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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728
4월12일 [부활 제2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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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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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gVnMMwtcJ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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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위로부터 태어난 사람들,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의 입에서는 감사와 찬미의 기도가 그치지 앟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잘 나가던 유명 인사가 있었으니, 니코데모였습니다. 그는 당시 인싸 그룹이었던 바리사이 소속이었고, 예루살렘 최고 의결기관이요 법정이었던 산헤드린의 최고의원이었습니다.
대단한 인물이었던 니코데모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머무시는 동안 행하셨던 표징에 자극을 받고 밤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 큰 호감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재미있는 사실 한 가지는 니코데모가 낮이나 저녁 시간이 아니고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사도들처럼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확고했더라면 굳이 밤에 찾아오지 않고 대낮에 당당하게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니코데모는 예수님에 관해서 확신이 서지 않았던 관계로,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나머지 밤에 찾아온 것입니다. 아직 어둠에 속한 니코데모가 빛이신 예수님의 현존 앞으로 슬금슬금 다가오는 모습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무지의 구름 속에 갇혀있는 니코데모에게 알쏭달쏭한 한 마디 말씀을 던지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 복음 3장 3절, 5~7절)
요한 문학 안에서 육은 하느님과 고립되어 있는 인간성, 허약하고 죽음에 속한 인간성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과 분리된 육은 초라하고 무력하여 죄와 죽음의 세력 하에 있게 마련입니다. 니코데모처럼 자신 안에 갇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진리의 말씀을 알아듣지도 못합니다.
육으로서의 인간 존재는 하느님의 은총과 권능에 힘입어 변화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권능에 의해 변화된 인간 존재는 ‘영’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만나게 됩니다.
영은 육으로서의 인간 존재를 말살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은 인간 생명의 원천을 죽을 운명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시켜 하느님께 소속시킵니다.
아래로부터, 1차로, 육으로 태어난 우리가 이 세상 머무는 동안 반드시 수행해야할 필수 과제 한 가지가 있습니다. 아래로부터 태어난 것에 만족하지 말고 다시 한번 영으로,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면 다시 태어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두 부류의 사람들 사이의 거리감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끝끝내 다시 태어나기를, 위로부터 태어나기를 거절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 모습이 더할나위 없이 비참합니다. 입만 열었다 하면 불평불만이 폭포수처럼 쏟아져나옵니다. 세상 고통은 혼자 다 끌어안고 있는 듯, 지옥벌을 받고 있는 얼굴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태어난 사람들, 건너간 사람들,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의 입에서는 늘 감사와 찬미의 기도가 그치지 않습니다. 거듭되는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그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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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TGz1qxgg1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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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자녀인지 알아보는 법: 하느님의 뜻을 묻는가?>
오늘 복음에서 니코데모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밤에 왔다는 뜻은 아직은 빛 속에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새로 태어남’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물과 성령’으로 위로부터 새로 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물은 육의 죽음을 의미하고 성령은 하느님 자녀로의 새로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물속에서 사는 사람도 없고 성령 속에서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진정 물과 성령, 즉 세례로 새로 태어났는가?’ 하는 점입니다. 주님, 주님 한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셨기에 우리가 위선적으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났다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잘 살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직도 육적인 사람인지 혹은 영적인 사람으로 새로 났는지 알아보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그 해답까지 주십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영에서 태어난 사람은 바람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마치 배가 자신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 돛을 올려 바람에 자신을 맡기는 것과 같습니다. 아기가 부모를 찾으면 어떠한 일이 벌어질까요? 부모가 기뻐하는 일만 하려고 합니다. 그전까지는 만족할 줄 모릅니다. 영에서 새로 태어난 이도 이와 같습니다.
해체 직전에서 급 부활하여 지금 한창 인기몰이를 하는 ‘브레이브걸스’의 아버지라 부르는 작곡가이자 프로듀서가 있습니다. 바로 ‘용감한 형제’라 불리우는 ‘강동철 씨’입니다. 그는 MBC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에 출연하여 자신의 험난한 인생 여정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강동철 씨는 본래 착하고 공부도 잘하는 아이였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형만 좋아하고 동생인 동철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고등학교를 포기하고 주먹의 세계에 빠집니다. 그저 동네 양아치가 아닌 진짜 폭력집단에 소속되어 결국엔 17세 때 부모님이 보는 앞에서 포승줄을 차고 고무신을 신고 소년원에 들어갑니다.
그 이후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조직폭력배 생활을 이어갑니다. 그렇게 전과 12범이 되기까지 어둠 속에서 삽니다. 지금은 그때가 지옥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다 20세 때 한 장의 CD를 듣고는 음악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의 인생에서 무언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말합니다. 처음부터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기에 어차피 인정받지 못할 것, 아버지가 원하는 것이 자신이 원하는 것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싸움꾼에서 바로 벗어나 형과 함께 집을 나와 음악을 시작합니다. 형도 아버지로부터 자신만 사랑을 받았기에 동생에게 미안하여 동생과 함께하기로 합니다. 아버지는 착한 형까지 꾀여서 나쁜 길로 빠뜨린다고 동철 씨를 나무랐습니다. 동철 씨는 코드를 모르는 ‘음악의 음’자도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6년 동안 형 흑철 씨는 동생이 음악에 열중하는 동안 막일을 하며 생활비를 벌었습니다. 그렇게 양현석 씨의 눈에 띄어 YG 엔터테인먼트에 들어가 빅뱅을 히트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처음 그의 노래가 히트된 곡이 렉시의 ‘눈물 씻고 화장하고’란 곡이었습니다. 작곡가 이름이 ‘용감한 형제’로 되어 있어서 아버지는 자신이 작곡했다는 동철 씨의 말에 “그게 너라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며 콧방귀도 안 뀌었습니다. 믿어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MBC 9시 뉴스에 동철 씨가 유명한 작곡가로 소개되는 것을 보시고는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때 아버지와 통화 했을 때, “너 맞네. 와 진짜 뭘 하긴 했다.”라는 말을 들은 후 그 인정받는 느낌에 전화를 끊고 한없이 펑펑 울었다고 합니다. 학교에서 상을 타와도 한 번도 칭찬해주시지 않던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당시 일 년에 수십억씩을 벌고 우리나라 최고의 작곡가로 인정받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그래. 네가 한 게 맞는 것 같다. 잘했다.”라는 인정이 그렇게 그리웠던 것입니다. “30년 동안 그 말을 기다렸을 수도 있겠네요?”란 기자의 질문에 “그랬던 것 같기도 해요. 되게 이상했어요. 그냥 북받치더라고요. 저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눈물이 터지더라고요.”라고 대답합니다.
왜 모든 사람이 인정해 주는데 아버지의 인정을 받지 못한 것 때문에 그렇게 한스러웠을까요? 그것은 아버지에게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나를 태어나게 해 주신 분이 인정해 주기 전까지 항상 배고픈 것이 자녀의 마음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영으로 태어나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의 마음은 어떨까요? 아버지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을 것입니다. 매일매일 ‘오늘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으려면,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혹은 순간마다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물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묻지 않고 내 뜻대로 산다면 그분으로부터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김완선 씨는 자신이 번 모든 것을 이모에게 맡겨서 무일푼이 되었습니다. 장윤정 씨는 어머니를 믿어 그렇게 되었습니다. 요즘 박수홍 씨도 형에게 그러한 사기를 당했다는 뉴스가 나옵니다. 이 세상의 자녀는 이 세상에서 자신과 가까운 사람을 믿습니다. 그러다가 사기를 당하면 자기 자신만을 믿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다가 결국엔 삶이 의미 없다고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 천상 아버지요, 어머니이신 분입니다.
새로 난 사람은 이 세상의 의미 있는 유일한 것이 그분들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뿐임을 압니다. 그래서 항상 그분들이 원하는 것을 찾습니다. 이렇게 성령의 이끄심에 살다 보면 사람들은 그 사람이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듯, 영에서 난 이도 이 세상에서는 이와 같습니다. 순교하시는 분들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당사자는 그러한 삶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서 그러함을 잘 압니다.
적어도 아침에 오늘 주님께서 내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지 물어보도록 합시다. 이것이 영에서 난 영적인 이들의 기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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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3,1-8: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3절)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하며, 바로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태어나지 않으면 누구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말씀이다.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나는 것이며, 새로 태어나므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며, 새로운 피조물로서 그분을 더 깊이 알게 된다. 니코데모는 두 가지 태어남이 있지만 한 가지만 알고 있었다. 두 가지 태어남은, 하나는 땅에서 비롯하고 하나는 하늘에서 비롯한다. 하나는 육에서 비롯하고 하나는 영에서 비롯한다. 하나는 죽을 운명에서 비롯하고 하나는 영원에서 비롯한다. 하나는 남자와 여자에게서 비롯하고 하나는 하느님과 교회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4절) 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5절) ‘물과 성령’이란 바로 세례를 의미한다. 세례는 죽음과 부활의 상징이자 새로운 탄생이다. 부활한다는 것은 죽음 후에 새로이 창조된 것으로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이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물에 잠김으로써 죽은 것이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활하여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물에 잠기는 것은 매장을 상징하고 머리를 물에서 들어 올리는 것은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는 부활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6절) 육이라는 것은 죄 때문에 죽음을 피할 수 없지만, 하느님의 성령께서는 썩음을 모르시고 죽음을 넘어 생명을 주신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이 멸망을 초래하는 삶에서 우리 자신을 떼어 놓아야 한다. 육적인 삶은 죽음이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동반하지 않는 삶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라는 것은 바로 “성령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영적이다.”라는 뜻이며, 영예와 은총에 따른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마음 역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이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7절)는 말씀이다.
육신을 가진 우리는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지만, 성령이 주시는 생명은 인간의 능력과 삶이 다다를 수 없는 그 이상의 하느님께서 주시는 삶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가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사랑할 때 이루어진다. 이렇게 하느님의 뜻을,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일을 받아들이고 실천할 때, 우리 자신이 죽고, 자신을 끊고, 자신을 온전히 맡길 수 있을 때 우리는 새로이 태어날 수 있고 참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는 것이며 바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하늘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부활을 체험한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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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가끔 신자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받습니다. “신부님, 도대체 왜 그러세요?” 그러면 저는 얼굴을 붉히며 이렇게 변명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보고 배운 신부의 모습은 가부장적인 팔·구십년대 사회에서 사목하던 모습입니다. 눈으로 보고 배운 모습은 아주 가까이 있고, 말씀으로 배웠던 ―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 목자의 모습은 아직도 머리에만 있어 몸으로 옮겨 오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최선을 다하여 변하고자 노력하지만 아직 부족합니다.”
우리의 지금 모습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다음 질문을 깊이 한번 생각해 보고 대답해 보는 시간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부모님에게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무엇이고, 가장 많이 본 모습은 무엇입니까? 학교에서 선생님이나 친구들에게 보고 배운 것은 무엇이고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무엇입니까? 방송이나 다른 미디어에서 가장 많이 보고 들은 것은 무엇입니까? 또 성당에 와서 보고 들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런 것에서 어떤 영향을 받아 왔고, 그것들이 지금의 자신의 모습을 이루는 데 어떤 역할을 하였습니까?
그렇게 만들어진 자신의 모습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느님을 닮은 모습일까요? 오늘 본기도에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저희가 이 땅의 부모에게 받은 모습은 벗어 버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모습으로 변화되게 하소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부모에게서 받은 모습이 아니라, 하느님의 모습으로 살고자 함입니다. 어찌 보면 그것이 신앙의 완성이요 구원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완성을 이루려면 얼마나 많이 노력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날마다 세례의 삶으로 묵은 인간은 죽고 새로이 태어나도록, 사랑의 삶으로 태어나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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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하였다고 놀라지 마라.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요한 3,5-8)
1) “위로부터 태어나다.” 라는 말씀과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다.”라는 말씀은, ‘세례’ 때 받는 성령을 통해서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는 것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보다.”라는 말씀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다.”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을 얻는 것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들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누구든지 성령을 통해서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입니다. 표현을 긍정적으로 바꾸면, “성령을 통해서 완전히 새롭게 변화된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다.”입니다. 스스로 포기하지 않으면,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라는 말씀에서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성령을 통해서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는 것’과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는 것’은 같은 일입니다. <새롭게 변화되려면 회개해야 합니다. 참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성령을 통해서 어린이처럼 순수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2) ‘누구든지’ 라는 말은, ‘면책 특권’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또는 구원받기 위해서 갖추어야 하는 자격 조건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됩니다. 특권도 없고, 특혜도 없습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누구든지 희망할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다음 말씀이 바로 그것을 나타냅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 12,20-21) 지금 부러진 갈대라고 해도, 또 연기 나는 심지라고 해도, 스스로 포기하지 않고, 회개하고 노력해서, 성령을 통해서 새롭게 변화된다면,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하느님 나라에 아주 가까이 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라고 해도, 자만심에 빠져서 제대로 변화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이 의인이라고, 또는 성인이라고 존경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인정을 해 주셔야 합니다. (아마도 하느님 나라는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것처럼 보였던 사람들이 많이 들어가 있는 나라일 것입니다. 반대로 틀림없이 들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사람들은 들어가지 못해서 그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그런 나라일 것입니다.)
3)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 관한 말씀들 가운데에서 가장 유명한 말씀은, ‘낙타와 바늘구멍’에 관한 말씀일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23-24)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26) 하느님은 섬기지 않고 재물만 섬기는 사람은, 또는 재물을 하느님처럼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부자라도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난 부자는 더 이상 재물을 섬기지 않고 하느님만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4) 다음 말씀도 중요한 말씀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믿는다고 말은 하는데 실천이 없으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 2,26) ‘죽은 믿음’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 경우에 ‘살아 있는 믿음’으로 변화되려면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은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세례를 받았으니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일을 이미 거쳤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일’은, 한 번으로 그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즉 한 번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은총을 받는 일도 중요하지만, 받은 은총을 지키는 일은 더 중요합니다. 세례를 받았다면 받은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만일에 세례를 받기만 하고, 세례받기 전에 살던 모습 그대로 산다면, 세례성사의 은총을 헛일로 만들어 버리게 됩니다. 성령의 은사는 모든 문제를 자동적으로 해결해 주는 자동 기계 장치가 아닙니다. 은사를 받은 사람 자신의 능동적인 응답과 노력이 합해져야 합니다.>
5)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라는 말씀은,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지 않는 사람은 ‘육’의 상태로 끝나고,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만이 ‘육’의 상태에서 벗어나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라는 말씀은, ‘성령의 작용’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기 어렵다는 뜻인데,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는 일은 이론적으로 공부해서 지식을 쌓는 일이 아니라, 믿고, 깨닫고, 삶으로 실천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뜻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은 학문 연구가 아니라 ‘삶’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나라에 실제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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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애틀란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서 ‘부활특강’을 준비하였고, 제게 강의를 의뢰하였습니다. 대림특강과 사순특강은 본당에서 준비하게 됩니다. 주님의 탄생을 준비하고, 기쁘게 맞이하기 위해서 대림특강을 준비합니다. 나의 허물과 잘못으로 또다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것은 아닌지 성찰하기 위해서, 주님의 수난이 나를 구원하기 위한 십자가임을 생각하며 감사드리기 위해서 사순특강을 준비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만일 주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입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고린토 전서 15, 12-22) 주님의 부활은 우리 신앙의 시작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신앙의 신비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들 또한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입니다.
강의를 준비하면서 저도 부활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돌아보았습니다. 부활 성야 독서와 복음은 ‘빈 무덤’에서 끝이 납니다. 그리고 천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가 그분을 모셨던 곳이다.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덤에서는 만날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삶의 현장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선포하셨던 곳, 표징을 보여주셨던 곳 갈릴래아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부활은 새로운 탄생이 아닙니다. 부활은 머나먼 곳으로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서는 것입니다. 부활은 슬픔에서 기쁨으로 일어서는 것입니다. 다시금 허리띠를 동여매고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이제 십자가는 더 이상 치욕과 굴욕의 상징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는 구원의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12명의 제자가 시작한 하느님 나라 운동이 2000년 역사를 이어온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하나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초대교회의 많은 신자들은 십자가를 받아들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부활’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던 예수님께서는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부활하였습니다. 아픈 사람을 고쳐주고, 마귀 들린 사람을 치유하고,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환상입니다. 씨를 뿌리지 않고 열매 맺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의 위기는 재물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조직이 잘못되어서가 아닙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하려는 욕심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외면하는 교회는 언제나 위기를 겪었습니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고통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에서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보내셔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소생의 차원이 아닙니다. 부활은 물과 성령으로 새로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추구하였다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절망과 슬픔 속에 있었다면 희망과 기쁨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들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의 종들이 주님의 말씀을 아주 담대히 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저희가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는 손을 뻗으시어 병자들을 고치시고, 주님의 거룩한 종 예수님의 이름으로 표징과 이적들이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를 마치자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흔들리면서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였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선포하는 것, 예수님의 이름으로 표징과 이적들을 일어나게 하는 것, 병자들을 고쳐주는 것이 부활신앙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가난한 이들의 아픔에 함께 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부활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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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심원택 토마스 신부님]
한 주간의 시작인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찾아온 니코데모와 예수님과의 대화를 들었습니다.
니코데모는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인 ‘산헤드린’ 의원입니다. 산헤드린은 71명으로 구성되어있는데, 유다의 전통에 따르면 모세가 이를 구성했으며 (민수 11,16∼24), 로마 지배시대에 이 의회는 가장 큰 세력이었습니다.
국가의 내무행정은 실제로 여기에 속해 있었으며, 사법권뿐만 아니라 유다 율법에 따른 재판권도 행사하였습니다.
이처럼 최고의 위치에서 학식을 겸비한 지도자들 중의 한 사람인 니코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밤’, ‘어두운 밤’에 그가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아마도 사람들의 이목이 귀찮거나 두려워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인생의 모든 것을 누리고 사는 처지의 니코데모였지만 내적으로는 어둠 속의 삶과 다를 바 없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합니다.
아무튼 어두운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코데모는 예수님을 통해서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과 삶의 돌파구를 찾고자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지적 편견으로 인하여 ‘…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새로 태어남이란 인간의 내면적인 삶에 뚜렷한 변화를 가져오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지식과 이론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코데모는 자신의 지성에 의존하며, 또한 여전히 외형적인 것에 마음을 쓰고 있음으로 인하여 영적으로 성숙한 삶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의 박해를 받던 사도들은 제일 먼저 하느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그들의 기도는 외적인 고난으로부터 보호해달라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종들이 주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고통 중에서 하느님을 원망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런 고통을 이려낼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달라고 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도들의 모습이야말로 참으로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난’ 이들의 모습은 아닐까 합니다.
우리는 간혹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그냥 주저앉고 하느님께 원망을 하기도 합니다.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이 오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내가 무슨 죄가 있기에 이런 고난이 오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들은 생명을 걸고 그런 고통 속에서 하느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 고통을 없애 달라고 기도드리지 않고, 오히려 그런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고 합니다. 믿음을 갖고 찾아 나서면, 하느님의 은총의 이끄심을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심지어 고통 안에서도 우리를 강하게 만드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 근본적인 삶의 변화를 이루어내길 바라십니다.
그리하여 인간의 능력과 삶이 다다를 수 없는 그 이상의 삶을 살아가길 바라십니다.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하지 않는 오늘 하루가 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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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섭리수도회 양옥자 마리아 수녀님]
<움켜쥐었던 손을 펴면>
아주대학병원에서 원목을 하고 있을 때 나는 야곱처럼 하느님과 씨름을 하는 사람을 많이 만났다. 자신이 가고 싶은 길, 하고 싶은 일,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느님의 뜻이나 섭리에는 귀를 막고 살아오다가 병고라는 불가항력적인 사건을 통해 자신의 뜻을 꼭 움켜쥐었던 손을 서서히 펴면서 하느님의 섭리를 받아들이는 여정을 보았다. 한 치 앞만 보면 하느님 섭리의 길이 야속하고 손해만 보고 고통만 주는 것 같지만 움켜쥔 손을 펴면서 받아들이게 되는 하느님의 길 안에서, 그들은 전에 누리지 못했던 참 평화와 참 기쁨을 맛보게 된다.
그럴 때 이들의 영혼이 얼마나 맑게 빛나고 아름다운지…. 나는 그런 여정을 걷고 있는 한 청년에게 이렇게 말했다. “영혼을 찍을 수 있는 카메라가 있다면, 가만히 들여다보면 다 보일 듯 맑게 빛나는 아름다운 네 영혼을 찍어두고 싶다.”
그들이 하느님을 만난다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름답게 빛나는 그들의 얼굴이 하느님을 만난 흔적을, 향기를 역력히 보여주고 있다.
‘위로부터 나지 않으면’이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뜻 안에서 거듭나지 않으면’이라고 바꿔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늘 최선의 길을 마련해 주시는 하느님의 뜻 안에서 우리가 삶의 참된 의미와 존재 가치를 찾으려 할 때, 우리는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화와 행복을 맛보게 된다.
세상의 잣대와 나의 좁은 시선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다시 하느님의 뜻에 초점을 두려는 작은 노력에서 시작되는 아름다운 삶의 여정은 성령의 은총 안에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하느님의 사랑 깊은 배려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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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강영구 루치오신부님]
<새로 나기 위하여>
예수님, 새로 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니고데모는 새로 난다는 것을 어머니 배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새로 태어남은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요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라 하셨음으로, 다시 태어남은 육적인 태어남이 아니라 영적인 거듭남을 뜻합니다. 저는 이 땅에 태어나고자 의도한 적이 없습니다. 부모님도 저와 같은 아들을 낳겠다고 작정하거나 계획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느님께서 부모님을 통하여 한 생명을 점지해 주셨기에 저는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저의 의사와 아무 상관없이 저는 이 세상에서의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땅에서의 생명은 하느님의 큰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서의 생명도 선물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의 생명은 전적으로 저의 선택과 결단에 달려있습니다. 당신의 가르침대로 새로 나는 사람만 하느님 나라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 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합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서 죽어야 새 생명으로 거듭나서 열매를 맺게 되듯이(요한12,24-25), 스스로 죽는 사람만 거듭 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욕망과 주장, 생각과 뜻을 고집하면 거듭 날 수 없습니다. 하늘의 뜻을 따르고 성령의 이끄심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신을 비우고 죽어야 합니다. 새로 남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죽고 거듭나야 합니다. 예수님, 저는 이미 오래 전에 세례를 통해서 당신과 함께 죽고 새 생명으로 거듭났습니다.(로마6,3-4) 그러나 이 생명은 아직 열매 맺지 못했습니다. 끊임없는 거듭남을 통해서 열매 맺을 수 있도록 오늘도 죽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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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니코데모는 최고의회 의원으로서 세상의 명예와 권력과 재물을 다 지닌 탄탄한 지위에도 불구하고 참된 행복을 찾지 못한 그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니 “밤에” 그가 찾아온 것은 단지 자신의 행동을 조심하는 신중함이나 두려움만이 아니라, 그의 영혼의 상태를 말해줍니다. 사실 ‘밤’의 의미는 무지와 불완전함을 의미합니다. <시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여 어둠 속을 걷고 있으니 세상의 기초들이 모두 흔들린다.”(시 82,5)
<로마서>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밤은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그러므로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무기를 갖춥시다.”(로마 13,12)
오늘 복음에서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요한복음>에서 “위”(아노텐: 위, 새로)란 단어는 다섯 번 나오는데, 여기에서는 ‘높은 데, 하늘 혹은 하느님으로부터’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하느님 아들의 모습을 갖게 됨을 말합니다.
그러니 이는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유대인인라고 해서 다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단순히 생활 개선이나 악습을 고치거나 질병을 치료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과 권능에 의한 전적인 새로운 변화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께서는 이를 구체적으로 이렇게 설명해 주십니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
이는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내린 그 물로 깨끗해지고, 예수님의 숨이신 성령으로 죄 사함을 받아 태어나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곧 십자가의 죽음에서 새로 태어난 부활생명을 말합니다. 그것은 선사받은 생명이요, 변화된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생명”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요한 3,8)
그처럼, ‘영으로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오히려 변화의 영께 자신을 내어맡기는 것, 그렇게 변화되는 일, 그리하여 변화된 눈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일,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의 현존과 활동, 곧 그분의 사랑을 보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세상이 이토록 경이로운 것은 세상이 새로워져서가 아니라, 제가 영으로 새로워진 까닭인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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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영에서 태어난 이”(요한 3,8)
주님,
제 영혼의 무지를 깨우소서. 빛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제 영혼의 밤을 몰아내소서. 제 어둠의 행실을 벗기소서.
당신 빛으로 당신을 뵈옵게 하소서.
세상이 이토록 경이로운 것은 세상이 새로워져서가 아니라,
제가 새로워진 까닭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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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3,3)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와 이야기하시는 말씀입니다. 바리사이이고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 의원인 니코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믿음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니코데모에게 위로부터 태어나야 하고,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있고,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의미는 '다시 태어남'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영적인 탄생'인 '영적으로 새로남'의 의미를 지니고 있고, '지금 여기에서의 부활'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태를 통해 첫 번째 탄생인 몸이 태어났고, 세례를 통해 두 번째 탄생인 영이 다시 태어났습니다.
영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은 하느님 아버지와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흘러나오는 '성령으로' 양육되어지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을 받아라."(요한20,22)
'성령'은 하느님을 온전하게 믿고, 하느님의 사랑과 말씀 안에 머물 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성령'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이 성령께서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합니다. 이 성령께서 나의 영과 육을 부활시킵니다. 이 성령께서 어떠한 위협에도 굴하지 않게 하면서 담대하게 하느님의 말씀인 복음을 전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 성령 안에 머무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를 보는 것이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14,17)
오늘도, 부활하신 예수님, 우리도 당신처럼 부활하기를, 다시 태어나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예수님께로 나의 마음이 향해 있게 합시다! 그리고 성령을 기쁘게 받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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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날이>
요한 3,1-8 (니코데모와 이야기하시다)
바리사이 가운데 니코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 의원이었다. 그 사람이 밤에 예수님께 와서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이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면, 당신께서 일으키시는 그러한 표징들을 아무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고 내가 말하였다고 놀라지 마라.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이와 같다.”
<나날이>
나날이
나는 죽음으로써
나는 태어나야 한다
나날이
나를 허물어
나를 세워야 한다
나날이
나를 버려
나를 품어야 한다
나날이
나를 비워
나를 채워야 한다
나날이
나를 끊어
나를 이어야 한다
나날이
나를 죽여
나를 살려야 한다
나날이
나는 죽음으로써
나는 태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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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시골 성당의 마당 한쪽에 여러 과일 나무가 있었습니다. 가을이 되면 익지도 않은 과일들을 따 먹느라 동네 아이들이 야단입니다. 골머리를 앓던 본당 신부님은 개구쟁이들의 양심에 호소하기로 마음먹고는 다음과 같은 팻말을 만들어 나무 앞에 꽂아 놓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보고 계신다.”
본당 신부님은 이 글을 보고서 양심에 가책을 느껴서 따먹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본당 신부님의 기대는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과일이 하나도 빠짐없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십니다.”
하느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며, 무한한 자비를 보여주시는 사랑 가득하신 분이십니다. 문제는 자기 입맛에 맞는 하느님만을 원하고 있을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포용하시는 하느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오십니다. 이런 다양한 모습의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만이 나의 이웃도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받아들이는 하느님은 어떤 분입니까?
모든 부분을 받아들이는 겸손한 사람만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으면서 계속해서 표징을 보여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바로 지도계급이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학식이 풍부하고 백성들의 교사 격인 랍비라는 호칭을 가졌을 뿐 아니라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 의원이기도 한 니코데모는 달랐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생각하는 하느님만을 받아들이는 다른 종교지도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니코데모에게 새로 태어남에 관해 이야기하십니다.
영혼이 새로 태어나는 것은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새로이 창조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니코데모는 아직 믿음이 모자란 상태였기에, 이 새로운 태어남의 의미와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빨리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어떻게 물로써 당신의 힘을 행사하시는지를 설명해 주십니다. 이스라엘의 이름난 스승이면서도,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좁은 시각으로 하느님을 봐 왔던 것입니다.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여야 새롭게 태어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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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같게 사는 길>
비좁은 방 한 칸에 다섯 식구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경제 사정이 어떻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잘 산다고 할 수 있습니까?
집에 텔레비전과 냉장고가 없습니다. 이 가정의 경제 사정은 어떻다고 할 수 있을까요?
몹시 어려운 가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은 가난하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40~50년 전, 어느 중산층의 가정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이렇게 사는 사람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래서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현재의 시간을 넘어와 보십시오. 4~50년 전과 비교하면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와 비교하면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데, 더 풍요로운 지금 많은 것을 나누고 있습니까?
어쩌면 부족한 옛날에 더 많은 것을 나누지 않았습니까? 많은 부를 가지고 있어도 부자 같지 않게 살 수도 있고, 많은 것이 없어도 부자 같게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서로 사랑하며 사는 길만이 진정한 부자 같게 사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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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성령으로 태어나야 한다>
무엇을 배우는 사람은 가능한 유명한 사람으로부터 지도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야 효과 있게 제대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처음부터 제대로 배워야 기초가 바로 섭니다.
그러나 유명한 사람도 좋지만 성실하고 눈높이를 맞춰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너무 잘 나서 바닥에 있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간혹 있기 마련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 수준 이하에 있는 사람을 무시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운동이나 피아노를 배우는데 전문가의 지도를 받을 때는 제대로 합니다. 그렇지만 아직 기초가 서기도 전에 여러 사람이 이렇게 저렇게 가르쳐 준다고 하여 그것을 따라 하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됩니다.
한편 오래도록 꾸준한 훈련과 연습을 한 사람의 수고와 땀을 인정하지 못하고 단번에 그들보다 더 나은 운동선수나 피아니스트가 되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욕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의 일에도 좋은 선생을 만나길 바라는데 하물며 우리 인생사의 스승을 모시는 일을 소홀히 할 수는 없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음을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3,3)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난 것은 영이다.”(요한3,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위로부터 태어나야 하는데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영으로 태어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영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세상의 논리나 인간적인 삶의 방식과 틀에 매여 있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뜻과 섭리에 맡기고 사는 삶을 말합니다.
영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하느님의 가르침을 새기고, 돌처럼 굳어진 마음을 날마다 새롭게 하며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지 않는 한 하느님의 나라는 멀리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육의 관심사는 하느님을 적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것은 하느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복종할 수도 없습니다. 육안에 있는 자들은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로마8,5-8).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성과 인간 논리의 능력을 뛰어넘는 성령께 의탁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영으로 태어난 사람의 삶은, ‘바람이 제 불고 싶은 데로 불듯이’(요한 3,8) 더는 틀에 박힌 삶이 아닙니다. 자유로운 삶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눈에 드는 자유로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8,31-32).
그런데 진리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잊지 마십시오. 매 순간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하느님의 말씀 안에 거듭 태어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12,2)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으로 마무리합니다. "주님께서는 살아 계시고, 희망과 꿈을 그리고 존귀함을 땅에 묻은 많은 얼굴들 안에서 다시 살아나길 원하십니다. 우리를 이 길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우리를 맡겨 드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닐 것입니다...... 그분의 심장 박동이 우리들의 약한 심장 박동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맡겨드립시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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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배경의 힘>
-기도와 말씀, 찬미와 감사의 전례 공동체-
배경이, 소위 말하는 백이 좋아야 합니다. 배경에 감사해야 합니다. 오랜 세월 지내다 보면 배경을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배경이 없거나 미미하면 그 존재도 미미하기 초라해지기 마련입니다. 명산대찰名山大刹이라는 말도 있듯이 큰 절은 유명한 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 태령산 배경의 ‘무아의 집’이요, 불암산 배경의 제 소속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입니다. 산 배경에는 어김없이 푸른 하늘의 배경이 있습니다. 참 많이도 인용한 ‘하늘과 산’이라는 제 자작시를 소개합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1997.3
산이 상징하는 바 우리 믿는 이들이라면, 배경의 하늘이 상징하는 바 하느님이요, 예수님이요, 교회요, 우리 수도공동체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말하는 배경의 의미는 훨씬 깊고 풍부합니다. 산과 그 배경의 하늘처럼, 참으로 밀접한 배경과의 관계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 수도자들의 자랑은 ‘기도와 말씀, 찬미와 감사의 전례 수도 공동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수도자가 매일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공동전례기도의 은총이 공동체의 일치를 이루고 기쁨과 평화를 선사하며 우리를 부단히 정화하고 성화하여 주님을 닮게하며 샘솟는 활력의 원천이 됩니다. 이런 공동체 배경의 관점에서 오늘 말씀을 대하면 그 이해가 확연해 집니다.
오늘 복음의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찾은 구도자 니코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은 것을 보면 그가 출중한 자질을 지녔을지 몰라도 두려움에 싸여 있는 느낌을 받습니다. 바로 자신의 배경의 초라함을 느껴 참 좋은 배경의 빛이신 예수님을 찾았음이 분명합니다. 주고 받은 대화에서 분명히 감지됩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두 번 거듭된 답변에 무지한 니코데모는 큰 깨우침을 얻었을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위로부터, 물과 성령의 세례성사로 거듭 태어나 파스카의 예수님을 배경으로 일치의 삶을 살 때 비로소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세례 받아 위로부터 거듭 새로 태어난 우리들은 과연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를 살고 있는지 자문하게 됩니다. 거듭된 예수님의 말씀도 참 깊고 풍부한 깨우침을 줍니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하였다고 놀라지 마라.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이와 같다.”
그대로 파스카의 예수님을 지칭하는 말씀이요, 우리 영성생활이 목표하는바 궁극의 경지이겠습니다. 참으로 예수님과의 일치로 무엇에도 걸리지 않는 성령에 따른 자유로운 삶, 참으로 완전한 자기 실현의 삶을 상징합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은 평생 날마다 거행하는 성체성사가 세례성사를 보완하면서 우리를 이런 완전한 자유의 하느님 나라의 실현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니코데모와 참 좋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사도행전의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두 사도는 위에서,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 빛 속에 살기에 두려움이 없고 담대하며 자유롭습니다. 평생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보고 배운 데다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엇보다 두 사도의 자랑은 참 좋은 배경의 사도들의 공동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두 사도의 활력의 원천이, 비밀이 환히 드러납니다.
동료 사도들은 두 사도의 말을 듣고 한마음으로 목소리를 높여 하느님께 아룁니다. 주목할 것은 여기 기도에 인용된 시편2장입니다. 시편은 예나 이제나 믿는 이들에게 기도의 교과서이자 학교임을 입증합니다. 시편을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렉시오 디비나하여 제 삶의 영적 양식으로 삼은 사도들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우리 수도공동체처럼 ‘기도와 말씀, 찬미와 감사의 전례 사도 공동체’라 일컬을 만 합니다. 이러 사도들의 공동체가 한마음이 되어 바치는 공동기도는 얼마나 장엄한지요!
“이제, 주님! 저들의 위협을 보시고, 주님의 종들이 주님의 말씀을 아주 담대히 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저희가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는 손을 뻗으시어 병자들을 고치시고, 주님의 거룩한 종 예수님의 이름으로 표징과 이적들이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
개인기도가 줄 수 없는 엄청난 위력을 지닌 통쾌한 공동기도가 용기백배하게 합니다. 공동기도의 위력은 금방 드러나 기도를 마치자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흔들리면서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 말씀을 담대히 전하니 흡사 오순절 성경 강림의 분위기입니다.
참 좋은 배경을 지닌 우리들입니다. 무엇보다 ‘기도와 말씀, 찬미와 감사의 전례 수도 공동체’의 배경은 우리의 큰 자랑이자 고마움입니다. 우리는 이미 물과 성령의 세례로 위로부터 태어난 이들입니다. 여기에 주님은 날마다 이 거룩한 찬미와 감사의 미사공동전례의, 성체성사의 은총으로 우리 모두 성령 충만한 삶을, 또 거듭 새롭게 태어나 빛과 생명, 진리와 정의, 기쁨과 평화의 하느님 나라를 살게 하십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여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가 하느님 오른쪽에 앉아 계신다.”(콜로3,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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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새로 태어남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그 사람이 밤에 예수님께 와서"(요한 3,1)
바리사이파 사람이며 최고 의회 의원인 니코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유다교의 명망 높은 어른이고 율법을 수호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는 스승이지만, 계보도 없이 느닷없이 나타나 진리를 설파하고 표징을 보여 주는 예수님에게서 알 수 없는 힘을 느낀 듯합니다. 하지만 드러내놓고 예수님을 따를 수 없어, 밤이라는 어둠의 시간을 택해 움직이지요. 빛이신 분 앞에 섰으나 아직 빛을 향해 열리지 않은 그의 내면이 "밤"이라는 시간적 배경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
지식과 명망, 재산 등 세상 것을 부족함 없이 누리는 그에게 예수님은 새로 태어남을 말씀하십니다. 그에게는 퍽 생소한 제안일 것 같습니다. 니코데모는 그 자리에 이르기까지 태생적으로도 기질적으로도 나름 탄탄한 길을 걸었을 법합니다. 하느님께 충실한 만큼 그 이상의 교육과 대우를 받으며 성경에 근거한 메시아를 기다려왔을 겁니다.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사실 지금까지 그다지 나쁘지 않은, 아니 아주 만족스런 삶을 누려온 이는 굳이 새로 태어나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럴듯하게 갖춘 커리어의 그 무엇도 내려놓지 않으면서, 누려온 바에 그저 무언가 살짝 더 얹고 싶은 욕구 정도로 신앙에 접근하기도 하지요. 여기까지는 제 아무리 학식 있고 부유해도 아직 육의 생명입니다.
그런데 신앙은 자신을 송두리째 뒤집는 새로운 탄생을 요구합니다. 이제까지의 완고하고 오만하며 자기중심적인 시야가, 그동안 자기도 모르게 자기를 돌보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인내를 깨달으면서 새로운 지평으로 열리는 신비입니다. 영의 생명은 이렇게 시작되지요.
제1독서에서는 제자들의 놀라운 기도를 들려 줍니다.
"이제, 주님! 저들의 위협을 보시고, 주님의 종들이 주님의 말씀을 아주 담대히 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사도 4,29)
감옥에서 풀려난 베드로와 요한을 맞이한 동료들이 한마음으로 주님께 기도드립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저들의 위협을 보시고, 우리를 구해 달라'고 기도할 줄 알았는데, 더욱 담대히 주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 달라고 청하다니요!
그동안 겁 많고 두려움에 짓눌려 비겁함마저 보인 제자들이 어디 간 걸까요? 지금 우리 앞에서 당당히 주님의 길을 걷는 이들이 이전의 그들과 동일인이 맞습니까?
"이렇게 기도를 마치자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흔들리면서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였다."(사도 4,31)
제자들은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 지금의 그들이 되었습니다. 조심성 많고 의혹으로 주저하며 두려움을 덜치지 못한 복음 속 니코데모와 사뭇 다른 모습이지요. 물론 니코데모도 후일 예수님을 위해 큰 정성을 보일 테지만 그때는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한 상태였지요.
하느님 말씀에 대한 열정과 선포에 있어 담대함! 성령을 받은 이의 특징입니다. 무엇을 많이 배워서도 아니고 주변에서 인정해 주는 신분이어서도 아닙니다. 믿음 하나 부여잡고 있는 그들을 움직이시는 힘은 성령이시지요.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화답송)
하느님의 마음이 시편 작가의 입을 빌어 드러납니다. 성령으로 새로 태어난 이는 모두 하느님의 아들/딸이지요. 인간적 혈연 관계 안에서 누구누구의 아들/딸이기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보시며 "너는 내 아들/딸"이라고 하시는데, 이 사랑 고백을 듣는 여러분의 마음이 어떠십니까?
부활 시기에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성령을 기다리라고 누차 초대할 겁니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우리의 희망이듯, 그분께서 보내주실 성령 또한 순례길에 있는 우리에게 대전환의 힘이 될 것이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대로 새로 태어나길 간절히 청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여전히 주저하며 '이건 말고요, 이 부분만 조금요' 하는 우리의 의혹과 두려움을 성령께서 걷어내 주시고,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새로 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담대히 청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실 겁니다. 새 창조의 문턱에서 성령을 기다리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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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주님의 수난과 부활
주님의 수난은 현세의 수고와 고통과 죽음의 운명을 가리킵니다만, 주님의 부활과 그 영광은 우리가 받을 영원한 생명을 가리킵니다.
-성 아우구스띠노-
♣주님께서는 모든 인류가 수고와 고통과 죽음에 허덕이는 이 세상 속으로 뛰어드시어 인류의 수고와 고통과 죽음을 무릅쓰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하시고 우리의 무의미한 수고와 고통이 주님의 십자가 수난과 고통에 동참함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도구가 되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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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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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CAOrXRok6Sc&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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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 3, 7)
바꾸어주시고
변화시키시는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 사랑이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한다.
자아를
내려놓는 것이
영적 탄생의
참된 시작이다.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아의 뜻을
내려놓아야 한다.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이시다.
성령께서는
영적 근원이신
하느님과
화해하게 하신다.
하느님의
선하심을
깨닫게 된다.
새로운 삶으로
나가게 한다.
끊임없이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불듯
성령께
맡겨드리는 삶이
살아있는 본질이다.
모든 진리를
꿰뚫어
이해시키는
진리의 영이
바로
성령이이시다.
부활의 길을
걸어가게 하시는
안내자가 바로
우리의
성령이시다.
사랑하도록
이끄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는 성장한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삶을 간절히
원하신다.
삶이 있는 곳에
성령이 계신다.
성령이
계시는 곳에
모든 은총이
있다.
새로운 삶의
은총이
시작되었다.
성령님께
의탁하는
새 날
새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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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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