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신 134/200416]봉양奉養과 양지養志 사이
70년대초 중학교 도덕시간에 배운 두 단어를 지금도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봉양奉養과 양지養志’가 그것. 부모를 모시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봉양은 부모의 식의주食衣住를 활발하게 해드리는 것(맛있는 음식, 좋은 옷, 넉넉한 집 등)이고, 양지는 부모의 뜻을 헤아려 모신다는 것일텐데, 이제껏 국어사전은 찾아보지 않았다. 말하자면, 물질적인 것들을 부족하지 않게 모시는 게 봉양이라면, 정신적으로 원하는 것들을 살펴드리는 것이 양지일 것이다.
아버지와 둘이 고향에서 산 게 딱 석 달 열흘, 100일이 되었다. 어제는 총선거의 날. 사전투표를 했기에 온전히 휴일이다. 며칠 전 전주에 사시는 이모와 인근 3km 거리에 사시는 외숙모께 모처럼 전화를 드렸다. 오전에 얼른 투표를 하시면, 제가 승용차로 모시러 가겠다고. 어머니 돌아가신 후 1년도 넘게 아버지와 만나지 못했으니, 서로 근황이 궁금하셨을 터. 물론 가끔 전화로 안부를 묻긴 했지만. 그분들은 시골집을 어떻게 고쳤고, 건강은 어떻고, 일상은 또 어떻게 보내시는지 궁금할 터이고,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자식들을 빼놓곤 어머니와 가장 밀접한 분들이니, 보고 싶기도 하셨을 것이다. 허나, 누군가 모시지 않으면 왕래往來는 거의 불가능한 일.
어머니보다 두 살 적은 동생이니 올해로 89세. 이숙어른은 10년 전에 돌아가시고, 평생을 사시던 태평동 일반 주택에서 혼자 사신다. 일곱 자녀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큰집과 언니(우리 어머니) 조카들을 차별하지 않고 참 많이 보살펴 주신, 우리에겐 엄청 각별한 이모이다. 20년도 더 전에 외숙이 돌아가시고, 외숙모 역시 혼자 사시는데 올해 85세란다. 금방이라도 꼬부랑 할머니가 될 듯, 유모차에 의지하고 떠듬떠듬 걷는 모습이 어머니를 보는 듯, 마음이 짜안하다. 전주까지 왕복 2시간 가까이, 처음으로 이모와 드라이브를 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지루할 까닭이 없다. 아무튼 아버지와 두 분이 반갑게 해후邂逅를 하셨다. 살가운 형부와 처제 사이. 깻잎김치와 오이김치에 생채까지 담가오셨는데 맛있을지 모르겠다며 걱정이다. 고모부와 처남댁. 아버지 드시라고 쌀튀밥에 배 몇 개, 사탕 한 봉지를 갖고 오셨다. 두 분 모두 클리넥스 화장지 한 통을 준비해 놓으셨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역시 노인들이다.
옛날 얘기만 나누어도 ‘한 바가지’로 부족할 것은 당연. 아버지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처가형제들 동향 묻기에 바쁘다. 2남7녀. 어머니는 ‘딸 부자집’의 셋째딸. 어머니는 17살에, 이모는 18살에 결혼을 하셨다한다. 환골탈태된 집 구경을 한 후 40명이 넘는 조카들의 소식 주고받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모처럼 식탁에 네 명이 둘러앉아 점심을 했다. 내가 끓인 ‘실가리 새우탕’과 돼 그제 잡은 돼지고기로 끓인 김치찌개 그리고 이모가 담가온 반찬 3가지 ‘진수성찬珍羞盛饌’이 따로 없다. 흐흐. 두 분은 60을 훌쩍 넘은 조카가 신통방통한지 연신 칭찬이다. 쑥스럽지만, 기분은 너무 좋다. 진즉 이렇게 한번 모실 것을.
언제 가장 친한 전주이모와 데이트를 할 기회가 있었던가? 이모는 어린 시절의 나뿐만 아니라, 언니와 동생 소생의 조카 수십 명의 이름도 모두 기억하고 계셨다. 사람의 도리는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도 아주 쉽게 말씀하시는데, 무엇보다 도시에서만 산 때문인지 쿨cool하셨다. 그 연세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터인데, 젊은 사람들과 엄청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에 대한 이해도가 남달라, 여러 번 나를 놀라게 하셨다. 외할버지는 딸이 일곱이나 되건만, 하나같이 엄청 예뻐하셨단다. 잠든 딸들의 머리를 일일이 쓰다듬어주며, 국민핵교에도 보냈는데, 외할머니가 악착같이 못다니게 했다하신다. 그래서 '세상에 우리 아버지처럼 존(좋은) 양반은 없을 것이여. 지금도 젤 보고 싶어. 어머니는 '독살시렀어. 안보고자파'라고 하신다. 얼매나 배우고 싶어 한이 됐으면 그럴까 싶다. 나이가 들어가며 살다보면 총생들에게 어찌 서운한 점이 한두 개일 것인가? 그런데도 이모는 아주 ‘슬기로운 노년생활’의 주인공 같았다. 늘 다리가 아파 그렇지, 아직은 혼자 계시는데 크게 불편하지는 않으시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7공주’ 가운데에도 어머니와 ‘절친’이었고, 그 많은 이모 중 가장 스킨십을 많이 한, 신세를 가장 진 이모였기에 살갑기가 특히 더했다. 이모는 연신 나의 수고로움에 미안해 하고 고마워했지만, 두시간 여 이모와 데이트는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아버지 역시 좋으셨을 터. 복지관에 가든, 주위를 휘휘 둘러봐도 거개가 다 ‘가버렸기에’ 변변한 말벗이 없는, 적적한 생활에 조금은 활력이 되셨을까? 어머니에 대한 추억을 되새기는데, 이모와 처남댁만큼 딱 맞는 상대가 어디 있으랴? 옛날 앨범을 꺼내 보여드리기도 하고, 100년이 된 유서깊은 장롱과 어머니가 평생 쓰시던 페달 달린 재봉틀, 떡방아 찧던 도굿통에도 설명이 길다. 살아계신다면야 1년에 한두 번 이런 자리를 만들어드려야겠다. 나도 어머니처럼 누가 오기만 하면 무엇을 싸줄까 머리를 굴린다. 이모와 외숙모에게 똑같이 한 보따리를 안겨 드리니, 아하, 왜 이리 기분이 좋은 걸까? 내용물을 보자. 갓 따온 두릅 한봉지, 광양 기정떡 3개, 사과 3개, 비비고 사골곰탕 3봉지, 새우 말린 것 한 봉지, 쑥. 고사리와 머위잎, 산취를 어제 뜯어놓았으면 좋으련만, 시간이 없었다 이제는 거의 향미香味를 잃어 밥도 반공기나 겨우 드시는데, 좋은 옷과 좋은 집이 무슨 소용이랴. 당신이 하고 싶은, 원하는 것을 해드리는 것이 ‘봉양’보다 몇 배 더 중重헌 ‘양지’라는 것을 새삼 느낀 ‘착한 하루’의 일기.
날마다 이렇게 '착한 일' 한 개씩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침 배달된 전북도민신문 독자페이지에 '전북 일일선행동본부'라는 시민단체가 눈에 띄었다. 일일선日日善이라니? 불우한 가정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등 날마다 착한 일을 하자는 취지로 만든 단체인 모양이다. 일일선, 얼마나 좋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