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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5일 성주간 월요일
제1독서 : 이사 42,1-7
복 음 : 요한12,1-11
1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셨다.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가 살고 있었다.
2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라자로는 예수님과 더불어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끼여 있었다.
3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4 제자들 가운데 하나로서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하였다.
5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6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
7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8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9 예수님께서 그곳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많은 유다인들의 무리가 몰려왔다.
예수님 때문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도 보려는 것이었다.
10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은 라자로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11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마을에 두 농부가 있었습니다.
둘 다 곡물의 씨앗을 뿌리려고 준비하고 있었지요.
그리고 씨앗을 뿌리려는데, 곡물 씨앗 안에 다른 씨앗이 섞여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너무 많아서 일일이 가려내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한 농부는 “나는 다른 씨앗이 섞여 있는 이 씨앗을 뿌리지 않겠다.”라며
씨 뿌리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반면 다른 농부는 그럼에도 씨앗을 밭에 정성껏 뿌렸습니다.
시간이 지나, 곡물을 얻을 수 있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다른 씨앗이 섞여 있어도 씨앗을 뿌린 사람이 분명합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 말씀을 떠오르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가라지는 독보리라고 불리는 잡초로, 밀의 뿌리와 뒤엉켜 자라기 때문에
이 가라지를 뽑으면 밀까지 뽑히게 됩니다. 그래서 추수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점과 약점을 얼른 뽑아 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불가능합니다.
부정적인 모든 것을 없애 버리려는 완벽주의자의 모습을 가지려고 하지만,
이 부정적인 모습도 받아들이면서 밀과 같은 좋은 모습을 성장시켜야 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는 부족함을 가지고 있다면서 대충 막살면 될까요?
아닙니다. 그래서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자기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되돌아갈 수 있는 용기 있는 겸손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겸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도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가라지를 억지로 뽑으려 하지 않습니다.
즉,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 모습을 받아들이고
그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이 잡초의 힘을 빼앗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잡초를 솎아내고 그 힘을 빼앗습니다.
물론 전부 제거하거나 완전히 깨끗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 하느님께서 그 불순물을 제거해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 매달리며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붓는 마리아의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유다는 이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지요. 쓸데없는 낭비를 하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이렇게 사리사욕이 가득 찬 계산속에서 예수님을 은돈 서른 닢에 팔아넘기게 됩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마음으로 예수님 발에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립니다.
여기서 보이는 것이 무엇입니까? 낭비일까요?
아닙니다. 사랑만이 보입니다. 이 사랑을 예수님께서는 받아주십니다.
주님 앞에서는 완벽주의자가 굳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오로지 사랑의 삶만이 필요합니다.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배타니아의 라자로와 마리아와 마르타 집에서 벌어졌던 잔치 중에 있었던 일을 전해줍니다.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드렸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요한 12,3)
그렇습니다.
오늘도 내가 있는 우리 집, 우리 공동체 안에는 내 형제들이 부은 사랑의 향유가 가득합니다.
그런데 나는 왜 그 사랑의 향기를 맡지 못하는 것일까요?
내 온몸을 적시고 흐르는 그 사랑의 향기를 왜 알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직도 나를 치장하기 위한 향유를 필요로 하고 있는 까닭은 아닐까요?
아직도 자신을 감추어 둔 채, 다 부수지 않은 까닭이 아닐까요?
값비싼 것을 소모하고 낭비할 수 없다면서, 오히려 물질에 애착하고 있는 까닭은 아닐까요?
나는 왜 아직도 형제들의 땀과 눈물을 닦아주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결코 닦아 드릴 머리카락이 없어서가 아니라,
머리를 수구려 발까지 자신을 낮출 줄 모르는 까닭이 아닐까요?
혹 사랑이 없어, 사랑의 마음을 듣지 못하는 까닭이 아닐까요?
오늘도 옥함을 깨뜨려 향유를 쏟아붓듯
내 발에 우리 주님과 형제들의 사랑이 쏟아지는데
나는 왜 이 사랑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재채기로 코를 풀어내야만 하듯,
내 영혼의 옥함에 불순물이 너무도 많은 까닭이 아닐까요?
아직도 구린내를 담고 있는 나를 깨부수지 못한 까닭이 아닐까요?
아직도 자신을 깨부수지 못한 나는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까닭이 아닐까요?
왜 나는 이 숨 가쁜 사랑의 숨결을 듣지 못하는 것일까요?
형제들 가슴속 깊게 흐르는 사랑의 마음을 듣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토록 눈멀고 귀먹고 마음마저 굳어져 버린 나는,
오늘도 자신과 물질을 버려서 예수님을 차지하는 마리아가 되기보다,
자신과 물질을 차지하여서 예수님을 버려버리는 유다가 되곤 합니다.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할 일입니다.
진정 우리 삶의 가치는 무엇인가?
우리 삶의 잣대는 무엇인가?
사부 성 베네딕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앞세우지 말라!”
그렇습니다.
신앙인에게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을 섬기는 것에 앞세울 수는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어떤 처신을 할 때에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스스로에게 자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주님께서는 제가 어떻게 하길 원하십니까?” 하고 물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온 집안, 온 공동체를 사랑의 향유로 가득 채워주십니다.
온 집안에 가득 퍼진 이 감미로운 사랑의 향기에 종일토록 취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내내 찬미해야 할 일입니다.
그 향기 온몸에 묻혀 바다 소라처럼 향 내음 되어 날릴 일입니다.
그 향내, 온통 베인 이 집안을 사랑할 일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향기가 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드렸다.'(요한 12,3)
주님!
옥함을 깨뜨리듯 제 자신을 부수고, 부서질수록 사랑의 향기 짙어가게 하소서.
향유를 쏟아붓듯, 내 발에 쏟아지는 사랑을 보게 하소서.
제 영혼에 새겨진, 사랑의 숨 가쁜 소리를 듣게 하소서.
온 집안에 가득한, 감미로운 사랑의 향기에 내내 취하게 하소서.
온통 당신의 숨결이 배인, 이 집안을 사랑하게 하소서.
그 사랑의 향기 뿜어대는 당신 마음 닮아가게 하소서. 아멘.
사랑은 모든 것을 내어 줍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좋은 사람,
아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에게는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 주고도 더 주지 못해 안타까워합니다.
다 퍼주고도 아직도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심장이라도 내어 주고 싶어 합니다.
마리아는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3키로 그램)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습니다(요한12,3).
마리아는 예수님께 자기의 아주 소중한 것을 바쳐드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에게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냄새가 가득했다는 것은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집안에 가득한 것을 나타냅니다.
이럴 때는 냄새가 아니라 향기라고 해야 하는데……
그런데 이 상황을 바라보는 곱지 않은 눈이 있었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지 않는가?”(요한12,5). 하며
향유의 값어치를 계산하였습니다.
향유를 붓는 행위를 존경과 사랑, 감사와 믿음의 표현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간적으로 계산하였습니다.
‘부처 눈에는 부처가, 돼지의 눈에는 돼지가’ 보이는 법입니다.
돈주머니를 관리한다는 것은 그만큼 능력이 있었다는 얘긴데
그 좋은 머리를 자신의 잇속을 챙기기 위해서 사용하였습니다.
남모르게 돈을 가로채던 유다에게는 돈만 보일 뿐입니다.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사랑이거늘, 그 사랑을 외면한 채 약삭빠른 계산을 하였습니다.
그에게는 돈이 최고였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자신의 능력에 걸려 넘어져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관심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지금 나를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가장 좋은 것을 주님께 바쳐드려야 함을 알지만, 아는 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큽니다.
나의 시간과 재능, 능력, 재물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에 기꺼이 사용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이미 주님께서 주신 것이고 주님께 되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유자가 아니라 관리자일 뿐입니다.
모두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었던 라자로를 살리심으로써 부활의 생명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수석 사제들은 라자로를 죽이기로 결의하였습니다.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들이 자기들로부터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요한12,11).
살리는 일을 하시는 예수님 곁에서 죽음의 어둠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좋은 일을 하는 곳에 기쁨이 넘쳐나야 하는 데
유다의 모습도 있고, 수석 사제들의 모습도 있었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생명의 문화’와 더불어 ‘죽음의 문화’가 함께 있습니다.
살리는 일에, 생명의 문화에 우리의 마음이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나 시기와 질투, 미움, 분노, 기득권을 누리려는 욕심이 있는 곳에
어둠의 그림자가 밀려옵니다.
반면 사랑의 마음이 있는 곳에 모두를 주고도 더 주고 싶은 마음이 커집니다.
마리아처럼 주님께 존경과 사랑으로 모두를 바칠 수 있는 날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향한 사랑도 커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예전에 교구 사목국에서 일할 때입니다.
당시 서울대교구는 ‘복음화’를 중심으로 소공동체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교육담당 사제였기에 복음화에 대한 교육을 각 지구로 돌아다니면서 하였습니다.
교재는 반장학교 1단계, 2단계, 3단계가 있었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 모든 것이 기억나지 않지만 두 가지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신앙인들은 모두 예수님의 사랑을 배우고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사랑의 첫 번째는 ‘죄인까지 품어 주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악인들도 자기들의 자식은 사랑한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선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 때문에 더 기뻐하신다.’라고 하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라고 하셨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죄인까지 품어 주는 사랑이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예전에 ‘무조건’이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가사 중에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무조건 무조건이야’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어미가 어찌 젖먹이 아이를 잃어버리겠느냐?
설령 어미가 자식을 잃어버릴지라도 나는 너희를 결코 잃지 않겠다.’
예수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었습니다.
죄인일지라도, 이방인일지라도, 마귀 들린 사람일지라도, 아픈 사람일지라도
예수님께서는 모두 다 사랑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배반하여 다락방에 숨어 있을지라도 제자들에게 ‘성령과 평화’를 주셨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이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수난과 고통까지 감수하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성인과 성녀들은 바로 이런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수난과 고통까지 감수하는 사랑이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네 번째는 ‘끝까지 믿어 주는 사랑’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님 제 이웃이 제게 잘못을 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충분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
비록 둘째 아들이 유산을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서 돌아왔을지라도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반지를 주고, 잔치를 벌여 주는 사랑입니다.
우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시는 사랑입니다.
우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시는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끝까지 믿어 주는 사랑이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다섯 번째는 ‘열정적인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참새도 둥지가 있고, 여우도 동굴이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누일 자리조차 없다.”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 끝까지 가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복음을 선포하여라.”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활화산처럼 터져 나오는 열정적인 사랑이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하나는 복음화의 4가지 요소입니다.
첫 번째는 ‘말씀’입니다.
말씀이 중심이 되지 않으면 소공동체의 모임은 그저 독서 토론회가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이 중심이 되지 않는 강론은 진정한 강론이 아니라 사제 개인의 넋두리가 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씀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 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두 번째는 ‘기도’입니다.
기도가 중심이 되지 않으면 소공동체의 모임은 곧 활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기도는 샘이 깊은 물과 같고, 기도는 뿌리 깊은 나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을 새워 피땀 흘리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지역’입니다.
지역이 중심이 되지 않으면 소공동체의 모임은 그저 신심단체 중에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구원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지역이 활성화되면 본당은 더욱 활성화되기 마련입니다.
네 번째는 ‘활동’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실천이 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은 하지만 실천하지 않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비난하셨습니다.
실천이 없는 소공동체 모임은 그저 친목단체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성주간을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을 묵상하며 복음화의 4가지 요소를
삶으로 실천하는 성주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님께서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1절) 베타니아로 가셔서 라자로의 집에서 식사하신다.
그 식사는 유대인들의 관습이었다.
파스카 양을 준비하기 전에 잠시 흥겨운 시간을 가졌는데,
양을 마련한 후에는 축제 때까지 단식이나 정화하는 데 마음을 쏟았기 때문이다.
마르타는 식사 준비를 하고 그리스도께 시중을 들었다.
라자로는 예수님과 함께 앉아 식사하는 영예를 갖는다.
마리아는 비싼 나르드 향유를 가져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가족의 시중드는 것을 흐뭇해하시면서 받아주신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3절)
향유를 부어 그 향기가 가득 차게 하는 것은 그 행위가
하느님 때문에 그리고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행은 좋은 냄새를 풍기는 향유이다.
자선을 베풀고, 병자를 찾아가고, 낯선 이들을 맞아들이는 일과
겸손, 친절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것이다.
이 향유가 온 집안 즉 그리스도의 교회를 향내로 가득 채우는 값진 향유가 될 것이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5절)
유다는 열두 사도 중의 하나였고, 돈주머니를 관리하며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믿음이 없고 사악한 유다는 자신을 믿어 준 사람들을 잊어버리고,
자신이 맡고 있던 돈주머니를 횡령하는 것은 물론 자신을 믿어 준 주님을 배반하고 만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7절)
여기서 보면 유다가 순수하게 말하고
주님께서는 마리아의 행동에 당신 신비를 설명해 주는 것 같다.
즉, 당신이 곧 돌아가실 것이며 향료와 향유로 당신의 장례가 치러질 것이라고 하신다.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8절)
많은 사람이 예수님과 그분이 살려주신 라자로를 보려고 몰려왔다.
그러니까 수석 사제들은 라자로도 죽이려고 결의한다.
다시 살아난 사람을 죽이려 하는 것은 바로 눈먼 자의 눈먼 생각이다.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분이 당신을 죽이더라도 당신은 다시 살아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셨다.
죽은 이들이 생명으로 돌아오고 죄를 용서받아 되살아나는 것을 보고 그들을 시샘하며
그들이 다시 죽기를 바라고 죽이고 싶어 하는지도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한다.
예수님께로 가는 것을 무엇으로 막을 수 있겠는가?
유대 지도자들은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막으려고
살해에 또 살해를 저지를 생각을 한다.
라자로를 죽이면 그 기적의 힘도 지울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러면 나는 선행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는 삶을 살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며 부활을 준비하고 있는지 성찰하면서
주님을 따르는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도록 기도하면서 이 성주간을 지내야 하겠다.
오늘 우리는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도대체 무엇을 봉헌하고 있습니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예수님께도 유난히 가깝고 편안하고 절친한 가족이 있었으니,
바로 라자로와 그의 누이 마르타, 마리아네 집이었습니다.
공생활 기간동안 예수님께서는 끝도 없이 늘어선 환자들의 치유,
적대자들과의 거듭되는 논쟁으로 온몸과 마음이 녹초가 될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즐겨 찾던 집이 베타니아의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의 집이었습니다.
휴대폰도 없던 시절, 예수님과 제자들은 갑작스레 우르르 들이닥치곤 했었는데,
그럴 때마다 세 남매는 그들을 극진히 환대하였습니다.
냉장고를 탈탈 털어 식사를 준비했고, 감춰두었던 값진 포도주를 내어놓곤 했습니다.
베타니아의 그 집은 예수님과 제자들에게는 일종의 오아시스이자 베이스캠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을 목전에 두신 성주간 첫날 베타니아의 그 집을 또다시 찾아오셨습니다.
여느 때처럼 마르타는 마음이 급해지고 손길이 바빠졌습니다.
지지고 볶고, 삶고 굽고 정신없었습니다.
라자로는 예수님 맞은 편에 앉아 귀빈 접대를 하느라 바빴습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과 영적으로 깊이 일치하고 있었던 마리아였습니다.
그녀는 직감으로 알아차렸습니다. 이제 드디어 사랑하는 주님과 작별할 날이 가까이 다가왔구나.
이제 드디어 그분을 떠나보내 드려야 하는구나.
뭐라도 해드려야겠다는 마음에 마리아는 자신의 소지품들 가운데 가장 값진 것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즉시 찾아냈습니다. 자신의 소지품 가운데 가장 아끼던 물건,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챙겼습니다.
식사 중이던 예수님 발치 앞에 엎드린 마리아는
그 비싼 순 나르드 향유를 아낌없이 통째로 예수님 발 위에 부어드렸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둘러앉아 있던 사람들은 웅성대기 시작했습니다.
저런 저런 저게 얼마나 비싼 향유인데... 저런 행위는 아무 사이나 하는 행위가 아닌데...
공개석상에서 무슨 꼴불견이람.
그러나 마리아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너무나 당당하고 거리낌 없이 자신의 긴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렸습니다.
여인들이 아주 중요시여기는 머리카락으로
누군가의 발을 닦아 드린다는 것, 보통 일이 아니겠습니다.
너무나 그를 사랑한다는 표현, 내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대상이라는 표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실 마리아가 보여 준 특별한 행위는 일종의 장례 절차였습니다.
돌아가시고 나서 해드리는 것도 좋지만, 살아생전 해드릴 수 있는
가장 극진한 예를 주님께 바치는 마리아의 모습이 참으로 갸륵해 보입니다.
가장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자신이 지니고 있는 가장 귀한 것을
봉헌하는 마리아의 모습이 참으로 크게 다가옵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도대체 무엇을 봉헌하고 있습니까?
내가 지닌 가장 귀한 것을 대체 어떻게?
어디에? 사용하고 있습니까?
<성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복음은 파스카 축제 엿새 전 베타니아의 잔치를 배경으로 합니다.
참혹한 수난이 다가오고 있는 시점에
잔치, 향유, 여성의 머리카락 등의 소재가 다소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음에도 다시 살아 난 라자로의 이야기는
오늘부터 엿새 뒤에 있을 예수님의 부활을 암시합니다.
마리아의 이야기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상징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리아가 삼백 데나리온(1년 치 품삯에 해당)이나 하는 비싼 향유를
한 번에 사용하며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린 것 때문에 유다 이스카리옷은 분통을 터뜨립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그러나 본문은 분명하게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냥 놔두어라.” 하시며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행위와 당신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연결시키신 것입니다.
사실 ‘향유’를 쏟아 ‘예수님의 발을 닦는 행위’는
당신의 ‘피와 물’을 온전히 쏟아 ‘인간의 죄를 닦으신 예수님의 행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던 것처럼
십자가 주변도 예수님의 피 냄새가 가득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듯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그가 허리를 굽혀 예수님의 발을 닦았듯이
예수님께서도 허리를 굽혀 인간의 발을 닦으시고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으시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고, 성실하게 공정을 펴시며,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분께서는
“백성에게 목숨을 …… 사람들에게 숨을 넣어 주신 분”이시기에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것처럼
이제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숨과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닦아 드렸다. -요한 12,43-
성 호세 마리아 수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지는 상황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몫을 다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이는 마리아의 행동을 비난하고 흉보기도 합니다.
가장 사랑하는 이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행하는 행동은 참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몸을 굽혀
그 사람의 발에 향유를 붓고 정성스레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은
그 여인의 행동은 몇 쳔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향유의 아름다운 향기를 뿜어내듯 잊혀지지 않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나는 곧 수난, 죽음으로 가시는 예수님께 무엇을 해드릴 수 있을까?
다른 제자들처럼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부인하고만 있을 것인가?
마리아처럼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며
행동으로 예수님을 위로해 드리고 그 죽음을 묵묵히 받아드릴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수난 절정으로 나아가는 성주간 시작 날
마리아가 예수님께 해드린 행동을 생각하며
우리도 사랑하는 이들에게 몸을 굽혀
겸손 되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는 시기가 되길 기도합니다.
[출처]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대구수녀원 - 복음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