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계중생과 정치의 기술―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사이에서
최근 이재명 정부의 경제정책을 둘러싼 논란이 거세다. 정부는 부동산에 집중된 자산을 생산적인 금융시장으로 유도하기 위해 "부동산보다 주식"이라는 방향을 제시했다. 동시에 보유세, 금융규제, 대출규제 등을 통해 부동산 투기를 억제하고, 장기적으로는 주택가격 안정과 공급체계의 정상화를 이루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러나 현실은 정책의 의도대로만 움직이지 않았다. 주식시장의 변동성이 커지고, 전월세 가격 상승과 주택공급 부족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일부 언론은 정부의 시장개입이 실패했다고 평가한다. 특히 정부가 시장을 지나치게 통제하려 했으며, 시장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수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 논쟁을 보면서 문득 불교가 바라보는 인간관이 떠오른다.
불교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욕계(欲界)라고 부른다. 욕망이 삶의 기본 동력이 되는 세계이다. 여기서 살아가는 중생은 성인도 아니고 보살도 아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삼독(三毒)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정치학에서는 이것을 '합리적 이기주의'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먼저 자신의 생존과 가족의 안정을 우선시한다. 공동체 전체의 장기적 이익보다 당장의 생활비와 주거비, 자산의 증감을 먼저 고려하는 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심리이다.
이는 도덕적으로 비난할 일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의 조건이다.
불교는 이 점을 매우 현실적으로 본다. 부처님은 중생에게 처음부터 보살의 마음을 기대하지 않았다. 탐욕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욕망을 어떻게 조금씩 선한 방향으로 이끌 것인가를 가르쳤다. 계율도, 보시도, 수행도 모두 인간의 현재 수준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정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정치는 이상적인 시민을 대상으로 설계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인간을 대상으로 이루어진다.
정부가 공동체의 장기적 이익을 위해 정책을 설계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정책이 성공하려면 그 정책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심리 역시 함께 계산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먼 미래의 공익보다 오늘의 손익에 훨씬 민감하다.
몇 년 뒤 집값이 안정된다는 약속보다 이번 달 대출이자와 전셋값이 더 절실하다.
국가경제의 체질 개선보다 자신의 자산가격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것이 바로 욕계중생의 현실이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심리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 뒤 방편(方便)을 사용한다.
부처님의 설법은 언제나 상대의 근기에 맞추어졌다. 처음부터 공(空)을 설하지 않았고, 먼저 복을 이야기하고, 계율을 이야기하고, 선행을 이야기한 뒤 조금씩 깊은 진리로 이끌었다. 이를 차제(次第)의 가르침이라고 한다.
정치 역시 어느 정도는 이러한 차제의 원리를 필요로 한다.
국민 모두가 장기적 국가이익을 위해 당장의 손해를 감수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이상주의일 수 있다.
오히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공익도 함께 실현되도록 제도를 설계하는 편이 현실적이다.
고대 중국의 「조삼모사(朝三暮四)」 이야기는 흔히 원숭이의 어리석음을 풍자하는 우화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도토리의 총량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점이다. 인간은 객관적 숫자보다 심리적 만족에 더 크게 반응한다.
현대의 행동경제학 역시 같은 사실을 말한다. 사람들은 절대적 이익보다 손실을 더 크게 느끼며, 장기적 이익보다 즉각적인 보상을 선호한다.
정치는 이러한 인간심리를 무시해서도 안 되고, 그것에만 끌려가서도 안 된다.
좋은 정치는 인간을 성인으로 가정하지도 않고, 짐승으로 취급하지도 않는다.
욕망을 인정하되 그것이 공동체를 파괴하지 않도록 방향을 잡아주는 기술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방편이라 하고, 정치학에서는 이를 제도설계라고 부른다.
결국 정치의 어려움은 여기 있다.
이상만 바라보면 현실을 잃고, 현실만 따라가면 이상을 잃는다.
부처님의 중도(中道)는 양극단을 피하는 길이었다.
오늘날의 정치 역시 시장만능주의와 국가만능주의라는 두 극단 사이에서 중도를 찾아야 한다.
시장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시장의 폐해를 줄이고, 인간의 욕망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사회 전체를 해치지 않도록 유도하는 것.
아마도 그것이 욕계중생의 세상을 다스리는 가장 현실적이고도 불교적인 정치가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