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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작문비평 게시판에 써 놓은 것의 원본 격인 글입니다.
작문은 좀 주제를 한정하면서 한 소재에 생각과 묘사를 담으려 노력했는데
한 번 생각이 왈칵 하고 열리니 좀체 가라앉지 않아 옛 글을 다듬어 다시 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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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합니다, 라고 메신저에 써 놓았더니 지인들이 왜 고향인 M시가 아니라 부산으로 가느냐고 묻는다. 외할아버지의 제사는 큰외삼촌 댁에서 지내기 때문이다. 외할아버지의 기일(忌日)은 음력으로 오늘이다. 나는 아마도 부산역 정거장 플랫폼에 간신한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속속들이 날아 남천동 큰외삼촌 댁으로 갈 것이다. 예전에는 범일동 깍달막진 데 외삼촌 형제 두 분이 같이 사셨고 이제는 작은외숙모 혼자서 그 동네를 지키고 계신다. 그리고 아직 촌에 있는 외가댁은 그대로 남아 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외할머니 홀로 지키고 계시는 그 곳은, 나와 그들의 추억은 있을지언정 더 이상 명절에 사람이 찾아오지 않는다. 대신 큰외삼촌이 자가용을 몰고 외할머니를 모시러 간다. 이른바 역귀성이다. 그리고 얼마 전 퇴직한 큰외삼촌께서는 아흔 네 살이 된 외할머니를 모시고 가셔서 이제는 외갓집에 아무도 없다.
어쨌든 오늘 쓰고 싶은 얘기는 지금이 아니라 예전의, 살아 생전 우리 외할아버지에 관한 얘기다.
ㅡ 재차(再次), 오늘은 외할아버지의 기일이다.
내가 중학교 2학년이던 겨울의 일이니 벌써 10년도 더 되었다. 아직도 기억 속에는 경상도 겨울 특유의 그 말라비틀어진 잔디떼와 딱딱하게 굳은 황토가 선연하다. 따뜻한 남쪽 나라에는 눈이 내리지 않아 언제나 겨울은 가물다.
예년보다 유독 혹한이 찾아왔던 그 해 겨울, 단단하게 굳어 흙먼지 날리는 오솔길을 홀로 걸어 외갓집에 닿았다. 학교를 조퇴하고 M역에서 오랫만에 낡아빠진 비둘기호에 올랐다. 반객반화(半客半貨), 덜커덩거리는 완행열차에서 내려 근 오년만에 보는 고향 모습은 박제된 듯 그대로였다. 그러나 외갓집의 풍경은 전에 본 적 없는 것이었다. 허연 천막과 싯누런 삼베옷, 평소에 쇠죽이나 삶던 부뚜막 쪽 가마솥에서 쉴새없이 올라오는 쇠고기국의 내음, 그리고 전혀 처음 보는 어르신들이 다가오셔서 "니가 박서방네 아들가?" "쟈가 덕이 아들네미 아잉교. 므스마 많이 컸네" 하는 이야기들.
하지만 그 왁자지껄함 속에는 익숙한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경상도말 특유의 약간 새는 소리로 "찬-이 왔나?"하던 외할배의 목소리가 더 이상 없었다. 나는 그 때서야 사람이 죽는다는 의미를 비로소 알았다. 키우던 병아리는 하루저녁 울고 논두렁이나 봇둑에 묻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다정하게 불러주던 그 목소리가 없어졌을 때, 나는 그 아무렇지도 않던 외침의 무게를 짊어지고 새삼 비틀거렸다. 그것은 내가 태어나 맨 처음 접한 가족의 죽음이고 장례였으니까.
원래 외갓집 남자들이 오래 살지 못했다는데, 그러고보면 외할배는 천수를 누린 셈인지도 모른다. 큰손자가 큰 병원 외과 교수가 되어 놓으니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살리려 했겠는지. 말년에는 경동맥쪽에 어른 새끼손가락만한 굵은 튜브를 꽂고 이 년인가를 더 살다 가셨다. 병원에서 의사 가운 입은 형님이 나더러 '할배 주사 맞으신다, 얼라는 나가서 있으라'던 게 기억난다. 무슨 일이었길래 애들이 봐서는 안 되는 거였는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대학병원의 신식 의료도 결국 사람 목숨은 어떻게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세월도 이제 훌쩍 지나 나는 지금 다시 이렇게 기일을 맞아 당신을 추억하고 있는 중이다.
사실 내가 추억하고 싶은 것은 병상에 누워계시던 외할배가 아니라 그 전의 얘기다. 내가 아직 국민학교를 다니고, 개구리 잡으러 돌아다니다가 꼭 소싯적 강호동맨키로 생긴 동네 '행님아'한테 얻어맞던 그 때. 그래놓고 다음날이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같이 에불려 놀았다. 그러다가 쇠다마(구슬) 따먹었다고 시비가 붙으면 또 싸웠다. 헨모(현무)야 필환아 영재야 상준아, 나온나 노올자아... (사실 한 명은 나보다 한살 위였다.)
말 놓고 맞먹긴 했지만 오뉴월 볕이 무섭다고 한 살 차이는 꽤 컸어서, 싸우다가 항상 져서 외할배 지겟작대기 부러뜨려먹고 엉엉 울면서 외갓집으로 간다. 그러면 외할매가 씰갱이같은 날 씻기겠다고 물 데워놓고 기다리고, 외할배는 쐬(혀)를 끌끌 차면서 낫으로 다시 나무를 깎아 지게작대기를 새로 만들고 계셨다. (하도 부러뜨려먹으니 나중에는 아예 받침대를 쇠로 달았다.) 옆집 석산할배집 외양간에 송아지는 눈을 끔뻑끔뻑 하다가 목욕 다 한 나를 쭈울떡 핥았다. 문자 그대로 소 핥은 머리가 되면 어느 새 퇴근하신 어머니께서 또 씻겨야 한다며 역정을 낸다. 그렇게 나는 학교 사택 우리 집보다는 걸어서 한 삼십분 거리에 있는 외할매 집에서 훨씬 자주 놀았다.
외할배는 부지런해서 천상 농군이이다. 할배 논, 우리 논, 외삼촌 논 해서 딱 서마지기 있는 것을 그 흔한 일소[牛]나 경운기도 없이 외할매하고 둘이서 꾸렸다. 동네가 품앗이를 해서 가을걷이를 끝내면 나락(볏단)을 털고 휑하니 빈 땅에 마늘쫑이나 파를 '숭궜다(심었다).' 겨우내 일손을 놓을 때면 동사(洞舍:마을회관)에 가서 옆집 아제들처럼 화투짝이나 만지련만. 생각해보면 외할아버지가 막걸리에 취해 있거나 노름을 하시는 꼴을 본 적이 없다.
항상 외할배 손에는 꽃패 대신에 일거리가 들려 있었다. 새끼를 꼬고, 자리를 짜고, 쇠죽을 삶고, 장작을 팼다. 송아지 '새칩이'를 팔아버린 뒤에는 쇠죽을 삶지 않았다. 가끔 나무토막이 남으면 낫으로 팽이를 솜씨좋게 깎아다가 나에게 주셨다. 하다못해 안방에 앉아 계시더라도 항상 방 안에 날아들어온 먼지 티끌을 손으로 요래 요래 쓸어서 밖에다 탁탁 털고 있었다. 가끔 동사에 놀러가시긴 했지만 바둑을 두던지 아니면 오수를 즐기셨다. 그것도 아니면, 이상한 악보 비슷한 걸 벽에 걸어두고 구성진 가락으로 시조창을 하고 계시게 마련이다.
시조창을 할 줄 안다는 것은 외할배가 유학자라는 말도 된다. 어릴 때 한학을 하셨다 하고(한 가지 의외였던 것은 외할매도 그 시절 한학을 같이 배우셨다는 것이었다), 가끔 문중의 큰 어르신들이 찾아올 때면 알 수 없는 한문 고서적들을 봇짐에 바리바리 싸들고 왔었다. 한 번은 외할배가 그걸 기찻간에 놓고 내려, 빨간버스 타고 털털거리는 시골길을 달려 진주역까지 찾으러 간 기억이 난다.
사실 이 글의 제목을 저렇게 뽑아놓은 것(원제: 혹시 유학자(儒學者)를 아시나요)은 나름 이유가 있다. 외할배가 살아생전에 보여 주셨던 생활과 행동의 철학에서 나는 세간에 회자되는 "유교 가부장 문화의 폐습..." 운운하는 말을 전혀 떠올릴 수 없다. 그래서 언제 한 번 날 잡고 진정한 유학자셨던 당신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그리고 당신의 열 번째 기일인 오늘이, 바로 그 날인 것 같다.
지금도 나는 "대한민국에 이상적인 모습의 표준 가정"이 있다면 주저없이 외가 식구들을 꼽고 싶다. (우리 집이 그렇단 얘긴 아니다. 그래서 더 추억하는지도 모른다.) 별것 아닌 일로도 밥상을 엎고 하는 게 옛날 사람들의 가부장적 유교문화라고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을 보면 조금 안타깝다. 나는 외할배가 별것 아닌 일로 화내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다. 언제나 (발음은 좀 새지만)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한 마디 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런 카리스마가 외할배에겐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이치에 맞았기 때문에 사실 별로 반박할 건덕지도 없었다. (이건 큰외삼촌이 지금 그대로 닮아 계신 듯하다. 한 가지 더 덧붙이면 나는 외할배나 큰외삼촌께서 배우자에게 하대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외할배가 역정내는 걸 어머니는 딱 한 번 봤다고 하고, 나도 딱 한 번 봤다. 못살던 시절 월사금을 미처 기일까지 마련하지 못하여 "오늘은 그냥 가거라" 하는 걸, 어린 이모가 제 고집대로 버티고 문간에 섰다가 지겟작대기로 동구밖까지 후두끼(쫓겨) 나갔다 - 라는 이야기는 어머니의 회고담이고, 내가 봤던 것은 내가 외할배한테 머리 깎았던 그 때 본 광경이다.
외할아버지께서 우리 집에 몇 달 계실 적에, 무슨 일인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하루는 누나랑 어머니랑 크게 다투었던 기억이 난다. 누나는 그때 고입(이 동네 연합고사 커트라인이 200점 만점에 180점이던 시절이다)을 앞둔 사춘기 소녀였고 반항이 심했다. 어머니도 상당히 성격이 센 분이어서 두 모녀는 언성이 높아졌다. 급기야 어머니가 매를 드셨을 때, 바로 그 때 외할아버지가 역정을 내셨다.
"이 아가 지금 어디서 에슥아(여자애라는 뜻. '가스나'는 사투리라도 좀 품위가 없는 표현인 것 같다)한테 매차리(회초리)를 드노! 내가 니를 그리 가르쳤더나!"
당신께서 그렇게 노여워하는 것은 그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았다. 하지만 모친도 그 때는 성이 있는 대로 나 있었는지라, 외할배한테 아랑곳하지 않았다. 급기야 외할배는 그날 저녁 막차를 타고 바로 시골로 내려가버렸다. 그것은 외할아버지를 우리 집에서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때문에 어머니는 아직도 외할아버지 얘기만 나오면 울먹거리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성격이 강하신 건 여전하다.)
또 다른 기억을 되살려보면, 외할배는 늘 밥상에 왜간장 한 종지를 올린다. 그걸로 밥 먹기 전에 숟가락을 적셔 입맛을 돋구어야 비로소 식사를 드시는 것이 천상 개다리소반 차려놓은 선비의 모양새다. 그러던 분이 외할머니가 편찮으실 때는 흰죽에 계란타서 그 개다리소반에 올려놓고 자신은 아궁이에 라면을 끓여 드시다가 위장병을 얻었다. 지금도 풍로에다 외할매 약탕기 올려놓고 부뚜막 앞에서 부챗바람을 살래살래 흔드는 당신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삼대가 빌어 처묵는다'고 하던 시절 그 옛날 사람이 그랬다. (박정희와 동갑.)
필요하다면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인습은 과감히 내던질 줄 아는 분이었다. 향반집 아들네가 손에 가위를 쥐고서 일제시대에 오사카로 건너가셔서 이발기술을 배웠다. 6.25 때는 김해 미군공항 앞에서, 또 역전 너른 마당에서 군인들 머리를 깎아 식솔의 생계를 책임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외할배가 머리를 깎아주신 기억이 있다. 교통사고를 당해서 학교를 쉬고 집에서 뒹굴거리며 뒤룩뒤룩 살만 찌던 때였다. 그런 환자수발 때문에 외할배 외할매가 잠깐 집에 와 계셨던 것이다. 외할배는 당신께서 어릴 때 업어 키우던 외손자가 다리가 부러져서 머리도 못 깎으러 가고 산발이 되어 있는 꼴이 영 보기 그랬던 모양이다. 어디서 수동 바리깡을 구해 갖고 오시더니 솜씨좋게 머리를 깎아주셨다. 나중에 좀 거동할만해져서 동네에 목발 짚고 나가니까 노인정의 어르신들이 "쟈는 꼭 대가리를 옛날 머리로 깎아놨네"하고 웃는 걸 들었다. (근데 그게 지금 영화 '아저씨'에 나오는 원빈 머리다. 유행은 돌고 도나보다.)
전쟁이 끝나자 외할배는 이발해서 번 돈으로 농지개혁 때 손바닥만한 땅을 사서 자작농이 되었다. 그리고 난리통에 불타버린 집자리에는 세 칸짜리 미니 기와집을 새로 올렸다. 그리하여 큰외삼촌을 그 시절 진주사범대에 보내고(남강 다리가 없던 시절이라 모래톱을 걸어서 건넜다고 한다....), 어머니와 이모를 시내에 시험치는 고등학교에 열차 통학을 시켰다. 그리고 어머니는 큰외삼촌의 도움에 힘입어 교육대학이나마 갈 수 있었다고 한다. "아부지, 덕이가 저리 공부 해샀는데 시험이나 함 치보라 하입시더." (만약 어머니께서 대학을 아예 못 갔거나, 혹은 제대로 큰 도시의 사립에 갔다면 어땠을까. 나는 아마 씨도 없었겠지만 그 편이 당신 인생에 더 나았을 것 같기도 하고...;;)
외가 댁네 식구는 전부 다 잘 되어 있다. 외할아버지 성격은 큰외삼촌이 그대로 닮았고, 생김새는 얼마 전 유명을 달리하신 작은외삼촌이 정말 닮았다. 집안이 자기 건사할 정도로는 잘 되어 있다. 집안에 우환이 하나도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장기하 노랫말마따나 그럭저럭 별 일 없이 사는 것 같다. 큰집 식구는 꽤 잘 되어 있고 작은집도 요즘같은 세상에 고만고만하게 산다니 복이라면 복이다. 이모네는 냉면집 잘 하시고, 문제는 우리집 하고도 바로 나인데(웃음), 아직 꿈을 좇아 이 지랄을 하고 있는 게 좀 답답하긴 하다. 뭐 모친께서도 교직의 한 길을 걸어오셨으니, 나만 빼면 외할배도 자식농사 괜찮게 하셨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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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아버지의 삶은 우리가 흔히 갖던 가부장의 이미지와 많이 달랐다. 마누라에게 하대하고, 자식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한 집안의 제왕으로 군림하는 스테레오타입같은 사람이 유교에서 말하는 가부장은 아니었다. 오히려 유학에서 가르치는 기본 이념에 충실한 인간상과 가족상이 어떤 것인지 당신께서는 몸소 실천했고 보여주셨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로서, 인간이 자신의 근본에 충실해야 남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을 수 있음을 보였고, "임금이 임금답고...(君君 臣臣 父父 子子)"라는 고어가 가진 뜻은 무소불위의 권위가 아니라 오히려 책임감에 가까운 것임을 스스로의 삶으로서 반증하신 분이었다.
사족같지만 좀 더 생각의 틀을 넓혀 본다. 우리에게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없다고 사람들이 흔히 개탄하는 것을 볼 수 있지만, 우리에게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없을까. 임금이 임금답고 아비가 아비다운 대접을 받으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 위치에 있는 사람이 우선 자기의 몫을 다해야 권위가 설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하는 일이 없이 권위에만 의존하여 아랫사람을 억압하던 것이 우리 사회가 겪었던 권위주의의 폐습이었다. 그리고 그 권위주의를 타파하고자 했던 몇 년 전의 권력 잡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권위주의와 권위를 미처 구별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쩌다 보니 폐습이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성체 그 자체가 삐걱거렸다. 그리고 지금은 그 역작용으로, 과거의 망령들이 돌아온 듯 시간이 거꾸로 돌아간 듯한 권위주의와 권력이 잔나비 뒷마당 치듯 사회를 삐걱거리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나의 외할아버지께서 살아생전에 보여 주신 삶의 태도가 진정으로 유학을 한 사람의 삶이라고 생각하고 늘 그 태도를 본받고자 노력을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꿈을 좇는 백두(白頭)는 심신이 피폐해서 아직 제 몫을 못하는지라 마냥 부끄럽기만 하다. 어쨌거나 올해도 돌아온 외할배의 기일을 맞아 이렇게 외할배를 추억한다. 그리고 난 후에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를 생각하며, 내 이웃들을 생각하며, 우리의 철학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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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외할배 원조 꽃미남ㅋ / M시는 C시로 통합됐죠? / 양반(귀족)은 지위나 행동거지가 아니라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해요, 맞겠죠? / 저희 할아버지가 생각나네요.. 젊으셨을 땐 성격 있으셨다고 하지만 제 기억은 항상 점잖은 노신사로만 기억되네요. / 아 그보다 전 어릴 때 이모 할머니(할머니의 언니)가 키우셔서 그 분이 가장 보고 싶어요. 그 분의 삶과 많이 닮고 싶고 닮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 아름다운 외할배가 되시길.. (전 이모할매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