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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되려고!"- 나의 작가론(作家論)④ <김승웅>
김승웅 <swkim4311@naver.com>
수 2021-04-21 오전 7:40
받는 사람:김영교
[즐거운 세상]
장하다 우리말 ‘내로남불’!
임철순
“야, 아무개야. 넌 선배와 꼰대의 차이를 아나뇨?”
“아니요. 모르는데요.”
“선배는 말이야, 후배가 물어볼 때 자세하고 친절하게 알려주는 사람이고,
꼰대는 물어보지 않은 거까지 시시콜콜 설명하는 사람이란다. 알았니?”
“안 물어봤는데요?”
웃기는 꼰대문답이다. 꼰대는 노인, 기성세대나 선생을 뜻하는 은어이자 비칭이지만
나이를 떠나 사고방식이 권위주의적인 이들을 비하하는 데 쓰이는 말이다.
‘주름이 많다’는 의미에서 '번데기'의 경상도, 전라도 방언인 꼰데기나 꼰디기에서 나왔다거나
나이 든 세대의 상징인 곰방대가 줄어든 말이라는 설도 있나 보다.
일본어엔 ‘로가이(老害)’라는 게 있는데, ‘고가이(公害)’에서 유래한 말이라니
어느 나라나 늙고 나이든 사람은 말이 많고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 같다.
영어로는 has-been(한물간 사람), fogey(고루한 사람) 정도로 번역되며
꼰대질 행위는 bossy(우두머리 행세를 하는)라는 형용사로 표현되는 모양이다.
그런데 ‘타인을 무례하게 하대하는 노년층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가 마땅치 않아 ‘꼰대(kkondae)’를 그대로 사용하기도 한다.
‘꼰대’는 해외에도 꽤 알려진 한국어 단어다. 영문 위키백과에도 설명 문서가 존재한다.
2019년 9월 24일에는 BBC2 공식 페이스북이 이 단어를 소개했다.
꼰대는 있으나 꼰대를 표현하는 적당한 말이 없었는데 한국 사람들이 좋은 단어를 알려준 셈이다.
‘재벌’, ‘갑질’도 이미 해외에 잘 알려진 우리말이다. 그 이전에 국제화 세계화를 이룬 우리말로는
김치, 온돌, 불고기, 빨리빨리, 소주 이런 것들을 들 수 있다.
라면도 잘 알려진 말이긴 하지만, 영어권 사람들에게는 일본어 라멘이 더 친숙한 것 같다.
이런 말들에 비하면 ‘내로남불’은 확실한 세계어로 공인됐다고 볼 수 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4월 10일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참패한 4·7 재보선 결과를 보도하면서
그 이유로 ‘naeronambul’을 꼽았다. 이 말의 의미에 대해서는
“If I do it, it’s a romance. If you do it, it’s an adultery(내가 하면 로맨스, 네가 하면 불륜).”라는 설명을 붙였다.
우리말이 거둔 대단한 쾌거가 아닐 수 없다.
내로남불을 발음 그대로 소개한 게 왜 ‘역사적 쾌거’인가.
그 이전 한글의 세계화는 우리 고유어나 한자어가 세계인이 사용하는 세계어로 공인된 경우에 불과하다.
내로남불은 격이 다르다. 내로남불의 ‘내’는 나, 그러니까 한글 고유어이고, ‘로’는 영어와 프랑스어의 romance, 독일어의 Romanze,
일본어 ロマンス(로만수)의 앞글자이며, ‘남’은 한글 고유어, ‘불’은 한자 ‘不’의 우리 발음이다.
한 단어에 세계의 주요 언어를 유기적으로 통합해 절묘한 시너지효과를 내고
사자성어라는 착각까지 불러일으키는 성과를 거두었으니 역사에 길이 남을 독창적 우리말 창제사례가 아닐 수 없다.
‘내로남불’은 모두가 함께 갈고 닦고 조이고 기름쳐 다듬어온 말이다. 특히 정치권이 합심 협력해
언중(言衆)의 지지와 동참을 적극 유도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 말을 처음 쓴 정치인은 박희태 전 국회의장으로 알려져 있다.
1996년 4·11총선(제15대) 직후 여소야대 상황에서 여당(신한국당)이 야당 의원들을 영입하자 제1 야당(새정치국민회의)이 맹공격했다.
박 의원은 “1995년 국민회의가 (분당 과정에서) 민주당에서 의원을 빼간 것부터 따져보자”며
“내가 바람피우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인가”라고 받아넘겼다.
이후 계속 애용돼온 내로남불이 문재인 정부만큼 많이 쓰인 적은 없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과거의 말과 글이 예외 없이 본인과 정권을 향한 부메랑으로 돌아와
‘조로남불’, ‘조적조(조국의 적은 조국)’라는 말까지 생겼다.
2019년 국감에서 야당 의원이 “내로남불도 유분수”라고 지적하자 민주당 김종민 의원이 “내가 조국이냐”고 대든 일도 있다.
이번 재보선에서 선관위는 국민의힘이 ‘투표가 내로남불을 이깁니다’라는 문구를 펼침막 등에 사용할 수 있는지 문의하자
“특정 정당(후보자)을 쉽게 유추할 수 있거나 반대하는 표현이라서 사용할 수 없다”고 불허했다.
그러자 국민의힘은 “민주당이 내로남불 정당이라는 사실을 국가 기관이 공식 인정했다”며 오히려 좋아했다.
당 대표선거에 출마한 더불어민주당 홍영표 의원은 "당 대표가 된다면 민주당은 더 이상 내로남불이 없을 거라고 분명히 약속한다"고 말했다.
홍 의원은 20일 한 방송사 인터뷰에서 “국민들 보기에 저 사람은 투기꾼이라 한다면 당에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10명이든 20명이든 출당이라는 과감한 조처를 해야 한다”는 말도 했다.
이런 몇 가지 사례에서 보듯 내로남불은 ‘착용감’과 ‘가성비’, ‘부가가치’가 아주 높은 말이다. 이런 말을 자꾸 더 개발해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언제까지 갑질 꼰대 재벌 내로남불…이렇게 부정적인 말만 세계화시킬 것인가.
소설가 박완서(1931~2011)는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우리말 중에서 어떤 말을 가장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서슴지 않고 대는 말이 있는데 그건 ‘넉넉하다'는 말이다. 나는 '넉넉하다'는 말을 아주 좋아한다.”
나도 너그럽다와 함께 이 말을 좋아한다. 앞으로 세계화하기를 바라는 우리말은 고수련(앓는 사람의 시중을 들어줌), 그루터기,
너나들이, 단비, 디딤돌, 울력, 윤슬, 이웃, 이바지, 이렇게 긍정적이고 남을 돕거나 배려하는 뜻이 담긴 것들이다.
이런 말은 수도 없이 많은데 더 예를 들지 못하겠다. ’다원‘도 좋다. ’모두 다 원하는 사람, 모두 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우리말이다.
25일(일)에 열리는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에 6개 부문 후보로 올라간 영화의 제목 ’미나리‘도 참 좋다.
작년에 이 상을 받은 ’기생충‘이나 그 영화에 나오는 ’짜파구리‘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어감과 음감이 좋고,
미나리의 상징성이 긍정적이고 국제적이다.
내로남불의 성공은 사실 성공이 아니며 쾌거가 아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지?
아니, 이 경우는 “성공은 실패의 어머니”라고나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국인들이 언행을 더 닦고 다듬어야 우리말이 빛나고 쓰임새 좋은 세계의 언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021.04.21 미디어SR>
<미디어SR 주필· 전 한국일보 주필, 편집국장/近著:"한국의 맹자 언론가 이율곡", "손들지 않는 기자들",
"효자손으로도 때리지 말라", "노래도 늙는구나"/보성고 문예반장~고대 독문학과 졸>
#3 나의 작가론(作家論) <3>
김승웅
'작가론' 3회 분 계속합니다.
지난 2회 분의 마지막 대목에서, 69년 3월, 그러니까 41년 전인 이맘 때,
견습기자 3개월 차의 '새까만' 신분으로 (당시)한국일보 편집국장이시던 이원홍 선배님<아래 사진>의 자택에
끌려갔다가 "너 신문사 뭣땜에 들어왔지? 도대체 장래 희망이 뭐냐?" 는 질문을 받고
엉겹결에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답변했던 이야기까지 썼지요?
당연히 "기자하러 들어왔습니다"라고 답변했어야지요
더구나 하늘처럼 보이던 편집국장 아닙니까? 이원홍/문화공보부 장관, KBS사장,
허나 당시만 해도 '가난'의 대명사로 통하는 신문기자로 한국일보 편집국장 역임
내 인생 마감하기는 죽어도 싫었고, 부산고~서울대 문리대 종교학과 졸
또 아무리 '하늘'이지만 나는 누가 뭐래도 "내조때로 산다... 또 살 것이다!"라는 판단이 서기에
불쑥 대답한 것이 예의 "작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술도 얼큰히 취했겠다...순간 안경 넘어로 씰룩대던 편집국장의 왕방울 같던 눈...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이원홍 국장, 대번에 "뭐, 이런 게 다 있어!"하는 표정을 짓더니
부엌에 계신던 사모님을 향해 "야, 술 더 가져와!"라고 고함을 친 후
벌떡 일어나는 겁니다. 그 때 제 옆에는 저를 데리고 온
선배 안봉환 기자(작고)가 자리를 함께 했는데,
그 안봉환 선배 역시 저를 향해 눈을 딥다 부라려대고...속으로 아차! 했지요.
벌떡 일어난 이원홍 국장, 어디로 가나 싶었더니
거실 한 구석에 놓여있던 풍금 쪽으로 걸어가더니 두껑을 열고
딥다 오르간 건반을 두들기는 겁니다.
곡명(曲名)은 지금 생각나지 않습니다만, 무슨 성가(聖歌) 비슷했습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 이원홍 국장... 목사 되려고 신학대학에 다니다가 때려치고
문리대 종교학과로 진학, 졸업 후 기자직을 택한 직업언론인이었습니다.
풍금은 신학대학 시절에 배워뒀던 성 싶습니다.
풍금 영탄을 마치더니 제 쪽으로 얼굴을 돌리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봐라, 너 잘 모르는 모양인데, 기자라는 직업...해 보면 알겠지만 무척 가치있는 직업이다.
작가보다 한 수 윗길의 직업이란 말이야. 그런대로 매력도 넘치고..."
하더니 제 잔에 술을 콸콸 채우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20년 남짓... 저는 결국 한국일보를 떠나지 못한채 중학동을 헤매다
다시 시사저널, 문화일보로 옮겼습니다만,
그 와중에 작가가 돼 보려는 꿈도 덩달러 접혀졌고요.
작가의 꿈을 접은 것... 제가 이원홍 국장님 말씀듣고 뭐 대오각성해서도 아니고,
기자하신 분들 익히 아시겠습니다만, 기사꺼리 찾아 이리저리
미친 말처럼 뛰어다니다 보니 작가고 지랄이고...꿈같은 이야기더라고요.
만사 그렇게 맡겨놓고 산 거지요. 이 날, 이 때까지 말입니다.
허나 요즘처럼 새벽 일찍일어나 새벽 별을 올려다 볼 때,
특히 지금처럼 사순절의 마지막 주간인 '고난 주간'을 보낼 땐
저도 몰래 불쑥불쑥... 대학시절 그토록 한 번 돼보고 싶던 '작가'의 꿈이 도지는군요.
그리고 그 때 제 인생진로(?)를 바꿔 놓으신 이원홍 국장님에 관한 생각도
더러 나더라는 말씀... 두 달 전 이 글방식구 되신 이원홍 국장님을 염두에 두고
여기 첨언(添言) 합니다.
이원홍 국장님에 대한 제 생각...뭐 별다른 건 아니고,
"그 분은 왜 목사 대신 신문기자가 됐을까?" 라는 의문 말입니다.
위 대목을 기술하자니 신학자 칼 발트가 남긴 지론(持論)이 떠오르는 군요.
"성경을 읽을 때는 신문기사를 읽듯 하고,
기사를 읽을 땐 성서 읽듯하라"는 명언 말입니다.
성서를 읽을 땐 무엇이 핵심이고 사실(fact)인지를 살피고,
신문기사 읽을 땐 그 사건 속에 하나님의 사역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살피라는 이야기겠지요.
목사직 때려치고 기자의 길을 택하신 이원홍 국장님,
혹시 그 칼 발트를 실천하기 위해섭니까?
다음 번 화요회(한국일보 전직 사우 친선모임) 때 뵙거든 그 때 답해 주시지요.
예의 '작가론'으로 넘어갑니다.
그 작가에의 꿈을 제가 어떻게 극복했는지에 대한 설명도 됩니다.
소설 <삼국지>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신참 장수 강유와의 헤게모니 갈등에 빠져있던 장수 위연은
제갈공명이 죽자마자 촉(蜀)나라를 배신, 적국 위(魏)나라 캠프에 몸을 던집니다.
장수 위연은 한때 천하의 맹장 장비나 장합과도 일합을 겨뤘던
맹장중의 맹장이었습니다만
이상하게도 그의 위력은 촉나라 진영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하루아침 적장으로 바뀐 위연을 보고 모든 촉장(蜀將)들의 무서워 떱니다.
비슷한 예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의 제겐 한국일보가 그렇습니다. 한국일보 다닐 때는 못 느꼈고
(왕초 장기영에 대한 대결의식에 불타) 매사에 식식~거리면서 20년 남짓
`일 저지를` 궁리만 했습니다만, 막상 떠나고 보니 그 시절,
가공(可恐)의 한국일보가 떨쳤던 위력과 스타일이
지금처럼 <옛 한국일보>에 대한 그리움을 더욱 증폭시키는 구려.
아름다움과 위력은 일단 그 대상이 소멸돼야 절감합니다.
어머니를 일단 여의고 봐야 그 사랑이 골수를 찌르듯이 말입니다.
한국일보도 그렇습니다. 같은 편집국안에서는 못느끼던 한국일보 동료 기자들을
타지(他紙) 기자들이 얼마나 무서워했고 떨었는지를
우리 모두 한국일보를 떠난 뒤에야, 그것도 타지 기자들로부터 전해듣고서야
절감하듯 말입니다. 그 당시 우리 모두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어떤가... 생각합니다. 절망하지요.
위에 예로 든 삼국지 얘기,
사실(史實 또는 事實 어느것도 무방합니다)과는 무관한 천하의 이야기꾼 나관중이나
그 나관중보다 한 술 떠 뜬 일본 작가 요시가와 에이찌(吉川英治)가 초를 듬뿍 친
한갓 소설에 불과합니다만, 그래서, 작가란 어디까지나 이야기꾼에 불과하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돼서는 안됩니다.
누가 뭐래도 문학의 대종(大宗)은 소설입니다.
(따라서) 작가의 역할과 기능은 늘 우리 무릎 밑에 놔둬야 마땅하고
툭하면 무릎 위로 올라오는 걸 항상 경계하고 살아야 한다는 걸
저는 진즉 터득한바 있습니다. 이것이 제 작가론입니다.
작가의 어쩌다 신들린 표현 한 가닥에,
또 어떡해서든 감동을 주려 기를쓰는 가공(架空)의 스토리에
내 인생을 통채 내 맡긴다는 건 내 삶은 너무 너무 비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한갓 '이야기꾼'의 감동과 가공을 실습하기엔
제 인생이 너무너무 소중한 걸요! 누구로부터 받은 인생인데... 감히!
긴가꾸지(金閣寺)의 저자 <미시마 유끼오>에 관해서 한 말씀 드리자면~
그 소설이 쓰여지기 직전, 당시 도교 시내 한 경찰서에는
어리비리한 동승(童僧) 하나가 방화범으로 잡혀 온 적이 있고,
그 방화 기사가 요미우리 신문이던가 사회면에 1단으로 다뤄진 적이 있습니다.
큰 작가는 결코 될 수 없는 도다이(東京大) 출신임에도,
자칭타칭 천재로 통하던 지 대긋빡 자랑(그 자랑하려는 것... 병입니다 병! 죽어도 못 고치지요!)
한번 허발나게 하려고, 여기에 그 현란한 문필과 미학을 가미해서
감동을 가공(架空)해 낸 것이 <긴가꾸지(金閣寺)>의 정체입니다.
문학 역시 서구(西歐)지향 일방통행이던 당시의 일본 문단에
멋진 이야기 하나를 제공한 겁니다.
그리고 지가 만든 가공(架空)의 감동에 지 스스로가 취하고
결국 중독까지 돼 자신의 마지막을 할복이라는 '감동'으로 뒤처리 한겁니다.
그게 감동입니까? 가짜(fake) 입니다.
저는 (비단 작가만이 아니라) 자살이다 할복이다...극성떠는 그 극성이 참 싫은 겁니다.
같은 (일본)작가라도 <시바 료따로>(司馬遼太郞) 의 삶은
얼마나 솔직합니까! 그리고 겸허합니까!
그 역시 가짜(fake)의 연속이었겠습니만,
미시마 유끼오처럼 극성과 법석을 떨지는 않았습니다.
한국일보 시절, 출입처 외무부를 내 던지고일본으로 도망쳐
그곳 도꾜에서 잠시 유학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바 료따로>와 절친한 일본의 모 대학 교수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시바 료따로라는 사내 어떤 사내냐?" 는 제 물음에
그 교수... 한참을 기다리게 하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고기를 못 먹더군요. 쇠고기고 돼지고기고 일체 못 먹어요.
굳이 먹고 싶을 경우, 고기를 가루로 낸 음식을 드는 건 몇 번 봣습니다..."
그 말을 들으며 시바가 딱이 불교신자라서 때문이었다고는 생각 들지 않더이다.
한마디로 섬세한 삶입니다. 남을 죽이거나(자살도 남을 죽이는 겁니다)
놀라게 하지 않으려는, 허다 못해 말 못 하는 소 돼지한테도 거칠게 굴지 않으려는
작가의 겸손이 절로 와 닿더이다.
작가란 별종치고도 요상스런 별종이라서
어떡하면 남을 감동시킬 수 있는가... 하루종일 또 한 평생을 고놈의 감동만을
바라고 노리는 `못된 버르장머리` 를 가진 직업입니다.
오늘은 일단 여기서 마치지요. - 건대입구 지하철 역 PC방에서/방장
<방장> - 차호에 계속
#4 호밀밭의 파수꾼 되려고!
김승웅 - 나의 작가론(作家論) ④
뻬제스부르크의 夕陽 - 네바 江가에서
LA의 박흥진!
멀리 헐리웃에서 띄워 보내는 자네 영화 얘기 읽고나면
"이런 니밀헐! 영화 얘기가 아니라 결국 니 놈 얘기 읽었구나!" 하고 번번히 느낀다.
일테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특히 그렇다.
"....그의 고독과 권태와 무료는 에어컨도 선풍기도 없는
서울의 복날 밤 열기와 습기처럼 끈적거리는데,
결국 무기력감에 '날 잡아 잡수'하고 손을 들게 된다. 그게 차라리 편하다"
`날개` 에서 이상(李箱)이 느낀 그 (가공의)고독과 무료를 어린 박흥진 짜식은
경복고 시절, 몸으로 실제 체험하며 산거야....그렇지, 맞지?
`날개` 에 나오는 이상의 애인 이름이 금홍이던가, 연홍이던가. 결론을 미리 말한다만,
그거 다 페이크(Fake)다. 가짜란 말이야!
당시 조선 인테리가 왜놈 문단을 통해 얻어 들은 보틀레르 풍(風)의 흉내였어.
더 웃기는 얘기 하나 늘어 놓을까?
대학시절 도서관에서 목록을 봤던 논문 한 편이 생각 난다.
(당시) 서울대학교 국문과 대학원에 재학중인 어느 석사가 쓴 논문인데,
논문제목이 걸작이었다. 정확한 건 기억이 잘 안난다만
"이상(李箱)이 임종시 먹고 싶었던 과일 '레먼'이 작품에 끼친 영향" 뭐 이런 제목이었는데...
내가 대학을 졸업 하고도 몇 십년이 흐른 후
그 이상(李箱)의 본처였던 모 저명인사(화가 김환기와 재혼 한 여자인데..)가
전 남편 이상이 임종시에 먹고 싶어했던 과일이 레먼이 아니고,
정확히 "멜론이 먹고싶다!"고 했다는 거야. 자기 귀로 똑똑히 들었다는 거야.
까짓 레먼이면 어떻고, 멜런이면 어때?
이상의 전처되는 여인... 남편과 사별했고 세월도 많이 흘렀으니
두 과일이 엇갈릴 수도 있었겠지... 하고 여긴다만,
중요한 건 과일 이름까지 들먹이며 논문을 쓴 그 대학원생의 '극성'이란 말일세.
그 극성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도 집요한 거라서
일제(日帝) 때의 `먹물` 이상(李箱)이 '페이크'를 따랐듯이 시대 평론가들도, 문학을 전공하는
학자들도, 또 그 학자를 지망하는 대학원까지도 다들 이런 허망의 세계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어. 그리고 이런 허망은 요즘 우리 세태에도 그대로 반영돼 있지. 볼래?
자네가 영화를 통해 말하려던 고독과 권태, 그 중에서 특히 권태에 관해서
말하자. 이왕 말 난 김에 프랑스 작가 누군가가 만들어 낸 멋진 말
`롱강뉘` (긴 권태/long ennui)를 염두에 두고 말 하자.
너는 글에서 "그 권태는 에어컨도 선풍기도 없는 복날 밤,
열기와 습기처럼 끈적 거리는데 결국 무기력에 날 잡아잡수! 하고 ..." 라 밝혔다만
그 청소년 시절 너나 내가 쬐금 부자로 살았던들 요즘 아파트 회색 그늘 밑에서 자란
금속적(金屬的)인 철딱서니들과 하등 다를 바 없었을 거야.
제 방 등신대 거울앞에서 (가수)`비` 흉내 내려 까뒤집고 뒹굴거나
아니면 온 종일 옆 B동(棟) 14층에 사는, 제 또래 기집애 자빠트리는 궁리나 했겠지.
아니면 심야, 그 기집애 전화로 불러내 지네 아빠 차 훔쳐타고
걸어서 50m도 안떨어진 맥도널드 가개로 차를 몰아 노닥대거나 옆집 로빈슨 아이스 크림 집에
덤으로 들려 아몬드 아이스크림이나 쪽쪽 빨고 있겠지.
이 대목에서 갑자기 지난번 쓰기로 해놓고 약속을 깜박해버린,
데이비드 제롬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생각 나는구나.
쓰여진지 지금부터 반세기가 훌쩍 넘는(정확히 1951년) 그 고물소설이 쓰여진 때로부터
물경 13년이나 지나, 그때 대한민국 서울 동숭동 하숙방에 쳐박혀
툭하면 수음(手淫)이나 즐겼다고 소설에서 밝힌, 불문학을 공부하던 청년 김승옥을 통해
재현된거야. 그게 바로 김승옥의 "서울,1964년 겨울" 이지.
샐린저의 "호밀밭..."과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에는 왠지 비슷한 묘사대목이
적지 않게 등장하지. "호밀반..."에 나오는 16세 주인공이 "...센트랄 파크 연못에 사는
고기는 지금 눈을 뜨고 잘까, 아니면 감고 잘까..." 하는 걱정은 김승옥의 소설에 오면 "
그 아파트 5층 창가에 켜진 불빛은 지금 켜져있을까 꺼져있을까"로 둔갑해.
<서울,1964년 겨울>이 나오던 그 해,
논산훈련소 하교대 조교시절, 내무반에 벌렁 들어누어 김승옥의 그 대목을 읽다
나는 김승옥이 자신의 문체를 다듬는데 이 정도로 절차탁마를 했구나... 하고 감탄했어.
허나 좀 우울해졌다.
그로부터 25~26년이 지난 어느 해 (내가 한국일보를 떠나 <시사저널>의 창간을
도울 때 였어) 나는 그 김승옥한테 군복시절 빈 막사에서 느낀 그 우울에 관해 애기해
줘야지... 하고 술집으로 불러냈어. 김승옥은 당시 <시사저널> 편집위원이란 직함을 가지고
신생 언론사 기자들이 내조때로 써갈기는 기사를 다듬어 주고(潤文)있었어.
그때 김승옥은 이미 절필(絶筆)작가로 바뀌어 있었어.
대학시절 내가 심취했던 <원형의 전설>을 쓴 장용학이 절필작가로 바뀌었듯이 말이야.
술이 얼근히 오르고 나서 나는 예의 '우울'에 관해 얘기한다는 것은 빠트리고(의도적으로
빠트린 거야!) 엉뚱하게 그의 '절필'을 건드렸다네.
내 글친구 양평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
"김 형, 당신을 절필작가로 만든 게 누군지 알아? 독자? 천만에!
당신이 정상을 달리던 그 시절, 당신을 격찬했던
일간지 문화부의, 그 잘난 문학 담당기자들이야!"
김승옥의 이름이 한창 뜰 당시 도하 신문의 문학담당 기자들이 보인 작태는
가히 변태에 가까웠어. 내 말이 틀렸거든 그 당시 신문의 문화면을 읽어봐!
기자들 논리대로면 (그 다음 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는 이미 김승옥으로 결정 나 있다는 투야.
너도 잘 알듯, 노벨문학상이라는 게 어디 한국기자들 '내조때로' 되는 거냐?
작가를 네가 좋아하는 영화에 비유해 말하자.
작가는 영화에서 인디언이나 개잡듯 싹쓰리하고, 딴따다~ 하고 진군 나팔이나 불어대는,
그리고 때 거르지 않고 진급하는 '웨스트 포인트' 출신 북군 장교 스타일이 돼서는 안 돼.
작가는 차라리 허름한 남군 복색에,
그것도 이왕이면 탈영병 출신, 그리고 여자만 보면 견적필살(見敵必殺) 자빠트리는
농땡이가 적격야. 이 농땡이한테는 그러나 (북군 출신과는) 다른 점이 하나 있지.
아란 랏드 저리가라는, 타고난 총잡이라는 점이 그것이야. 필력이 뛰어난다는 이야기일세.
나팔부고 우르르 군집(群集) 이뤄 진격 잘하는 파랑색 군복의 북군은 조연은 될망정
결코 결코 주인공은 못돼. 허기야 이따금 북군 장교가 주인공이 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영화 <소령 댄디(Major Dandy)>에서 주인공 찰튼 헤스턴이 북군 장교 소령으로
나오더라만, 그건 출연 배우 몸값을 고려한 감독의 캐스팅 때문 일 뿐(그런 의미에서 그 영화는
완전히 miscasting 이야!) 그 영화에서 내가 정작 반했던 건 찰튼 헤스턴과
노상 일합을 겨루던 남군 대위역의 영국배우 리차드 해리스<사진>였다.
작가는 단연 리차드 해리스 같은 사람이 돼야 한다... 이 말이다.
김승옥은 그 후에도 자주 만났다.
만날 때마다 그는 자기가 이루려는 꿈 얘기를 늘어놨던 걸 기억한다.
그가 가고 싶은 곳은 인도였다. 인도에 가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싶다며,
그런 계시를 어느 날 꿈에 나타난 예수의 손을 보는 순간 절감했노라고 실토했다
그러다 나는 미국으로 갔고, 그는 서울에 있는 무슨 대학의 교수가 됐다는 얘길 들은 것 같은데,
그 후에는 10여년 넘게 만나지 못했다. 미국에서 돌아와 몇 해를 살다 어느 해 겨울이던가
갑자기 그가 보고 싶어 불쑥 전화를 건 즉 그 아들이 받더니
"아버지께서 전화 받을 입장이 못된다"며 전하실 말씀 남기시면 전해 드리겠노라고
말했다. 나는 가만히 수화기를 놓았다.
미국에서 살 때도 김승옥의 생각이 날 때가 많이 있었다.
거기서 어느 날 고등학교를 다니던 내 둘째 놈 레오의 책가방을 뒤지다
예의 샐린저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이 영어 교과서(그러니까 그 나라의 국어교과서다!)에
실려있는 걸 봤다네(지금도 교과서에 실려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만,
왜 실려있는지, 누구 아는 분 계시면 설명을 듣고 싶다).
그렇잖아도 대학시절 읽었던 감흥이 되살아 나기에 교과서에 실린 "호밀밭..."을 꺼내
찬찬이 읽었지만 책 서문만 읽다 까빡 잠이 들고 말았어.
대신 그 서문에 적혀있던 다음과 같은 문귀는 아직껏 기억이 나기에 여기에 그대로 옮긴다.
"나는 언제나 조그만 아이들이 넓은 호밀 밭에서 뛰놀고 있는 것을 상상한다.
주위에 나말고 큰 애는 아무도 없어.
그런데 내가 막상 서 있는 곳은 무서운 낭떠러지 앞이야.
거기서 나는 애들을 낭떠러지로부터 보호하는 거지.
애들이란 원래 저희가 어디로 달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낭떠러지로 뛰어가잖아?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 그 애들을 붙잡아 주는 거야.
난 하루 종일 그 일만 하고 싶어.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는 거지.
바보같은 짓인 줄은 알지만, 내가 되고싶은 것은 그것 밖에 없어. 그 뿐이야"
난 요즘 집에서 두 달간 아무 일 안하고 쉬고 있어.
아내는 아랫층에서, 나는 윗층에서 하루 종일 혼자 보낸다.
자네으이 글을 읽던 날도 나는 빈 방에 홀로 누워 "너 앞으로 뭐 할꺼지, 뭐 할꺼야?" 하고
자문했지만 그 때마다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어"라는 자답만 나오더라.
써 놓고보니, 글 서두에 자네 글 읽다보면
노상 니 얘기 읽은 셈이라고 말했듯이 나 역시 자네 영화 얘기 실컷 꺼내 놓고는
결국은 내 얘길 늘어 놓고말지 뭔가!
더위 좀 풀리면 내 평소 좋아하던 그 김승옥을 만나러 나가 볼 셈이야. <계속>
<김승웅>
열매 맺기
김승웅 - 나의 작가론(作家論) <5/끝>
서대문 전철역에서 5호선 전철을 기다리다
지하 통로의 벽에 붙어 있는 시(詩) 한 수가 눈길에 잡혔습니다.
열매라는 시제(詩題)의 시였는데, 시가 하도 좋기에 두 번이나 연거푸 읽었습니다.
볼펜과 종이를 꺼내 딥다 끼적거려 첫 행(行) 정도를 적었는데,
마침 전철이 도착하는 바람에 미수로 그쳤습니다만 전철 안에서 계속 그 시만 생각했습니다.
시도 좋았지만 정작 제 관심을 끈 것은 그 시를 쓴 오세영이란 이름의 시인이었습니다.
오세영이라, 오세영... 어디선가 많이 듣던 이름이었거든요.
만일 동명이인이 아니라면 그 시인... 지난 가을 제 한국일보 파리 특파원의 전 전 선임이신
김성우 선배님(한국일보 주필, 편집국장 역임)의 저서 "돌아가는 배"의 시비(詩碑) 제막식에
참석하러 남해 '욕지도' 행에 올랐을 때 함께 동승했던 바로 그 시인임이 분명할텐데...
그래도 혹시나 싶어 집에 닿자 마자 인터넷으로 오세영을 클릭한 즉, 맞았습니다.
시와 시인의 사진이 함께 뜨더이다. 어찌나 반가웠던지... 우선 그 시부터
글방에 띄우지요. 시인의 사진도 인터넷에서 함께 퍼옵니다.
열매
오세영
세상의 열매들은 왜 모두
둥글어야 하는가.
가시나무도 향기로운 그의 탱자만은 둥글다.
땀으로 땅으로 파고드는 뿌리는 날카롭지만
하늘로 하늘로 뻗어가는 가지는
뾰족하지만
스스로 익어 떨어질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
덥썩
한 입에 물어 깨무는
탐스러운 한 알의 능금
먹는 자의 이빨은 예리하지만
먹히는 능금은 부드럽다
그대는 아는가,
모든 생성하는 존재는 둥글다는 것을
스스로 먹힐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시... 참 좋지요?
새삼 무슨 시평이 필요하겠습니까. 둥근 건 무조건 좋은 것 아닙니까?
시평 그 자체가 오히려 궁상맞아 보일, 한 마디로 그런 시 아닙니까?
시인 오세영... 아시는 분도 많겠습니다만, 여기 간략히 소개하지요.
61년 서울대 문리대 국문학과 입학, 모교에서 주~욱 국문과 교수로 재직해 오다
지금은 은퇴하여 명예교수로 계십니다.
그리고 보니 과(科)는 달랐지만 저와는 입학 동기가 되는 셈이고,
무엇보다도, 욕지도 다녀 온 후 근 반년 넘게 이 글방의 식구였다는 점이,
그를 여기 글방에 소개해드리는 주된 이유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시인의 소개와 함께 위 시의 제목으로 등장하는 바로 그 '열매'에 관해
제가 썰(舌)을 풀고 싶은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이 열매 이야기를 노상 꺼내시던 분의 이야기인데,
일상 대화 속에서는 물론이고 행동 속에서 자주 애용하셨고
막바지에는 그 열매 맺는 게 과연 뭘 뜻하는지를 몸소 보이시고 실천 하신 분이시지요.
모든 사람은 그 열매로 평가 받는다는 비유로 말씀을 즐겨하셨고,
한참 시장하실 때 거리의 무화과 열매를 드시러 찾으셨다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 나무를 보시자 분한 나머지 그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고
마침내는 그 나무로 하여금 현장에서 말라 죽게 하신 분이십니다.
말도 못하는 나무를 저주하다니... 의아히 여기실 분 계실지 모릅니다만, 저는 해석을 달리합니다.
말씀 하실 때마다 매번 비유를 즐기신 그 분의 스타일로 미뤄 판단컨데
인간의 '열매'맺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기 위해, 다시 말해, 열매 맺지 못하는 인간이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인지를 가르치기 위해
무화과 나무를 시청각 교재를 사용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그 분이 그토록 강조한 '열매'란 어떤 열매냐.
그 답에 관해, 영감(靈感)을 지닌 시인 오세영은 바로 위 시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 짓고 있네요.
그대는 아는가,
모든 생성하는 존재는 둥글다는 것을
스스로 먹힐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 분' 말씀을 더 계속하지요.
시인 오세영의 말 마따나 세상 만사..."둥글고", "먹힐 줄 알아야" 하는데,
더구나 세상만사를 지배하고 장악하는 주인이 되라고 '그 분'이 손수 만들어 내신,
바로 그 인간들이 말입니다,
"둥글고 먹힐 줄" 알기는 커녕 서로 짜고 약속이나 했듯이
열이면 열 모두가 삐죽빼죽 모가 나 있다는 점을 그 분은 개탄 하신 겁니다.
개탄하다 개탄하다 마침내는 장열하게, 그리고 비참하게 삶을 마감하신 분입니다.
그 못된 인간들...얼마만큼이나 모가 나 있었는지 잘 모르시지요?
그 분의 손과 발에 쾅쾅 대못을 박아 죽이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들이 지금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는지를 모를 만큼, 그 정도로 모 나고 패악했지요.
누구 말씀하는지 대강 아시지요?
2천 년 전 바로 오늘의 이야기입니다. 로마의 자그만한 속령이었던 유대 땅
골고다 무덤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신 분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아침 9시에 십자가에 매달리셨다가 장장 6시간이 넘는 고통과 신음 속에
오후 3시에 숨을 거두심으로 해서, 그 아름답고 외로운 눈을 우리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만 서른 세살의 유대 청년- 예수의 이야기입니다.
오늘이 바로 그 분이 돌아가신, '성(聖) 금요일'입니다.
그가 운명한 오후 3시 전후의 상황에 관해 영국의 사학자 에드워드 깁슨(Edward Gibbon:1737~1794)은
로마를 수 십번 왕래하며 쓴 저서 "로마제국의 쇠망사(The History of Decline and Fall of Roman Empire)"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 전능자의 손에 의해 인간의 이성이 아닌 감성을 상대로 계시된
기적의 증거들에 대해 이교도와 철학자들이 그처럼 무관심을 보인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예수의 시대, 사도의 시대, 그리고 초기 제자들의 시대에는
그들이 설교한 여러가지 교리가 수맣은 기적들에 의해 확인되었다.
앉은뱅이가 걷고, 장님이 눈을 뜨고, 병자가 치유되고, 죽은 자가 일어나고,
마귀가 축출되고, 교회를 위해 자연의 법칙이 중지되었다.
그러나 그리스와 로마의 현인들은 이 외경스러운 장관을 외면하고
일상적인 생활과 학문을 추구하면서
세상의 도덕적 물리적 통치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의식하지 않는 것 같았다.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중에 온 지구가,
아니 적어도 로마제국의 축복받은 한 속주(屬州)는 3시간 동안 초자연적인 암흑에
휩싸였다. 만인의 경이감과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음직한 이 기적적인 사건조차도
과학과 역사의 시대에는 주목을 끌지 못한채 지나갔다.
이 사건은 세네카와 대(大)플리니우스의 생애 중에 일어났으므로
두 사람은 이 기적의 직접적인 영향을 경험했거나
아니면 그 최초의 정보를 입수했음이 틀림없다."
그 분이 노상 강조하던 열매...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마음 속에 늘 "나, 예수"를 심어주기를, 또 언제나 "나, 예수"처럼 생각해주기를,
무슨 일을 만나거나 "나, 예수"처럼 처신해 주기를,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 예수"를 그대로 닮아 주기를 바랬던 분이시지요.
그것이 바로 그가 그토록 바라고 바랐던, '열매 맺는 일'이었지요.
예수의 삶과 죽음...알고보면 시인 오세영이 노래했듯
"스스로 익어 떨어질 줄 아는 열매" 되기의 실천이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예수야 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 용기있는 작가였던 것입니다.
그 분의 아름답고 외로운 눈을 그리워하며 제 '작가론' 여기서 마감합니다.
<김승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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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긴 글 잘 읽고 갑니다
다음엔 나누어 올리심이 어떨까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