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잎 클로버 한 장
정 금 지
지난겨울 어느 날이었다. 남편이 아침운동 갔다 오면서 액자 하나를 들고 왔다. 나무로 된 작은 틀 안에는 네 잎 클로버로 붙여 만든 손바닥만 한 크기의 ‘행운’이라는 두 글자가 들어 있었다. 행운이 들어온 것처럼 기뻤다.
여러 해 전, 남편과 아침운동을 같이 다닐 때 운동이 끝나고 나면 가까운 회원들과 같이 네 잎클로버를 찾아보기도 했지만 내 눈에는 뜨이질 않았다. 학교 다닐 때 소풍가서 하던 보물찾기도 나하고는 거리가 멀었던 걸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아예 찾는 걸 포기하고, 행운은 나하고는 인연이 없는 거라고 체념하게 되었다.
그런 나에게 이렇게 많은 네 잎 클로버가 한꺼번에 들어온 건 만든 분의 정성까지 더해서 글자 그대로 행운이었다. 액자는 거실 전면 텔레비전 아래 잘 세워놓았다. 복권은 사지 않으니 그 쪽은 바랄 게 없고,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 뜻밖에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게 되었다.
봄볕이 환하게 내리던 날 묵은 먼지를 털어내기 위해 대청소를 시작했다. 바닥청소를 끝내고 걸레로 액자를 조심스럽게 닦다가 멈칫했다. 모두 네 잎인 줄 알았는데 ‘ㄴ’의 맨 끝에 다섯 잎 클로버 한 장이 붙어 있었다. 꽃말을 알아보기 위해 검색 키를 눌렀다. 주변에 많이 보이는 세 잎은 행복, 네 잎은 행운, 다섯 잎은 엄청난 행운과 불행, 두려움과 불행이라고 나왔다.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엄청난 행운’같은 건 감히 생각조차 없지만 ‘불행과 두려움’이 진실인양 다가왔다. 만든 분이 모르고 그랬거나, 혹시 네 잎 클로버 한 장이 모자랐던 건 아닐까.
살면서 항상 하나가 문제가 될 때가 있다. 어떤 이는 다 좋은데 하나 때문에 가까이 하기 힘든 사람이 있고, 어떤 일도 하나만 이루어지면 전체가 다 잘 될 수도 있다. 옥수수 농사를 짓다보니, 잘 되어도 수확할 때 하루를 놓치면 너무 딱딱해져서 제 맛을 잃기도 해서 그 하루의 선택을 위해 고심하게 된다. 아무리 행운이 많이 들어온다고 해도 마지막 하나로 전체를 잃게 될 수도 있다. 마지막 다섯 잎 클로버 한 장은 무언의 경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액자 속에 행운의 클로버는 모두 서른일곱장이나 되었다. 너무 많았다. 나누어 주기로 했다. 그렇다고 이미 붙어 있는 클로버를 떼어 줄 수 는 없고, 눈에 안 보이는 걸 애써 찾아 나설 수도 없다. 나폴레옹처럼 총알을 피할 일이 없으니 굳이 네 잎클로버를 고집할 일도 아니지 싶었다. 밭에 가면 세 잎 클로버는 얼마든지 있다. 행운 대신 행복으로 대체하기로 했다.
지난봄에 친구가 딸기 모종을 가지러 왔을 때, 수확한지 얼마 안 된 뚱딴지, 꽃봉오리가 맺힌 매화나무 한 가지, 겨울을 지내고 잘 자란 움파도 다듬어 주었다. 분양간 매화가 꽃을 피웠다고 좋아하며 사진을 보내왔다. 친구가 좋아하니 나도 행복했다. 줄 수 있어서 행복했다. 밭에 있는 것을 나누어 줄 때마다 액자 속에 있는 행운의 클로버를 하나씩 탈출시키기로 했다. 서른일곱 장이 끝나면 나머지 ‘불행과 두려움’의 다섯 잎 짜리 한 장은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 제 할 일을 끝낸 것처럼.
남편은 올해 고구마 면적을 넓혔다. 봄에 날씨가 가물어서 물을 주느라 힘들어 했는데 여름 들어 비가 와서 다행이었다. 작년보다 더 많이 나누어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긴 겨울밤과 함께 할 고구마는 행복을 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가랑비가 내리는 날 아침, 운동에서 돌아온 남편은 책갈피를 내밀었다. 그 속에 네 잎 클로버 한 장이 들어 있었다.
강원수필문학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