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0일(일) 날씨 맑음
눈 떠서 새벽까지도 안양으로 올라갈까 말까 망설이며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아침 차를 마시며, 행님 曰 ‘내 술 안 먹고 잘 있을테니 제수씨랑 올라갔다 온나’ 하시기에 행님 서운할까봐 급히 일거리 하나 만들어 썰물처럼 빠져 나가는 아내, 바람같은 친구, 조카, 손녀 가족들 틈에 끼여 함께 안양으로 출발했다. 고속도로에 올라서면서 옛 직장 친구들에게 전파를 날렸다. 저녁에 만나자고..
그랜드 카니발인가 하는 차라 승차 인원이 손녀 포함 8명이라 고속버스 전용차로를 달릴 수 있어서 추석 명절 연휴라도 출발해서 도착하는 시간은 평소와 같았다. 세수도 않고 추리닝차림으로 출발한터라 바람같은 친구와 없어져 버린 목욕탕을 세 곳 거쳐 아주 작은 동네목욕탕에 들러 목욕을 하고 친구들 모임에 갔다. 1차는 곱창에 소주( 이 시각, 숭례문이 불타 무너지는 중계가 TV에서 나오고 있었다), 2차는 맥주, 3차는 노래방에서, 4차는 헤어지기 허전해 전주콩나물해장국에 또 소주 1잔...
가늠 없는 삽질에
동강난 지렁이.
친구들 시간 동강내다.
고맙고 미안감
서둘러 남쪽으로
길 떠날 채비.
2월 11일(월) 조금 흐림
환락의 밤을 지내고 아침에 일어나 3년 전 제주도 여행가기 위해 산 길표 운동화를 신고 검박한 농사꾼으로 위장하고서 의왕에 계신 박영호 선생님께 작년 겨울부터 준비한 중고생용 다석 류영모 선생님 전기 수정원고를 들고 갔다. 다시 한 번 꼼꼼히 점검해 보시겠다는 선생님 말씀을 듣고 점심을 함께하고는, 도시의 외로운 선비 담사님을 뵈려갔다. 점심 먹고 들리겠다는 말을 담사님께서 급히 듣는 바람에 점심함께 하자는 줄 알고 점심도 굶고 기다리고 있어서 배불러 도착한 나를 미안케 하였다. 담사님은 점심도 굶으며 방에서 과일 몇 조각으로 둘이서 두 서너 시간 정담을 나누었다. 아파트 일일장돌뱅이로 동생 일 돕고 있는 바람같은 친구를 보고 내려와야 할 것 같아 일어서니, 담사님은 저녁 먹고 늦게까지 얘기 하고 싶었다며 막걸리라도 한 잔 하고 가란다. 항상 가던 순대국 파는 집에 가서 남은 얘기를 풀었다.
줄 선 순대국밥 집
막걸리 두 잔(이천 원)
순대국밥 한 그릇(삼천 원)
눈총 없는 주인 덕에
정담 나누기 두어 시간
차마 이젠 떨고 일어나야지.
해는 져 어둠이 깔리고, 친구가 장사하고 있다는 난장에 서둘러 찾아갔더니 벌써 천막을 접고 떠날 채비 중이다. 내일 새벽 또 장터로 나서야 하기에 아쉬운 이별주 한 잔 못하고 그저, 고생해라, 잘 가라 한 마디로 선걸음에 작별하고 돌아섰다.
2월 12일(화) 맑음
열차시간이 남아 TV소설 ‘아름다운 시절’을 보았다.
남자가 얘기한다.
‘결혼할 때까지 향숙씨는 아무 고민도 걱정도 하지 말아요. 해도 내가하고 문제가 있으면 내가 해결합니다.’
나도 예전엔 저렇게 자신감에 차 있었고 박력 있는 남자비스무리 했는데...지금은 그저 입안에서 우물우물하다말 뿐이니, 같이 사는 사람이 얼마나 답답할꼬? 어 휴--- 이런 생각하며 집을 나선다.
제법 바람이 제법 차다. 수원역에서 10시 37분발 열차라 9시가 조금 넘어 집을 나서는데 아내가 버스정류장까지 따라 나섰다.
영하 10도,
체감온도 영하 14도
길나선 나그네 뺨에
삭풍 스친다.
귀 시럽지하며
모자 씌우고
손 시럽지하며
손도 넣어준다.
시러운 게 어찌 몸뿐이랴
속울음 흐른 가슴에
고드름 주렁주렁
김밥 하나 사서 차에서 먹고, 창밖으로 고개 돌리니 햇살은 따사로운데 담사님과 얘기하던 중 나온 “이미 ‘禮’가 무너졌는데 숭례문(崇禮門)은 무슨 숭례문이냐”고 하신 말씀이 온 통 머리를 감싸고돌아 긴 여행시간도 짧기만 하였다. 오후 4시 군북역에 도착하니 홀로 지내던 노인이 활짝 웃으며 국거리 장을 보아 기다리고 있다. 저녁엔 매생이에 굴을 넣고 국을 끓여 해도 지기 전에 밥 먹고, 불 때고 방에 들어와 도사리고 앉아 밀린 숙제를 하였다.
첫댓글 카푸스 미안..
보고서 잘 읽었네...
아름다운 시절은 제가 보는 유일한 드라마에요. 아침 출근 준비하느라 KBS 아침 뉴스 틀어놨다가 계속 보는데 좀 빤하기도 하면서도 다른 드라마에 비해 융슝깊은 맛이 있어서요. 이 글을 보니 길벗 님 생활이 손에 잡힐 듯 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나도 그거 봐요 ㅎ 그렇게 이쁜엽서 상순이 엽서말고 처음 봤어요 ㅎ
가족간 주고 받는 사랑이 넘 조아서..코끝도 찡찡하게 맹글고.
글 보고 반가웠습니다 ^^*
저도 어제 밀린 일기 쓰느라 가슴패기가 아프도록 엎드려 글씨를 썼습니다. 매양 명절이야기에 살림이야기들...
몸 많이 힘드실 터 대강 하시죠. ㅎㅎ
바쁘게 다녀가셨나 봅니다 일상을 아주 반갑게 만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