의 우익을 맡고 있던 장자충의 전사는 제33집단군의 지휘체계를 마비시키고 중국군의 사기를 떨어뜨렸고, 손연중의 제2집단군, 탕은백의 제31집단군 등 타 부대의 공세도 일본군의 반격으로 큰 희생만 치루고 격퇴당합니다. 이종인은 잔존부대를 수습해 양양으로 후퇴하도록 명령합니다. 이를 일본군 제3사단이 추격하여 5월 19일 양양 부근에서 대파하고 이종인의 사령부가 있는 노하구 인근까지 진격합니다.
한편, 제39사단도 후퇴하는 중국군을 맹추격해 백하강까지 진격한후 20일 백하강 서쪽으로 도하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막 도하하자 사전에 매복해 있던 중국군이 이들에게 맹렬한 사격을 가했고 보병 제233연대의 연대장이 전사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고 격퇴당합니다. 또한 병참선이 한계에 직면하고 워낙 더운 날씨에서 강행군으로 공세 한계점에 직면했다고 판단한 제11군 사령관은 당초 도쿄의 대본영에서도 제한된 공세만을 허가했다는 명분으로 이쯤에서 적당히 끝내려고 하나 공명에 눈이 먼 일부 참모들이 "고작 그거 먹고 떨어진다면 우리 체통이 떨어진다"라며 의창까지 공격해 끝장을 내자고 강력히 주장합니다. 결국 이들의 고집으로 공세는 재차 시작되는데, 만주사변이래 일본군 중급 참모들의 오만함과 직속사령관조차 개무시되어 이들을 제대로 콘트롤 할 수 없다는 것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대목이죠.
5월 31일, 양양성의 중국군에 맹렬한 포격을 가하면서 제3사단, 제39사단은 한수서안으로 도하를 시작합니다. 다음날 양양성을 점령한후 남쪽으로 진격합니다. 장자충의 전사에다 이미 심각한 타격을 받은 중국군은 제대로 저항도 못한채 아작나서 후퇴합니다. 더욱이 중앙군과 군벌군의 혼성군대이다보니 개별플레이만 할뿐 서로간의 협조가 결여되고 조직적인 저항을 하지 못합니다. 이종인 역시 전구사령관을 맡고 있지만 장개석 직계가 아닌 광서군벌출신이다보니 현지부대에 명령과 지휘가 제대로 먹혀들지 않았고 전황 보고도 제대로 되지 않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조차 파악하기 어려웠습니다. 이것이 당시 중국군의 최대 약점이었죠
여기에 남쪽에서는 제13사단이 의창을 향해 서진하여 중국군에 대해 거대한 포위망을 형성하려고 합니다. 호북성의 방어선이 붕괴되면 당장 중경과 사천까지 위협받는지라 장개석은 급히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참모인 진성과 중앙직계군인 제18군을 증원하여 의창으로 급파합니다.
6월 9일 제13사단은 당양의 중국군 방어선을 돌파하였으나, 북쪽에서 남하하던 제3사단은 지형을 이용한 중국군의 강력한 저항에 막힙니다. 따라서 제11군 사령부는 제13사단에게 의창 공격을 명령하지만, 여기에 대해 제3사단과 제39사단이 강력 반발하자 타협책으로 이들의 병력 일부를 빼내 제13사단과 함께 의창을 공격토록 하죠. 그리고 6월 11일 저녁부터 공격이 개시되어 의창은 그동안의 폭격과 이들의 공격으로 만하루만에 함락됩니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제5전구에 대한 소탕작전이 6월말까지 계속됩니다.
의창작전 당시 양측의 작전상황. 빨간색이 중국군, 파란색이 일본군입니다. 왠지 삼국지에서 익숙한 지명들이 있어서 형주를 놓고 조조와 싸우던 유비가 연상되는군요. 참고로 저 아래 당양이 그 옛날 장비가 조조의 대군을 맞아 홀로 버텼다는 장판교가 있는 동네라고 합니다. ※ 사진출처 : http://baike.baidu.com/view/64419.html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중국군 피해는 전사 63,127명에 달했고, 총탄 1,200만발, 쌀 1만7415섬을 비롯해 막대한 연료와 탄약을 노획합니다. 이종인의 제5전구는 50%이상의 손실을 입어 사실상 파멸상태나 다름없었습니다. 반면, 일본군의 피해는 전사 1,403명, 부상자 4,639명으로 사실상 압승이나 다름없었죠.(반면, 중국측 기록으로는 중국군 37000명, 일본군 7000명이 전사했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중국에게는 심각한 타격이었고 장개석은 "항전이래 최대의 위기"라고 한탄합니다.
의창함락으로 일본군의 목적은 사실상 달성한 셈이었으나, 이를 계속 확보할 것인가를 놓고 논란이 일어납니다. 당초계획은 수비병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최대한 물자만 뽑아먹고 점령지를 포기한채 무한방면으로 도로 철수하는 것이었으나, 중경을 비롯한 중국 내륙에 대한 전략 폭격의 거점으로서 의창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결국 관철되죠. 또한 장개석은 진성에게 명령을 내려 호북서부지역을 제6전구로 편성하고 중앙군과 사천군, 서북군을 동원해 의창 탈환을 명령합니다. 그러나 공세는 일본군의 압도적인 반격으로 실패로 돌아가지만 일본군 역시 중국군을 포위섬멸하지는 못했고 다시 교착상태로 돌아갑니다.
1944년 대륙타통작전(일본명 : 이치고작전) 직전의 중국 전선의 형세도. 40년이후 전투는 국지전의 반복이었고 무익한 소모전만 계속됩니다. 37~40년까지 중국의 피해는 그야말로 치명적이었음에도 끝까지 버틴 중국이 대단한 것인지, 그러고도 이기지 못한 일본이 무능한 것인지 모르겠다는...--
※ 사진출처 : http://www.necrosant.net/zbxe/15221
[출처] 중일전쟁중 전사한 최고위 장성인 장자충|작성자 욱이님
|
첫댓글 첩혈고성이란 영화의 소재가 된 전투인가요?
그건 다른 사람입니다
중공이 대인배라기 보다는 승자의 여유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6.25때 북진통일 했었더라면 공산계열 독립투사들에게 좀 더 너그러울 수 있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