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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53) 필립 자크 반 브리의 ‘로마 공회장을 방문하는 그레고리오 16세’
로마 황제 개선문 아래 극빈촌을 찾은 교황
- 필립 자크 반 브리, ‘로마 공회장을 방문하는 그레고리오 16세’(1832년), 로마 박물관 소장.
나폴레옹과 정교 협약을 맺고, 그의 황제 대관식에도 참석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타협을 시도하며 교회의 위상을 바로 세우고자 한 비오 7세 교황의 노력과 달리, 나폴레옹과 교회의 관계는 순탄치 않았다. 나폴레옹이 자신의 절대 권력을 위해 벌이는 전쟁과 대륙 봉쇄령에 반대하다가 포로생활까지 한 교황이지만, 비오 7세는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여러 면에서 인도주의적인 자세를 보여줬고, 로마로 귀환한 후 예수회를 부활시키는 등 나름대로 소신 있는 교황으로서 면모를 아낌없이 보여줬다.
보수주의 교황들, 레오 12세 교황부터
친척인 비오 6세와 비오 7세 두 교황은 나폴레옹에 의해 힘든 재임 시기를 보내면서도 프랑스 대혁명으로 인한 유럽 내의 변화의 물결을 일정 부분 수용하려는 태도도 보였다. 하지만 이후 레오 12세부터 비오 8세와 그레고리오 16세는 소위 ‘보수주의 교황들’로, 여러 면에서 이전과는 다른 사목 정책을 펼쳤다. 나폴레옹을 선두로 한 혁명 세력과 진보적이고 개혁적이며, 자유주의를 표방했던 세력들에 대한 반감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비오 7세의 뒤를 이을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는 26일간 지속됐다. 비오 7세 시절을 마무리하고 1814년 빈회의에서 교황령을 되찾아오며 교회 내 개혁을 선도하던 콘살비 추기경을 반대하던 보수파 추기경들은 이탈리아 움브리아주 스폴레토 출신의 안니발레 세르마테이 델라 젠가(Annibale Sermattei della Genga) 추기경을 제252대 교황, 레오 12세(재임 1823~1829년)로 선출했다. 그가 교황이 된 후 가장 먼저 발표한 칙서는 「첫 번째 장(場)(Ubi primum)」이다. 여기서 교황은 성직자들의 지적ㆍ윤리적인 교육과 규범을 강조하고, 위험한 교설에 반대할 것을 촉구했다. 국무성 장관 콘살비 추기경을 경질하고, 델라 소말리아 추기경을 그 자리에 앉혔다.
레오 12세는 교황령의 행정을 재정비해 성직자들이 통치하게 했고, 1826년 칙령으로 로마에 거주하던 유다인들을 게토에 한정해 살게 하고, 그들의 영지를 몰수했다. 비밀결사대들이 교황령 안에서 혁명을 일으켜 독립을 부추긴다고 생각해 출판 검열을 강화하는 등 자유주의를 억압하고 보수적인 태도를 강화했다.
비오 8세 교황, 프랑스와 좋은 관계
그의 뒤를 이은 교회법 학자 출신의 비오 8세 교황(재위 1829.03.31~1830.12.01)도 같은 기조를 이어갔다. 1800년 몬탈토의 주교가 된 후, 1808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선서를 거부해 투옥됐고, 교황이 된 후 건강이 좋지 않아 전례를 거행하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그가 전임 교황과 다른 것은 프리메이슨과 같은 비밀결사대들은 단죄했지만, 교황령의 행정에 대해서는 온건한 정책으로 경제ㆍ사회적 개선책을 펴나갔다는 점이다. 프랑스와의 관계도 좋아져서 프랑스에서는 반(反)가톨릭 법령이 철회되기 시작했고, 루이 필리프 왕은 가톨릭교회에 지원과 보호를 아끼지 않았다.
그레고리오 16세 교황, 조선대목구장 임명
비오 8세의 후임으로 선출된 교황은 성 베네딕토 수도회 소속 카말돌리 수도회 출신의 마우로 카펠라리(Mauro Cappellari)였다. 그레고리오 16세(재위 1831~1846년)라는 이름으로 선출된 그는 강한 보수주의자며 전통주의자였다. 수도자 신분으로 있을 때인 1799년, 이탈리아 얀센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박한 「성좌와 교회의 승리(Il trionfo della Santa Sede e della Chiesa)」라는 책을 집필해 출판했다. 책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이탈리아뿐 아니라 유럽 각국어로 번역되어 널리 배포됐다. 1805년 로마 첼리오 언덕에 있는 ‘성 대(大) 그레고리오’ 수도원의 아빠스가 됐다. 그가 후에 교황명을 ‘그레고리오’라고 한 것은 자신이 20년 넘게 첼리노 언덕의 ‘성 대 그레고리오’ 수도원의 아빠스로 지냈기 때문이다.
그레고리오 16세는 전기와 철도 같은 기반 기술 혁신도 반대할 만큼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교황령에 이런 현대 문명이 도입하게 되면, 교역량이 늘어 부르주아 계층이 권력을 갖게 되고, 자유주의 개혁에 대한 요구가 급증해 결국 교황권은 위협받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철도를 프랑스어로 ‘지옥으로 가는 길(chemins d’enfer)’이라고 불렀다.
그는 신학에 관심이 많아 성 아우구스티노와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을 옹호하며, 과거 잠시 포교성성 장관으로 있었던 탓인지 전교에도 관심이 많아 교황이 된 후 전교지의 여러 곳을 교황대리구 곧 대목구로 설정하고 성사 집행을 허락했다. 이 시기(1831년 9월 9일)에 조선 교회를 대목구로 설정해 파리외방전교회의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 조선대목구장 주교로 임명했다. 그러나 브뤼기에르 주교는 중병으로 입국에 실패하고 앵베르 주교가 그의 뒤를 이었다. 같은 시기에 캐나다와 미국, 볼티모어에도 많은 교구가 설립, 재조정 되었다.
1831년 8월 5일, 그레고리오 16세는 헌장 「교회에 대한 관심(Sollecitudo ecclesiarum)」을 발표, 정치적인 입장과 상관없이 교황의 영적 권위는 훼손될 수 없다는 원칙을 천명했다. 33명의 ‘하느님의 종’을 성인 혹은 복자품에 올렸고, 여러 수도회의 창설을 인가 혹은 지원해줬다. 개인적으로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커서 이를 널리 장려하기도 했다. 1836년 11월 15일 그는 당시 교황령의 일부였던 에트루리아 지역에서 고대 유물이 발굴되자 바티칸박물관 내에 ‘그레고리오 에트루리아관’을 신설하도록 했다. 1846년 6월 1일 급성 피부 감염병인 안면 단독(丹毒, erysipelas)으로 선종했다.
안트베르펜 출신 화가
소개하는 작품은 필립 자크 반 브리(Philippe Jacques van Bre, 1786∼1871)가 그린 ‘로마 공회장(포룸 로마눔, Forum Romanum)을 방문하는 그레고리오 16세(Gregorio XVI in visita ai Fori)’(1832년)다.
안트베르펜 출신의 작가 필립 자크는 친형인 마티아 이냐시오(Mattheus Ignatius van Bree, 1773∼1839)와 함께 그림에 대한 사랑을 공유하는 한편, 안트베르펜의 아카데미 교수로 있던 반 레게모터(Petrus Johannes van Regemorter)의 제자이기도 했다. 형제는 파리를 비롯해 유럽의 손꼽히는 도시들을 방문해 여러 화풍을 보며 견문을 넓혔다. 그 과정에서 프랑수아 앙드레 뱅상(Franois-Andr Vincent)의 스튜디오에서 그의 제자가 되기도 했다. 파리에 체류할 때는 다비드의 문하생 중 한 사람이었던 지로데 드 로시 트리오종(Anne-Louis Girodet de Roussy-Trioson, 1767∼1824)의 스튜디오에도 자주 들렀다.
형 마티아는 1804년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왔지만, 필립 자크는 로마, 독일, 영국으로 여행을 계속했고, 파비아에서 몇 년간 체류하며 일하기도 했다. 그는 역사와 환상과 건축을 주제로 한 그림에 전념했다. 벨기에 정부는 그의 작품 중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의 내부 풍경(Veduta dell‘interno della basilica di San Pietro a Roma)’이라는 작품을 구매하면서 황금 메달을 수여하기도 했다. 벨기에 정부가 그의 작품 가격을 설정하기도 했다. 브뤼셀에 있는 벨기에 왕립 미술관(Museo reale delle belle arti del Belgio)의 학예사가 됐고, 1871년 생조스텐노드(Saint-Josse-ten-Noode)에서 사망했다.
그림 속으로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로마 공회장(Foro Romano) 내 티투스 황제의 개선문(Arch of Titus) 아래서 지내던 가난한 사람들을 방문하고 있다. 당시 로마 공회장은 집 없는 사람들이 모여 지내던 일종의 촌락이었다. 유적지 안에 있던 고대의 신전들은 중세기를 거치며 순교자들을 위한 성당으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순례자도 모여들었다. 교황의 이러한 사목적 행보는 교회가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의미뿐 아니라 로마 백성의 군주로서 공적 외출을 한 것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작품에서는 오늘날 보기 힘든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티투스 황제의 개선문 아래가 극빈자들이 사는 장소로 사용되고, 멀리 배경에 콜로세움이 있다. 개선문의 내부에 새겨진 부조와 바닥에 보이는 로마식 가도 형태가 로마의 역사 유적지라는 걸 입증하고 있다.
교황을 바라보고 우측에 있는 일행은 복음서를 손에 들고, 좌측에 있는 일행은 아기를 돌보는 부녀자들에게 성체를 분배하고 있다. 개선문의 우측 아래에는 순례자로 보이는 중년의 한 남성이 어린 양의 다리를 묶고 그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시선을 교황에게 두고 있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54) 프란체스코 포데스티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의 선포’
비오 9세 교황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교리’ 반포하다
- 프란체스코 포데스티,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의 선포’(1859~1860), 바티칸박물관.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시대 혁명 정부의 영향은 유럽 봉건주의 체제의 종말과 민족 자결주의가 싹트는 계기가 되었다. 외세의 지배에서 벗어나 하나의 통일된 민족 국가를 이룩하려는 열망은 특히 이탈리아를 자극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 쉽지 않은 것이었다. 로마 제국 붕괴 이후 오랜 자치 국가주의를 넘어야 하고, 당시 북부 이탈리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오스트리아를 몰아내야 하며, 교황청의 반대를 극복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의 뒤를 이어 이탈리아 마르케주 안코나현의 작은 도시 세니갈리아 출신의 조반니 마리아 마스타이 페레티(Giovanni Maria Mastai-Ferretti)가 제255대 비오 9세 교황으로 선출됐다. 콘클라베는 이탈리아 정치가 매우 불안정한 가운데서 진행됐고, 그래서 비(非) 이탈리아인 추기경들의 많은 불참 속에서 진행됐다. 여기에서 54세의 젊은 추기경이 교황이 되어 교회사에서 성 베드로(34년) 다음으로 오래 재임한 교황(32년)으로 이름을 남겼다.
비오 9세 교황과 교황령
복자 비오 9세 교황은 선출과 동시에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로 이탈리아 반도에 불어닥친 자유와 통일의 열망과 그것을 실행해 옮기는 ‘부흥 운동(리소르지멘토)’과 맞닥트려야 했다. 신심이 깊고 지성과 인품을 두루 갖춘 교황은 모든 사람을 열린 마음으로 대했다. 교황이 되어 가장 먼저 한 일도 교황령 내에 수감 중이던 정치 사범들을 모두 사면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사면된 ‘혁명주의자’들은 곧 과거 자신들이 하던 활동을 재개했고, 그것은 교황령의 종식에 불씨가 됐다.
당시 이탈리아는 통일을 위해 오스트리아가 차지하고 있던 이탈리아 북부 지방을 탈환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비오 9세의 참여를 압박했다. 그러나 교황은 장화 반도뿐 아니라 보편 교회의 수장으로서, 현세의 국가주의를 초월하는 위치에 있다고 주장하며, 더욱이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가톨릭 국가를 상대로 한 전쟁에는 동참할 수 없다며 발을 뺐다. 민족주의가 팽배하던 이탈리아는 교황이 이탈리아를 배반했다고 외치며, 이참에 교황령의 종식을 부르짖었다.
한편, 비오 9세는 교황청의 영적인 독립을 주장하며 교황령을 헌법 정부로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이탈리아 통일의 급물살 속에서 급진주의자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히고 말았다. 1848년 11월 15일, 교황령의 초대 총리였던 로씨(Pellegrino Ross)는 암살되고, 다음날 스위스 근위대의 무장이 해제되며, 교황은 바티칸 궁전에 감금됐다. 평범한 사제복으로 갈아입고 겨우 로마를 빠져나와 나폴리 왕국의 가에타로 피신한 교황은 음모에 가담한 관련자 전원을 파문했다. 그 틈에 이탈리아 통일의 당위성을 설파했던 정치사상가 마치니(1805~1872)와 그의 추종자들은 ‘이탈리아 공화국’을 선포하고 수도를 로마로 지정(1849년 1월)했다.
교황은 프랑스 원정군의 도움으로 1850년 4월 12일 로마로 귀환했으나, 프랑스 혁명과 로마의 독립운동이 상호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전통 사회는 물론 도덕과 종교 질서까지 붕괴할 것임을 예견했다. 17개월의 망명에서 돌아온 뒤, 앞서 로마 공화국에서 벌인 여러 가지 사업을 폐지하고 복구를 단행했다. 국가 재정은 엄청난 빚으로 파탄 상태에 가까웠고, 행정은 말이 아니었다. 교황의 지속적인 개혁과 통제하에서 경제와 행정은 8년 만에 회복 분위기로 돌아섰고, 시민들의 세금 부담은 유럽 평균보다 훨씬 낮았다. 그 결과 외국인 거주자들이 대거 로마로 유입했는데, 다수는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다.
문화·개량 사업 적극적으로 펼쳐
비오 9세 교황은 1850년 8월 14일 유럽에서 처음으로 청각 장애인들을 보호하고 교육하기 위한 법적 규정을 마련했다. 또 그해 9월 12일 자의 교서를 통해 교황청 자문위원회를 재구성하고, 재정위원회를 신설하며, 광범위한 사면을 단행했다. 그 덕분에 1850년대 교황령은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이룰 수가 있었다. 19세기 중반, 교황령에서 시작되거나 이룩한 주요 공공사업은 ①페라라와 오스티아 습지 간척 사업 ②라벤나에서 안코나까지 항구를 확장하고, 일부 항구에 새 등대 설치 ③알바노와 아리챠 구간을 포함해 20여 개의 주요 도로에 고가 건설, 도로 현대화 ④통신망을 구축해 교황령 내 모든 주요 시설과 직접적인 소통 모색 ⑤1823년 7월 15일 화재로 새로 지은 성 밖의 성 바오로 대성전 축성(1854년 12월 9일) ⑥철도 건설 등이다.
1852년 1월 비오 9세 교황은 피렌체, 모데나, 파르마와 함께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우표 사용을 도입했다. 1853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교황령은 면적 기준으로 장화 반도에서 나폴리와 사르데냐 왕국에 이어 세 번째 국가로 이름을 올렸다. 비오 9세는 재임 기간 장애인을 위한 전문학교와 노동자들을 위한 야간 학교를 신설해 교육 혁신을 가져왔다. 종일반 어린이 학교를 개설해 종일 일하는 학부모들의 고충을 해결해줬다. 대학교 교직원들의 급여를 인상하고, 대학 교육에 지질학, 농업 과학, 고고학, 천문학 및 식물학을 추가했다. 산부인과 병원, 박물관과 천문대도 여럿 문을 열었다. 신학 과정에 있는 학생들에게는 엄격한 양성을 요구했고, 해외 유학생들에게는 아낌없는 재정적 지원을 해 줬다.
비오 9세 교황은 대다수 전임자와 마찬가지로 예술을 후원하는데도 소홀하지 않았다. 모든 예술 분야를 후하게 지원하고, 각 분야의 대표에게는 많은 상을 수여했다. 로마에 있는 두 개의 극장은 교황의 모든 검열에서 면제됐다. 역사 유적지에 있는 성벽, 분수, 도로와 다리들도 복원하며, 로마의 유적지 발굴을 명해 많은 중요한 유물들을 발견하도록 했다. 당시 무너질 위기에 처한 콜로세움을 보수했고, 카타콤바 발굴을 위해 엄청난 돈을 쓰기도 했다. 1853년 고고학 위원회도 신설해 성 칼리스토 카타콤바 발굴을 주도했다. 페루지아, 오스티아, 베네벤토, 안코나, 라벤나 등지에서 에트루리아 유적과 고대 로마의 기념물을 발견, 복원하기도 했다. 교황령이 이탈리아 왕국에 합병되기 20년 전, 로마 외곽 대부분 지역에서 개량 사업이 완성되고, 로마시 상수도 사업은 마무리 단계에 있었다. 유럽의 어느 사회보다도 로마를 비롯한 교황령에서 진행된 현대화는 괄목할 만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비오 9세가 가톨릭 신자들의 신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건 1854년 12월 8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를 선포한 것이다. 400여 개 언어로 번역된 교서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Ineffabilis Deus)」을 통해 선포된 이 교리는 뒤이어 개최하게 될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암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교리는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을 토대로 선포됐고, 이 두 가지 권한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다룬 가장 큰 주제였기 때문이다.
역사 회화의 마지막 주자
소개하는 작품은 하예츠, 베추올리와 더불어 1800년대 이탈리아를 이끈 최고의 화가로 알려진 포데스티(Francesco Podesti, 1800~1895)가 그린 프레스코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의 선포’(1859~1861)이다.
작가는 나폴레옹 시절, 안코나의 소박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재봉사로 도시에 주둔한 프랑스 군대와 수비대의 군복을 수선하는 일을 했다. 파비아에서 군(軍) 건축을 공부하던 중 부모를 모두 잃고, 그 시기에 회화에 대한 예술적 재능을 보여, 안코나시에서 지급하는 장학금으로 로마의 성 루카 아카데미에서 10년간 고전 미술과 역사 회화를 공부했다. 그 시기에 카노바를 만나 부정(父情)을 느끼며 예술가로 성장했고, 다비드(Jacques-Louis David)와 이상을 공유하는 친구가 되었다.
포데스티는 1826년부터 예술 공부를 위해 피렌체, 피사, 볼로냐, 파르마, 베네치아와 밀라노 등지를 여행했다. 나폴리, 폼페이, 에르콜라노 등도 방문해 고대 미술을 만났다. 이후 그는 작품을 통해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역사적 낭만주의에 권력과 감정의 조화를 모색했다. 그것은 시민 정신으로 일컫는 용기와 자유에 대한 사랑을 부각하는 것이기도 했다.
학문주의와 낭만주의 사이에서 ‘역사 회화’의 마지막 주자로 런던과 파리 등 유럽 전역에서 크게 명성과 영광을 얻었고, 1895년 95세의 나이로 로마에서 사망했다.
그림 속으로
바티칸박물관, 라파엘로의 방으로 가는 길목에 1854년 12월 8일 비오 9세 교황이 선포한 ‘마리아 교의’ 장면이 그려진 대형 프레스코화가 있다. 1861년 중요한 교황령이었던 로마시를 이탈리아 왕국에 빼앗긴 민감한 순간에 안코나 출신의 프란체스코 포데스티가 방의 세 벽면에 교황의 권한을 암시하는 세 개의 벽화를 그린 것이다. ‘옥좌에 앉은 교회’, ‘교의 선포’, ‘동정녀의 대관식’에 대륙들이 무릎을 꿇고 있다.
이 작품은 ‘교의 선포’에 해당하는 것으로, 삼위일체 하느님께 둘러싸인 동정 마리아를 중심으로 천상 그룹과 지상 그룹으로 나뉘어 예언자, 사도 등 구약, 신약의 인물들과 당시 교회를 이끌었던 교회 인사들이 한자리에 있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55) 프란체스코 하예즈의 ‘입맞춤’
‘작별 키스’에 담긴 숨은 뜻은 19세기 이탈리아 통일 의지
- 프란체스코 하예즈, ‘키스’(1859년), 브레라 피나코테크 소장, 이탈리아 밀라노.
이탈리아 민족의식 태동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체제는 장화 반도를 근본부터 흔들어 놓았다. 프랑스 혁명의 불길은 이탈리아에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를 전했고, 여러 군소국가로 분열되어 있던 장화 반도는 민족의식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 체제가 붕괴한 뒤 1814년 빈 회담을 계기로, 이탈리아의 통일을 향한 행보는 본격화됐다. 그러나 갈 길은 녹록지 않았다. 지난 호에 잠시 언급했지만, 이탈리아가 통일하려면 당시 북부 이탈리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를 몰아내야 하고, 교황청의 반대를 극복해야 했기 때문이다. 또 오늘날 보다시피 죽어도 이탈리아에 합류하지 않겠다고 버틴 ‘산 마리오 공화국’ 같은 나라도 있었다.
프랑스 대혁명 시절부터 19세기 후반, 이탈리아가 통일하고 수도를 로마로 정한 뒤 교황을 ‘바티칸의 수인(囚人)’으로 만들 때까지, 그 시기의 교황과 교황령은 한 시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교회 입장에서 19세기는 시작부터 숨쉬기조차 힘든 시절이었다고 할 수 있다. 복자 비오 9세 교황은 이탈리아 통일의 급물살 속에서도 로마와 교황령 안에서 지도자로서 나름의 정치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부흥’을 의미하는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는 곧, ‘통일운동’을 의미했고,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탈리아의 독립전쟁은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그것을 오늘 소개하는 하예즈의 작품으로 설명해 보기로 하겠다.
이 작품은 남녀가 격정적인 사랑의 키스를 하는 걸로 보이지만, 역사적, 정치적 은유로 유명한 작품이기도 하다. 하예즈는 이 작품을 모두 4점 그렸다. 3점은 유화고, 하나는 수채화다. 모두 이탈리아 통일의 상징으로 밀라노 브레라와 암브로시아나 피나코테크에 있다.
독립전쟁과 세 가지 버전의 그림
1848년 이탈리아는 제1차 독립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로 끝났고, 이탈리아 혼자 힘만으로는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1858년 주세페 가리발디, 주세페 마치니와 함께 이탈리아 통일의 3걸이 된 카보우르 백작 카밀로 벤소(Camillo Benso Conte di Cavour)의 제안으로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와 비밀리에 ‘플롱비에르 협약(Plombires Agreement)’을 체결하고 이듬해, 제2차 독립전쟁에 승리함으로써 본격적인 통일에 접어들었다. 1859년 프랑스군의 원조를 얻어 오스트리아군을 무찌르고 이탈리아 중부와 북부를 점령한 것이다.
하예즈의 첫 번째 ‘키스’는 바로 그해, 밀라노의 명문 출신 알폰소 마리아 비스콘티 디 살리체토(Alfonso Maria Visconti di Saliceto) 백작이 프란체스코 하예즈(Francesco Hayez)에게 개인적으로 의뢰했다. 비스콘티는 프랑스와 사르데냐 왕국 간의 동맹이 가져올 ‘희망’을 그림에 담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그려진 이 그림은 25년 이상 비스콘티의 호화로운 저택을 장식했다가 1886년 알폰소가 죽기 1년 전에 브레라 피나코테크에 기증했다.
흔히 ‘수채화 버전’으로 알려진 뒤이은 작품은 같은 해(1859년)에 작가가 연인 카롤리나 주키의 언니에게 선물용으로 그린, 달걀 형태의 작은 그림이다. 첫 번째 버전과 같은 색으로 현재 밀라노의 암브로시아나 피나코테크에 있다.
두 번째 유화 버전은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이 선포되던 해에 그렸다. 그해 통일의 3걸은 빅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를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왕으로 추대했다. 그림 속에서 여성은 흰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이것으로 하예즈는 작품을 이탈리아 통일에 헌정했다.
세 번째 유화 버전은 1867년 이탈리아 통일이 완성되고, 남자의 망토 왼쪽에 초록색 외투가 추가되고 계단에 흰색 천이 앞서 남자의 빨강 바지와 함께 이탈리아 국기를 상징한다. 흰색 천과 남자의 외투 밝은 녹색이 앞의 버전에 추가됐다.
‘키스’라는 주제를 통해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동맹이 이탈리아 통일로 이어졌고, 이것은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에서 시작되어 단테가 한탄하기도 했던, 교황의 세속권력이 종식되는 것을 의미했다.
프랑스인 아버지와 이탈리아인 어머니
작가인 프란체스코 하예즈(Francesco Hayez, 1791∼1882)는 베네치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인이었고, 어머니는 이탈리아인이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이미 많은 것을 함의한다고 할 수 있다. 베네치아 학파들의 파스텔톤 그림으로 학습을 시작했다. 1809년 로마 아카데미아 주최 ‘로마 견습’ 기회를 주는 대회에서 만점을 차지하며, 로마시에서 주는 장학금과 보조금을 받으며 3년간 공부했다. 이전부터 볼로냐, 피렌체, 시에나를 거쳐 로마에 안주하는 과정에서 라파엘로를 깊이 연구했고, 로마에서 여러 중요한 직책을 수행하고 있던 안토니오 카노바를 만났다.
로마의 치코냐라 공작은 그를 두고 “위대한 이탈리아 회화에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어 줄 인물”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카노바의 도움으로 카피톨리니 박물관과 키아라몬티 박물관에 수집된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 작품들을 공부할 기회를 얻었고, 바티칸 궁전에서 라파엘로의 작품들을 만났다. 이런 경험은 성경과 역사, 인물을 주제로 바로크와 로코코의 웅장하고 화려한 기법이 아니라, 단순하고 명료한 신고전주의에 안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예츠는 1820년을 전후로 밀라노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새로운 낭만주의 분위기를 접했고, 유명 정치인들과 접촉하며 당대 명사들의 초상화로 이름을 얻었다. 극도로 세밀한 묘사와 인물의 미세한 감정변화까지 포착해내는 낭만주의적 정교함으로 큰 찬사를 받았고, 1850년 브레라 아카데미아에서 회화 분야 학과장이 됐다. 이후 그는 고전주의 분위기에 개인적인 감성과 인간과 자연의 자연스러운 동화를 통해 낭만주의적인 색채를 드러냄으로써 신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의 이행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882년 91세를 일기로 밀라노에서 생을 마감했다.
낭만주의의 가장 위대한 해석자
이탈리아 통일의 영감을 불어넣었던 주세페 마치니(Giuseppe Mazzini)는 밀라노에서 활동하며 애국심이 투철한 하예즈를 두고 “19세기 이탈리아의 위대한 이상주의 화가”, “이탈리아에서 국가주의 사상이 요구하는 역사회화의 수장”이라고 극찬하며, 낭만주의의 가장 위대한 해석자로 꼽았다. 스탕달도 그를 두고 낭만주의적 이상을 가장 장엄하게 해석한 몇 안 되는 이탈리아 예술가 중 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하예즈가 ‘키스’에서 강조하고자 한 것은, 사적인 감정과 애국심이 동일한 맥락에 있다는 것이다. 개인의 감정과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는 조국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것을 위해서는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잠시(혹은 영원히) 헤어지는 희생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리소르지멘토의 낭만적, 민족주의적, 애국적인 이상을 상징하며, 19세기 이탈리아의 정치적 변화를 색으로 함축한 탁월한 작품이다.
미(美)와 사랑, 거기에 애국심까지 담긴 이 작별의 ‘키스’는 이탈리아 국가 탄생의 상징이 되었다. 이것은 비오 9세 교황의 정치력과 외교력이 아무리 훌륭해도 이탈리아가 통일로 가는 운명의 물꼬를 되돌리지는 못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림 속으로
14세기 복장을 한 청춘남녀는 중세기 한 저택의 현관에 있다. 낭만주의의 상징이 된 이 그림 속 남녀의 키스는 마지막 작별 인사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맞서 전투에 나가는 이탈리아의 젊은 병사가 연인에게 굿바이 키스를 한다. 여성은 보내고 싶지 않다는 듯 연인의 어깨를 거세게 붙잡고 있다. 남성의 왼발이 맨 아래 계단에 올린 사이, 옆구리에 찬 칼이 그의 신분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동료로 보이는 한 남성의 그림자가 왼쪽 문 저편에 있는 것 같다. 키스하는 두 주인공이 입고 있는 옷의 색깔, 곧 남성의 빨간 바지, 여성의 흰 속옷과 청색의 드레스는 프랑스의 국기 색이다. 자유, 평등, 형제애를 의미한다. 여기서 두 사람의 입맞춤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두 국가의 동맹관계를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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