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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6일 성주간 화요일
제1독서 : 이사 49,1-6
복 음 : 요한 13,21ㄴ-33.36-38
그때에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예수님께서는 21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2 제자들은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여 서로 바라보기만 하였다.
23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다.
24 그래서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고갯짓을 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이 누구인지 여쭈어 보게 하였다.
25 그 제자가 예수님께 더 다가가,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님께서는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리고 빵을 적신 다음 그것을 들어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다.
27 유다가 그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28 식탁에 함께 앉은 이들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아무도 몰랐다.
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주머니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예수님께서 그에게 축제에 필요한 것을 사라고 하셨거나,
또는 가난한 이들에게 무엇을 주라고 말씀하신 것이려니 생각하였다.
30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 31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32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33 얘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너희는 나를 찾을 터인데,
내가 유다인들에게 말한 것처럼 이제 너희에게도 말한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36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37 베드로가 다시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하자, 38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지난 18일, 신학교 추천서를 써 주셨던
이학노 요셉 몬시뇰님의 사제 생활 50주년을 기념하는 금경축이 있었습니다.
미사와 모든 행사를 마치고 몬시뇰님께서는 당신이 추천해 줬던
신부, 수녀들을 향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시간 정말 빠르다. 나도 금경축은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벌써 금경축이다.”
50년이라는 시간, 정말로 긴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의 속도가 빠르다는 것을 떠올리면 그리 긴 시간도 아닐 수 있었습니다.
하긴 저 역시 엊그제 신학교 들어가겠다고 몬시뇰님께 추천받았는데,
벌써 사제 생활을 한 지도 25년이 지났습니다. 이렇게 지나고 나면 너무 빠른 시간입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너무나 천천히 지나는 시간이었습니다.
군대에서 제대 날짜를 기다릴 때, 사제 서품 날짜를 기다릴 때,
힘든 사목에서도 시간의 흐름은 너무나 느렸습니다.
물리적 시간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만의 절대적 시간 안에서 느리게도 또 빠르게도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나의 절대적 시간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중요합니다.
내가 힘들다고 해서 시간이 잠깐 멈춰서서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진행되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세상 안에서의 삶이 영원하지 않기에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영원함을 위해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묵상하고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배반하는 유다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예수님을 배반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면서 함께했던 그 모든 시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하느님의 관점을 보려고 하지 않았던
그 모든 마음이 예수님을 결국 배반하게 됩니다.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뜨끔해서 다시 마음을 되돌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순간,
그의 시간은 하느님의 시간이 아닌 인간의 시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자기 이득을 취합니다.
잠시만의 만족을 얻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시간은 잠시만의 만족을 가져다주는 유한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는 영원의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특히 우리가 그 나라에 들어가 살 것을 떠올린다면,
이 세상 안에서도 당연히 하느님의 시간을 쫓아서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야 했습니다.
지금 어떤 시간을 살고 계십니까?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우리는 성삼일을 이틀 앞두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절망과 어둠이 더해가는 이야기입니다.
빛으로부터 떠나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 간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두 개의 밤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 개의 배반이 있습니다.
하나는 유다의 밤이요, 또 하나는 베드로의 밤입니다.
유다의 밤은 캄캄한 어둠이 짙어져 가는 밤이요,
베드로의 밤은 닭이 울기 전 새벽이 밝아져 오는 밤입니다.
유다의 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둠이 제자들을 덮치자,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놓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요한 13,21)
사실 예수님께서는 배반하는 제자를 마지막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빵을 적셔서 그에게 주었습니다.
빵을 적셔서 주는 것은 애정의 표현이었습니다.
당신을 배반할 제자에게 끝까지 베푸는 충실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사랑을 등지고서 밤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택했습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면밀히 계획한 바를 어둠 속에서 행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겠다고 장담하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 13,38)
베드로는 주님을 배반할 의향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약한 순간에 그만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닭이 울면, 어둠은 밝아질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나친 자기 과신으로 넘어졌습니다.
사실 우리가 넘어질 때는 가장 약할 때가 아니라, 가장 강할 때입니다.
반대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우리가 약할 때 오히려 강해질 것입니다(2고린 12,10).
그렇습니다.
유다의 밤은 어둠과 악으로부터 오는 밤이요,
베드로의 밤은 약함과 과신으로부터 오는 밤입니다.
또한 유다의 밤은 죄를 깨닫고서도 더 짙은 어둠으로 빠져들어 멸망으로 가는 밤이요,
베드로의 밤은 죄를 깨닫고서는 어둠을 헤치고 빛으로 나아가는 생명의 밤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베드로같이, 유다같이 곧잘 넘어집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넘어지는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두가 일어서는 존재인 것은 아닙니다.
혹 넘어진 사실을 깨달아 알고 뉘우치고 성사를 본다고 해도,
일어선 사람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단지 넘어진 채로 넘어진 자신을 본 것일 뿐, 비록 용서는 받았다 할지라도
일어서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일어서서 넘어졌던 자신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빛 속으로 건너와서 어둠을 바라보아야 할 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일어선 자만이 빛나는 새벽을 만날 것이요, 일어선 자만이 빛 속에 들 것입니다.
먼저 베풀어진 그분의 사랑을 만난 자만이 그분의 빛 속을 걸을 것입니다.
하오니, 빛이신 주님!
저를 비추소서!
제가 일어나 빛 속을 걷게 하소서.
오늘 제가 비록 넘어지더라도 일어나 빛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 13,38)
주님!
어둠에 휩싸여 넘어지고 또 넘어집니다.
빛을 비추소서.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넘어지기도 전부터 베풀어진 당신의 사랑을 보게 주소서
일어나 빛 속을 걷게 하소서.
구원의 십자가를 지고 사랑의 길 걷게 하소서.
빛을 받아 빛을 밝히게 하소서. 아멘.
배신의 죄보다 사랑입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배신은 한솥밥을 먹는 사람이 합니다.
멀리 있는 사람은 서로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등질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사람은 서로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고 그것이 채워지지 않았을 때
마음이 상해 차라리 몰랐던 사람만도 못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잘 안다는 것이 오히려 별것도 아닌 것에 서운함을 갖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강한 것 같지만 연약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폭과 깊이, 넓이를 더해야 하겠습니다.
내 마음의 문을 열어 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해야
주님께서 우리 삶의 역사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오실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비록 예수님을 팔아넘기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여전히 예수님의 제자였고,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마음을 알고 내내 번민하셨습니다.
속을 다 아시고 그것을 품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과 깊은 일치 안에서
침묵으로 철저히 고독을 이기셨습니다.
마음이 넓어야 좁은 이를 품을 수 있는 법입니다.
마침내 유다는 스승을 배반하였고 그 자책 때문에 목숨을 끊었습니다.
사실 누구나 유다처럼 약한 마음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양상이 다릅니다.
베드로나 바오로는 주님을 등졌던 사람이지만 회개하여 주님의 도구로 항구하게 살았습니다.
한때 주님을 배반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주님의 자비를 믿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유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주님의 자비가 심판을 이긴다.’는 진리를 믿지 못한 탓입니다.
우리는 어떤 처지나 상황에서도 주님의 자비 안에 굳건해야 합니다.
주님의 가장 큰 약점은 어떠한 죄도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용서하는 데 지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또 잘못할 것을 알면서도 용서하십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유혹은 나를 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유혹 앞에서 나를 가장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 의탁할 수밖에 없는 나의 한계성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혹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시험입니다.
하느님 편에서 생각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커다란 공로가 될 것이고,
사탄의 편에 서서 그 유혹을 받아들이면 파멸의 길, 죽음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는 항상 사탄의 말만 있는 것도,
그렇다고 늘 하느님의 말씀만 들리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끊임없는 선택의 길에 서게 됩니다.
단호하게 하느님을 선택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유혹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요, 나에게 자유가 주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하느님 앞에서의 그만한 책임을 져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심판보다는 자비를 갈망하는 만큼 예수님 곁에 꼭 붙어 그분만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절대 빼앗기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은 배반 앞에서도 늘 용서를 베푸셨습니다.
우리도 그 마음으로 가슴을 채워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전임 신부님이면서 동창 신부님이 제게 ‘선물’을 하나 주고 갔습니다.
성당 마당에 ‘창고’를 하나 만들 수 있는 후원금을 주고 갔습니다.
신부님이 주신 후원금을 아끼기 위해서 형제님들이 팔을 걷고 나섰습니다.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서 모든 작업을 손수 하였습니다.
인터넷에서 창고를 세울 도면을 50$에 구매했습니다.
그리고 도면에 따라서 기초를 세우고, 그 위에 합판으로 바닥을 깔았습니다.
네 면의 벽을 만들어서 세웠고, 지붕으로 덮었습니다.
입구에는 문을 달았고, 벽에는 창문을 달았습니다.
이제 조금만 더 힘을 모으면 근사한 창고가 마련될 것입니다.
매주 토요일 형제님들이 모여서 작업하였습니다.
식당을 하시던 형제님은 매주 맛있는 점심을 준비해 주었습니다.
나이가 지긋하신 형제님은 집에 있는 작업 도구를 가져오셨습니다.
젊은 형제님들은 무거운 자재를 날랐습니다.
손재주가 없는 저는 현장을 보면서 고마운 마음을 전했습니다.
오후에 작업을 마치면 형제님들과 삼겹살에 맥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부님이 제게 준 선물은 눈에 보이는 ‘창고’가 아니었습니다.
그 창고를 만들기 위해서 모인 형제님들의 마음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묵묵히 땀을 흘리면서 창고를 만들고 있는 형제님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제게 큰 선물을 준 동창 신부님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민족들의 빛이 되는 사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은
아주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약하고, 부족한 사람들도, 예수님을 배반했던 사람까지도 민족들의 빛이 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하였지만, 절망을 버렸습니다. 마음 안에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자신의 죄를 뉘우쳤고, 통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용서를 받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신비입니다.
‘부활은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어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활은 이제 죄의 상태에서 돌아서서
다시금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못과 허물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잘못과 허물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정화시켜 주시는 하느님께로 우리들의 마음을 돌리는 것입니다.
절망을 버리고 희망을 간직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을 수 있으며, 그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었지만 부활하셨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였고,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제자들의 배반도, 외부의 박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를 무너트리지 못하였습니다.
교회는 지난 2,000년 동안 어둠에 빛이 되었습니다.
절망 중에 있는 이들에게는 희망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현대 문명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선물을 주셨습니다.
성체성사를 통해서 예수님은 몸과 피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예수님은 구원의 방주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셨습니다.
신앙인은 이웃에게 따뜻한 선물이 되어야 합니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21절)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25절)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26절)
유다도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빵을 받았으나,
축복받은 빵을 먹지 못했고 생명의 잔도 마시지 못했다.
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는 사람들에게 갔고, 축성된 잔을 보지 못하였다.
유다는 다른 이들과 생명의 성사를 받지 못하도록
사탄이 그를 그곳으로부터 떠나게 하였다.
“때는 밤이었다.”(30절)
인간이 하느님을 떠나서 하느님의 뜻이 아닌 자기 뜻을 행하며 나아갈 때
그 자체가 언제나 밤이라고 할 수 있다.
유다가 사탄과 함께 밖으로 나가자 예수님께서는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31절)고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필리 2,8) 했을 때,
그를 높이 들어 올리셨다. 이렇게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면
그분 안에서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된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광을 받으신다면,
영원하신 말씀이 취하신 인성도, 그 인간이신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 안에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32절)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너희는 나를 찾을 터인데,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33절).
주님은 수난 때까지만 제자들과 함께 계실 것이며,
당신이 가시는 곳에 제자들은 올 수 없다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이 영광으로 옮겨가시는 것임을 알려 주신다.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37절)
베드로가 말하자,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38절)
베드로는 여기서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말하고 있다.
그는 자기가 말한 것을 이룰 능력이 없었다.
베드로는 두려움 때문에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말했다.
우리 안에도 유다와 같은 탐욕이 있어
주님을 버리고 어둠을 향해 나가는 잘못을 범하기도 한다.
또한 베드로와 같은 두려움 때문에
주님께 대한 신앙을 용감히 고백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분의 식탁에서 생명의 빵과 구원의 잔을 항상 마시며
그분을 따르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삶은 항상 이 빛과 어두운 밤을 넘나드는 삶의 연속이다.
베드로는 그렇게 세 번이나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섰고
주님께로 돌아왔기 때문에 빛 속에 살 수 있었다.
유다는 빛 속으로 다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하고 말았다.
우리의 실수로 어두운 밤에 떨어졌더라도
즉시 빛을 향하여 머리를 돌리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어떻게서든
주님과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몸부림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제자들의 마음을 손금 들여다보듯이 환하게 꿰뚫고 있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당신을 은돈 서른 닢에 팔아넘기며 배신할 것인지?
누가 결정적인 순간에 당신을 모른다고 3번이나 부인할 것인지?
누가 당신 홀로 체포당하실 때,
뒤도 안 돌아보고 줄행랑을 놓을 것인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만일 제가 그 상황에서 예수님이었다면, 즉시 노발대발했을 것입니다.
급한 성격에 제자들을 총집합시켰을 것입니다.
배신감에 치를 떨며 제자들을 일렬로 쭉 세워놓고 일장 훈시를 했을 것입니다.
한명 한명 이름을 불러대며 인간이 어떻게 그러냐?
인생 그렇게 살지 말라며 호통을 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 혹독한 배신감과 고독함,
그로 인한 극도의 산란함 속에서도 철저하게도 제자들의 배신을 함구하십니다.
결정적인 배신자가 누구인지 궁금했던 제자들이 계속 캐물었지만,
끝끝내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서 예수님의 그런 태도를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속 깊숙이 들어가 보지 않은 이상,
쉽게 해석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은 다양한 해석을 시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데 있어서
각 개인의 자유의지를 철저하게 존중해 주신다고.
절대로 강요하지 않으신다고. 당신을 철저하게도 배신하고
죽음의 길을 가는 것조차 본인의 선택에 맡긴다고?
실수도 하고 방황도 하면서 변화되고 성장하는 존재가 인간이니,
스스로 잘못을 인식할 때까지 기다려주시는 예수님이시니,
그런 배신의 기회조차도 제자들에게도 체험하게 하는 것이라고?
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 한 가지는? 영원하신 하느님, 절대 진리이신 하느님에 비해 우리 인간은 너무나 가변적이고, 지극히 가벼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어제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칠 기세였지만,
오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신의 잇속과 안위만을 궁리합니다.
어제 금강석보다 더 굳은 신념으로 결심하였지만,
오늘 속절없이 허물어지고 마는 나약한 존재가 우리 인간인 것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너무나도 나약한 우리 인간 존재 곁으로
사탄의 강력하고도 집요한 유혹은 끝도 없이 계속됩니다.
우리의 취약함 부분을 거듭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어제의 대단한 결심을 오늘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어제 당당한 주님의 제자였지만, 오늘은 배신의 참담함에 눈물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어떻게서든 주님과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몸부림입니다.
비록 오늘 죄와 배신의 늪 속으로 깊이 빠져들어 갔다 할지라도,
다시 한번 고개를 주님께로 돌리며 그분의 크신 자비를 구하는 노력입니다.
가리옷 사람 유다의 길과 수제자 베드로의 길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의 제2부(13장-21장)에 해당되는 첫 부분이다.
요한복음 제1부(1장-12장)가 세상을 향한 예수님의 자기계시적 업적을 展開하는 과정이라면,
제2부는 이 업적의 완성을 지향하고 있다.
우리는 제2부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예수님의제자들 앞에서 행하신 마지막 말씀(13장-17장)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사건(18장-21장)이 바로 그것이다.
오늘 복음은 전반부에 속하는 것으로,
예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 석상에서 그들의 발을 씻겨 주시고 난 뒤,
새 계명의 선포부분(13,34-35)을 제외한 가리옷 사람 유다의 배반과 함께
베드로의 장담에도 불구하고 그의 배반을 예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어제 복음에서 3백 데나리온 어치의 향유 한 근을 예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았던 마리아의 예수를 위한 사랑의 행위를
심한 낭비의 행동으로 생각하고 투덜거렸던 가리옷 사람 유다는
이미 예수를 배반할 자로 암시 되었다.(12,4-6)
물론 이 부분은 복음서가 기록되던 시점에서 소급하여 언급된 부분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복음서의 기록과는 관계없이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
예수님만 빼고는 다른 어떤 제자들도 유다가 배반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측할 수 없었다.
유다는 최후의 만찬 석상에도 함께 자리를 하였고,
예수께서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그의 발도 씻어주셨다.
그때까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때가 되자 예수께서는 몹시 착잡한 심정으로 예언적 비밀을 폭로 하신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너희 가운데 나를 팔아넘길 사람이 하나 있다.”(13,21)
이 비밀이 폭로되자 만찬 석상은 순식간에 서로에 대한 의심과 자신에 대한 변명의 자리로 변한다.
제자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다가(13,22) 사뭇 걱정스런 어투로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르 14,19; 마태 26,22) 하고 자신 없는 반문을 하기도 하고,
“자기들 중에 그런 짓을 할 자가 도대체 누구일까”(루카 22,23)하고 서로 묻기도 했다.
이미 그 전날 대사제들을 찾아가 예수를 넘겨줄 것을 약속하고
은전 서른 닢을 챙겨먹은 유다도(마태 26,14-15) 나서서 예수께
“선생님, 저는 아니지요?”(마태 26,25)하고 물었다.
首弟子(베드로)와 愛弟子(통상 요한을 지칭함) 사이에 눈짓이 오고 가면서 마침내 背反者를 색출한다.
애제자가 예수께 속삭이다.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25절)
예수께서 스스로 배반자를 암시적으로 지목하신다.
“내가 빵을 적셔서 줄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26절)
이로써 배반자는 수제자, 애제자, 예수님, 그리고 배반자 스스로의 선에서 밝혀졌다.
(이 장면을 묘사한 15세기경의 그림이 있다.
프랑스 알사스 지방의 콜마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마르틴 쇼가우의 작품이다.)
이제 배반자는 더 이상 그 공동체 안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다.
예수님 스스로 유다를 밖으로 내보내신다.
“네가 할 일을 어서 하여라.”(27절)
유다는 곧 밖으로 나갔고 때는 밤이었다.
유다에게는 배반의 밤이었지만,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실 영광의 밤을 내다보시고
남은 제자들에게 말씀을 계속하신다.
수제자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오갔을까?
유다는 어쩔 수 없이 그런 運命으로 태어난 것인가?
아니면 재수가 없는 것일까?
베드로의 머릿속이 복잡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요한 복음에서 참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새 계명”(34-35절) 부분이 오늘 복음에는 빠져있다고 했다.
이 부분을 원래 자리에 넣어 읽어보면,
베드로가 딴 생각을 하고 있거나, 그의 생각이, 한곳에 머물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31-34절)는
부분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복음서의 문맥상 베드로는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새 계명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을 흘려들은 것이 분명하다.
그 때문에 갑작스레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36절)하고 물으면서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37절)하고 장담한다.
결국 수제자도 걸려들었다.
예수께서는 스승을 배반할 자가 유다만이 아님을 이미 내다보고 계셨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새벽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고,
닭이 울자,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려야 했다.(마태 26,75; 루카 22,62)
사태가 이쯤 되면 제자들 중 어느 누구도
스승을 배반할 가능성에서 배제될 수 없음을 알았을 것이다.
사실 바로 그날 밤에 제자들은 예수를 버리고 모두 달아났다.(마태 26,36)
스승에 대한 제자의 信義와 忠誠은 壯談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行動 속에 있음을 본다.
배반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정작 배반했을 그 순간에 해야 할 가장 필요한 일은 즉시 회개하는 것이다.
유다인 종교 철학자 마르틴 부버(1878-1965)는
‘인간의 가장 큰 잘못은 회개할 수 있는 모든 순간에 회개하지 않는 데 있다’고 하였다.
성주간 화요일은 이렇게 가리옷 사람 유다와 수제자 베드로가 걷게 될 길,
같은 길인듯하면서도 서로 다른 길을 보여 준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성주간 화요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산란하시어”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견고한 신념으로 죽음을 향하여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이토록 ‘산란하게’ 한 것은 “너희 가운데”에서 일어난 ‘배신’이었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나누며 함께 대의를 이룩하여 온 밀접한 관계가
그저 허술한 기만에 지나지 않았음을 들키는 자리,
그들이 지켜 온 진실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외면되는 자리가 배신입니다.
오늘 복음은 유다와 베드로를 대조시킴으로써 배신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죽이려는 고위층의 계략을 알고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하려는 일”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 계획을 “어서 하여라.”라는 준엄한 말씀에
유다는 밖으로 나가 자신의 계획을 구체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배신도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라고 선언한 그였지만,
예수님께서는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사실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은 사도는 “사랑하시는 제자”(요한 19,26)뿐이었습니다.
그 말고는 제자들 가운데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있던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유다와 달랐던 점은
배신의 현장에 계시는 예수님과 시선이 마주쳤다는 점입니다(루카 22,61 참조).
배신의 순간을 지켜보고 계시는 예수님과
시선이 마주치는가 그렇지 못하는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과 시선이 마주친 뒤 베드로가 흘린 눈물은,
다시 진실을 깨달은 구원의 눈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신 그 자체보다,
배신하는 순간조차 예수님의 시선을 외면하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고통스러워하십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어둠이고 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이야기합니다.
‘유다는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