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을 뒤로하고
영월을 향해 강원도땅으로 들어 섰다.
남한강변에는 이국적인 집들이 즐비했다.
처음에는 가정 집인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거의 모든 이국적인 집들이 팬션들이다.
강물따라 사는 사람들도 놀러오는 사람들도 거의 모두 우리나라 사람들이련만
집들은 모두 어디 서양에 온듯한 느낌의 화려함을 뽐내고 있다.
우리 아들놈의 비판 - 한국의 고유 가옥의 원형은 어디서고 찾을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으며
곧 그 원형에의 기억마져 없어질거라나.
남편의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나온다.
이야! 저 돌밭 좀 봐라.
한번 내려가서 탐석을 해보고 싶나보다.
내가 여그서 탐석하다 잡혀갈려고? 하며 말렸지만
기어이 차를 세우고 강변으로 들어선다.
역시 강원도라서인지 바람끝이 순천하고는 사뭇 다르다.
너무 춥다고 조그만 돌 두점을 줏어들고 철수했다.
남한강변에서 우리가족은 다들 생각이 다르다.
큰아이는 동강레프팅을 생각하고,
남편은 탐석을 생각하고,
나는 탐석하는 남편의 기분을 맞춰주려 추워도 안 추운척하고,
작은아이는 못말리는 부부라고 우리둘을 흉보고....
늘 남편의 친구가족들과 어울려서 여행을 했는데
이번에는 우리가족만 아름다운곳에 간게 아이들은 미안했나보다.
작은아이가
형 제대하고 희욱이가 좀 크면 우리세가족이 이곳에 와서 레프팅을 하잔다.
어렸을때부터 늘 같이 모였던 아이들이라 사촌들마냥 서로를 보고싶어한다.
그런마음을 쭉 이어가길 바란다.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남한강 돌밭을 보며 달리다보니 영월에 도착했다.
숙소를 찾아 보기로 했다.
애들이 강변의 팬션에서 자면 어떻겠냐고 했지만,
아마도 엄청 비쌀것같아 시내 모텔에 숙소를 잡자고 했다.
이정표를 보니 사진박물관이 있단다.
저녁먹기도 이르니 한번 들러보자고 했다.
영월군청옆에 있는데 입장료가 있는 유료관람박물관이었다.
그러나 3천5백원을 내고 들어간 입장료가 하나도 아깝지 않은 곳이었다.
사진의 역사, 카메라 변천사, 카메라 원리 등등 배워 볼 것들이 많이 있었다.
지난 학기에 나를 괴롭혔던 사진대목이 떠올랐다.
카메라에 대해서 모르니 조리개니 피사체니 어렵기만 했었는데....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초의 카메라 발명자란다.
작은아이 왈 '다빈치는 사람이 아닌가봐'
사진 박물관에서 영월의 관광지안내장을 받고,
친절한 직원으로부터 저녁에 천문대에 가보면 좋다는 안내까지 받았다.
로얄호텔이라고 어벌쩍하게 씌여진 곳에 숙소를 정하고
그 곳 1층에 있는 식당에서 돼지갈비로 저녁만찬을 즐겼다.
식당앞 벽에 큼지막하게 '제영호남향우회'라는 현판을 걸어놨다.
서빙아주머니에게 사장님 고향이 호남이예요하고 여쭸더니
사장님 내외분의 고향이 여수시란다.
우리는 순천에서 왔어요하고 묻지도 않는데 우리사는곳을 말해줬다.
정작 고향이 여수라는 사장님은 못 뵈었다.
눈이 무서워서 오지도 않는 눈을 핑게삼아 가지 않을려는 남편에게 떼를 써서
별마로 천문대에 갔다.
험한 산길을 올라 다다른 별마로천문대 영월에들러 그곳에 가지 않았다면 정말 후회했으리라.
환상적인 하늘을 감상했다.
큰아이 전공이 지구과학이라서 쫑알쫑알 설명들을 한다.
천체투영실에서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밤하늘의 별들을 보여주고 설명해주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북반구의 별이 3,000개쯤 된다고 한다.
동양에서는 주로 별하나 둘에 이름하나를 붙여서 00성으로 이름하는데,
서양에서는 전갈자리, 황소자리 등으로 밤하늘의 별들을 모아
상상도 되지않는 그림을그려 별자리를 지어내고,
그리스 신화속의 신들을 끌어모아 별자리 전설을 만들었다.
아무리 설명을 해줘도 내게는 그냥 반짝반짝 빛나는 별 뿐인걸.
내가 아이들 앞에서 천문대 관람소감으로 일갈-
서양의 문화가 기독교에 뿌리를 둔 문화라 하지만,
그리스신화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는 사실.
기독교사상으로 서양우월주의로 유색민족들을 깔보는 그들이지만
그들도 어느 민족이나 다름없이 고대의 다신신화의 틀에서 벗어날 수없다는 것.
이쯤에서 끝내자. 내 지식의 한계이니까.
밤늦게 내리는 눈으로 인해 직접 밤하늘을 관측해 볼 수있는 기회는 놓쳤다.
대신 주관측실에 있는 대형 반사망원경앞에서 촬영할 수 있는 특혜(?)를 천문대측에서 배려해주셨다.
천문대에서 내려다본 환상적인 영월의 야경.
산속의 조그만 읍내의 야경이 휘황찬란한 도시의 야경보다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다.
좀더 머물고 싶어하는 작은아이와 눈이 쌓이면 위험하니 빨리 내려가자는 남편과의 작은 실랑이로
환상적인 여행지 밤의 기분이 좀 깍이기는 했지만
펄펄 끓는 여관방의 따뜻함과 모든 스포츠체널이 다 나오는 TV의 위로로 다시 좋은 기분으로
회복시키는 우리가족의 저력이 있어서 좋다.
온 가족이 응원한 사라포바가 셀레나 윌리엄즈에게 패배한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라포바가 이겼으면 여행의 즐거움과 응원의 즐거움을 더 할 수있었을텐데 아쉽다.
느긋한 늦잠과 아침밥 지을 노동이 없는 일요일 아침의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아마 남자들은 못 느껴볼 즐거움일게다.
아침을 해결할 수 있는 음식점이 있을까를 걱정하며 여관 카운터에서 '계세요'를 외쳤건만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다.
남편이 생각해낸 굿 아이디어.
영월역 앞에를 가면 아마도 해장국집이 있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만난 '성호식당'
TV 맛대맛 프로에도 나왔고, 라디오 전유성 채유라 프로에도 나왔단다.
전유성씨의 멘트를 쓴 쪽지도 붙여 놓고, 맛대맛에서 소개된 그림도 붙여놓고...
어수선하게 이것 저것 붙을 건 다 붙은,
그리고 단성사에서 간판을 그렸다는 분이 그린 외국배우들의 초상화까지 덤으로 걸려진
시골의 그냥 그런 수선스런(?)식당이었다.
주 요리가 다슬기 해장국, 다슬기회무침, 다슬기 전골. 모든 요리에 다슬기가 음식재료다.
다슬기, 올갱이, 올뱅이. 이름도 다양하다. 우리 순천에서는 대사리.
다슬기해장국으로 아침을 먹었다. 우리가족에게서는 맛있다는 찬사를 받지를 못할 맛이었다.
우리가족은 직접 잡은 다슬기로 진국을 내서 먹는 입맛이 살아있어
곰국과 다슬기된장국의 중간인 맛이 다슬기의 참맛을 느낄 수 없게 했다.
전라도 음식인 고들빼기 김치가 나왔는데 맛은 전라도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고들빼기 김치를 그 식당에서 내놓으면 사람들이 우리처럼 맛있다고 할까도 생각해 보았다.
조그만 식당에 빼곡이 들어선 식탁이 꽉차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서성거릴 정도로 손님들이 북적거렸다.
영월의 별미식당이라는 간판이 거짓이 아닌가 보다.
장릉으로 향했다.
억울하게 죽은 단종의 시신을 우리 엄씨의 조상이신 엄흥도란 분이 수습하여 암장을 한 곳이라고 한다.
훗날 숙종때에 복권되어 장릉이라는 능호더불어 능이 정비되었다 한다.
비운의 왕비 정순왕후는 남양주에 뭍혀있고 죽어서도 부부가 떨어져 있어 여기저기 남양주 시장이나 시의회의장의 명의로 식수된 사릉에서 옮겨온 소나무가 있었다.
죽음으로 불의와 맞섰던 사육신과 새 왕을 외면하는 소극적인 저항의 생육신을 같이 만나보았다.
멋있는 소나무 길을 따라 오르면 쓸쓸히 누워있는 단종을 만날 수 있다.
임금의 자리에서 쫒겨나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유배된 첫 유배지 청령포에 갔다.
단종이 쌓았다는 망향탑과 남양주땅을 바라보며 정순왕후를 그렸다는 노산대,
왕위를 잃고 유배객이 되어 그 고뇌와 분노를 읊은 것을 들었다 하여 이름붙여진 관음송.
벼랑으로 내 몰린 가녀린 한 아이,
열일곱에 무참히 죽임당해야 했던 억울하기 그지 없었을 남자,
만나고 싶었다. 역사를 돌렸어야 하냐고 묻고 싶었다.
훈구와 사림의 대결이 없는, 사림의 집권이후 당쟁이 없는, 안동김문의 세도가 없는
조선 정치의 틀을 세울 수 있었겠냐고 묻고 싶었다.
솔밭에는 찬 강바람만이 머물고 있었다.
맑은 물과 단종의 애잔함과 깨끗하게 단장되고 청소되어진 관광지의 화장실과
매표소에 진열된 관광안내서 그리고 사람들의 친절 등등
그리고 내 성씨의 본관이라서 늘 마음속의 고향같은 느낌이 드는 영월을 뒤로 하고
일상으로 복귀하기 위해 차를 달렸다.
돌아오는 길에 안동 하회마을을 들러 볼까 했는데
먼길을 운전하는 남편의 노고를 좀 덜어주고자 고집하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따뜻해 지는 순천에 도착했다.
여행에서 오는 나른한 피로보다는
서로 함께 했다는 행복감에 젖은 가족들의 사랑이 가슴을 적신다.
아~아 행복 만땅이다.
석양의 아름다움이 지는 아쉬움 때문에 아름답다 하였던가.
아니 오늘 난 석양의 아름다움이 내일을 기약하는 뜨거움에 아름답다 하겠다.
내가 시민다리 근처를 지날때 회상하는 가슴 따뜻한 추억-
아버지와 엄마손을 잡고 목도리를 두르고 올망졸망 언니들이랑 같이 갔던 극장구경.
무슨 영화를 봤는지는 기억 할 수 없지만 그때 내 옷깃을 여며 주시던 아버지의 따뜻한 손길은 기억한다.
이처럼 내 아들들이 이다음 여행을 계획하며 또는 여행지에서
우리와 같이 했던 이번 여행을 따뜻한 추억으로 기억해 내는 기쁨이 되기를 바래본다.
우리 부부도 늙어가는 길목에서 아들들과의 사랑나눔에 따뜻한 추억으로 꺼내보고 또 꺼내보고
닳도록 추억에 추억을 쌓아갈것이다.
첫댓글 정말 좋았겠다. 나도 늘 계획은 세워보지만 가족이 모두 함께하긴 무척 힘들던데..올해의 목표로 삼아볼까나...ㅎㅎ
오래전에 단종의 장릉엘 우리 부부가 다녀왔지만 군대가려는 아들들과 동행하는 너네 가족 여행이 너무 아름다워 보여 나도 계획해봐야 겠어 경미야 사랑의 향기로움이 내게로 전해 온다 .
가슴 한쪽이 아프다. 아직도 눈가에 눈물이 자리한다. 온세상에서 나혼자 아들 군대보낸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