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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개장된 부산시민공원에서 [우윤근] 씨가 하야리아 부대가 있던 당시 상황을 회상하고 있다. 최원준 시인 제공 |
- 담장 하나 너머로 '호기심 반 부러움 반'
- 몰래 넘어가 구리 등 돈될 만한 것 슬쩍
- 사흘이 멀다 하고 물품 절도사건 빈발
- 정문 후문 외 샛문은 물자 밀반출 통로
- 항공모함 들어오는 날엔 상인들 집결
- 부대 앞서 왁자지껄 도떼기시장 형성
- 미국 독립기념일엔 축제 도가니 변해
- 인근 마을 사람들도 들어가 함께 즐겨
- 낯선 음식 먹어보고 공연·영화도 관람
- 시레이션 츄잉껌 초콜릿 얻어먹고
- 미군과 계약동거·집창촌·양키장사 등
- 우리 현대사 아픔 간직한 장소이기도
"저~기 국립부산국악원 건너 언덕배기로 미군들이 많이 살았어요.
스위스 집처럼 생긴 양옥도 있었고, 기와집, 슬레이트집 등에서도 살았지요.
주로 한국 여인과 살림을 차린 미군들이 부대를 나와 마을을 형성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도로와 인접한 곳으로는 미군이 출입하는 클럽들이 있었고요."
하야리아 정문 터에서 우윤근(81) 씨는 아스라한 눈빛으로 그 시절을 회상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부대 정문 오른쪽으로 장교 숙소와 그 뒤로 미군 사무동 콘센트 막사가 자리했습니다.
그 옆으로는 헬기장이 있었어요. 내가 아는 문관을 통해 부대에는 무시로 출입했었으니까 부대 지리는 훤하죠. 이 문관이 헬기로 부대 상공을 한 번 태워 주겠다고 했었는데, 그만 사정이 생겨 타지는 못했지요."
■ 간 큰 도둑들
미군부대 물품을 파는 도떼기 시장과 함께 '양키장사'들이 활동했던 옛 하야리아 부대 옆의 부산진구 범전2동 본동마을 전경. |
우윤근 씨는 1964년 대구에서 부산 하야리아 부대 근처로 이사 온 후,
50여 년을 하야리아 부대 사람들의 삶을 지켜보았던 이다.
그는 오랫동안 부대 근처 진양화학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우 씨가 미군과 인연을 맺은 것은 17살 전후인 한국전쟁 때였다.
그는 대구 영남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대구 동촌동에 있던
K2 비행장의 통역 심부름을 했다.
그 시절에는 고등학생들이 미군부대에 근무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쟁 중 모자라는 허드레 일손들을 내국인들이 도맡다시피 했다.
전쟁이 끝나고 10여년 후 하야리아 부근으로 이사를 온 우 씨는,
부대 밖에서 부대와 인연을 맺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대부분은 부대와 직·간접으로 관계를 이어가던 사람들이었다.
"주로 군무원이나 부대 노무자, 부대 앞에서 가게를 하던 사람 등 부대에 기대어 함께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죠.
이제 내 또래는 거의 다 죽었어요."
우 씨는 몇 개의 동네 친목계를 했었는데, 계원들 중에는
부대에 근무하던 문관, 초소 야간경비원, 부대 앞 술집 주인 등도 있었다고 했다.
"정희철이라고, 부대 초소에 야간경비를 하던 사람이 있었죠. 그 시절엔 도둑들이 극성이었다고 해요.
사흘이 멀다 하고 담 넘어 들어가 큰 물건은 아니지만 구리나 목재 등 잡다한 것들을 훔쳐 나왔다고 그래요.
부대 안에 들어가면 없는 게 없다고들 하던 시절이었으니까."
하야리아(Hialeah).
미국 인디언 말로 '아름다운 초원'이라는 뜻이다.
부대가 들어서기 전 이곳에는 일제가 운영한 [경마장]이 있었다.
일제가 패퇴한 뒤 새로이 진주한 이곳에서 미군들은, 고향의 푸른 초원을 보았을 수도 있을 터이다.
이는 미군들만이 아니고, 마을 사람들에게도 또 다른 의미의 이상향 '하야리아'였다.
물자가 넉넉하여 굶지 않는 곳. 고급 레스토랑과 영화관, 별의별 물건들이 산재해 있는 PX에다, 온갖 서양음식들과 양질의 생활용품, 가전제품 등이 끊임없이 샘솟듯 소비되는 곳.
말 그대로 꿈의 장소, 이상향의 공간이라 할 만했다.
"초소는 한 50여 미터 간격으로 설치를 했는데, 옛날 정문 쪽은 간격이 넓고, 지금의 정문 터에는 인적이 드물어 초소 간격이 좁았어요. 간 큰 도둑들은 정문을 통해서도 슬쩍 들어갔다고 해요."
■ 게이트 쓰리는 접촉창구
부대에는 [출입문이 3개]가 있었다.
정문과 후문, 게이트 쓰리(Gate 3)가 그것이다.
원래 [정문]은 부산진구청 앞 교차로 쪽 입구에 있었고, [후문]은 국립부산국악원 길 맞은편에 있었다.
후에 [정문]은 폐쇄되고 [후문]이 정문 역할을 하였다.
[정문, 후문]으로는 차량을 비롯한 공무 출입자들이 출입을 했었고, [게이트 쓰리]는 샛문으로 주로 사람들이 드나들었던 문이다.
"게이트 쓰리로 군무원들과, 부대노무자, 외부 용무자들이 출입을 했는데, 일반인들도 부대 안의 사람들이 보증만 하면 출입이 쉽게 허용되었어요. 나도 부대 사람을 통해 부대 안에서 햄버거도 사 먹고 영화도 보고 했지요."
때문에 '게이트 쓰리'는 부대 사람과 외부 사람들의 접촉창구였던 셈이다.
사람을 통해 부대의 물자들이 반출되고, 사람을 통해 서로의 문화가 오고 갔다.
그리고 그 앞쪽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부대 앞길에서 게이트 쓰리 통로까지 한 40~50여 미터 정도 되었지 아마. 그곳에 많은 가게들이 상가를 이루고 있었어요. 양복점, 세탁소, 어묵가게, 미장원, 양장점 등등. 가끔 항공모함이라도 들어올라치면,
부대 앞에는 물건을 파는 상인들과 상륙한 미군으로 도떼기 시장이었어요. 참 재미난 구경거리였지요."
[게이트 쓰리] 앞 가게들은 부대 안 사람과 부대 밖 사람들이 함께 사이좋게 이용을 했었다.
양복점과 옷가게는 주로 미군들이, 미장원·양장점은 미군부인이나 양공주들이, 어묵집은 부대 노무자들이
김밥과 함께 허기를 채우곤 했다.
"부대 앞에는 부대 노무자들이 자주 가는 술집들이 있었는데, 오후 5시 퇴근 무렵이면 노무자들이 들어와 한잔씩들 해요. 그리고는 부대에서 가져온 물건들로 계산을 하는 거예요. 미군 물건을 술과 맞바꿔 먹는 거지요."
■ 도떼기 시장의 '양키장사'
당시 하야리아 부대 내의 미군들 생활 모습. 국제신문DB |
하야리아 부대를 추억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음성적으로 거래되던 미군 물품들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국제시장을 중심으로
미군부대 물품들이 암거래된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
"미군 물건을 사고 파는 사람들을 '양키장사'라 했어요.
그들이 미군과 사는 한국여인들에게 술, 담배, 과일, 식료품, 전자제품
등 온갖 부대 물건들을 부탁해요. 그러면 그 여인들이 미군에게 받아
이문을 남기고 파는 거지요. 한때는 '양키장사' 단속이 심했어요.
벌금도 물리고, 구류를 살리기도 했지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미군 물품은 부대 인근에서 화폐의 역할을 했다. 부대 안의 사람들은 부대의 물건을 가지고 나와 현금처럼 사용하였고,
부대 바깥사람들은 이를 받아 적당한 가격으로 되팔았던 것이다.
특히 부대 안 물건은 면세라 가격이 아주 쌌다.
품질도 좋고 가격도 싸고 하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래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음성적이긴 했지만 부대와 마을의 동거는 높은 담을
사이에 두고도 활발했다.
불법 반출된 미군 물품 뿐 아니라 미군과 양공주들의 계약결혼이나
부대 부근의 집창촌 300번지의 성업과 성병 등이 그것을 증명한다.
이러한 왜곡된 부대 안팎의 소통이, 부산 현대사의 뒤안길 속에
가슴 아리게 스며들어 있다.
■ 미군과 결혼해 미국 가는 게 꿈
김해경(51) 씨는 국제결혼을 한 언니의 남편, 미국인 형부를 통해 두어 달 정도
하야리아 부대 내에서 생활을 했다.
친정 어머니가 병중이라 첫 아이 출산 후, 부대 안의 형부 부부 사택에서 산후조리를 한 것.
형부는 직업군인으로 부대 내 부사령관급이었다.
"형부가 독일 미군부대에서 근무할 때, 간호사로 파견된 언니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했어요.
그 후 쭉 미국에서 살다가 1988년인가? 형부가 하야리아 부대로 발령을 받아 이곳으로 온 거죠.
처녀 때 가끔 형부 집무실에 들어가 보면, 그 규모나 실내장식 등이 으리으리 했었어요.
서울이나 대구 미군사령부에 갈 때는 헬기를 타고 다녔고요.
어린 나이에도 형부가 중책을 맡은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낮은 언덕 위에 자리한 사택은 외화에서나 볼 수 있는 미국 중류층 주택 수준이었다고 한다.
단층 주택에 방 3개와 거실, 욕실 등을 갖추고, 주택 앞에는 주차장과 잔디밭이 있는 구조였다.
"워낙 부대 안 복지수준과 문화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 편안하게 몸조리를 했어요.
일주일에 몇 번씩 집 안 청소를 해주러 오는 한국 노무자의 도움도 많이 받았고요."
김 씨는 두어 달 산후조리 할 때를 포함, 형부가 하야리아에 근무하던 2년여 간을
무시로 부대를 드나들었다고 했다.
3명의 조카들과 지내며 부대 사람들의 모습들을 누구보다 유심히 살펴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오전 10시 쯤 되면 청소하는 한국인 아저씨가 출근을 해요. 그리고는 오후 3~4시까지 집안 청소도 하고,
부대 밖 시장에서 장도 봐주곤 했어요. 미군간부 부인이 한국인이면 대신 통역도 해주고, 필요할 때는
간단한 한국요리와 대리운전도 해줘요. 필요한 것은 부탁만 하면 거의 다 들어줬어요."
부대 내 한국인 노무자들은 다양한 직종과 폭넓은 업무에 종사하고 있었다.
김해경 씨 말대로 부대 내 청소 일 등을 하는 일반 잡역부부터 카투사, 군무원, 통역, 야간 초소경비, 세탁소, 클럽 밴드마스터, 식당 등 부대 핵심 파트 이외에 모든 분야에 걸쳐 다양한 일들을 맡아했던 것이다.
"형부 부부와 함께 장교식당에서 스테이크도 먹고, 클럽에서 위문공연 오는 유명가수들의 공연도 보곤 했어요. 파친코(슬롯머신)도 하고 빙고게임도 하며 참 재미났죠. 영화는 원어로 상영하는데, 새 영화가 들어오면
한국인들도 많이 보러 왔어요. 특히 한국 아가씨들이 미군들 에스코트 받으며 많이 출입했고요.
아가씨들은 사병클럽에도 자주 드나들며 미군들과 데이트를 즐기곤 했는데, 그중 많은 수가 '미군과 결혼해서
미국으로 가는 게 꿈'이라고들 했었어요."
■ 없는 게 없는 미군부대
이렇게 부대 안의 [미국 대중문화]는 부대 밖 사람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부대 안의 인맥을 활용하여 부대 안으로 들어가려고 애를 썼다.
'호기심 반 부러움 반'으로 그들의 대중문화를 무조건 수용하고, 그들의 제품을 애용하면서, 잠시나마
팍팍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다.
"부대 안에는 없는 게 없었어요. 타운 하나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았지요. 대중문화 시설뿐만 아니라
초중고 학교도 있었고, 축구장, 농구장, 볼링장 등 운동시설과 대형마트도 있었어요.
부대 내의 모든 것이 다 자급자족 되도록 되어 있었어요.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미제'니까 사람들이 더 부러워들 한 거죠."
김해경 씨는 산후조리 후에도 미군 직계가족들에게 발급하는 '패스카드'로 게이트 쓰리를 통해
부대를 드나들었다.
언니가 게이트 쓰리 앞의 어묵을 몹시 좋아해 싸들고 가기도 했다는데, 그 비법을 물어보니
'국산 천일염을 볶아 국물을 빼기 때문에 시원하고 맛있다'고 말했단다.
지금 그 어묵집은 꽤나 큰 규모의 어묵체인점 사업으로 번창하고 있다.
"미군들은 양복 맞추는 걸 아주 즐겨 했어요. 워낙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 있다 보니, 저들에게 맞는 기성복이
잘 없어요. 게다가 양복 기술 좋지, 가격 싸지 하니까, 특별한 날마다 게이트 쓰리 앞양복점에서
몇 벌씩 맞추곤 했지요."
그만큼 게이트 쓰리 앞 상가 사람들의 실력과 솜씨는 대단했다.
세공기술이 좋은 금방이 그랬고, 육수가 시원한 어묵집이 그랬다.
이들 중 몇몇은 시내로 진출하여 크게 성공하기도 했단다.
"미국 독립기념일에는 부대 전체가 축제로 들떠 있었지요. 부대 밖 마을 주민들이 죄다 들어와 인산인해를
이뤘어요. 밤 하늘을 수놓는 불꽃축제도 벌어지고, 햄버거와 소시지, 칠면조, 바비큐 등도 팔고, 가수들
공연도 신이 났지요.
다시 말하지만, 그 시절 부대 밖의 사람들에게는 부대 안의 이러한 풍족한 삶이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부대 안의 미군들을 공연히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군부대 주변은 달콤한 꿈과 희망의 공간이기도 했지만, 주둔세력으로서 온갖 강압과
일방적 횡포를 일삼았던 장소이기도 했다.
그러하기에 부대 주변 사람들은 하야리아 부대를 애증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씨레이션'과 '츄잉껌', '초콜릿'을 나눠주던 곳이기도 하면서, '집창촌'과 '양공주'와
빈번한 미군에 의한 사건사고로 점철된 장소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제 이곳 하야리아 부대는 역사의 뒤편으로 서서히 사라져 간다.
이미 이곳은 부산의 꿈을 모은 시민공원으로 재탄생되었다.
하야리아가 우리에게 있어 어떤 의미든지 간에, 우리의 현대사 속에 한 페이지를 기록한 장소이다.
때문에 하야리아와 함께 그 주변 사람들의 '삶의 기록'도, 우리 후손들에게 올바르게 남겨줘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인 것이다.
최원준 시인
※ 공동기획 :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부산시설공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