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시작 2 (7)
윤찬준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다시 물었다.
"엘레나 수녀라고요? 그분은 지금 생존하고 계십니까?"
"이 세상에 없다. 너를 낳고 수녀원을 떠났다. 그리고 그 후 너의 또 다른 동생을 낳았다. 여자 아이였다.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났다. 모두가 내 탓이다. 어떻게 모두 다 보속을 해야 할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 동안 다른 신부님에게 이 모든 사실을 고백하려 했으나, 그때 바로 내 마음 안에 있던 악의 세력이 이를 저지시켰다. 나의 체면과 허영이 나를 이대로 있게 만들었던 것이다. 너무나 엄청난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아무런 보속도 나를 자유롭게 만들지 못했던 것이다. 너에게 이런 고백을 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법구나."
윤찬준은 아버지 미카엘 신부의 얼굴을 연민과 증오의 두 시 선으로 응시했다. 아버지가 못났다고 생각했다.
"그럼 나중에 태어난 여자 아이, 아니 제 동생이 되겠죠. 그 아이는 어디 있습니까?"
"역시 고아원에 주어 버렸다."
"그 고아원을 기억하십니까?"
"내 친구를 통해서였다. 너에게 찾아간 그 친구가 잘 아는 고 아원에 맡겼다."
"찾을 수 있나요?"
"찾아서 무엇 하겠니?"
"그래도 찾아보겠습니다. 모두가 다 불행한 사람들이니까요. 불행한 사람들끼리 만나면 무슨 대책이라도 있겠죠."
윤찬준은 아버지 미카엘 신부가 너무나도 큰 짐을 지고 있다 고 생각했다. 미카엘 신부가 만일 신부의 직책이 아니었다면 이 따위 것은 아무런 죄도 될 수 없고 세인의 손가락질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한 시민으로서 떳떳하게 결혼을 할 수 있고 가정을 꾸려 갈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부라는 .직책은 결코 하느님이 만들어 주신 것이 아니지 않는가.
인간들이 신학 대학을 만들어 놓고 학생을 뽑아 신부를 배출 하고 그 신부에게 독신을 강요하고, 독신의 틀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면 마구 돌팔매질을 하는 그 엄청난 속박이 윤찬준에게는 와 닿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 미카엘 신부가 아무런 죄가 없다고 생각했다. 순전히 미카엘 신부와 윤찬준 사이에 맺혀져 있는 피 의 부름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럼 어머니의 묘지는?"
미카엘 신부는 차마 입을 떼지 못하겠다는 투로 더듬더듬 말 했다.
"송추에 있는 운경 공원묘지에 있다."
"송추요?"
"의정부 넘어가는 산비탈 왼편에 천주교 묘역이 있다."
"사실 입니까?"
"이제 와 이것마저 거짓말을 할 수 있겠냐?"
"잘 알았습니다."
"그럼 나는 돌아간다."
"성당으로 가실 겁니까?"
"일단 그래야지."
그 일이 있고 나서 윤찬준은 원장에게 이야기도 하지 않고 고
아원을 뛰쳐나왔다. 그러나 달리 갈 데라곤 없었다.
그는 미카엘 신부가 있는 D성당으로 갔다. 그러나 이미 그 성당에 미카엘 신부는 없었다.
"주임 신부님을 뵈러 왔습니다."
윤찬준이 성당의 사무장에게 미카엘 신부를 묻자, 사무장은 그의 아래위를 수상쩍은 듯 훑어보다가,
"벌써 이틀째 소식이 없습니다. 교구청에서도 난리가 났어요. 수소문할 데는 모두 찾아보았는데 이런 일은 드물거든요. 신부님
이 성사 주는 일을 포기한다는 것은‥‥‥‥
그때, 윤찬준의 머리 속에 번개처럼 스치는 어떤 생각이 있었다.
'그렇다. 그분이 갈 데라곤 거기밖에 없다. 송추에 있다는 운경 공원묘지‥‥‥‥혹시 거기 가 있는 것이 아닌가.'
사무장이 윤찬준에게 물었다.
"형제님은 신부님과 어떻게 되십니까?"
"신자입니다."
윤찬준은 그 말을 끝내고 서울 역으로 가서 송추 가는 버스를 탔다. 156번 일반 버스였다.
한 시간쯤 달리자 공원 앞에 버스가 멎었고, 거기서부터 묘지 입구까지는 1킬로쯤 되었다. 그는 다시 지나가는 택시를 타고 묘 지 입구에서 내렸다.
늦가을의 찬바람이 그의 앙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는 묘지 입구 매점에서 북어 한 개와 사 홉 들이 소주 두 병을 샀다.
공원묘지는 조성된 지가 폐 오래됐는지 산 전체가 묘지로 들어차서 관리 사무실에 가서 그 위치를 알아봐야만 했다.
불교 신자 묘역과 가톨릭 신자 묘역, 그리고 개신교 신자 묘역이 따로 구분이 되어 있었다. 가톨릭 신자 묘역은 산 정상에 있었다. 그러나 많은 무덤 가운데 생몰 연대도 확실히 모르는 엘레나 수녀의 묘지를 찾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밝은 가을 하늘 아래 까마귀 두 마리가 먹을 것을 찾기 위해 선회하고 있었다.
까악 까악!
조용했다. 죽은 자들은 원래 말이 없는 법이다.
윤찬준은 산꼭대기에 올라서서 지형지물을 살폈다. 천주교 신
자가 한두 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때, 그의 눈에 들어온 어떤 물체가 있었다. 평일이라서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는 묘역 가운데 어떤 중년 사내가 앉아 있었다. 사내는 허름한 잠바를 입고 있었는데 무척 낯이 익었다.
윤찬준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사내의 곁으로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 사내의 모습이 또렷이 나타났다. 예측한 대로 미카엘 신부였다.
그는 아버지란 이름 대신 신부님이란 호칭을 썼다
"신부님!"
미카엘 신부도 그를 알아보았는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찬준이가 왔구나."
그는 윤찬준의 손을 꼭 잡았다. 두 사람 사이에 신(神)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오직 육친의 정만이 있을 뿐이었다. 미카엘 신부가 말했다.
"이렇게 내가 자유로울 수만 있었다면 왜 내가 구태여 사제복 을 입고 고통을 당했는지 모른다."
"아버지, 이제부터 함께 살아요."
"그러나 어차피 나는 사제복을 벗어야 하니까."
윤찬준은 고아원에 맡겨졌다는 여동생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불광동에 있는 K고아원이었는데 원장의 성씨가 박씨였다.
이름은 영숙이었으니까 박영숙이겠지. 한 번도 찾아가 보질 않았으니까."
윤찬준은 엘레나 수녀의 봉분 앞에 북어포를 놓고 절을 했다. '성도 박엘레나 영생을 얻다.'
묘비명에는 다른 글귀는 없었다. 수녀라면 성직자의 묘지에 안장되게 마련인데, 엘레나 수녀는 이미 죽기 전에 성직자의 대열 에서 이탈 됐음을 알 수가 있었다.
그 동안 누군가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던지 봉분이 움푹 파이고 내려앉아 있었다. 그리고 구멍 뚫린 봉분 사이로 쑥대풀이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미카엘 신부는 처음에 절을 하자는 윤찬준의 제의를 물리치고 신자들이 하는 간단한 기도를 했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고
그 나라가 임하시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우리를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산 아래 신작로로 장난감 같은 버스가 줄을 이었다. 의정부로 넘어가는 버스들이었다.
윤찬준은 엘레나 수녀 앞에서 절을 세 번 했다.
"아버님도 하셔야죠."
윤찬준의 말에 따라 미카엘 신부도 절을 세 번 했다. 그리고 음복을 했다.
윤찬준은 절을 하고 나서 그 자리에 벌떡 누웠다. 하늘엔 무심한 구름이 몇 점 떠 있었고, 그것은 다른 구름들과 맞물리면서 이상한 형체를 만들었다. 그 형체는 생전에 보지 못했던 엘레나 수녀 같기도 했다.
"우리 내려갈까?"
미카엘 신부가 말했다.
"저는 그냥 여기 있겠어요,"
"나는 할 일이 좀 남았다. 사제관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아직까지 사제이니까. 성당을 비워 둘 수가 없어."
그는 자리를 떴다.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다."
윤찬준은 미카엘 신부를 붙잡지 않았다. 미카엘 신부는 묘지와 묘지 사이로 난 작은 길을 비집고 산 아래로 내려갔다.
윤찬준은 미카엘 신부의 뒷모습을 보았다. 무척 초라하다고 느꼈지만, 한편 그가 자기를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얼마나 괴로워했을까.
제도와 법의 틀에서 부대껴야 하는 그의 괴로움을 아들인 그 로서는 짐작이 되었다. 그러다가 이유 모를 분노가 앞섰다. 그래 서 벌떡 일어나 주머니에 있던 성냥을 꺼내 바짝 마른 잔디에 붙였다. 가뭄이 계속된 산에는 물기라곤 전혀 없었다. 앙상하게 마른 잔디에 작은 불꽃이 일고, 그것은 이웃 나뭇가지에까지 번졌다.
불은 마침 불어오는 북서풍으로 인해 묘지 전체로 번졌다. 묘 지 관리소에서 사람들이 뛰어 올라왔다. 그리고 각 스피커에서 요란한 안내 방송이 흘러 나왔다.
'묘지 정상에 불이 났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나와 진화에 협조해 주십시오.'
십 여분 뒤에는 인근 소방서에서 불자동차가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내면서 산 중턱에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어떤 놈이야! 저놈 잡아라!"
갈퀴를 들고 올라온 인부에게 윤찬준은 멱살을 잡혔다.'
"네놈이 불을 질렀지?"
그는 순순히 시인했다.
"왜 불을 질렀어?"
"그냥 장난삼아서‥‥
"이 새끼가 돌았나?"
관리인의 억센 손이 그의 따귀를 후려 갈겼다.
"장난삼아서?"
"이 새끼는 콩밥 좀 먹어야 돼."
불은 삼십 분 만에 꺼졌고, 그는 실화(失火)범이 아니라 방화 범으로서 체포당했다. 의정부 경찰서에서 경기도 경찰국으로 넘겨졌고, 의정부 법원에서 방화죄로 9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윤찬준은 교도소에서 풀려나오자 정처 없는 방랑길에 들어다.
그가 맨 처음 찾아간 곳은 그의 누이동생이 있다는 고아원이었다.
서울 은평구 불광동, 서부 경찰서 근처에 있는 고아원이었는데 거기엔 박영숙이라는 여자 아이는 이미 없었다.
"열일곱 살쯤 됐을 겁니다."
"작년에 이 고아원을 나갔는데
직원의 말이었다.
"보호자가 없어서 그냥 있으라고 했더니 굳이 갈 데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디로 갔는지 혹시 ‥‥‥‥
"모르겠어요. 유흥업소가 하도 많아서‥‥‥‥
윤찬준은 그대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