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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히브리서 제7강
새 언약의 중보자
말씀/히8:1-9:22
요절/히9:1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히브리서 저자는 오늘 말씀에서 구약의 대제사장 직분과 비교해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분이 더 우월하다고 말합니다. 또 예수님이 우리에게 더 좋은 언약인 새 언약을 가져오셨다고 말합니다. 왜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분이 더 우월할까요? 왜 예수님이 중재해준 새 언약이 더 좋은 언약일까요? 새 언약은 과연 어떻게 체결되었길래 그럴까요?
1절을 보십시오. 히브리서 저자는 지금까지 예수님이 천사보다도 모세보다도 더 위대하고 월등하신 대제사장이고 한계적인 인간 대제사장과는 달리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르는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심을 말했습니다. 바로 지금 이같이 위대하고 영원한 대제사장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 예수님은 또 어떤 분이십니까?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 즉 하나님이 계시는 자리 우편에 앉으셔서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참 장막인 하늘 성소에서 지금도 섬기고 계십니다. 물론 하나님과 예수님은 어느 곳에서나 계실 수 있고 임하셔서 역사하실 수 있는 편재성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특별히 하늘은 하나님이 세우신 진정한 예배처이며 하나님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 처소이며 참되고 진정한 성소로 히브리서 저자는 말합니다. 히브리 성도들이 활동했던 당시 사람들은 크고 화려한 성전에서 아름다운 옷을 입고 제사 드리는 대제사장을 영광스럽게 보았습니다. 그에 비해 현재 이 땅에 계시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예수님을 믿고 살면서 고난과 박해를 받고 사는 자신들이 초라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이 직분을 수행하던 성막과 성전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하나님의 참되고 영원한 처소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직접 세운 참 장막인 하늘 성소에 거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본체가 하나님이지만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죄와 죽음의 세력 아래 고통당하는 영혼들을 살리는 구원역사를 완성하셨습니다. 승천하신 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는 자리 오른편에 앉으셔서 영광과 존귀로 옷 입으시고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며 중보사역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대제사장은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해 세운 자입니다. 이들은 제사에 드려질 제물들을 드렸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 자기 자신을 제사에 드려질 희생제물로 드렸습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레위의 후손 출신들만 택함 받았고 그들은 날마다 제단에 희생제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이 같은 구약시대의 제사장 제도를 통해서는 예수님은 제사장이 되실 수 없었습니다. 구약시대 제사장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 성소에 있는 것의 모형이요 그림자였습니다. 구약시대 제사장들의 일은 중요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이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구약의 제사장 직분도 영광스럽고 월등한 직분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8장에 보면 대제사장은 세상에서 가장 영화롭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제사장 직분을 수행했습니다. 그 옷은 모두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엮어져 있었고 어깨와 가슴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진 아름다운 열두 보석들이 있었습니다. 이는 제사장 직분이 그만큼 영화롭고 월등함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보다 훨씬 뛰어나고 월등한 직분을 얻으셨습니다.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이는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분은 모형이 아니라 원형이며 참된 장막인 하늘 성소에서 섬기시기 때문입니다. 또 일시적이고 물질적인 제사가 아니라 영원하고 신령한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더 좋은 약속으로 세워진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중보자가 무엇입니까? 중보자는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고 양측을 중재하는 존재입니다. 레위 후손의 제사장들은 인격도 불완전하고 그들이 드리는 제물도 불완전했기 때문에 완전한 제사로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리며 중재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오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에 중보자로서 너무나 합당했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 5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예수님은 그 인격 면에서 완전한 중보자가 되실 뿐만 아니라 제사에 드릴 희생제물도 흠 없는 자기 자신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 양측을 다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면 더 좋은 약속인 새 언약은 과연 무엇입니까?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았던 첫 언약에 흠이 있었기 때문에 새 언약이 필요했습니다. 첫 언약이 파기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백성들의 우상숭배와 음란 등의 죄와 허물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애굽에서 해방되었고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언약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다른 신, 즉 우상을 섬겼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렸다고 탄식했습니다(렘31:32).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따라간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하는 영적 음행의 죄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은 수없이 선지자들을 그들에게 보내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회개를 촉구하였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도 그들을 돌아보지 않으시고 심판하셨습니다. 이로써 모세를 통해 시내 산에서 맺었던 첫 언약은 깨어졌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들을 완전히 버리셨습니까? 완전히 포기하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크신 긍휼과 변치 않는 사랑으로 그들과 새 언약을 맺겠다고 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주어진 첫 언약이 불완전하고 임시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더 좋은 언약, 새 언약이 주어질 때가 올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생각과 마음에 기록될 새 언약을 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새 언약의 요점은 이것입니다.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10).” 새 언약은 희생 제사나 다른 외적인 의무 조항들로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새 언약은 사람의 마음의 변화를 통해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생각과 마음에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이 같은 마음의 변화는 죄를 제거하고 성령의 내주하심을 얻게 하는 예수님의 온전한 희생 제사를 필요로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의지하고 삶을 온전히 내어 맡길 때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거룩한 영적 소원을 부어주십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고 우리의 양심을 살아나게 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마음과 생각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주십니다. 우리를 자녀 삼아주시고 우리를 돌보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까지 인도해주십니다.
이래서 새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 성령께서 친히 계획하시고 이루시고 우리를 이끄시기에 은혜의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 순종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화평하게 하는 언약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능력을 의지하고 나아오는 자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시고 모든 죄를 근본적으로 용서해주시고 다시는 기억도 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야말로 말할 수 없는 크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죄 용서의 은혜를 온전히 믿을 때 더 이상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고 죄 사함의 은혜와 기쁨이 넘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새 언약이 주어졌기 때문에 옛 언약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가슴에 새기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영원히 용서해주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참 장막인 하늘 성소에서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시는 영원한 대제사장 예수님께 날마다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죄 사함의 은혜를 누리며 감사와 확신 가운데 하나님을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9장은 더 좋은 언약인 새 언약이 어떻게 세워지는가를 보여줍니다.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이 땅에 세워진 성소가 있었습니다. 이 땅의 성소는 성전이 지어지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용하던 성막을 가리킵니다. 그 성막은 두 방이 있었는데 성소라고 부르는 외실과 지성소라고 부르는 내실이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섬기며 이 방에 배치되어있는 성물들을 관리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해주는 휘장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범죄한 인간을 분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 휘장 뒤에 지성소가 있었는데 그곳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입니다. 지성소에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 1년에 하루 대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은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 지성소에 들어가 언약궤 위, 속죄소에 짐승의 피를 뿌렸습니다.
언약궤 안에는 성물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 아론의 싹난 지팡이, 십계명이 기록된 언약의 돌판입니다. 속죄소는 죄를 속하는 곳이었기에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백성들은 속죄소를 통해 하나님의 죄 용서를 경험했습니다. 구약의 희생 제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과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이같이 옛 언약에 속한 예법과 의식들은 개혁할 때까지 맡겨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개혁’이라는 말이 ‘new order’로 되어있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언약의 질서가 세워지게 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제물과 제사 등과 관련해 어떤 질서나 예법을 세우셨습니까? 11,12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이 땅의 대제사장은 첫 장막 성소를 지나 둘째 장막 지성소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대제사장은 장막 바깥에서 잡은 짐승의 피를 속죄소에 뿌리고 백성을 위해 간구했습니다. 이러한 예식을 매년 반복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한 제사 제물로 친히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가 아닌 오직 ‘자기 피’로 단번에 영원한 죄 사함을 이루시고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제사는 완전하므로 더 이상 또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매년 십자가에서 죽기를 반복할 필요도 없고 하늘 성소에 들어갔다 내려왔다를 매년 반복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피의 효력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를 죽게 하는 죄악된 행실에서 우리 양심을 깨끗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피로 우리 인간이 치러야 할 죗값을 완전히 다 치르시고 우리를 죄와 사탄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피의 능력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8,19).”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는 아무리 더럽고 추한 죄라도 깨끗하게 하여 양심을 회복시켜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양심이 깨끗하게 될 때 조그만 죄도 민감하게 깨닫고 애통히 회개하게 됩니다. 그럴 때 죄 사함의 은혜가 차고 넘치게 됩니다.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덧입을 때 우리 내면에 근본적인 변화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상을 섬기고 자기만을 위해 이기적으로 살던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가 성경 지식이 많다고 해서, 신학을 공부했다고 해서, 인생 경험이 많다고 해서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을 섬기는 데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본질적인 것은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충만한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며 하나님께 헌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믿고 의지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알고 날마다 매순간마다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와 능력을 믿고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이 새 언약의 중보자임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온전히 희생하신 것은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자들이요, 예수님을 유일한 구원자요, 새 언약의 중보자로 믿고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와 능력을 믿고 예수님을 배우고 닮아가는 사람들은 영원한 기업인 하나님의 나라와 영원한 구원과 하늘의 상급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왜 꼭 ‘피’여야 했을까요? 유언은 유언한 사람이 죽어야 효력이 있습니다. 언약과 유언은 헬라어 원어로 ‘디아데케’라고 하는데 이는 언약은 유언적 성격이 있음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이 하신 언약이 효력을 발생하려면 죽으셔야 했고 그것도 피를 흘리며 죽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면 언약은 유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제자들과 가지실 때 포도주잔을 나누어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8).”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죄 사함을 얻게 하기 위해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시며 피를 흘리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피는 언약의 피요 능력의 피입니다.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닙니다. 첫 언약 때도 모세가 송아지와 염소의 피를 온 백성에게 뿌리며 말하기를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고 했습니다. 또 이 짐승의 피를 집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도 뿌렸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습니다. 정결하게 하는데 피 흘림이 필요합니다. 구약시대에 인간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 수많은 짐승이 희생되었고 많은 피가 뿌려졌습니다. 이 모든 예법과 의식은 그리스도 예수를 예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믿고 의지하기만 하면 어떤 죄를 지었을지라도 현재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라도 문제 되지 않습니다.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의지하는 사람을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시고 영원한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 상속자로 삼아주십니다. 하나님의 모든 신령한 은혜들을 자녀 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십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고귀한 피를 흘리심으로 새 언약을 체결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새 언약의 중보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서 피 흘려 온전히 희생하심으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셨습니다. 죄 사함과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나라 기업을 주셨습니다. 양심까지도 깨끗하게 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능력을 부어주셨습니다. 죄악된 생활에서 벗어나 은혜와 감격이 넘치고 생명력 충만한 삶을 살게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만이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의 은혜를 기억하고 덧입음으로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고 섬기며 구원과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 상속의 은혜들을 삶 속에서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가게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