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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3일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제1독서 : 에제 37,21ㄴ-28
복 음 : 요한 11,45-56
그때에 45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46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바리사이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알렸다.
47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48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49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해의 대사제인 카야파가 말하였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50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51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다.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52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53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54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유다인들 가운데로 드러나게 다니지 않으시고,
그곳을 떠나 광야에 가까운 고장의 에프라임이라는 고을에 가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머무르셨다.
55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많은 사람이 자신을 정결하게 하려고
파스카 축제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56 그들은 예수님을 찾다가 성전 안에 모여 서서 서로 말하였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가 축제를 지내러 오지 않겠소?”
조명연 마태오 신부
2001년 911테러를 모두 잘 아실 것입니다.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인 알카에다가 일으킨 하이재킹 및 자살 테러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2,996명이 사망하고 최소 6천여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이슬람 테러 단체에 의해 납치된 4대의 비행기는 뉴욕 세계무역센터,
워싱턴의 국방부 펜타곤 청사, 그리고 백악관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첫 번째 비행기는 제1세계무역센터를, 두 번째 비행기는 제2세계무역센터를,
세 번째 비행기는 국방부 펜타곤 청사를 무너뜨렸습니다.
이 세 비행기에 타고 있던 승객들은 납치범들이 하라는 대로 가만히 있었고,
그 결과 모두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네 번째 비행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저항했습니다.
납치범들을 향해 자기 몸을 던져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그 결과 이 비행기는 유일하게 테러범들의 계획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원 목표였던 워싱턴 D.C가 아닌 펜실베이니아 주 근처 광산 벌판에 추락하고 맙니다.
이 안에 있던 승객들은 모두 죽었지만,
도시 안에서의 충돌을 막아 많은 목숨을 살릴 수가 있었습니다.
이들의 희생으로 많은 목숨을 살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셨고, 또 직접 당신의 십자가로 보여 주셨던
한 알의 밀알이 썩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냥 주님께서 알아서 해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도구일 따름인데, 도구의 역할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합니다. 그들의 걱정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많은 표징으로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고 있고,
이렇게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원하지 않는 점령자 로마인들이
쳐들어와서 민족들을 짓밟을 것이라는 걱정입니다.
그리고 대사제 카야파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안위만을 걱정하면서
백성 모두를 진정으로 살릴 어떤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구원으로 이끌 예수님을 없앨 생각만 합니다.
로마가 싫어할 것이라며 미리 앞서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에 반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행동하십니다.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피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희생만이 많은 목숨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특히 사랑의 삶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까지 내어놓으면서 보여 주신 것으로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몫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대신 쉽고 편한 것만 선택하려고 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주님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어떤 변화도 따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무엇인지를 묵상하면서,
내일부터 시작하는 성주간을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온 백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서 죽는 것이 더 낫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지금 우리는 사순시기의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사순시기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이르는 결정적인 사건인
십자가 사건에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이 결정적인 사건이 어떻게 해서 벌어지게 되는지 그 단초를 제공해 줍니다.
곧 유다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죽이기로 결정한 사건을 전해줍니다.
이 일은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시던 중,
채 도달하기도 전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는 엠마오라는 마을에 다다랐을 때에
생긴 일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생긴 일입니다.
곧 엠마오에서 라자로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지막 일곱 번째의 표징, 곧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표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표징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라자로의 장례식에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이 이를 예루살렘에 있는 유다 지도자들에게 알린 것입니다.
그러자 유다 지도자들은 민심이 동요된 것을 두려워하여
최고 의회 곧 산헤드린을 열고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것은 백성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곧 메세아가 와서 다윗 왕조를 회복하고 새로운 이스라엘을 재건하리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실이 로마제국에게는 위협이 되고
당시의 기득권을 갖고 있던 종교도자들에게도 위기가 되었고,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결정 과정이 참으로 묘합니다.
바로 그 결정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드러내 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 해의 대사제였던 가야파가 가기도 모르게 자신의 입을 통해 밝혀줍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 11,50)
이는 결국 예수님의 죽음이 온 백성을 위한 대속임을 말해줍니다.
곧 의인의 죽음을 말해줍니다. 곧 이는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요한 11,52)임을 드러내 줍니다.
그런데 이는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 해의 대사재로서 예언한 것'(요한 11, 51)임을 밝혀줍니다.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오묘하게도 기회주의자인 카야파의 입을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밝혀주십니다.
그리하여 유다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백성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의 입성을 기다리며 파스카를 준비합니다.
오늘 우리도 이 사순시기의 막바지에서 예수님의 파스카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복음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그분의 죽음과 영광을 준비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준비해야 할까요?
<오늘의 말·샘 기도>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요한 11,50)
주님!
겉치레 속에 교묘히 가리고 있는 불신의 껍질을 벗겨 내소서.
신앙의 겉꾸밈 뒤에 감추고 있는 제 허영과 자애심을 끊어내소서.
사랑의 겉모습 뒤에 숨기고 있는 위선을 몰아내소서.
빛을 비추시어 사실을 보지 못하게 하는 어리석음의 어둠을 몰아내소서.
당신의 생명이 자라고 당신의 영이 흐르게 하소서. 아멘.
그들은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죽은 라자로를 예수께서 다시 살리신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고
그 소문이 퍼지자 대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한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요.”(47-48절).
그들은 지금까지 누리고 있던 기득권을 잃을까 두려워 주님을 제거할 음모를 꾸민다.
대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정말 성전과 백성을 걱정해서 이런 회의를 소집했던 것이 아니다.
이렇게 정치적으로도 생각하였겠지만,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죽은 라자로를 살리시는 기적을
사람들이 보았고 많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자,
예수님을 견제하기 위해, 그 사태를 수습하려고 의회를 소집하였다.
이때 대사제 가야파가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49-50절) 하였다.
이것은 대사제로서 예언한 것이며, 예수님의 죽음이 유대인뿐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한데 모으기 위해서 죽는다는 예언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그분의 죽음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위한 죽음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의 행위로서의 의미가 있다.
이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태어날 것이다.
하여간에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이해 때문에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행위가 하느님의 뜻에 맞는지 맞지 않는지도 성찰해 보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분을 죽일 방법만 찾았고 이제는 그렇게 하기로 결의하고,
계획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에 들어간다.
우리는 우리의 판단 기준을 어디에 두고 살아가고 있는가?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며 진위를 가리고 있는가?
아니면 나 자신의 명예나 안위에 우선을 두고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이기적인 판단의 기준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오늘을 사는 다른 무죄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하고 있지나 않은가를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 복음의 유다 지도자들을 보면서 나를 반성하며,
잘못된 판단으로 그들의 잘못을 범하지 않고,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자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1) 여기에도 신비가 있다.
창세기에서 악마는 동정이었던 하와에게 먼저 말을 건 다음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이 말은 그들에게 죽음을 건네기 위한 말이었다.
동정잉태의 사건에서는 거룩한 천사가 마리아에게 먼저 말하였고 다음에 요셉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그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앞의 사건에서는 죄와 죽음을 위해 여자가 선택되었고, 뒤의 사건에서는 구원을 위해 여자가 선택되었다.
앞의 사건에서는 여자로 말미암아 남자가 넘어졌고, 뒤의 사건은 동정녀로 말미암아 남자가 일어섰다.
그래서 천사는 요셉에게 그렇게 말한 것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희생해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좋은 일에는 생색내기 좋아하고 어려운 일에는 꽁무니를 빼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나에게 닥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시련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불똥이 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간절합니다.
그러다가도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으면 태연하게
“그 일을 위해서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느냐?”고 말합니다.
정말 속 보이는 일이죠. 그러나 이런 일이 비일비재한 것은 그만큼 마음이 굳어진 탓입니다.
대사제인 가야파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는 명분을 내세워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왜 예수님입니까? 자기가 온 백성을 위하여 죽으면 안 됩니까?
왜 나는 안되고 다른 사람이 십자가를 짊어져야 함을 당연하게 생각합니까?
유다인들은 거창한 명분을 내세워 희생양을 선택하였는데
안타깝게도 그들의 구원자 메시아를 제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명분을 내세워 자기 자신과 가문을 위하고 자기 실속을 차리려 하였습니다.
자기가 희생하려 하지 않고 명분을 내세워 남을 희생시키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 이들은 다른 사람이 아닌 오늘 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때때로 나의 명분과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을 지니게 되는데
바로 그 순간이 메시아를 희생양으로 삼는 때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명분에 앞서 나의 진심을 볼 수 있는 지혜를 간직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나의 희생 봉헌이 다른 사람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구원을 가져옵니다. 희생은 주님 사랑의 징표입니다.
따라서 누구의 희생이 아니라 바로 나의 희생을 통해서 구원이 온다고 생각하면
한 순간순간이 소중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와 함께 기도합니다.
“주님, 저는 황홀한 환시보다도 숨은 희생의 단조로움을 선택하렵니다.
희생과 사랑으로 작은 핀 한 개를 줍는 것이 한 영혼을 구하고 회개시킬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좀 더 청념하고 바른 마음을 지닌 사람,
그리스도를 가슴에 모시고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들이 공직을 맡았으면 좋겠습니다.
교회공동체 안에서도 헌신 봉사할 수 있는 이들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요한3,16).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최근에 두 가지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는 싱크대에 있는 음식물 분쇄기가 고장 난 것입니다.
원인은 분쇄기에 음식물을 아예 넣지 않고 오랜 시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부식이되면서 하수관도 부식되어서 잘못하면 물난리가 날 뻔했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사시던 집도 동생 수녀님이 가끔, 관리를 해서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기저기 문제가 생겼을 것입니다.
디지털의 세상에 살면서 여기저기 비밀번호를 지정하게 됩니다.
자동으로 기억하게 해 놓지만, 나중에 비밀번호를 기억해 내기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자주 사용해야만 기억하기 쉽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래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언제가 기도하십시오. 늘 감사하십시오.”
교회가 매년 이렇게 ‘사순시기’를 전례 안에서 보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 죄인인 나를 위한 헌신과 희생임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하나는 스마트폰의 액정이 꺼지는 현상이 생겼습니다.
인터넷에 원인을 찾아보니 원인이 엄청 많았습니다.
배터리의 문제일 수도 있고, 용량의 초과일 수도 있고, 시스템의 오류일 수도 있고,
물리적인 손상일 수도 있다고 합니다.
여기저기 알아보아도 저의 능력을 벗어난 것 같아서
방법을 찾고 있는데 의외로 쉬운 방법을 알았습니다.
제가 뉴욕에서 스마트폰 보험을 들었기 때문에 보험처리를 하면 된다고 합니다.
새 스마트폰이 오면 자료를 옮기면 된다고 합니다.
스마트폰 기종을 휴대하기 편해서 접이식으로 선택했습니다.
아무래도 자주 열게 되니 접촉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새롭게 거듭나는 과정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세례’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지난날의 모든 죄가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사해집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것은 보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고백성사’입니다. 우리는 성찰, 회개, 결심, 고백, 보속의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성령의 이끄심으로 새롭게 거듭날 수 있습니다.
국가는 국민에게 권리를 주기도 하지만 국민은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할 책임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은 4가지 의무를 지켜야 합니다.
국방의 의무, 납세의 의무, 교육의 의무, 근로의 의무입니다. 저는 30개월의 군 복무를 다 하였습니다.
성직자들도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고 해서 교구에서 정한 방법에 따라서 세금을 내고 있습니다.
자녀가 없기에 자녀를 교육할 의무에서는 제외되지만,
교구 성소국장으로 지내면서 신학생들을 양성하는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오늘 독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 하느님께서 우리의 하느님이 되는 방법을 이야기합니다.
33년 동안 사제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5년을 더하면 저도 직무에서는 배제되는 원로사목자가 되려고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이렇게 나의 거처가 그들 사이에 있으면서,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의 성전이 그들 한가운데에 영원히 있게 되면,
그제야 민족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아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십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것입니다.
아무리 율법을 잘 아는 율법학자라고 해도,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대사제라고 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겠다고 다짐한 바리사이파라고 해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식과 권력을 이용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율법을 이용해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구원은 능력과 직책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겸손과 희생 그리고 나눔과 선행을 통해서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복음은,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기적의 후일담입니다.
그 일은 그동안 예수님이 행하신 어떤 기적, 표징보다 적대 세력의 두려움을 자아냅니다.
그럴 수밖에요. 삶과 죽음은 인간 능력 밖의 문제,
즉 온전히 하느님의 영역임을 그들도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로마인들을 운운하며 자기들의 불안을 민족적 운명으로 확대하고
예수님에 대한 자기들의 공격 욕구를 합리화합니다.
그때 그해의 대사제 가야파가 말합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요한 11,50)
가야파의 예언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요한 11,51)이라고
복음사가는 전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말에는 그 자신도 의도치 못한 거대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선, 그는 예수님의 존재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저울 한쪽 접시에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 나아가 온 인류를 올려놓고,
다른 한쪽 접시에는 예수님을 올려놓은 채 평형을 잡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어 마땅한 미치광이 몽상가 죄인일 뿐이라고 규정해 놓고서도
대사제직에 부여된 영의 뜻을 자기도 모르게 발설했을 겁니다.
또한, 그분의 죽음이 "백성을 위한" 것임을 밝힙니다.
단순히 로마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희생양 정도가 아니라,
죄악에 시달리는 인류를 "위한" 고귀한 죽음이 될 것임을, 자기도 모르면서 고백한 셈입니다.
독서인 에제키엘 예언서에서는 주님께서 바빌론 유배 중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들려주시는 새 희망이 울려 퍼집니다.
"한 임금, 유일한 목자."(에제 37,22.24)
주님께서 세워주실 평화의 임금, 그분 종 다윗을 이을 새로운 통치자는
가야파 입을 통해 발설된 "한 사람", 곧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에제 37,23.27 참조)
옛날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계약의 말씀이 다시 갱신됩니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이를 위해서 두 가지 제안을 하십니다.
첫째는, "그들이 저지른 모든 배신에서
내가 그들을 구원하여 정결하게 해 주시리라."(에제 37,23)는 것이고,
둘째는, "나의 성전을 영원히 그들 가운데에 두겠다."(에제 37,26)는 것입니다.
정결하게 하시고 백성 가운데의 성전 안에 현존하시리라는 이 약속은,
마침 오늘 복음에 드러난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적 관습에 잘 드러나 있지요.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많은 사람이
자신을 정결하게 하려고 ...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찾다가 성전 안에 모여"(요한 11,55-56)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신 하느님의 새 계약은
이렇듯 유다인들 종교 생활의 근간을 이루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제, 한 사람이 온 백성, 온 인류를 위하여 죽음으로써
시간과 공간, 육체와 신분, 이스라엘에게만 부여된 듯 자부했던
율법과 선민사상을 초월한 새롭고 영원한 계약이 체결될 것입니다.
잠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를 떠올려 봅니다.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온다."(요한 4,21.23)
유다인들이 사유화했던 정결례와 예루살렘 성전을 통한 하느님 현존의 계약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파스카 희생제사를 통해
그분 이름이 전해지는 곳 어디에나 확장되어 퍼져 나갈 것입니다.
육신의 소멸이 오히려 영의 자유로운 활동과 믿는 이들의 헌신으로 부활하기 때문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이제 파스카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이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에 잠시 숨을 돌리기는 하지만,
우리에게는 예수님과 함께 채워야 할 남은 고난이 있습니다.
그 유혹과 어둠의 시간을 예수님 수난과 발맞추어 성실히 완주할 수 있기를
서로 격려하면서 용기 북돋워 주면 좋겠습니다. 힘내십시오, 벗님!
그렇다. 한 사람이 백성을 대신해 죽는 편이 낫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죽은 지 사흘이 지난 라자로를
소생시킨 표징사건(요한 11,1-44)을 전제한다.
죽은 라자로를 소생시킨 기적은
요한복음이 보도하는 예수님의 7개 표징사화 중 마지막 표징이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자신을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예고된 메시아요,
그들이 믿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하느님과 같은 분이요,
하느님과 함께 생명을 주관하시는 주님이심을 명백히 계시하셨다.
이제 더 이상 다른 계시는 없다.
있다면,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 높이 달리시는 것과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시는 일만 남았다.
라자로를 소생시킨 표징사화를 끝으로
예수님의 3년간 공생활은 사실상 끝났다고 보아야 한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3년간 공생활은 처음 1~2장에서 아주 완만하게 시작한다.
(다음날/1,29; 다음날/1,35; 그 이튿날/1,43; 사흘째 되던 날/2,1)
그러다가 3장부터 11장까지에는 그 속도가 빨라져
단숨에 3년 정도의 공생활이 보도 된다.(2번의 해방절)
그다음부터는 예수님의 죽음까지 마지막 7일간의 활동을 보도하고 있다.
12장 서두를 보면 예수께서 과월절을 엿새 앞두고 베다니아로 가셨다고 한다.
이것이 예수께서 마지막 맞으시는 과월절(해방절)이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성대하게 입성하실 것(12,12-19)이고,
과월절 하루 앞두고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드시면서
새 계명과 함께 긴 고별사를 주실 것(13-17장)이다.
이제 예수께서 유다인 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 하실 일은 거의 마치셨다.
당신 자신이 누구신지를 모두 밝혀주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실 일을 다하셨으니, 이제 선택은 사람들의 몫으로 남는다.
라자로의 소생 기적은 분명 많은 유다인들이 예수께 대한 믿음을 갖도록 했다.(45절)
그러나 이 사건이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는
예수를 완전히 제거하려는 마지막 결정적 요인이 되고 만다.
예수님의 활동과 가르침을 못마땅하게 여긴 유다인들이
돌로 예수님을 치려했던 행동(8,59; 10,31)은 그나마 즉흥적이고 충동적이었다.
사실, 그들이 재판을 하지 않고 사람을 죽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제는 유다인들의 최고회의가 예수를 죽이기로 결의한다.
그 해의 대사제 가야파가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대신해서 죽는 편이 더 낫다는 것도 모릅니까?”(50절)라는 말로
예수님의 속죄 죽음을 예고한다.
가야파의 태도는 거만하고 불손하기 이를 데 없지만,
예나 지금이나 大를 위해 小의 희생은 감수한다는 정치가들의 일관된 생각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을 위한 죽음, 즉 전 인류의 죄를 위한 속죄의 죽음이 될 것이다.
유다인의 최고의회가 예수의 죽음을 결의하였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다고 해서 그들이 예수를 마음대로 죽일 수는 없다.
예수께서는 때가 오면 스스로 죽음을 향하여 걸어가실 것이고,
또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실 것이다.
그러나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도모하실 것이다.
그때까지는 아직 일주일이 남았다.
교회는 오늘로써 사순시기의 재계를 마감하고 본격적인 수난시기로 돌입한다.
예수님의 본격적인 수난시기는 곧 聖週間이다.
성주간에도 여전히 재계는 필요하다.
그러나 성주간에는 실제로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의 길을
한 걸음 한 걸음씩 함께 걸어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라자로의 소생사건을 통하여 믿음을 가진 자는 예수님과 함께 그 길을 갈 것이지만,
백성의 지도부는 그 반대의 길을 갈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가는 자는 그분과 함께 죽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분은 죽임을 당하거나 마지못해 목숨을 내어놓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좇아 인류의 모든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생명을 내어놓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이것이 곧 세상에 ‘새 생명’을 선물하시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을 함께하고,
그분과 함께 죽을 때만이 새 생명의 참뜻을 깨닫게 될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의 라자로를 살리신 뒤
그분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극명하게 갈립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바리사이들에게 가서” 이 일을 알립니다.
결국 유다인들의 최고 의결 기구인 산헤드린까지 개입하여
예수님에 대하여 논의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유다 지도층은,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임금’(다윗 가문의 메시아)으로 인정하면,
로마인들이 이를 정치적 반란으로 규정할까 보아 우려를 표합니다.
결국 대사제 카야파가 이 모든 논쟁의 해법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낫다는 결정이었습니다.
이는 철저하게 정치적 발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제안에는 희생될 존재의 무죄 여부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희생양이 될 존재가 모든 혼란과 불안을 끝내 줄
결정적 동기가 되어 주면 그만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카야파의 이 불의한 결정도 당신 섭리에 활용하십니다.
대사제의 입으로 예수님의 죽음은 “민족을 위한” 것이고
이를 통하여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는
사건임이 선언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산헤드린의 수장이었던 대사제의 제안에 따라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합니다.
‘두려움’은 질투와 경쟁심에서 시작됩니다.
산헤드린은 민족주의적 감정을 명분 삼아 자신들의 불안을 그럴듯하게 포장하였지만,
사실 그 두려움은 예수님에 대한 질투에서 나왔습니다.
기득권자들의 두려움은 민중의 작은 움직임도 하나같이 ‘반역’으로 선고하게 합니다.
그러나 오늘 독서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나는 그들과 평화의 계약을 맺으리니,
그것이 그들과 맺는 영원한 계약이 될 것이다.”
“그제야 민족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리라. -요한 11,45-46-
제노 수녀
요한복음을 1-12장 표징의 책, 13-21장 영광의 책으로 나누고 있다.
표징의 책으로 불리는 1-12장에는 7개의 표징(기적)이 나오고
오늘의 복음 11장은 그 마지막 일곱 번째 표징인
‘라자로를 살리신 이야기’로 시작한다.
라자로를 다시 살리심으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11,25b)이심을 우리에게 확실하게 알려주셨다.
그러나 라자로를 살리신 기적으로 최고의회는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다.
라자로가 되살아난 일을 본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지만,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바리사이들에게 가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알린다.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47-48절)
죽은 이가 살아나는 엄청난 기적을 보고 들었음에도,
예수님이 많은 표징을 통해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주었음에도
그들은 다음의 사실을 걱정한다.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다.’
이 말에서 사람들이 자신들이 아닌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대한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의 시기 질투심을 볼 수 있다.
대사제 카야파는 이 걱정에 대해 이런 해결책을 제시한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
표면적으로는 상당히 합리적이다.
한 사람이 죽는 것이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낫다는 그럴듯한 명분,
그러나 그 명분 밑에는 희생되는 이의 유죄 여부가 문제 되지 않으며,
나의 명분을 위해 무고한 생명을 아무 죄의식 없이 꺾어버린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저열한 악의를 통해서도 당신의 일을 계속하신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이 민족뿐 아니라 모든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신다.’
하느님은 인간의 죄악과 어리석음에도
우리를 사랑하시기를, 구원하시기를 그만두지 않으신다.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며
나와 타인을 속이고 생명을 소홀히 다루지는 않는지?
나의 대의명분만을 앞세우며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에 눈을 가리고 있지는 않는지?
나의 안위만을 위해 무고한 희생에 무관심하지는 않은지?
성찰해 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어둠과 거짓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지신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가도록 하자.
[출처]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대구수녀원 - 복음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