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밑 부산 원도심
남포-광복로 한 바퀴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을 떠올리게 하는 남포동 부산극장 앞 노점 호떡 가게였다. 내외국인 관광객들이 둘러서 있었지만 추위 때문인지 그 숫자는 평소처럼 많지 않았다. 옛 미화당백화점 앞과 용두산공원 그리고 남포동 지하상가에서 만난 대낮 성탄트리는 쓸쓸한 느낌을 안겨주었다. 성탄트리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오색 조명이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밤이어야 제격인데 백주 대낮이라 그런 것 같았다.
내 삶에 많은 추억을 안겨준 부산 원도심이다. 직장 사무실에서 가까워 골목골목을 누빌 수 있었으니 그건 내 생에 찾아든 흔치 않은 봄날이었을 것이다. 동란 끝난 지 10년이 채 지나지 않았던 그때로부터 세월은 어느새 60년이나 흘렀다. 그동안 도시는 숱한 변화를 겪었지만 광복로에 물린 국제시장과 남포동 자갈치는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어 옛 추억을 소환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부산 원도심에 처음 성탄트리 축제행사가 열릴 무렵 남포동 끝자락에 붙은 직장은퇴자 사무실 덕분에 난 6년 동안 축제를 만날 수 있었다. 그 무렵 삿포로 눈꽃축제와 하얼빈 빙등축제도 열리고 있었지만 광복로 성탄트리가 단연 압권이었다. 지구촌 곳곳에서 몰린 관광객들과 거리의 악사로 나선 부산의 원로 뮤지션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을 카메라에 담아 카페 회원들과 나눌 수 있어 행복했다.
금년엔 그나마 코로나로 중단되었던 성탄트리축제가 재개되었다. 축제는 전성기에 비해 크게 축소하여 조심스레 고개를 내민 형국이었다. 때마침 북극에서 몰려온 기록적인 한파에다 이태원 참사까지도 종전의 왁자한 성탄트리축제를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볼일로 동광동 인쇄골목과 국제시장을 찾았다가 광복로와 용두산공원 그리고 자갈치를 두루 카메라에 담았다. 한파가 매서웠지만 멈추지 않았다.
자갈치시장 뒤 바다전망대엔 스무 명 가까운 노인들이 연신 외투 깃을 올리면서 몰려들었다. 휴대폰을 손에 든 노인이 일행을 향해 단체사진을 찍고자 연신 소릴 질러댔기 때문이다. 그들은 충청도 말씨만큼이나 동작도 느렸다. 아무도 요청하진 않았지만 난 그들 앞에 나섰다. 단체로 막아선 ‘JAGALCHI'란 글자가 보이도록 뒤로 물러서게 한 뒤 사이사이를 벌려 바다 풍광까지 담아 셔터를 눌러주었다.
20여 년 전 광복로에 영문간판이 드문드문 등장하자 신문과 방송이 나서서 여기가 뉴욕이냐며 시끄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 글자로 된 간판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바뀌고 말았다. 골목 하나 사이인데도 남포동 골목은 다르다. 한글 간판이 대부분 그대로 살아있다. 그 때문인지 이곳엔 문을 닫은 점포도 많은 편이다. 난 그래도 세월을 함께 해온 남포동 골목을 못 잊어 오늘도 이곳 ‘18번완당’을 한 그릇했다.
매년 맞는 세밑이지만 그 감회는 한마디로 쓸쓸함이다. 인생황혼에 이른 탓도 있겠지만 노인의 기대와는 거꾸로 흐르는 세태도 쓸쓸함을 더해준다. 그런데다 지구촌을 강타한 불청객 역병까지. 곧 끝날 생이지만 이처럼 살얼음을 걷는 형국이니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도 여간 버겁지 않다. 세밑에 카메라가 부산 원도심 남포-광복로를 찾은 것도 이러한 쓸쓸함을 조금이나마 떨치기 위한 자구책인지도 모른다.
부산 원도심 회상
씨름장사 양동근 수필가
강문석 작가가 세모에 광복로와 남포동을 카메라에 담은 영상과 글은 나에게도 이곳 추억을 소환해 준다.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88년 3월부터 96년 10월까지 광복로 입구에서 헬스클럽을 운영했기 때문이다. 그땐 남포동 광복로를 관할하는 중구청이 남포동 사거리에 있었고 길 건너 토성동엔 한전과 천일정기화물이 있었다. 동아대 정삼현 교수가 운영하던 극동체육관이 한전 옆에 있었고 그곳에선 역도와 유도 복싱 그리고 헬스까지 가르쳤다.
소생이 '미스터부산' 장년부 톱에 오른 것은 1980년이었고 그때부터 국제시장 입구에 박성남 관장이 세운 대한체력관을 인수받아 운영하기 시작했다. 현 서구청에서 도로를 건너면 남포동이 시작되는데 당시엔 그곳부터 포장마차가 즐비했다. 호주머니가 가벼운 애주가들이 즐겨 찾는 포장마차가 불야성을 이루어 도시의 또다른 풍경을 만들었다. 아카데미 극장 뒷골목엔 영업이 끝난 포장마차를 보관하는 자리가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때 본인이 운영한 대한체육관은 그 규모가 충무동과 광복동 중앙동 자갈치를 통틀어도 가장 컸다. 헬스 회원만 5백 명이 넘었고 에어로빅 강사교육관도 별도로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때가 딱히 나에게 딱히 인생의 봄날이라 할 수는 없지만 장녀와 차녀 결혼을 시켰고 체육관 운영위원들과 나이트클럽과 단란주점도 자주 들락거렸다. 당시 동연배로 헬스클럽 관장을 지낸 이들은 지금도 몇 명을 만나고 있으니 더욱 부산 원도심에 애착이 간다.
당시 아카데미극장을 관리한 지배인은 동향이기도 하여 그 덕에 영화도 자주 보러 갔었다. 그 시절엔 자갈치시장 포장마차에선 양곱창까지 팔았기에 우리 가족은 자주 포식할 수 있었다. 세월은 참으로 무상하여 부평동을 떠나온 지도 벌써 26년 세월이 흘렀다. 내가 강 작가를 만난 것은 2005년으로 기억한다. 그 무렵 그의 부부와 명지에도 함께 가서 갈대를 배경으로 카메라 앞에 섰던 기억이 떠오른다. 강 작가의 가슴 뭉클한 신작소설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