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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 11:17-27)
요즘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수많은 민간인들이 학살당하는 현장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서로 죽이고 죽는 무서운 일들이 메스컴을 통해 가감없이 그대러 방영되면서 참으로 인간의 잔인함과 인간의 어리석음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수많은 위인도, 나름 성공자라고 하는 사람도, 심지어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는 사람도, 결국 모두들 한결같이 흙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우리는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 여러가지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나 자신에게 죽음이 닥치게 되면, 죽음에 대해 이러니 저러니 결코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와 철학과 사상들은 죽음을 미화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결국 죽음에서부터 도피하고 싶은 인간 본능에 의한 표현일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죽음이 결코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려져 있지도 않습니다. 죽음은 슬프고 허무한 것입니다. 죽음은 파괴적이어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갑니다. 그래서 성경은 죽음을 원수라고 부릅니다. "마지막 원수!" 우리가 인생의 싸움에서 최후로 싸워야 할 실존적인 대상이 바로 죽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사람이면 누구나 맞아야 하는 가장 큰 비극입니다. 그런데 죽음이 비극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 이유, 죽음은 필연적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확실한 것입니다. 쟈니 카슨은 우스개소리로 "미국에서 죽음과 세금 이외에는 아무 것도 확실한 것이 없다"라고 했는데,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우리는 주위에서나 신문 보도를 통해서 세금포탈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중장부를 써서 기가 막히게 세금을 피할 수는 있을지라도, 죽음을 피해 도망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전쟁이나 자연재해로 인해 무고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반드시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저 먼저 가느냐 늦게 가느냐 차이뿐입니다. 죽음의 확실성은 상식적인 이야기이지만 진리입니다.
둘째 이유, 죽음은 산 자와 죽은 자를 분리시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철저한 분리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일단 죽으면 그와 함께 있을 수가 없습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땅속에 묻어야만 합니다. 이젠 사랑하는 사람의 환상을 품고 살 수는있어도 그 시체 곁에 누울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죽음에 대한 공포는, 죽음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도 죽음으로 인해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부모와 자식이 헤어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가 분리되어야 합니다. 형제들과 사랑했던 오누이들이 나뉘어야 합니다. 죽음은 절대절명의 이산가족을 만들고 마는 것입니다.
1. 나사로의 죽음
본문은 오빠의 죽음 앞에서 절망하고 있는 두 여동생 마르다와 마리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빠가 죽기 전에 예수께서 오셔서 오빠의 병을 낫게 해 주시리라 기대했습니다. 메시야이신 예수님, 그분이 행하시는 일들은 팔레스틴 지방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그분이 가시는 곳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다행히 마르다와 마리아는 이 예수님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습니다.
그래서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주님의 도우심을 믿고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오라버니 나사로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주님께 급히 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야속하게도 주님은 늑장을 부리며 속히 오시지 않았습니다.(11: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나사로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으시면 맨발로 뛰어오실 줄 알았는데, 오히려 회피하며 무려 이틀이나 지체하십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배신감마저 느낍니다. 아직은 꾹 참고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드디어 예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이미 죽었습니다. (11: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나사로의 죽음을 기다리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시체가 되어 썩는 냄새를 풍기기 시작할 때, 비로소 주께서 이 절망의 현장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늦게 오신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 11:21).“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치료하실 수 있다는 것은 믿었으나 죽은 자까지 살리실 수 있는 능력의 주님이라는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마르다는 죽음의 문제는 예수님도 어떻게 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세계적인 뇌의학 권위자이자 신경외과 전문의인 이븐 알렉산더는 희귀질환인 박테리아성 뇌막염에 걸려 ‘뇌사상태’에 있다가 7일 만에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삶으로 되돌아왔습니다. 그는 그의 책 「나는 천국을 보았다」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죽었지만, 영혼은 살아있었다. 삶은 육체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 사후세계가 있다. 천국을 보기 전에는 천국, 하나님, 영혼에 관한 그 어떤 이야기도 의학적인 지식과 양립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하나님과 영혼이 실재하며 죽음이란 다만 다른 상태로의 전이 과정에 불과하다고 믿게 되었다. 영성과 과학은 함께 갈 수밖에 없다”
그렇습니다. 죽음 이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영생천국에 들어가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영원한 지옥 형벌의 길로 갑니다(마 25:46). 죽음은 육신의 장막이 무너진 것이요 육신의 고통이 끝난 것일 뿐, 믿는 자에게 죽음은 영원한 세계에서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육신의 장막을 벗고 영원한 천국으로 이동하는 하나의 관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과 같은 상황을 만날지라도 생명의 근원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2.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죽음조차 생명으로 바꾸실 수 있는 분이란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견디기 어려운 고난을 만날 때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고대인들도 그래서 피라미트를 만들기도 하고 순장제도라는 장례식을 통해 죽음이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상상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절망하고 있는 마르다를 향해, 이제는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이 극한 절망의 순간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실로 엄청난 소망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25,26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룻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부활과 생명의 근원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는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 생명은 우리 육신의 시작과 끝이 있는 것처럼 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스위스의 정신의학자요 의사인 폴 투르니에(Paul Tournier) 박사는 그의 책 ‘귀를 핥으시는 하나님’에서 아내의 임종의 순간을 기록했습니다.
죽기 직전에 아내는 남편에게 천국에 도착하면 먼저 가 계신 시부모님을 만나 정말 행복할 것이라고 평온한 미소로 말했습니다. 그는 그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아내의 말을 듣고서 저는 비로소 생명이신 예수님을 새롭게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아내를 먼저 천국으로 떠나보낸 후 저의 믿음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에 대한 믿음이 강해질수록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해방되는 놀라운 자유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생명의 주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생명의 주인되신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마치 꺽어진 나뭇가지를 생명의 본 줄기이신 예수님께 접붙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살아있는 관계를 맺어 예수님의 생명이 내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 생명이 내 안에 들어옴으로 이제 새로운 영생의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시간, 예수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신 것을 믿으면 모든 죽은 것들과 죽어 가는 것들이 다시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부활과 생명이 되신 주님을 만날 때 우리의 인생이 바뀌고 삶은 변화됩니다. 부활,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서 단순히 생명을 잠시 연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영원한 생명되신 예수님과 접붙힌 바 되었다는 것을 선언하시고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다섯 번째 자기선언으로서,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는 선포이기도 합니다. 흔히 기독교를 영혼불멸을 가르치는 종교라고 말합니다. 기독교는 영혼의 불멸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독특성은 영혼의 불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에 있습니다. 다른 이방 종교나 철학 사상들도 영혼 불멸을 주장하며 믿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이전에는 그 누구도 부활을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가 세상의 모든 종교나 사상을 넘어서는 것을 바로 이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C.S. 루이스는
"예수님의 최대의 업적은 그분이 부활의 메시지를 선포하신 것이고 그 메시지대로 다시 사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이루신 최대의 업적은 죽음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선포하신 것과 실제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부활을 증명하시기 위해서 세 사람을 실제로 살려내셨습니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으로써 어린 소년 소녀의 부활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셨고,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으로써 청년도 부활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주님은 장년 세대에 속하는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부활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주께서는 자신이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놀라운 사실을 확증적으로 선포하셨습니다. 우리가 부활을 확신한다면, 죽음은 안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일의 부활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안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루 해가 질 때 우리가 침대에 들어가서 안식을 누릴 수가 있는 것은, 내일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일 아침에도 해가 떠오른다. 그리고 빛나고 새로운 내일이 시작된다." 마찬가지로 부활이라는 놀라운 사실이 전제될 때에만 우리는 '죽음은 안식이다'라는 명제를 선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이 진정 사실이라면, 먼 훗날 우리는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함께 다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생명의 기적이었듯이, 전지전능하신 그분의 능력 안에서 다시 일어나는 부활의 사건 역시 엄청난 생명의 기적입니다.
이 부활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부활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의 삶에서 느끼는 허무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사실은, 부활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 앞에서 안식을 선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위대한 부활의 메시지! 이것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소망은 죽음 저 건너편에도 분명히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집안의 가장이었던 오빠 나사로의 죽음앞에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기쁨도 평안도 잃어버렸습니다. 내일에 대한 기대도 잃어버렸습니다. 살아 있으되 죽어 있는 사람과 같은 마르다의 모습입니다. 사실 마르다는 건전한 교리를 믿고 있었던 여인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믿고 있었던 진리가 그녀의 삶을 변화시키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모습입니까? 마르다가 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21절)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주님이 조금만 일찍 오셨더라면, 내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원망스런 푸념이며, 절망적인 독백입니다. (22절)“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아주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믿음이 있습니다. 계속 보십시오(23절)."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그러나 다음에 나오는 마르다의 고백을 보면, 방금 22절에서 마르다가 한 말이 진정한 신뢰에서 우러나온 고백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4절)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역사가 끝나는 그날, 주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성경에 약속한 그대로 부활된다는 그 사실을 저는 믿습니다.“
마르다는 '이제라도' 주께서 원하시면 하실 수 있다고 말해 놓고서 마지막 날의 부활을 믿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즉, 마르다는 지금 여기에서 무엇이든지 행하실 수 있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구체적인' 능력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4장에서도 이와 동일한 고민에 싸여 있었던 한 여인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여인도 메시야가 오시리라는 것을 믿고 있었고,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사이에 예배 문제가 거론되고 있는 부분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요 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지금 이 순간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사람을 찾고 있다." 예수님의 이 메시지에는 참으로 성령과 진리안에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만이 메시야를 만날 수 있다는 의미가 깔려있습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앞으로 언젠가 오실 메시야는 믿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나와 함께하시며 내 삶 속에서 나를 인도하시고 새롭게 변화시켜 주실 주님은 믿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나 마르다와 같이 "저는 마지막 날의 부활, 그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도신경을 통해서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하고 고백하지만, 그들의 부활 신앙은 현재 그들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현재의 절망을 치료하지 못하는 마르다의 신앙과 같습니다. 이들은 천국에 갈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그들의 삶에는 희망과 승리와 능력과 치유가 없습니다. 현재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부활의 신앙은 미래의 신앙이자 동시에 현재의 신앙이어야 합니다. "마지막 날은 살겠지요. 그러나 지금 현실은 절망이잖아요. 지금은 어둡고 슬프고 죽음이잖아요," 이것은 현실 직시가 아니라, 믿음이 부족한 것입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와서 마르다의 부활 신앙에 대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바를 들어 봅시다.
3. 부활신앙을 가르치시는 예수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25절). 주님은 먼 훗날 다시 오실 그때만이 부활이 아니라, 바로 지금도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25절). 여기에서 '살겠고'라는 말은 원래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죽어도 그는 여전히 계속 살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체험한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끊어질 수 없는 교제 속에서 날마다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의미는 좀 더 구체적입니다. 즉, 내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 영원한 생명이 지금 나의 삶을 지배하고 다스림으로써 오늘의 슬픔과 좌절과 불신앙을 극복하고 승리의 생활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오늘의 슬픔과 좌절을 딛고 일어서서 내일을 향해 걸어갈 수 있는 이 부활의 신앙은 현재적인 승리의 체험을 우리에게 보장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틴 루터의 일화를 생각할 때 이 진리는 더욱 명백해집니다. 그는 종교적 껍질을 뒤집어쓴 어마어마한 세력과 싸우느라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기진맥진하게 되었습니다. 갈수록 위협이 가중되고 일이 힘들어지니까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자포자기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는 의기소침하여 깊은 절망감에 빠졌습니다. 완전히 탈진한 듯한 무기력한 상태에 있는 그를 옆에서 지켜보던 아내는 무척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힘이 하나도 없이 서재에 앉아있는 루터곁에 상복을 입은 아내가 통곡을 하며 나타났습니다. 루터는 깜짝 놀라서 물었습니다. "아니 여보, 누가 죽었소?" "예,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아니,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는 거요?" 그때 루터의 아내가 이렇게 대꾸합니다. “하나님이 돌아가시지 않고 살아계신다면, 오늘 당신이 이렇게 맥없이 앉아있을 리가 없잖아요. 당신을 보니 하나님이 돌아가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이구, 아이구, 하나님이 죽으시다니!”
오늘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까? 살아계신 주님!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 오늘의 삶이 당신을 좌절과 어둠과 절망에 몰아넣더라도, 주께서는 부활과 생명으로 다가오십니다. 주께서는 무덤 저 건너편의 놀라운 소망을 약속하실 뿐만 아니라, 동일한 부활의 능력으로 지금 이 순간도 내 삶을 치유하시며 나를 새롭게 하기 원하십니다.
문제는 이것을 믿지 못하는 우리의 불신앙입니다. 주께서는 지금도 말씀하십니다.25-26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룻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역경이 우리의 삶을 사납게 뒤흔들고 우리를 의기소침하게 하려 할지라도, 우리는 항상 살아계신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사실 교리적으로 알고 주장하기는 쉽습니다. 마지막 날의 부활도 믿을 수 있습니다.
천국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이요 생명으로서, 지금 나를 치유하시고 나를 새롭게 하실 수 있는 살아계신 주님을 믿으십니까? 삶에서 경험하는 온갖 부조리와 수수께끼 같은 인생의 허무에도 불구하고 나의 삶을 새롭게 하실 수 있는 부활의 주님을 믿으십니까? 우리는 본문에서 두 가지 죽음을 보았습니다. 나사로와 같이 몸이 죽은 사람의 죽음과 마르다와 같이 살아 있으나 실상은 죽은 사람처럼 살고있는 사람의 죽음입니다.
소아시아에 있던 사데 교회를 향한 주님의 지적과 같습니다."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 3:1). 문제는 우리의 불신앙입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오, 주님! 저의 불신앙이 죽음과 같은 이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저를 뒤흔들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나사로의 무덤앞에서 예수님은 선언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그렇습니다. 진정한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부활의 주님을 다시 바라봅니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나와 함께 계신 부활하신 주님을 믿습니다. 부활의 능력으로 나에게 찾아오신 주님,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바라보고 그 주님을 내 안에 모시고 부활의 신앙으로 다시 일어서겠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찾고 그 생명을 누리는 부활신앙으로 일어서는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