숯
허효남
산을 내려왔다. 정상을 향해 질주하던 의지가 원점으로 되돌아오자 피곤이 몰려온다. 발아래 두었던 모든 것들을 다시 머리로 이고 가야 하기에 마음마저 무겁다. 그렇게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자며 일행들과 향한 곳은 찜질방이다. 뜻밖이었다. 산마루에서 바라보던 하늘은 온통 푸른색이었건만, 참숯방에 누워서 쳐다보는 하늘은 검디검은 색이다. 밤하늘을 수놓듯 천정에 별처럼 촘촘히 숯 토막이 장식된 방에서 스르르 눈을 감는다.
검은색을 흔히 죽음의 색이라고 한다. 깔끔해 보이고 정돈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선보다는 악을, 기쁨보다는 슬픔을 의미하는 관념 때문인지 어려서부터 유달리 검정색이 싫었다. 삶보다는 죽음에 더욱 가까이 다가서 있기에 왠지 우울했고, 하루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거라는 미신적인 불안감마저 들곤 했다. 대신 깨끗한 하얀색을 즐겼다. 금방 다려낸 흰색 셔츠와 말끔히 닦은 흰 구두, 거기다 손수건마저 새하얀 것으로 챙겨들면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었다. 검은 것이 내게서 앗아간 기쁨을 흰 것은 서너 배로 되돌려주는 것 같았다. 이런 편협한 생각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숯을 가까이 두고부터이다.
지인으로부터 숯을 선물 받았다. 이끼와 분재가 어우러진 산 모양의 숯은 한 폭의 산수화인 양 제법 운치도 있어 보였다. 허나 꺼멓다 못해 우윳빛까지 감도는 어두운 색만은 영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화사한 집안 분위기에도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루가 떨어져서 오히려 집안을 더럽히게 될까 걱정이 된 것이다.
배움은 들음에서 나고 정은 봄으로써 싹튼다고 했던가. 매일처럼 숯을 쳐다보자 검정과 나 사이에도 차츰 교감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항상 밤과 같은 침묵 속에서 새까맣게 눈을 뜨고 있다. 작지만 웅장하게, 가볍지만 절도 있는 모습으로 항상 세상을 바라본다. 때로는 숯이 검은 고양이처럼 하루 종일 내 주변을 서성이기도 한다. 검은 것이 전해주는 알 수 없는 잔상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눈길은 더욱 자주 갔다. 고요한 시간이면 탄광처럼 검고 비밀스런 숯 속을 광부인 양 파헤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한 장의 흑백사진을 발견했다. 열 살 터울 아래의 남동생이 태어났을 때였다. 할아버지는 새끼줄에 고추와 숯을 엮은 금줄을 대문 앞에 거셨다. 그것은 부정을 꺼리어 함부로 바깥사람이 출입하지 말라고 걸어둔 액막이였던 셈이다. 장을 담근 후에 할머니는 꼭 고추와 숯을 띄워두셨다. 볕이 좋은 날 반짝거리는 장독들 속에서 종이배처럼 떠다니는 숯과 고추를 보는 것은 꽤 즐거운 일이었다. 간장을 쪽박으로 떠서 다시 후루룩 부으면 고추와 숯은 표류하는 선박처럼 까닥거리곤 했다. 겨울이면 군불을 지피고 남은 숯등걸에 감자며 고구마를 구워먹기도 하고, 습한 창고에는 늘 숯 섶이 쌓여 있었다. 검은 빛깔 속에 감추어진 힘은 늘 조용하고 부지런했다. 항상 눈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기억의 저편에서 수대를 걸치며 묵묵히 제 소임을 다하였다.
숯에서 내세를 기약한 참나무의 슬픔과 애환을 느낀 것은 한참이 지나서이다. 숯이 된 나무는 죽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력을 얻을 수 있게 된다. 한 그루의 참나무가 숯가마에 들어가 고온으로 탄화되는 것은 생명체로서의 죽음을 의미하지만, 역으로 그것은 숯으로서의 새 생명을 얻는 탄생의 과정이기도 하다. 뜨거운 불을 이겨낸 나무가 숯으로 정련되는 고통과 인내가 결국 참숯으로의 윤회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숯이 검은 까닭은 영원한 생명력을 얻기 위해 지불해야 할 마땅한 대가인지도 모른다.
뜨거운 열정이 식어버린 후의 초췌함은 사그라짐이 아니라 원숙함으로 승화된다. 불과 바람, 뜨거움과 차가움의 시련을 운명처럼 받아들인 숯은 섭리에 따라 그저 겸손할 따름이다. 터덕터덕 화덕 속에서 결대로 자신의 살을 그을려가며 눈물조차 화염 속에 흩뿌리고 만다. 남은 삶에 대한 아쉬움도 다음 생에 대한 기대조차 품지 않은 허허로운 마음으로, 활활 타오르고 또 타오른다. 뜨거움 속으로 자신을 내던져야만 정금처럼 단련될 수 있기에, 숯의 화형식은 신성하기까지 하다.
비록 자신은 검을지언정 숯은 제 몸으로 세상을 맑힌다. 깔끔은커녕 도리어 거무스름한 몰골을 하고 있지만, 나쁜 공기를 흡착하는가 하면 전자파를 차단하기도 한다. 기계와 문명으로 얼룩진 일상을 지우개처럼 하얗게 지워주는 것이다. 찬란한 순백의 영광이 아니라 소박한 검정의 성실함으로 숯은 색에 대한 편견을 가진 세상까지 정화시킨다. 겉으로 보여지는 색과 모양 때문에 진실한 실체를 보지 못한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어두움 가운데 빛이 있으며 탁함 중에 맑음이 있음을 숯은 거짓말처럼 새카맣게 보여 준다.
향수는 아니지만 숯은 무향의 향기도 풍긴다. 요란한 용기에 이쁜 색으로 채워진 방향제는 집안의 악취를 향기로 숨길 뿐이지만, 숯은 잡내를 흡습하고 청정무향을 내어 놓는다. 그것은 더없이 맑고 청아하여 한 잔의 순한 차향과 같으며, 시멘트에는 어울리지 않는 삼림욕의 상쾌함을 준다. 숯은 요란하게 겉멋을 내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수수함으로 바라볼 수 있는 혜안을 가지게 한다.
숯만큼 뜨겁게 타올라 오래도록 기억되는 삶을 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참나무는 한 생을 마감하면 숯이 되고, 집 안 곳곳을 맑히다 재로 변하며, 밭에 뿌려진 거름이 되어 또 다른 생명체를 잉태한다. 이 세상 어디에서든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된다면, 굳이 사람으로 태어난 것만이 최고의 축복은 아닐 것이다. 숯은 타올라 재가 되어 쓰이지만 사람은 죽어 뼛가루만이 날리기 때문이다. 시커멓게 못나도 보이지 않게 누군가의 삶을 밝힐 수만 있다면, 덧없는 인생의 강물을 유랑하는 한 조각 숯덩이로 살아가는 것도 괜찮으리라.
햇볕이 좋은 날, 먼지 묻은 숯덩이를 씻는다. 늘 바라보아도 숯이 신선한 힘이라는 뜻을 지닌 우리말이란 것은 알지 못했다. 그것이 검어서가 아니라 정녕 내 마음이 어두운 까닭이다. 숯이 검정 나무란다고 검은 것은 정작 숯덩이가 아니라 표피밖에 볼 줄 모르던 내 눈인 것이다. 흐르는 물에 편견조차 조각난 숯가루처럼 점점 씻겨나간다. 현세와 내세를 넘나드는 검은 숨소리에, 내 숨결조차 숙연한 듯 조심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