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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홍기자! 6.25때 아버지가 인민군에게 학살당한 이래 어려움을 안고 중학교도 다닐 수 없었던 윤재홍이 검정고시로 중학교 졸업을 인정받아 서울에 있는 야간고등학교를 다녔다. 이때 신문사 사환으로 취직 고등학교와 대학을 나오고 마침내 KBS 방송기자가 되어 사회부기자, 정치부차장, 전국부장, 사회부 기동취재부장, 해설위원 등핵심기자로 활동했다. 그는 방송국 정년후를 생각하면서 교수가 될 꿈을 안고 국내외 대학에서 석사, 박사과정을 거쳐 방송국 퇴직과 함께 교수가 되어 70세가 된 2016년 3월 현재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방송인 탐방 윤재홍기자(교수) 가난과 시런을 해처온 세칭 아프리카 추장 필자가 방송생활중 윤기자와 인연은 있었어도 깊은 내용까지는 잘 몰랐다. 2011년 6월 28일 윤기자가 출판기념회를 한다기에 현장을 찾았다가 그 기념회 진행과정을 보면서 그의 시련과 역경을 이겨낸 그의 삶에 감동되어 동영상을 제작, 세상사람들에게 알린 적이 있었고 그 글을 보신 분들은 감동했다. 그로부터 5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 2016년 2월 22일 동갑내기 고희를 맞은 이양구 프로듀서와 함께 윤재홍기자를 사무실에서 만나 얘기를 나누고 현재 살고 있는 연희동 저택까지 방문하면서 살아온 얘기를 보고 들었다. 지금 듣고 계시는 얘기는 그날 윤재홍기자로 부터 들은 얘기의 일부를 올린것이다. 30년간의 방송, 13년간의 교수생활을 한 70세의 윤재홍기자는 오늘도 쉼없는 삶을 이어간다. 성균관대학교 언론 정보대학원 초빙교수, 경기대학교 외래교수, 가나문화콘텐츠그룹 부회장. 리빙TV의 사실상 대표역할을 하는 상임고문, 육아방송 고문을 맞는 등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사양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어린시절, 젊은시절은 6.25때 아버지를 잃고 가난과 시련 그것이었다. 윤재홍은 말한다. 「가난과 역경이 성공의 열정을 불렀다. 6.25전쟁때 아버지를 잃고 가난한 유년을 보낸 나는 고등학교에 가겠다는 일념으로 보따리 하나를 들고 무작정 상경했다. 낮에는 신문사에서 사환을 하며 학비를 벌고 저녁에는 야간고등학교를 다녔다. 거처가 없던 나는 신문사 여러분의 도움을 받아 신문사 사무실에서 생활했다. 사무실 한구석에서 신 김치와 곤로밥으로 허기를 달래고 딱딱한 책상에서 무거운 몸을 가로뉘어 잠들었다. 한겨울 추위 앞에서 의지 할거라곤 남대문에서 산 군용 모포뿐이었다. 그시절 추위는 무엇에 비할 수 없을만큼 혹독했다. 생각해보면그 시절은 사시사철 추웠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가난한 고학생의 마음에 찬 바람이 불었다. 그 추위에서 나를 버티게 한 것은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었다. 스물 여덟살에 홀로되신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 드리겠다는 생각, '호로자식'이라며 무시했던 사람들 보란듯이 성공해 집안을 일으키겠다는 생각, 이 두 생각으로 나는 삭발을 하고 책상에 몸을 묶어가며 악착같이 공부했다. 그리고 몇년의 혹독한 시련을 겪고 가난했던 고학생은 대한민국 최고방송사의 기자 그리고 교수가 되었다.」 문화방송에서 1975년 KBS 경력사원으로 옮겨간 윤재홍 기자, 경력사원으로 옮겨간 기자생활이 쉬운일은 아니었다. 윤기자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열정을 불태웠다. 1978년 KBS 사회부기자시절 전국사이비종교의 자연훼손실태를 특종보도 하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자 박정희 대통령은 이에 관한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각료회의를 열어 사이비종교의 자연훼손 대책을 강구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그의 끈질긴 취재력과 성과가 인정되어 방송보도 특종상인 방송대상을 받았다. 이때 김학영 사회부장이 윤재홍기자 특종을 축하하는 사회부 회식자리에서 윤기자를 칭찬하면서 아프리카 사막에 떨어뜨려도 1주일 안에 추장이 되어 나올 사람이라고 말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로분터 윤기자는 별명으로 '윤추장'으로 불렸다. 20011년 경기대학교를 정년퇴직하면서 '아프리카 추장이 되었다.' 라는 이름으로 자서전을 내어 6월 28일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윤기자의 동료기자이기도 했던 김인규 전 KBS 사장은「이프리카 추장이 되었다.」자서전 추천사에서「윤교수는 마약중독실태를 고발하기위해 술집의 여자화장실을 뒤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고 보도특집 취재중에는 다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하는 등 임무를 다 하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는 천생기자였다.」라고 썼다. 그때의 출판기념회에서는 신순범, 유선호, 최불암 등 각계 인사가 축사를 해 주었고 형제처럼 지낸다는 국회의원 신순범은 윤재홍기자의 삶이 고햑을 해서 국회의원이 되기까지 살아온 자기자신의 처지와 닮은점이 많아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고 했다. 윤재홍기자가 요악한 삶의 내용을 올렸다. 2011년 현재로 윤재홍이 쓴 글이다. 방송기자 30년을 하다보니 하는일도 많았고 만나는 사람도 많았다. 방송인 윤재홍은 기자라는 직업을 진정으로 사랑 했다. 고 했다. 기자생활 30년간 거지부터 대통령까지 여러부류의 사람을 만날 수 있었고 희대의 살인사건부터 선진국 정치문화까지 다양한 일을 경험할 수 있었다. 다치기도 하고 몇번의 죽을 고비도 있었지만 보람과 긍지, 자부심으로살아왔다. 고 했다. 정치부기자 3년동안에는 많은 정치인과 만나 얘기를 나누고 친분을 쌓기도 했다. 때로는 정치를 하라. 국회의원을 하라. 유혹도 있었지만 방송 한길을 걸었다. 교수를 할때도 방송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3김시대의 주역,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그리고 역대 대통령을 지내신 분들 모두 취재대상으로 혹은 친분으로 만났다. 그 중 사진 몇장을 올렸다. 김포공항에서 유럽순방을 앞둔 윤보선 전 대통령을 만나 인터뷰를 했다. (1982.10) 김대중 대통령과는 친분이 깊었다. 아래 사진은 여수방송국장시절 여수에 들른 김대중 대통령과 한 행사장에서 만나는 장면이다. (2000년 1월) 위는 김영삼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시절 신년 하례식에서 만나 담소를 나누는 장면이고. (1991년 1월) 아래는 제주 방송총국 보도국장시절 김영삼대통령이 조깅을 하기위해 제주 제일고등학교 운동장에 나왔을때 만나는 장면이다.(1994년 9월)
윤재홍 기자는 3김시대 김종필 신민주 공화당총재시절에 3년간 출입기자를 하면서 김종필총재와 정치부기자로서의 돈독한 대화를 나누면서 많은 정을 쌓아왔다.
정치부 차장시절 연희동 친목모임인 건우회 대변인으로 활동하면서 건우회 고문 노태우대통령 후보와 함께 한 사진(1987년 11월) 위는 제주방송총국장시절 한 행사장에서 노무현대통령 (2000년 초)과 만나는 장면이고 아래는 홍보실장시절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방송의 날 기념식에 참석한 이명박 서울시장을 만나는 장면이다. (2002년 9월) 윤기자는 기자 재직시절 바쁜 틈 시간을 활용 실무를 바탕으로 세권의 저서를 남겨 자서전 '아프리카 추장이 되었다.' 와 함께 교수 재직시절이나 사회생활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때 쓴 책 신문방송기사문장 (언론연구원총서), TV뉴스 취재에서보도까지 (커뮤니케이션북스), 방송기자로 성공하는 길 - 입사시험에서 데스크까지- (기린원) 위 아래 사진을 올렸다. 서예는 그의 인생에 중요한 삶의표상 이다. 여가시간을 활용해서 익힌 서예솜씨는 아마츄어 수준을 넘은지 오래이고 지금은 전문 서예가로도 활동하고있다. 이에관한 사연은 위 아래 별도로 올린 서면에 있고 끝부분에 작품 몇점을 골라 올렸다. 사무실에서 얘기를 듣다가 윤기자가 사는 연희동 자택을 방문했다. 조용한 한옥 주택가 전두환 전 대통령 사저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비교적 큰 단독주택으로 2,000년 IMF로 어려움을 겪던시기 6억원을 주고 산 집이지만 지금은 꾀 값나가는 집이 되었다고 했다. 소나무 등 운치있는 정원수가 우거진 이 집은 가끔 KBS와 SBS 인기 TV드라마 촬영 장소로도사용된다고 했다. 밖에서 보면 2층집 이지만 안에 들어가 보니 지하공간에 새로운 특별한 서재, 노래방, 피아노방, 홈바 등 다양한 생활공간으로 잘 꾸며져 갖추어져 흠잡을 데 없는 생활공간이었다. 그 넒은 공간을 내외분 단둘이 살기에는 부담스러울법도 하지만 집안을 돌아보니 빈 자리가 없을 정도로 가득 차 있었다. 삶의 발자취를 고스란히 정리해 놓은 어찌보면 개인 박물관이었다. 작은 물건 하나라도 손에 들어온 불건들을 모아 잘 정리해 노은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오래된 물건 필요없다며, 귀찮다며, 버리는 세태와는 다른 면모를 보았다. 지하의 남은 공간에는 HOME BAR 까지도 마련 해 놓았다. 아래 따로 사진을 올렸다. 이양구 프로듀서와 필자에게 집 내부를 설명하는 윤재홍 기자 윤 재 홍 (尹在洪-Yoon Jae Hong)기자 약력
관련글 보기 영문자 클릭 윤재홍기자 (교수) 삶과 출판기념. 서예전 (동영상) http://blog.daum.net/jc21th/17780871 화 보 윤후현(팔방미남) 선생님 같은 성씨(尹)로 저의 숙부 학렬인 재(在)자 이시군요. 방송국기자, 국장님, 대학교수님, 서예가, 등 다양한 직업과 예능소질을 겸비하셨으며, 학력과 경력,약력 또한 화려합니다. 글을 보다가 두 마디 문장, "소년은 늙기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렵다.~"와 "태공왈,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천하게 보이고~"가 눈에 확 들어옵니다. 가난은 임금님도 못 구한다.는 속담이 있는데 어렸을때 가난이 오히려 성공을 이루는 원동력이 되었군요. 시작하여 대학진학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학업에 대한 열정이 남달라서, 중학교 때 한문은 명심보감 까지 배우고 (한자 1급 자격증 소지자), 한문 덕으로 고교 때는 제 2 외국어인 중국어 를 잘하여 지금도 초급실력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서예 에서 필체(글씨~펜글씨, 붓글씨)는 남이 부러워 할 정도로 잘 씁니다. 외국어는 영어, 중국어, 일본어,베트남어,가 초급 수준 입니다. 소식 감사합니다. 이장춘 사장님!^0^ ^0^ ^0^ 유경환(유카리나) 여사님 한마디로 인간승리의 표본이십니다. 봅니다. 가야금을 하시는 분은 어머니이신가 봅니다. 두분이 꼭 닮으셨어요. 오래도록 건강 누리시며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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